163화
<또 하나의 규격 외>
A랭크 일리미네이터 라즈베리 미키스트리를 받아들인 지도 3주 가까이 지났다. 그동안 국내에서도 파급이 많이 나타났고, DS도 시동이 걸려서 해외에서 4건 이상의 경급을 처리했다하지만 그동안 라즈베리는 실전투입을 하지 않고 있었다.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첫째로 그녀의 한국어가 아직 미숙하다는 점이었다. 물론 그녀의 학습 속도는 놀라울 정도로 빨랐다.
"한국어, 일본어 닮았슴다. 쉽슴다."
일본어를 마스터하고 있었던 그녀는 자기 입으로 말한 것처럼 빠르게 한국어를 익혀나갔다. 어순이 비슷한 만큼 읽고, 쓰는 건 힘들어해도 회화는 이미 대부분 통할 정도로 익히고 있었다.
하지만 레이드 땐 캐스팅 사이사이에 공격대장이 아주 짧게 축약해서 명령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녀가 거기에까지 대응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 이것은 천후도 조금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였는데….
"저…. 사장님. 그 아이가 뛰어난 마법사인 건 알겠습니다. 하지만 미성년자를 이렇게 위험한 일에 투입하는 건…."
"……."
사원 대표격인 정태원이나 하연 등이 조심스럽게 해온 말에 천후는 입을 딱 벌렸다. 이건 정말 예상 못했던 일이었다.
대한민국 내에 기본적으로 깔려있는 분위기상, 성인이 되기 전엔 아무리 전문적인 기술을 가지고 있더라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그게 위험한 일이고 여자라면 뭐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서포터, 오퍼레이터 중에는 이브, 에바처럼 아주 어린 아이들도 있었지만, 그 경운 정말 그냥 이름만 올려놓는 수준이었지 전투에 직접 참가하거나 직접 보는 경우는 없다시피 했다.
"아…. 그 사람들이 굳이 말하러 왔다는 것은 이런 의견이 꽤 많단 거겠지? 생각도 못 했네, 진짜."
천후 본인은 15살 때부터 파급을 솔로잉으로 잡으러 다녔던 인간이었지만, 대한민국의 일리미네이터들은 그렇지 않다. 실제 DS에 입사한 일리미네이터 전원이 기본으로 20세는 넘었고, 국내 전체에도 10대는 한손에 꼽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드래곤 사태 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투입되지 않고 예비로 남았었다.
"저쪽이 정상인 거겠지?"
천후가 한숨을 내쉬며 자조적으로 말하자, 셀레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어깨를 짚었다.
"아니. 그냥 생각이 다른 거지. 너무 그렇게 우울해 하지 마. 외국에는 10대부터 활동하는 경우도 많아."
"정규 공대에도 있을까?"
"……."
"아아. 그렇군. 나도 진짜…."
그녀가 대답을 못 하자 천후는 책상에 이마를 박았다. 그러고 보면 패트릭이나 노블레스 클럽에서도 그런 미묘한 분위기가 형성되었었다. 하지만 영천후라는 개인의 능력을 보고서 괜찮겠다 싶어서 그녀의 신병을 위탁한 형태가 되었다.
그 분위기를 보고서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니. 이건 굳이 대한민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반적 깔려있는 의식에 가까웠다.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천후는 조금 자신의 인간성이 조금 망가져 있다는 것을 절감하곤 했다.
"1년 정도 쉬게 하자. 미안하지만. 라즈베리가 지금 18살이니까…."
얼굴을 감싸고서 우울한 목소리를 내는 천후를 보면서 셀레나는 그의 등을 쓸어내려 주며 말했다.
"아니면… 파급 퇴치 경력은 있다고 했으니까, 국내 파급 상대 전담으로 돌리는 것도 괜찮겠네. 서포트로 C랭크 한, 두 명 붙여서."
"어. 그러자…."
"내가 말해둘게."
"아냐. 내가 말할게…. 내가 데려왔는데 내가 말해야지."
깊은 한숨을 내쉰 천후는 라즈베리를 불렀다.
*
"말도 안 됩니다, 마스터! 재고해주세요! 한국어도 좀 더 열심히, 빨리 익히겠습니다! 저, 저도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천후의 부름에 신나는 마음으로 사무실로 들어왔던 라즈베리는 1년간 레이드엔 참가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청천벽력 같은 말에 영어를 쏟아내며 반발했다.
