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홍염의 디제스터?>
그 후. 영천후는 라즈베리를 정식으로 DS 공격대원들에게 소개했다.
"라즈베리 미키스트리임…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꾸벅꾸벅 머리를 숙여가며 인사하는 모습에 모두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했지만, 곧 받아들이게 되었다.
가장 결정적으로 작용한 건 마법의 한 마디였다.
"굉장하지 말입니다! 희주 언니가 가르쳐준 대로 '오빠'라고 부르면 다 잘해줍니다."
"끙…."
죄다 20이 넘는 남자들이다 보니까, 그녀가 와서 오빠 소리를 하자 은근슬쩍 친밀해진 것이다. 여자들은 여자들대로 남자들이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이 음흉하니 데라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말버릇은 왜 또 바뀌었어?"
"강사님이 이렇게 하면 군대 다녀온 오빠들이 좋아한댔지 말입니다."
아니야…. 그리 좋아하지 않아. 일리미네이터는 군대 갔다 온 사람도 없고.
'강사를 바꿔야 하나.'
분명 붙여놓은 건 여자 한국어 강사였는데 왜 애가 말을 배우는 방향성이 이 모양인지 모르겠다.
그런 천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라즈베리는 흥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싸부. 정말 절 스페셜 팀에 끼워주시는 겁니까?"
"그래. 그게 가장 보기 좋을 테니까."
반짝이는 눈빛에 이제 슬슬 익숙해진 천후는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칼을 정리해주며 답했다.
천후가 취한 조치는 그 뒤로도 더 있었다. 그녀의 실력. 가능성에 대해선 보여줬다. 하지만 다른 공격대원들이 걱정하던 부분이 실력에 대한 부분만은 아니었다. 순수하게 나이 어린 이에 대한 걱정의 의미가 강했다.
그 부분을 채워주려면 역시 그녀를 1년간 쉬게 하는 게 제일이었지만, 라즈베리의 반발을 이겨내기도 쉽지가 않았다. 사실 사람이 아깝기도 했고. 거기서 낸 절충안이 스페셜 팀을 만드는 것이었다.
스페셜 팀. 뭐 간단하게 영천후와 함께 행동하는 것이었다.
"지금까진 나랑 강호 선배, 그리고 레이나드 씨 이렇게 셋이었는데 이제 너도 한팀인 거야."
"오오오오…."
흥분한 목소리를 낸 라즈베리는 착착하고 어디 전대물 변신 포즈 같은 걸 흉내 내며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이제 저도 정식으로 슈발츠 폼을 전수받을 수 있지 말입니다… 아니 블랙은 싸부의 컬러니까 저는 다른…."
"후우."
앞에서 홀로 불타오르는 라즈베리를 보면서 천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영천후는 경급 퇴치 시 혼자 내려가서 모든 걸 끝내곤 했다. 대신 일부러 디제스터의 모든 패턴은 다 끌어내어 데이터를 확보했다.
어지간하면 문제없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같이 강호와 레이나드를 대동하고 다녔던 게 스페셜 팀의 정체였다. 즉, 그와 함께 다니면 쉬는 거랑 별반 차이 없게 되겠지만….
'이거라면 다들 만족하겠지.'
조건이 이래서 그녀에게 떨어지는 돈은 쥐꼬리만 하겠지만, 라즈베리 본인은 대만족 상태인 듯하고, 다른 공격대원들 역시 천후와 함께 다니면 절대 안전하다는 생각을 하는지 반발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멸급 트라이엔 동참시킬 거야. 그때까진 최대한 훈련을 끝내놔야 해."
"넵, 싸부! 괜찮지 말입니다. 드래곤이 한 번 나왔으니 올해 내론 안 나올 겁니다."
지금까지 멸급이 나타난 빈도는 1년에 1번 이하.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천후는 미묘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그랬으면 좋겠지만."
"네?"
"아니야. 그런 생각으로 게으르게 굴지 말라고."
"넵!"
착 하고 경례하는 모습을 웃으며 바라본 천후는 그러다 턱을 괴고는 생각했다.
'신급 디제스터가 나타난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그때엔 그냥 완전한 우연인가 생각했지만…. 굳이 그 동물원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들의 목적은 아마도 자신이었을 거라고 천후는 생각하고 있었다. 천후에게 모습과 이름을 밝히고자 온 것이 아닌가 하고.
이성을 가지고 있던 그 괴물들이 이후 적이 될지, 어떨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들이 모습을 나타냄에 따라 달라지는 것도 있을 터. 그게 어떤 방향으로 나타날지 천후는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
영국. 정식 명칭 대 브리튼 연합왕국과 북아일랜드.
근래 들어서는 그저 괴식의 땅이라는 이미지가 박혀 나라의 음식들이 인터넷에서 온갖 조롱을 받고 있지만, 과거에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 불리었던 국가.
아직도 왕의 존재를 인정하는 입헌 군주제를 채택한 나라 중 하나.
그 궁전인 버킹엄 궁 내부의 분위기는 지금 어느 때보다도 어두웠다.
