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하렘-168화 (168/324)

168화

던전 경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을 때. 영국 정부는 이것이 영국 멸망의 위기라는 것은 확신했다. 당장 120명이 투입되었을 때 보였던 교전 내용이 너무 절망적이었다.

가용한 모든 보조마법을 덕지덕지 발랐는데도 단박에 입고 있는 옷이 불타올랐다. 딱히 마주 보지 않아도, 놈이 패시브로 발휘하는 온도 상승에도 점화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이에 영국은 모든 정규공격대에 다시 한 번 연락을 취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미국은 월드 리버티와 머니 크래프트 파견 대가로 영국으로선 '도저히 치를 수 없는 대가'를 요구하였고, 라이징 선은 묵묵부답. 컨퀘스터는 좀 더 사태를 지켜보고 싶어 했다.

정부와 왕실에선 절망이 감돌았다.

그때. 연락이 들어왔다.

DS가 의뢰를 수락했다는 연락이.

*

"영 사장님. 이건 무리한 레이드입니다. 재고해주십시오!"

DS가 의뢰를 받았단 연락을 받은 영국은 당장 유그드라실 사용 비용을 치러 그들을 모셔 오려 했다. 선불로 거금을 받은 유그드라실은 DS 옥상에 큐브 엘리베이터를 강하시켜 두었다.

그 앞에서 태원이 천후의 뒤를 따르며 설득하고 있었다.

"사장님과 강호 씨를 제외하고는 전부 5분 이상을 버티지 못할 겁니다! 라즈베리의 화력까지 고려하더라도 성공 가능성이 너무 낮습니다! 하다못해 컨퀘스터와 연합이라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천후는 애걸하는 듯한 그의 목소리를 잠시 무시하고서 대신 유그드라실 직통 통신기를 들었다. 연결대상은 최완이었다.

"아저씨. 어때요. 제 짐작이 맞는 것 같죠?"

"아…."

"뭐라 말 못하는 거 보니까 맞나 보네. 또 비밀인가 보군. 미연이 누나 쪽으로 돌려, 미미르."

"야! 잠까-"

치직. 한차례 노이즈와 함께 통신기의 수신인이 미연에게 돌려졌다.

"아저씨랑은 말이 안 통해. 어때요, 누나. 맞는 거 같죠?"

"외형적으론 상당히 일치하는 것 같구나. 통제의 문제인 것 같은데."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누나 확답을 들었으면 확실하지. 오케이. 끊을게요."

통신기를 곁에 있던 희주에게 넘겨준 천후는 두려워하고 있는 직원들의 얼굴을 죽 둘러보았다.

말은 태원이 꺼내고 있었지만, 모두 비슷한 심정이라는 것이 전해지고 있었다. 전의에 불타고 있는 건 강호나 라즈베리 정도? 천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렇게들 죽을상이에요. 우린 이럴 때 나서려고 만든 공격대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리스크가 너무 큽니다! 이건, 이건 1차 드래곤 레이드 이상의 리스크입니다! 도저히 동의할 수 없습니다!"

안색이 새파래진 태원이 하는 말에 대부분 동의하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당했다. 돈 벌자고 하는 일이지, 죽자고 하는 일이 아니다. 멸급 레이드가 곧 리스크 그 자체라지만, 최소화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훈련도 군소리 없이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건 단련으로 극복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아아…."

천후는 강경한 그 모습에 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아저씨한테 느끼는 걸 똑같이 느끼고 있겠군.'

미쳤나 싶겠지 대체 뭔 생각인지. 역지사지를 깨달은 천후는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이거 참. 현장에 가서 말하고 싶었는데."

"네?"

태원의 반문에 천후는 장난스레 웃으며 말했다.

"얼른 타세요들. 우리 이번에 공돈 벌러 가는 거니까."

"네?"

일동 모두가 눈을 휘둥그레 뜨자, 천후는 입을 열어 뭔가를 말했다.

그 순간, 태원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정말입니까?"

"그래요."

"잠깐 그렇다면…. 이건…."

"짐작하시는 대로."

피식 웃은 천후는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강호와 라즈베리, 레이나드 그리고 태원이 그 뒤를 따랐다.

그는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이봐. 태원 씨!"

"방금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데 그래?"

갑자기 사람이 달라진 듯이 냉큼 올라타는 걸 본 공대원들이 인상을 찌푸렸지만, 태원은 손짓을 하며 말했다.

"도착해보시면 알 겁니다. 일단 확실한 건. 우리가 절대 질 리가 없단 겁니다."

정태원이란 놈은 확신이 없는 한 이런 장담을 입에 담는 놈이 아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조금 움직였다. 그때, 천후가 쐐기를 박았다.

"안타면 그냥 이대로 갑니다? 솔직히 이건 공대 다 끌고 갈 일도 아니에요. 그래도 같이 가려는 건데 안 올 거예요? 그러세요, 그럼. 나야 배분 줄어들면 좋지. 뭘."

으쓱하고 말하는 그의 제스쳐에 흠칫 놀란 공대원들은 반신반의하는 마음에도 결국 앞다투어 큐브에 올라탔다.

