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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드하렘-169화 (169/324)

169화

사원이자 왕가의 묘지였던 장소는 이미 열화의 지옥이 되어있었다. 금이 간 던전 경계에서 새어나오는 열기만으로도 주변의 평균기온은 크게 올라있었다.

지금이야 이 정도였지만, 만약 던전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 디제스터가 날뛰기 시작하면 대체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기상학자들은 영국의 기후가 완전히 바뀌어버리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측하고 있었다.

"후우. 긴장된다…."

"이제 이 안에 들어가야 한단 거지?"

멸급 디제스터, 임시 명칭 '이그네스'를 퇴치하기 위해 던전 앞에 선 DS 공격대의 표정엔 긴장이 역력했다. 그들의 몸엔 화염 저항 마법이 걸렸고, 그걸로도 모자라 방화복까지 갖춰 입었다.

방화복이라고 해도 캐스팅과 이동의 편의성을 최대한 중시한지라, 소방관이 입는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마음의 위안을 주는 정도의 장비에 지나지 않았다.

주민들은 100km 밖으로 대피해있었고, 수십km 밖에는 만약에 던전에서 '이그네스'가 튀어나와 화재가 일어날 경우를 대비해 영국 전역의 소방인력들이 소집되어 대기하고 있었다. 전투가 끝나는 즉시 투입될 수 있도록.

그만큼 '이그네스'가 보이는 화염은 강력한 것이었다. 정태원과 레이나드. 그리고 천후 본인조차 광역공격만 치자면 드래곤 이상이라고 못 박아두고 있었다.

허용된 교전 시간은 5분 이내. 과연 그 시간 안에 모든 것을 끝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이 자리까지 온 이상.

공대원들은 최종 브리핑 때 들었던 말을 뇌까렸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번 레이드는 무난하게 끝날 겁니다. 다만 위험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최대한 주의해주세요.'

마치 승리가 이미 확정되어 있다는 듯한 말투에 모두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영국으로 오기 전 그가 말한 '이번 상대는 디제스터가 아니다'라는 말의 의미를 눈치챈 것은 몇 되지 않았다.

그래도 저렇게 확신 있는 태도로 말하니 마음은 편해졌다.

"어쨌든 이기면 돼. 이기면."

"말 잘했다."

잡아내기만 하면 대박이다. 그들은 서로 전의를 북돋았다.

그 모습을 둘러보던 천후가 외쳤다.

"그럼 현 시간부터 멸급 디제스터 '이그네스' 레이드를 시작합니다. 따라서 지금부터 레이드 종료까지 공격대의 지휘권은 완전히 레이나드 씨에게 이양합니다. 그럼 레이나드 공격대장님. 지휘를 맡아주시죠."

공격대의 주인은 영천후였지만, 그가 직접 공격대장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는데, 첫째는 천후가 최전방에서 싸우기 때문이었다.

게임에서야 탱커가 공격대장을 맡을 수 있을지 몰라도, 현실인 레이드에선 불가능에 가까웠다. 게임에는 에드온이 있고, 알림창이 있으며, 시야 이내에 전 공격대원의 HP 바가 보인다.

유그드라실의 서포트를 받으면 최대한 이에 가깝게 가상 인터페이스를 지원받을 수 있긴 했지만 그래도 무리였다.

당장 수십, 수백 미터짜리 괴물의 바로 앞에 선 인간의 입장에선 이놈의 전체 동작이 시야에 다 보이질 않으니까!

아파트 단지 전체 크기만 한 놈이 주먹을 휘두르는 동안 등 뒤론 뭘 하는지 사람 눈으로 보일 리가 없지 않은가? 근접 거리에서 말이다. 심지어 아예 등 뒤에 있는 공격대원들의 위치 같은 건 더 말할 것도 없다.

이 때문에 공격대장은 무조건 후열에 있는 사람이 해야 했다. 가능하다면 아예 레이드 자체에 참가를 안 하고 전술지휘를 하는 것이 최선이지만, 그럼 현장에서만 판단할 수 있는 것을 놓칠 수도 있었기에 직접 참가했다.

두 번째 이유론 집단 통제가 익숙하지 않단 점도 있었다. 이것은 훈련과 연습으로 극복할 수 있는 영역이지만, 1번과 연계되면 당연히 효율이 극도로 떨어진다. 그렇다고 굳이 공격대장 하겠답시고 후열로 빠진다? 그럼 DS 공격대의 유니크성이 날아간다.

