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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드하렘-166화 (166/324)

166화

영국에 출현한 멸급 디제스터의 외형이 확인되었다. 불꽃의 형태를 한 놈은 지금까지 나타난 것들과는 다르게 아주 작은 크기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냥 보기에는 2m도 되어 보이지 않았다.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파급이나 경급에선 종종 이런 작은 디제스터가 나타나기도 했기 때문에 충격으로 다가오진 않았다. 당장 '그렘린 페이스'만 해도 사람의 얼굴만 한 크기였으니까.

문제점은 크기가 아니었다.

"큰 사전 동작 없이 금속발화가 일어났습니다. 시선에 영향을 받는 것으로 보입니다."

게이즈 어택. 설화 속 바실리스크처럼 바라보는 것만으로 영향력을 발휘하는 디제스터의 초자연능력을 일컫는 말이다.

이번에 나타난 녀석이 바실리스크와 다른 것은 석화가 아니라 화염이라는 점. 하지만 단순히 ‘불 좀 붙어서 뭐’하고 받아들일 순 없었다.

금속 자체를 발화시킬 수 있단 건, 인체 같은 것은 손쉽게 잿더미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영국 일리미네이터들은 이 정보를 얻자 난색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과연 화염 저항 마법을 몸에 두른다고 해도 완전히 막아낼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던전 내의 평균 온도는 58도. 디제스터에게 접근할수록 올라갑니다."

"게이즈 어택이 1페이즈부터 나타난단 건, 뒤로 가면 대체 어떻게 될지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끔찍하군…."

게이즈 어택 자체만으로도 끔찍한데 그게 최초 패턴이란 이야기에 등골마저 서늘해졌다. 정규 공격대에게 의존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이쯤 되면 자존심 챙길 문제가 아니었다.

이건 사람의 목숨을 총탄으로 삼아서 퇴치해야 할 적이다. 사람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그들의 표정은 굳어갈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파악되는 특성 중에는 그나마 그들을 안도하게 해주는 것들도 있었다.

"이 디제스터는 아무래도… 비선공성이 아닌가 추측됩니다. 보통 이렇게까지 많은 접촉시도를 하면 이동을 하기 마련인데 그 자리에서 움직이질 않습니다. 그러니 어쩌면."

"그냥 놔두고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요."

추측성으로 하는 말에 그들은 침음성을 흘렸다. 디제스터가 자리 잡은 곳은 왕가의 묘역. 버킹엄 궁까진 직선거리론 500m 거리다. 귀족인 그들의 입장에선 반드시 사수해야 할 아주 중요한 곳이었다. 하지만 그곳만 포기하면 그냥 두고 살 수도 있다면?

싸울 이유가 사라진다. 놈의 던전에 들어가지만 않으면 되니까.

"…쉽게 판단할 수 없는 문제군."

무작정 트라이를 시도해보기엔 변수가 많은 존재였다. 결국 일리미네이터들은 정부와 여왕의 의향을 물어보기로 했다.

*

정부의 의견은 한결같았다. 빠른 시일 내에 퇴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 지금은 잠잠하지만 언제 날뛸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다만 여왕의 판단은 달랐다.

"정말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사원을 포기하지요."

"폐하!"

대신들의 당황하는 목소리가 궁 안에 울렸다. 그녀의 부군인 카를로스 역시 놀란 듯이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공격성을 드러냈을 때 움직여도 충분합니다. 괜히 건드려서 전 세계에 재앙을 일으키는 것은 원치 않소."

정부와 일리미네이터 양측 모두에서 일리미네이터가 실제로 투입될 경우, 영국 자체만으론 퇴치 가능성이 없을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A랭크가 없으니 당연했다.

그뿐만 아니라 정규 공격대나 노블레스 클럽의 도움을 받는다 쳐도 큰 희생을 치르지 않을까 추측하고 있었다.

자체 마법이 강력한 A랭크들은 몰라도 그 이하는 게이즈 어택에 한 번에 쓸려나갈 가능성까지 점치고 있었다. 묘역에 나타난 디제스터는 그만큼이나 강력했다.

오히려 하수인도 불러내지 않고, 반경 200m 정도의 아주 작은 규모의 던전만 형성하고 죽은 듯 지내는 이상 그냥 놔두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폐하. 그럴 순 없습니다. 부디 저희가 사원에 발을 들일 수 있게 허락해주십시오."