"알아. 라즈베리. 하지만…. 다들 불안해해. 아직 어린 네가 다치면 다들 힘들어 할거야."
"무슨! 말도 안 됩니다! 마스터와 저는 한 살 차이 밖에 안 나는데! 워치프도 그랬는데 마스터까지 저에게 그렇게 말씀하실 건가요?"
노블레스 클럽을 전전하던 시절. 그녀는 정규 공격대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에 몇 번이나 패트릭에게 조르곤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넌 아직 어리단 소리를 들으며 가입조차 거부당하곤 했다.
패트릭 스튜어트의 압도적인 화력이 있는 한 경급 레이드의 위험성은 크게 떨어지지만, 그래도 만약의 만약을 대비하고 싶었던 것이다. 뭣보다 정규 공격대가 되면 그냥 노블레스 클럽 멤버일 때와는 다르게 멸급 디제스터가 나타나면 빼도 박도 못하고 동원되게 된다.
그 점을 염려하여 그녀의 입단을 말리고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패트릭이나 영천후 같은 어른의 생각이었고 그녀의 마음은 달랐다.
"저, 전 마스터나 워치프처럼 멋진 사람들하고 같이 싸우고 싶습니다! 마스터의 슈발츠 폼도 옆에서 보고, 배우고 싶단 말입니다! 이건, 이건 너무합니다!"
"라즈베리. 겨우 1년이야. 그냥 놔두겠다는 것도 아니야. 그동안 캐스팅 숙련을 쌓고, 파급 디제스터를 잡으면서 좀 더 경력을 쌓고 있으면…."
"겨우가 아닙니다. 그 1년이면 대체 얼마나…!"
라즈베리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 뒤에 따라올 말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의 DS에서 라즈베리는 필요한 존재다. 있으면 큰 도움이 되는 존재. 하지만 1년 후면 어떨까?
그때 가선 이 사부, 제자 놀이조차 못 할 정도로 그는 먼 거리에 있을 것이다. 라즈베리는 그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후…."
막상 앞에 데려와 반발을 듣자 천후도 마음이 복잡해졌다. 당장에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걸 보면 마음이 약해지지만, 그것뿐 만은 아니었다.
현재 상태에서 그녀는 분명 필요했다. 당장 멸급 디제스터가 나타난다면 그녀는 무조건 데려다 써야 할 인재였다. 그때 가서도 단지 나이를 이유로 쓰지 않기엔 그녀의 포텐셜이 너무 높았다. A랭크란 그런 존재다.
'어쩐다….'
자신은 여기서 고민을 하는 자신이 조금 싫어졌지만, 그럼에도 그의 성장배경은 그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선 라즈베리가 미성년자라 문제가 된다는 전제가 빠르게 사라져 갔다.
한참을 고민하던 천후는 그러다 한가지 결정을 내렸다.
"좋아. 라즈베리. 그럼 이렇게 하자. 너의 필요성을 사람들에게 보여."
"…네?"
"네가 다른 사람들이 왈가왈부하며 거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란 걸 각인시켜."
"……."
라즈베리의 눈이 몇 번이고 깜빡였다. 아직 완전히 알아들은 것 같은 기미가 아니자, 천후는 확실하게 말해주었다.
"기회를 주겠단 거야. 경급 레이드를 해볼 기회를."
"…!"
라즈베리의 얼굴색이 화악하고 밝아졌다. 감동한 그녀는 그대로 그에게 달려와 팔을 끌어안으려 들었다.
"싸부! 으엣!"
하지만 천후는 그 얼굴을 슥 밀어내면서, 냉정한 얼굴로 말했다.
"기회를 주는 것뿐이야. 그리고 제대로 못해내면 아까 말한 대로 1년간 쉬게 할 거야."
"으…."
"그러니까 다음 일이 잡힐 때까지 최대한 연습해둬. …유례없는 일일 테니까."
*
라즈베리는 DS에 들어오긴 했지만, 조금 붕 뜬 상태였다. 미국에서 데려온 A랭크라는 설명은 들었지만 직접 디제스터 퇴치에 참가한 적도 없었고, 그동안 한 거라곤 사장인 영천후의 옆을 졸졸 따라다니며 하악하악 댄 게 전부였으니까.