이 때문에 천후는 지휘권을 레이드 시에는 두 명의 공격대장들에게 넘기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 트라이에는 레이나드가 맡기로 했다.

이번에는 첫 번째 문제점이 걸리지 않았지만, 보편적인 경우에 익숙해져 있는 건 천후도 마찬가지였으니까.

"네. 지휘권 양도받았습니다. 전 공격대원 배틀 시그널."

던전에 출입하기 위한 도발 표식이 던전의 경계에 새겨졌다. 그 순간 금이 간 던전 경계가 일렁거리며 사람을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던전 입장."

레이나드의 명령에 따라 천후가 강화마법을 활성화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와. 슈발츠 폼!"

직접 본 것은 처음이었던 라즈베리가 탄성을 내지르는 것과 동시에, DS공격대 전원이 던전에 입성했다.

*

던전 내부는 의외로 안정되어있었다. 물론 이그네스가 긴 시간 날뛴 결과 내부 온도는 이미 100도 이상을 찍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안쪽에서 화염이 지속적으로 날뛰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호흡 관련도 마법으로 때운 상태인 공격대원들은 내부를 둘러보며 침음성을 냈다. 황무지 정도가 아니라 지면 일부는 암석들이 녹아 아예 유리화 되어있었다.

탄화된 지면에서 올라오는 매캐한 연기가 코를 찔렀다. 이것만 해도 조치를 안 하고 들어왔다면 유독했으리라.

"굉장하군. 이건…. 퇴치 후에도 땅을 되살리지 못하겠어."

이건 화전을 들먹이면서 말할 것도 못됐다. 아예 지면 자체가 열로 파괴되어있었다. 차라리 사막 한가운데가 여기보단 생산력이 있으리라. 그들은 던전 내부에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땅 자체가 이렇게 될 정도면 인간은 정말 뼛조각 하나 남을 수 없었을 테니까.

한편. 최전방에 나서있던 천후는 일렁이는 불꽃을 발견하고서 통신기를 통해 보고했다.

"이그네스 발견."

"네. 전 공격대원 산개."

지금까지 기록에 따르면 이그네스는 쉽게 공격해오는 타입이 아니었다. 먼저 접근해오긴 하고, 그 순간 모든 게 불타버리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 정도라면 디제스터 중에선 아주. 아주아주 양호하다.

그 속성을 이용해 레이나드는 사전에 준비한 진형으로 공격대원들을 산개시켰다.

"아――――――"

그들의 기척을 느낀 걸까? 1m 이하로 작아져 있던 불꽃이 커지며, 사전에 본 영상처럼 길쭉하게 늘어났다.

"공격대장님. 사전에 말씀드린 대로."

"네. 퍼스트 컨택트. 진행하세요."

이번 레이드에는 영천후의 의견이 상당히 많이 반영되었다. 레이나드와 태원은 반신반의했지만, 그래도 그를 믿기로 했다.

무엇보다 너무 '유사'하니까.

"후우…."

검은 불꽃이 되어있는 천후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며 이그네스에게 접근했다. 아름다운 아리아를 자아내던 이그네스는 그가 다가오자 아리아를 멈추었다.

앞뒤 구분을 짓기 힘든 불꽃 그 자체였지만, 천후는 그것이 자신을 마주 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느낀 순간….

화륵. 화염의 형상이 아주 잠깐. '얼굴'. 그것도 '사람의 얼굴' 모양을 드러냈다 사라졌다.

'역시.'

천후는 지금까진 의혹에 지나지 않았던 것을 확신으로 바꿨다. 그때였다.

"아――――――"

이그네스가 낮은 아리아를 발하며 그에게 다가왔다. 어느덧 두 불꽃은 금방이라도 맞닿을 것처럼 가까워졌다. 그리고… 예의 '팔' 그리고 가느다란 '손'이.

이그네스에게서 뻗어져 나왔다.

그것은 아주 얇았고, 떨리고 있었다.

"아…."

울리던 아리아는 나지막한 탄성으로 바뀌어있었다. 천후는 불꽃 안에서 '눈동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크게 떨리는 눈동자를.

"…이리 와."

자기도 모르게 안쓰러워하는 목소리를 내고 말았다. 천후는 천천히 그녀의 손 앞에 자신의 손을 가져갔다. 잡으라는 듯이. 이그네스는 그 손을 뚫어져라 보더니, 조심스레 자신의 손을 그 위에 올렸다.

그리고-

파지지지지지직!

두 불꽃이 부딪히며 백열이 터졌다.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빛에 상황을 지켜보던 공격대원들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비명을 지르는 것은 공격대원들뿐이 아니었다.