'젠장. 위험하기만 해봐라.'

'그놈의 돈만 아니었어도!'

속으로 구시렁거리면서도 말이다.

*

한편 대한민국 정부는 당황했다.

“아니? DS가 벌써 영국으로 향했다고?”

“이런. 어떻게 정부와 논의도 없이!”

기존 4개의 정규 공격대 모두 정부 친화적이었다. 국가 간의 거래가 끝난 이후에 공격대가 움직이는 식이었던 것이다. 덕분에 정규 공격대의 대응은 항상 대참사가 일어난 직후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건 대한민국이 드래곤 사태를 겪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DS는 대한민국 정부가 아직 영국의 파견 요청에 대해서 제대로 의견을 규합하지 못한 상황에서 기업 자체의 판단으로 움직여버렸다.

“너무 제멋대로인 것 아닙니까?”

“아무래도 DS의 활동에 제재를 가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멋대로 내뱉는 소리를 들으며 해명진은 해탈할 것 같았다. 분명 이전 텔레포테이션 규제를 풀 때도 정면에서 이 나라에 집착할 이유가 없단 말을 듣고 왔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도 이런 식의 쓸데없는 이야기가 나올 줄이야.

뭣보다 더 끔찍한 건 이것들은 DS에 ‘지금 우리 이런 이런 내용으로 영국과 딜을 하고 있으니 시간을 끌어 달라’는 공문조차 보내지 않았다. 그래놓고 일주일을 끌어놓고 있으니 당연히 천후는 자의적인 판단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일단 일주일이나 끈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오? DS 제재 같은 소리는 하지도 마시오.”

“각하. 그에게 너무 큰 여지를 주시는 것 아닌지.”

“드래곤 사태 때 약속한 특권이 너무 커서 제정신이 아닌 걸지도 모릅니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 관료들은 모두 뭣도 모르면 좀 가만히 있으라는 식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 시점에서 해명진은 머리를 비웠다.

5년 내내 이런 식이었다. 집권 여당의 전폭적인 지지에 힘입어 떠밀리듯이 대통령이 된 그는 실제론 대통령이란 직함만 달고 있을 뿐, 아무런 힘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그라도 할 수 있는 게 딱 하나 있었다.

“…그럼 일단 제재는 그가 돌아와서도 얼마든지 생각해도 늦지 않으니. 지금은 영국에게서 무엇을 받을 지부터 생각합시다. 한시가 급하오. 퇴치된 뒤엔 거래고 뭐고 없지 않소.”

“옳은 말씀이십니다.”

“아. 그렇습니다.”

그것은 상황정리였다. 원래는 이것조차도 하지 못했지만, 근래에 너무 여러 가지 사건이 일어나면서 그를 통제하려 드는 손길이 조금 헐거워졌다.

그걸 기회 삼아 그는 집권 마지막 시기에 이르러서야 아주 소소한 리더쉽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것에 기뻐하기엔 너무나 멀리 왔지만 말이다.

그의 말을 듣고 나서야 화제전환이 간신히 이루어지는 꼴을 보며, 해명진은 다시 한 번 한숨을 쉬었다.

‘글렀군.’

미국처럼 반 협박에 가까운 태도로 갈취하는 것까진 원하지 않지만, 일방적으로 유리한 경제 조약 하나 정도는 손쉽게 체결하고도 남는 상태. 하지만 꼴을 보니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았다. 해명진이 이렇게 생각했을 때, 그의 생각은 대체로 맞았고.

이번도 틀림없어 보였다.

*

유그드라실을 통해 DS 공격대가 도착하자 영국 총리인 로이드 셀든이 반겼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환영 행사를 할 수가 없군요.”

“당연합니다.”

이틀 후면 나라가 결딴날 수도 있는 상황에서 공격대 좀 왔다고 의장대를 불러 트럼펫을 불순 없으리라. 고개를 끄덕인 천후는 영국 측에서 미리 설치해놓은 대기소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일단 계약조건은 보았습니다. 보수에 문제는 없지만 만약에 대비하기 위한 몇 가지 조건을 걸고자 합니다.

첫째. 레이드 도중 던전 경계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던전 사방 100km 이내의 주민들을 모두 대피시켜주십시오. 가능하다면 더 멀리도 좋습니다.

둘째. 레이드 도중 던전 경계가 무너지고, 해당 디제스터가 추가로 다시 던전 생성하지 않는다면 영국 일리미네이터들도 레이드에 참가해주셨으면 합니다. 이 경우 퇴치금의 일부를 함께 분배해드리겠습니다.

셋째. 저희 DS 공격대가 만약 실패했을 경우 대한민국의 일리미네이터 1/3이 없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저희가 전멸했을 경우에도 일정 금액을 약속받았으면 합니다.”

급하게 나온 말이지만 로이드는 빠르게 판단을 마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첫째는. 사실 이미 대피가 끝나있소. 당연한 조치인지라. 둘째. 공격대 편성이 이미 되어있는 상태이니, 그렇다면 일정 거리에서 레이드 상황을 지켜보다가 참가하도록 하겠소. 셋째. 이 부분은 서류가 필요하오. 하지만 받아들일 수 있는 금액이라면 받아들일 생각이오.”