"해결할 방도가 없는 일이군요."
"설마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이야…."
영국 여왕 엘리제 3세와 총리 로이드 셀든은 서로를 마주 보며 곤혹스러워하고 있었다. 여왕이 물었다.
"EU의 정규공대, 컨퀘스터에게는 거절을 당했습니까?"
"죄송합니다, 폐하. 하지만 그들에게는 짐이 너무 무거웠던 게 사실입니다. 월드 리버티나 라이징 선 쪽에서도 난색을 보이고 있습니다. 단일 공격대로 시도하기엔 너무 버겁다고…."
"하지만 그들 전부를 끌어들인다면 나라 전체가 힘들어지겠지요…"
"일단 스코틀랜드는 떨어져 나갈 것이 확실합니다."
엘리제 3세는 침음성을 냈다. 왕은 같은 시민. 직업이 왕일 뿐. 그것이 현재 영국 왕의 위치였지만, 그럼에도 많은 결정에서 이들은 상징으로서 작용하고 있었고, 덕분에 나라 내외로 큰 사건이 있을 때 정부와 총리는 그녀를 찾곤 했다.
정치에 관여할 수는 없는 왕의 입장이었지만, 이럴 때의 발언엔 그녀 역시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특히….
"하필이면 웨스트 민스터 사원에서 디제스터가 등장할 줄이야.“
버킹엄 궁전의 코앞. 왕가의 묘지로 쓰이는 곳이 얽힌 일이라면 말이다.
보통 디제스터라면 충분히 잡을 수 있었다. 영국 국민들의 왕에게 보내는 지지는 대단했고, 그것은 일리미네이터 역시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영국에선 상당수의 일리미네이터가 왕가에 충성을 맹세해 귀족의 지위를 받아 왕을 섬기고 있었다. 그야말로 진정한 로열 가드라고 할 수 있으리라.
엘리제 역시 그들에 대해서 절대 신뢰를 보내고 있었으며, 국가의 수호신들답게 그들은 수많은 디제스터를 물리쳐왔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만은 무리였다.
"얼마전 한국에서 드래곤이 나타났었는데, 얼마 지나지도 않았거늘 멸급 디제스터라니. 게다가 던전화 가능 디제스터란 건."
총리의 얼굴에 핏기가 가셔있었다.
던전화 가능 멸급 디제스터.
지난 10년간 단 2번밖에 출현하지 않았고, 그때마다 지옥을 만들어냈던 괴물들이었다.
정확히 40명의 도전자에게만 던전에 출입할 권한을 내어주는 이것들은 그때마다 공격대를 몇 개나 전멸시켰다.
안소니 크라우저가 만든 노블레스 클럽의 A랭크 다수가 투입되고, 그중에서도 사상자가 나오고 나서야 간신히 잡혔던 상상을 초월한 괴물이 이미 영국 한가운데에 나타나고 말았다.
"하지만 조금 이상한 게 있습니다. 유그드라실의 보고론 분명 멸급 디제스터 판정을 받았는데도, 하수인 웨이브도, 전조현상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놈은 아주 작은 던전만 형성하고 그 안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으니…."
"……"
영국으로선 다행인 사실이었지만, 언제까지나 그런 불확정 요소에 기대고 있을 순 없었다. 내일 당장에라도 움직인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총리의 기색을 보며 잠시 말을 아끼고 있었던 여왕은 조심스레 물었다.
"정규 공격대 연합이 안된다면…. 이번에 드래곤 트라이를 성공하고 멸급 레이드를 대비하고 있다는 DS에 물어보면 어떻겠소?"
"으음…. 하지만 아직 성과가 별로 없는 그들을 믿어도 될지 어떨지…."
난색을 보이는 모습에 여왕은 고개를 저었다.
"적어도 패턴만은 알아낼 수 있지 않겠소? 그리고 만약 퇴치한다면… 다른 네 공격대를 전부 불렀을 때보다야 나을 거요."
영국이 곤란에 빠졌단 이야기를 듣자마자 정규 공격대를 가진 미국, 일본에선 말도 안 되는 조건들을 걸어왔다. 하나도 아니고 둘 다 들어줬다간 나라가 쪼개질 수준의 조건들이었다. 여기서 대한민국 하나로 줄인다면 건네줄 대가 많이 줄어들 것이다.
"하긴 성공하지 못했을 때는 건네주지 않을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으니…. 여왕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하지만 일단 의원들을 설득해야겠군요."
"빠르게 결정을 내릴 수 있었으면 좋겠군요."
"그들이라고 그렇게 멍청한 자들은 아닙니다. 이권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만 한다면 말이죠."
예를 갖춰 인사를 마친 로이드는 급한 걸음으로 궁을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보고 있던 엘리제 3세는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하오. 로이드."
건실한 남자다. 즉위한 지 수십 년. 재위 기간 동안 수많은 총리를 봐왔지만 저만큼 능력 있고, 나라를 진심으로 생각하는 이도 드물었다. 그런 그에게 비밀을 두고서 이야기하는 것은 힘들었다.