물론 그 외에도 레이드가 끝날 때마다 커피도 돌리고, 공대장인 레이나드나 다른 사람들과 친해지려고 미숙한 한국어로 접근해오니, 다들 동생 생긴 느낌으로 받아들이긴 했다.
DS에 사회견학 나온 고등학생 정도의 느낌이랄까? 하지만 바로 이렇게 형성된 이미지가 라즈베리에 대한 여론을 '함께 할 동업자'가 아니라 '지켜줘야 할 존재'로 만들어나갔다.
라즈베리 본인이야 친해지려고 열심히 자기 나름대로 힘을 낸 거지만, 받아들이는 입장에선 얠 어떻게 레이드에 데리고 나가나 하는 시선이었던 것이다.
천후나 레이나드에게 들은 그녀가 아주 강력한 마법사라는 정보와 그녀가 평소에 내비치는 이미지는 억만 광년 정도의 갭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언제까지고 이걸 안고 갈 순 없었다.
"사장님. 괜찮겠습니까?"
"뭐가 말이죠?"
"아니…. 저…."
반문을 받은 정태원은 당황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로선 현재 상황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태국에서 나타난 디제스터를 처리해달라는 의뢰를 받은 영천후는 평소와는 전혀 다르게 대응했다. 본인이 직접 나서는 것도 아니고, 공격대를 내보내는 것도 아니었다.
저쪽에서 무슨 건물만 한 집게발을 들고 있는 수십 미터 크기의 게와 대치하고 있는 건 단 세 사람.
이강호, 레이나드. 그리고 라즈베리 뿐이었다.
천후와 함께 온 25인 공격대는 조금 거리를 두고서 그것을 게스트로 관전하고 있었다.
"위험합니다! 겨우 셋이서 경급 레이드는!"
"후우…."
피곤한 한숨을 내쉰 천후는 고개를 돌려보았다. 보아하니 함께 온 공격대원 전원이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경급에게 탱커 역할을 할 수 있는 이강호나 경험 많은 레이나드는 그렇다 쳐도, 라즈베리를 보고서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의 실력에 대한 의심과 큰일 나면 어쩌나 하는 걱정들이 복합적으로 느껴졌다. 당장에라도 튀어 나갈 기세였다. 하지만 천후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위험해질 것 같으면 저와 여러분 모두 투입될 겁니다.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그것보다…"
천후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서 정태원을 마주 보았다. 그 모습에 태원은 흠칫 놀랐다. 입사하고서 그의 이런 얼굴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어떤 감정이 섞인 눈인지 판단하기 힘들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천후는 그 감정을 말로 설명해주었다.
"태원씬 역시 사람을 눈으로 보기 전엔 판단을 내리기 힘들어하는 타입이군요. 역시 두 분 다 받은 게 정답이었네요."
"네?"
"뭐…. 보시면 무슨 뜻인지 알 겁니다."
더는 답을 내주지 않은 천후는 촬영장비가 보내는 화면을 바라보았다. 화면에 비친 라즈베리의 얼굴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천후는 통신기로 그녀를 진정시켜주었다.
"레이나드 씨 지시만 잘 따르면 돼. 영어로 말해줄 테니까 걱정 말고."
"네, 네!"
"선배. 최대한 광역 말곤 공격이 새지 않게 해주세요. 라즈베리는 캐스팅 5등급입니다. 말뚝 캐스팅밖에 못 해요."
"음. 알았다."
"레이나드 씨. 추가 지시는 없고, 판단은 전부 현장에 맡기겠습니다. 하지만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개입하겠습니다."
"알겠다. 그럼 시작하지."
고개를 끄덕인 천후는 화면 대신 현장을 바라보았다. 여기선 상당한 거리가 있지만, 시력이 좋은 천후에겐 세 사람의 신형이 점처럼이나마 보였다. 그 순간, 그 신형들이 움직였다.
"탱커 어그로 확보. 딜러 대기."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 거리에서도 확연히 보이는 은색 섬광이 터졌다. 그 순간 수십 년 수령의 고목 두께보다 두꺼운 게의 눈동자가 끊어지며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크루루루루!"