“좋습니다. 이쪽이 준비 서류입니다. 실패 시엔 성공 시의 1/30의 금액을 받는 걸로 되어있습니다. 차후 확인해주셨으면 합니다.”

“알겠소.”

굳게 악수를 나눈 로이드의 얼굴은 밝았다. 아직 레이드를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드래곤을 잡았다는 이 청년은 쓸데없는 말을 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보통 정규공격대에 파견을 요청하면 그 나라 외교관이 당연하단 듯이 옆자리에 대동 되어, 멸급 디제스터로 아비규환이 되는 와중에도 조건을 걸곤 했는데 그런 이들도 보이질 않았다.

덕분에 로이드는 온전히 레이드 관련의 이야기만 나눌 수 있었다.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멸급 디제스터 상대로 확신을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승산은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로이드 총리님. 죄송합니다만, 로이드 총리님께선 디제스터 퇴치의 전문가는 아닐 겁니다.”

“당연히 그렇소.”

“네. 그러니 영국 일리미네이터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끔 해주시겠습니까?”

“아!”

자기가 이 자리에서 더 말을 나누는 것 자체가 시간 낭비라는 것을 깨달은 로이드는 얼굴을 붉히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영국 행정부의 수반이긴 했지만, 그들이 말하는 전술을 모두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 결단이었고, 그것은 이미 내려졌다. 그 결과 막대한 돈을 들여서 외국의 도움을 받기로 한 것이다.

이제 그 인력을 불러왔으니, 이후의 전개는 온전히 그들의 몫이었다.

“부탁하겠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반드시 해낼 수 있단 확답은 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그는 겁먹은 얼굴을 보이진 않았다.

*

영국 일리미네이터들과 만난 천후는 촬영화면만으로 확신하기 어려운 부분들을 하나씩 확인했다.

“팔이 보였단 말입니까?”

“네. 정확힌 그렇게 추정되는 부위입니다만….”

“그렇군요.”

듣고 싶었던 이야기였다. 천후는 그들에게 만약의 경우 레이드에 참가해달라는 약속을 다시 한 번 얻어내고는 DS 공격대원들 근처로 돌아왔다.

“후우.”

대기소에서 던전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이곳에 있다 보면 던전에서 새어나온 열기에 자기도 모르게 땀이 나곤 했다. 천후는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닦아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라즈베리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싸부. 두려우십니까?”

“음?”

묻는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보아하니 묻는 본인이 겁을 먹었는지 그녀의 얼굴색은 그리 좋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멸급 레이드였다. 당연히 두려워할 만했다. 천후는 안심시켜주려는 듯이 웃음 지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니야. 무서워하는 건 라즈베리 아냐?”

“아, 아니지 말입니다! 전 안 무섭슴다! 팍팍 끝장 낼검다!”

슈슉슈슉 하고 허공에 주먹을 내질러 대는 모습에 피식 웃은 천후는 그녀의 머리 위에 손을 턱 올렸다. 손 크기가 크다 보니 그녀의 머리 전체가 완전히 손에 쥐어질 정도였다. 흠칫한 그녀는 그러나 곧 말과는 달리 떨리던 몸이 멎었다.

“괜찮아. 라즈베리. 이번 레이드는 아마 그렇게 위험하지 않을 거야. 혹시 겁이 난다면 빠져도 돼.”

“정말입니까? 핫…!”

자기도 모르게 되물었던 라즈베리는 자기 입을 양손으로 가렸다가 고개를 붕붕 저었다.

“아, 아닙니다! 저도 꼭 낄검다! 슈발츠 폼 옆에서 실물로 볼검다!”

천후는 전부터 종종 들은 슈발츠 폼이란 게 뭔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하여간 의욕만은 알 수 있었다. 결국 그는 알겠노라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왜 이러시지?’

한편, 라즈베리는 그가 평소와는 약간 상태가 다르다는 것을 눈치챘다. 레이드에 나설 때만 이런 걸지도 모른단 생각도 들었지만, 그녀는 곧 그 생각을 접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감성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전의나 열의 같은 들끓는 것이 아닌, 조금은 착잡해 하며 착 가라앉은 느낌. 그러면서도 기대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싸부. 뭔가 이상한 겁니까?”

“음?”

“슬픈 것 같습니다.”

“…그럴지도.”

천후는 부정하지 않았다. 라즈베리의 고개가 옆으로 약간 기울어졌다. 그것을 보며 천후는 씁쓸히.

공격대원들에게 했던 말을 다시 한 번 입에 담았다.

“아마 저건 디제스터가 아닐 거야.”

그리고. 그들에게도 하지 않았던 말도.

“디제스터가 아니라… 나랑 비슷한 경우일 거야.”

천후의 눈은 금이 가있는 던전 경계로 향해 있었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쿠폰, 코멘트 모두 감사드립니다.

챕터 3의 주제는 주요 키워드는 닮은 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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