"설마 그들의 봉인이 깨질 줄이야."
주름진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그것을 감추고자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 감은 눈 속. 한차례 찾아온 어둠 뒤에는….
아직 그녀가 소녀적이었던 시절의 기억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
DS에 의뢰를 보내자는 안건은 영국 상원에서 빠르게 통과되었다. 이미 다른 정규 공격대에 한 번씩 헬프는 보냈었으니, 이제 와서 망설일 필요도 없었다. 대한민국 정부의 요구조건을 보고서 검토할 필요도 있었다.
그리고 그 헬프를 받은 대한민국 정부는.
당황했다.
"음. 대체 어느 선으로 해야 한단 말인가?"
"들려오는 정보로는 미국과 일본에선 영토할양 수준의 이야기가 나왔다고 합니다."
"자기들이 당해본 적이 없다고 아주 막 질러대는군."
드래곤 사태로 똑같은 입장에 처해본 적이 있었던 정부 인사들의 얼굴이 마구 일그러졌다. 하지만 영국은 자국 내에서 해당 디제스터를 퇴치하지 못할 거란 확신을 가지고 있는 태도였고, 때문에 초기 조건도 아주 끔찍하게 제시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비단 정규 공격대가 있는 국가뿐 아니라, 단순히 A랭크 일리미네이터 파견만으로도 엄청난 금액을 뜯어낼 준비를 하는 곳들도 있었다.
"일단은 시간을 두고서 지켜보는 게…."
한쪽에서 미지근한 의견이 나왔지만, 해명진 대통령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무슨 소린가. 이미 멸급 디제스터가 내륙 한복판에 나타났다고 하는데. 1초라고 빠르게 판단을 해야 하네. 이번이 DS의 최초 원정이 될 테니 그 기준이 될 수 있도록."
"하지만… 판단 근거가 너무 부족합니다. 너무 특수한 경우인지라…."
각료들 사이에서 이런저런 이야기가 빠르게 오고 갔다. 하지만 쉽게 결론을 내리진 못했다. 군사, 기술, 자금…. 어느 것으로 받아낼지에 대해서 의견이 첨예하게 갈렸다. 그동안 시간만 계속 흘렀다.
'이런 것들에게 내가 휘둘리고 있다니….'
너무 큰 사태가 오자 그를 꼭두각시로 부리던 이들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해명진은 힘겹게 한숨을 내쉬었다.
'꼴을 보니 다 퇴치된 뒤에나 결정 나게 생겼군.'
그의 예상대로. 결국 안건은 다음날 계속 토의하는 것으로 결정 내려졌다.
*
청와대에서 DS를 보내서 얼마를 받을까를 두고서 옥신각신하고 있을 때, DS는 이미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150억 달러."
"컥…."
희주가 타준 차를 마시고 있더 천후는 셀레나의 발언에 사레가 들려서 쿨럭거렸다. 하지만 조언 역으로 와있던 친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적당하군. 조금 싸게 부른 것 같기도 하다만."
"……."
못 따라가겠다. 천후는 이마를 짚고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6조 뜯어낼 때도 그랬지만, 이미 현실감을 아득히 초월한 금액이었다. 하지만 친란은 담담히 말했다.
"간단하게 이해시켜주겠네. 던전화 디제스터 트라이 난도는 기존과 얼마나 차이가 날까?"
"두 배 이상이겠지. 당장 드래곤 레이드 때 투입된 인원이 50명이었으니까."
"그래. 대통령 일정 소화비용을 제하고서 46억이었으니 그 두 배로 90억은 받아야겠지? 게다가 사원들에게 줄 분배비용으로 13억. 그리고 외국 원정 레이드는 원래가 더 많이 받지. 오히려 할인해준 수준이네만."
그야 지금까지 해외에서 경급을 잡을 때도 두 배로 받아오긴 했다. 천후가 직접 나설 땐 더 받는 경우도 있었고. 그걸 생각해보면 깎긴 깎은 건데….
"여기에서 직접 조우했을 때 난도에 따라서 변화, 그러니까 더 높아질 수 있단 조항과 트라이 실패 시 받을 최소 금액을 넣고서 보내면 될 거야. 아마 이 정도 규모의 공격대파견에 이 정도 조건이면 진짜 획기적인 수준일 테니 반드시 받아들이겠지. 어때?"
어때고 뭐고…. 어차피 대화한다고 판단할 수 있는 영역의 금액이 아니다. 알아서 맞게 부른 거겠지. 돈 계산은 아예 머릿속에서 놔버리기로 한 천후는 후 하고 한숨을 내쉬며 이 여자들이 까먹고 있는 걸 입에 담았다.
"일단…. 전력분석부터 하자."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쿠폰, 코멘트 감사드립니다.
던전화=결계
배틀 시그널이라는 특수 마법을 사용하지 않으면 외부에서 출입이 불가능합니다. 한번 들어가면 못나오고요.
일반적으로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