"……."

하지만 정부의 판단은 그녀와 대립했고, 안보 역시 궁극적으론 정치의 문제였다.

"후우…."

불만이 있었지만 엘리제 3세는 결국 그의 뜻을 들어주었다. 어차피 지금 들어주지 않는들 그는 할 테니까. 체면을 지키려면 예를 지키며 말할 때 받아야 한다. 그것이 현대 입헌 군주제의 왕이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부디 출정하는 모든 이들에게 신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

디제스터가 펼친 결계. 던전에 사람이 출입하는 방법은 유그드라실에게 배틀 시그널 처치를 받는 것뿐이다.

로이드는 일단 던전에 일리미네이터가 아닌 일반 병사들을 들여보냈다. 그냥 보낸 게 아니라 전부 기갑 병력으로 40명을 꽉꽉 채워 넣었다. 이걸로 전차 10대가 던전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어차피 사원 내부를 수색하려면 전차에서 내려야했지만 말이다.

"후우…. 후우…."

병사들의 눈엔 긴장이 역력했다. 자신들의 역할이 어떤 것인지 자각했기 때문이다.

총알받이.

디제스터의 패턴을 좀 더 알아내기 위한 버림 패였다. 죽는 게 예정된 병력.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지원해왔다. 조국의 위기를 이겨내기 위해 기꺼이 희생하고자 마음먹은 것이다.

"어디. 어디냐."

출입하기 전 화염저항 마법을 받은 상태임에도 차량 안은 끔찍하게 더웠다. 던전 안의 기온은 돌아다닐수록 올라, 그 안은 찜통 따위 우스울 정도로 변해있었다. 판단력과 인지력이 점점 떨어져 갔다.

그때였다.

"보인다…!"

좁은 시야각에 불꽃이 보였다. 놈은 다행히도 사원 밖으로 나와 공원을 배회하고 있었다. 디제스터의 본체. 그것의 크기는 미리 브리핑으로 들은 것처럼 작았다. 2m도 되지 않는다.

그냥 보기엔 앞뒤가 구분되지 않았다. 게이즈 어택을 한다는데 어디가 눈인지 알 수 없으니 대응하기가 어렵다. 전차장은 그렇게 판단하며 탄을 쏠 준비를 했다. 그러나 그때.

놈이 다가왔다.

"읏?!"

마치 유령처럼 허공을 미끄러지며 다가온 그것은 전차의 궤도 앞까지 다가왔다. 당장 마음만 먹으면 이대로 깔아뭉갤 수 있을 정도였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불꽃은 그 앞에 서서 마치 신기한 걸 봤다는 듯이 전차 앞에서 일렁여댔다.

"어쩌죠? 뭉갤까요?"

"젠장…!"

전차장 역시 당황해있었다. 이게 일반적인 적이었다면 깔아뭉갰을 테지만, 디제스터다. 그 정도로 죽을 리가 없었다. 주포로 갈겨도 멀쩡할 테니. 다만 그가 당황한 이유는 놈이 공격성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 정도면 정말 그냥 놔둬도 되는 거 아니야?"

그냥 파급 디제스터만 해도 기갑차량에 탑승한 인간들 냄새를 맡고서 공격해오곤 했다. 전차 장갑이 단단하여 뚫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놈은 인간의 기척을 느끼지 못한 건지, 아니면 느끼고도 별생각이 없는 건지 그저 앞에 떠 있을 뿐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공격을 가하는 게 더 위험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굳이 이런 나라 전체를 위협할 괴물을 자극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잠시라도 이런 생각을 한 것을 후회하게 되었다.

화르륵….

일렁이던 불꽃의 옆쪽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그것은 ‘팔’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었다. 놈은 그것을 슥 뻗어서 전차에 살짝 가져다 댔다. 그러자….

파치치치치칙!

"으아아악! 전차가!"

“미친!!!!!!”

디제스터가 닿은 것만으로도 접촉면에서 불꽃이 일어나기 시작하더니 그것이 곧 전차 전체를 뒤덮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병사들은 전차 밖으로 뛰쳐나왔다.