분노한 게가 집게발을 휘두르며 입안의 거품을 발사했다. 끓어올랐던 거품은 대체 어떤 원리인지 구슬처럼 단단하게 변하여 커다란 산탄처럼 해당 방향으로 발사되었다.
"흠!"
하지만 상당히 넓은 각도에 발사되었음에도 피해자는 없었다. 멀찌감치에서 사전 동작을 본 둘은 진작에 피했고, 이강호 자신은 이런 큰 동작의 공격에 맞아줄 사람이 아니었다.
바로 그때. 등껍질 사이가 갈라지며 그 안에서 추가적인 다리들이 튀어나와 뒤덮기 시작했다. 근접거리에서 알짱거리는 이강호를 완전히 찢어 죽일 심산인듯했다. 하지만 그것을 본 강호는 오히려 화색을 띠면서 다가오는 공격을 하나하나 잘라내며 받아냈다.
"하하! 징그럽구나!"
은선이 한 번 번뜩일 때마다 다리가 하나씩 끊어져 나갔다. 그 끊어진 다리들은 제각각 다시 움직이며 지상을 배회했지만, 그때 하늘에서 전격이 쏟아져 그것들을 태웠다.
"브레스, 집게, 다리생성 패턴 확인. 1페이즈 추가 패턴 없을 거라 추정. 딜러 풀 캐스팅."
"네, 네!"
레이나드의 마지막 말에 긴장하고 있던 라즈베리의 몸에서 오오라가 치솟았다. 너무나 밝은 연녹색의 오오라. 지켜보던 모든 사람이 비명을 질렀다. 단숨에 딜러가 노출된 꼴이었으니까. 하지만….
"크루우우우우!"
부우웅! 디제스터는 커다란 집게발을 휘두르며 이강호에게 집중하고 있을 뿐이었다. 놈의 시각은 360도 전부 보였지만, 한 대상에 집중하고 있을 때는 당연히 눈에 보인다 한들 그쪽으로 신경이 갈 리가 없었다.
그 상황을 단 6초간 유지하는 건 이강호에게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었다. 그리고….
6초면 충분했다.
"풀 캐스팅 레디!"
제자리에서 뻘뻘 대며 방출마법을 굳이 지연시켜둔 라즈베리가 소리치자, 레이나드는 쓰게 웃고는 외쳤다.
"파이어!"
"파이어!!!"
그 순간. 형언할 수 없는 섬광이 터졌다. 발사를 알리는 소리에 강호가 그 지역을 이탈하자마자, 엄청난 두께의 빛줄기가 디제스터를 관통했다. 그리고.
"꾸…꾸우우우…"
게 비슷한 모양새를 하고 있던 디제스터는 반신이. 아니 그 이상이 단숨에 사라진 채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흐억!"
완전히 퇴치된 건 아니지만, 그로기 상태인 게 분명했다. 키메라처럼 영체 복구라도 하는 게 아닌 이상 이제부턴 때리면 때리는 대로 맞다가 끝나는 전형적인 상태.
그 광경을 지켜본 정태원의 눈이 찢어질 듯이 커졌다. 단숨에 그의 머릿속에서 지금까지 그려왔던 DS의 전력 분석이 죄다 무너지고 재정립되어갔다.
"저, 저건 B랭크 4명 이상의 풀캐스팅과 맞먹는 위력…!"
말도 안 되는 초화력이었다. 아니, 사실 A랭크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그녀가 이럴 거란 생각은 하고 있었다. 알고는 있었단 말이다. 그도 지금까지 타국의 A랭크 일리미네이터가 활동을 기록한 영상들을 보아왔으니까. 하지만….
"그냥 아는 것과 이해를 하는 건 전혀 다르죠."
강력한 초상현상으로 생성된 거센 바람을 맞으면서 천후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온전하게 이해하고 있었던 건 결국 레이나드 하나뿐이었다.
"전혀 말이죠."
정태원은 그의 말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뒤에 있던 공격대원들도.
자신들이 걸어가려는 이 길이 괴물들이 가득한 정원 안이라는 것을 이제야 이해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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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작, 추천, 쿠폰, 코멘트 감사드립니다.
일어나서 한 화 더 올릴게요.
아. 라즈베리는 만 18세고. 천후는 한국나이로 20. 만으론 19세죠. 라즈베리 기준으론 한살 차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