"아――――――――!!!!!!!!!!!!"

이그네스도 마찬가지였다.

화르륵! 순간적으로 불꽃의 크기를 크게 부풀린 이그네스는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큭…!"

천후는 이그네스와 맞닿았던 손을 꽉 틀어쥐었다.

'닿았다.' 저것은 그냥 불꽃이 아니었다. 역시 실체가 있었다. 천후는 급하게 외쳤다.

"상황 B로 확정!"

"상황 B 확정. 전 공격대원 딜레이 해제.“

파아아아앗! 순간 공격대원들의 몸에서 오오라가 치솟아 올랐다. 천후가 앞에서 이그네스와 접촉하는 동안 그들이라고 놀고 있던 게 아니었다. 풀 캐스팅을 하면 오오라가 너무 커지니 절반 위력으로 줄인 방출주문을 준비하고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발사!"

명령에 따라 단박에 39인의 방출마법이 이그네스를 향해 쏘아졌다. 절반 위력이라곤 해도 A랭크인 라즈베리가 끼어있는 방출마법. 멸급 디제스터라도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공격이었다.

"아――――――――"

그때. 아리아가 크게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이그네스를 뒤덮고 있던 화염의 반절 이상이 갈라져 나오더니 앞쪽으로 쏘아졌다.

푸화악! 엄청난 폭열이 광선과 부딪혔다. 백색의 광선은 불꽃에 닿자 더는 나아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힘겨루기를 계속했다. 순간 공격대원들은 이번 공격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크윽! 말도 안 돼!"

40인분의 풀 캐스팅을 받아내 버리는 건 보았다. 하지만 지금의 화력은 그것보단 약하긴 해도 거의 근접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보다 대응시간도 짧았는데도 이걸 막아내 버리다니?

"아…아아아아아아아아!!!!!"

화륵! 화륵!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이그네스는 '왼팔'을 들었다. 순간 나머지 남은 화염이 전부 그 팔을 타고 똬리 틀듯이 엮이며, 그 끝에 맺혀 백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탱커!"

"네!"

던전 경계에 금을 가게 한 공격. 저게 떨어진다면 캐스팅이 끝난 직후인 공격대원들은 대응할 방도가 없다. 검은 번개가 지상에서 쏘아져 올라갔다.

파파파파팍! 흑염과 적염이 닿자 다시 한 번 백열이 튀었다. 그의 접근을 알아챈 이그네스가 그에게 모인 백열을 발사하려했지만, 이 근접거리에서 동일 체격, 아니 더 작은 체격의 공격을 쉽게 당할 천후가 아니다.

"'흡!"

백열이 튀는 것을 각오하고 그 팔을 잡아챈 천후는 이그네스의 손을 바로 아래의 지면으로 향하게 했다. 순간 이그네스의 손에서 백열이 쏘아졌다.

퍼거거걱! 백열이 지면에 닿자 순식간에 지면을 녹이면서 파고들어 갔다. 그 면적은 작았지만, 대체 어디까지 파였을지는 파보지 않는 이상 알 수가 없을 정도였다.

"아――――――――!"

아리아를 자아낸 이그네스의 몸이 순간 완전히 화염으로 흩어졌다.

"공간 이동!"

이건 처음 본 패턴이었다. 깜짝 놀란 천후가 보고하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호언장담해놓은 상태인데, 공격대의 뒤라도 덮쳤다간 막대한 피해가 나버린다.

그러나 다행인지, 이그네스는 먼 곳에 가지 않았다.

10m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날고 있었다. 강화마법이 걸린 천후에겐 코앞이나 마찬가지의 거리.

"읏?!"

하지만 천후는 자기도 모르게 그 자리에서 멎어버렸다.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지금까지의 이그네스가 아니었던 것이다.

"젠장! 역시 맞았어!"

천후의 입에서 욕지기가 튀어나왔다. 도저히 들끓어 오르는 마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불덩어리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던 이그네스는 그 형태가 완전히 변해있었다.

몸 자체는 여전히 불이다. 그러나 '몸'이라고 부를만한 것이 확실히 드러나 있었다.

160cm가 조금 안 되는 여인의 나신. 그 몸이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발아래까지 자란 긴 머리칼은 불로써 존재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분명 '사람'이지만, 불꽃이 혼재하고 있는 이 모습을 천후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마력 동화…!"

색과 크기만이 다른 두 화염 마인이 하늘에서 서로를 마주 보았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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