“아―――――――――――――”

순간. 인간을 발견했기 때문일까? 디제스터에게서 목소리와 같은 것이 튀어나왔다. 동시에 순식간에 하늘로 치솟아 오른 놈이 두른 불꽃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아―――――――――――――”

성가대가 내지르는 아리아와 같은 미성이 묘역에 울려 퍼졌다. 그러자…. 땅바닥에서 불꽃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발화점에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고 있던 잡초와 꽃, 인공물에 불이 붙기 시작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9대의 전차 역시 허무하게 불이 붙기 시작했다. 결국 40명 모두가 뛰쳐나와 디제스터에게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으아아악!"

"뛰어! 뛰어!"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다. 던전으로 들어온 이상 도망칠 곳은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달렸다. 이 공간 안에서 가장 안전한 곳을 찾아.

그러다 보니 도착한 곳은 던전 경계였다. 그리 넓지 않은 던전이다 보니 한 방향으로 도망치자 금세 경계까지 도착한 것이다.

"아악! 옷에까지 불이!"

"젠장!"

전차 본체보다도 더 공을 들여 화염보호 마법이 걸려있었지만, 아리아가 울려 퍼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군인들의 옷에까지 불이 붙기 시작했다. 전투화 밑창은 녹아 끈적거리며 땅에 들러붙으려 했다.

이대로라면 그들도 타죽는 데까지 얼마 걸리지 않으리라.

"젠장! 젠장!"

죽을 각오로 들어왔었다. 하지만 제대로 포 한번 쏴보지도 못하고 이런 개죽음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게이즈 어택이 문제가 아니라, 그냥 이 던전에 들어와 있는 것 자체로 놈의 광역공격 범위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마법의 영향으로 아직 목숨 부지는 하고 있지만 얼마 버티지 못한다! 어디에도 도망칠 곳은 없었다. 지금은 물에 들어간들 초고열 온천수나 다름없으리라. 병사들은 결국 비명을 지르며 던전 경계에 몸을 던졌다.

그러자.

"…헉?!"

자기도 모르게 던전 경계에 몸을 던졌던 병사는 갑자기 기온이 달라진 느낌에 눈을 떴다. 그의 눈앞에는 디제스터가 내지른 아리아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사원으로 들어서는 입구가 보였다.

"이게 무슨?"

깜짝 놀란 그는 다시 경계 안으로 들어섰다. 안쪽은 여전히 작열지옥이었다. 함께 던전에 들어왔던 병사들은 이제 속옷조차 남지 않았고, 몇몇은 1도 화상을 보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남자가 다급히 외쳤다.

"이봐! 던전에서 나가진다! 나가진다고!"

"뭐?!"

"그게 진짜냐?"

의식적으로 던전에선 나갈 수 없다고 생각했던 병사들은 놀라서 바로 던전 밖으로 몸을 던졌다. 그러자 최초 그 현상을 발견한 이의 말대로 그들 모두 던전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아―――――――――――――"

던전 내부에서 울리던 아리아가 가까워지며, 붉은빛이 도는 던전 경계 바로 앞쪽에 불꽃의 일렁임이 보였다. 던전에서 인간들이 빠져나가자 따라온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아――――――――――――"

놈이 경계에 다가오는데도 던전 경계는 이동하거나 확장되지 않고 그 자리를 지켰다. 그 때문인지 디제스터는 던전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에 분노한 것인지, 디제스터의 아리아가 좀 더 커졌다. 그 영향일까? 던전 밖에서도 확연히 알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화염이 던전 안을 뒤덮었다. 지금 저 안에 있었으면 타죽었으리라. 하지만 밖으로는 전혀 화염과 열이 새어 나오지 않았다.

병사들은 어안이 벙벙해져서 서로를 마주 보았다.

밖으로 나와지는 던전?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거기에 디제스터는 던전 밖으로 나오지도, 던전을 이동시키지도 못하고 있다?

"이, 이게 대체?"

그들은 생존에 기뻐하면서도, 예상외의 사태에 당황했다. 하지만 이것이 아주 중요한 정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군인의 의무를 떠올린 그들은 자축을 빠르게 멈추고 현재 상황을 보고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은 군 수뇌부는 빠르게 그들의 후퇴를 명령했다. 애초에 전차를 잃었다. 장비조차 전부 날아간 이 마당에 이들에게 뭔가를 더 시키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병사들은 화상 입은 병사들을 부축하고선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동안.

던전 안에선 작열 지옥이 계속해서 펼쳐지고 있었다.

끝없이. 끝없이.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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