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영상으로 처음 '그녀'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천후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동질감을.
그 몸에서 팔. 인간 수준의 얇은 팔이 튀어나오는 것을 보고서는 점점 확신에 가까워졌다.
"나와…아주 비슷해."
그녀의 행동패턴은 일반적인 디제스터와 너무 달랐다. 서브 퀘스트를 제외하면 보통 선공 성향을 띄는 것이 디제스터였지만, 그녀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드래곤도 비활동적인 면이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시야 안에 인간이 없었기 때문에 한곳에 머문 채 브레스를 날렸던 것이다. 시야에 인간이 들어오면 디제스터는 가차 없어진다.
하지만 그녀가 인간을 접하고 처음으로 보인 행동은 접촉 시도였다. 거기에서 천후는 일말의 희망을 보았고, 이미연에게 조언을 구했다.
다행히도 미연은 최완과는 달리 금제가 걸려있지 않은 모양인지, 상당한 유사성을 보인다는 대답을 해주었다.
"네가 A랭크 제어가 전혀 안 되던 때 보였던 모습과 비슷해. 통제력의 문제가 아닐까?"
이 대답에서 천후 개인은 그녀를 디제스터가 아닌 자신과 동류. 제3 인류로 보고자 마음을 굳혔다. 하지만 아직 확정된 사항은 아니기에 몇 가지 전술안을 세워서 이 자리에 와있었다. 만약 이게 디제스터라도 쓰러뜨릴 수 있는 준비를 해온 것이다. 이 때문에 자세한 설명은 피했다.
다만 완전히 묵묵부답으로 밀어붙일 순 없었기에 간단한 힌트만 던졌고, 레이나드와 태원은 그의 말을 알아들었다.
그렇게 이 자리에 왔고.
짐작은 사실이 되었다.
*
"정신을 차려! 우리는 적이 아니야! 이성을 되찾아!"
"아----------"
그녀, 이그네스는 천후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지 양팔을 벌리고는 아리아를 자아냈다. 화륵. 그녀의 몸에서 불길이 치솟는다 싶더니, 그것들이 허공에 녹아들었다. 그 영향은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던전 내 기온이 상승! 현재 125도!>
던전에 들어올 때에 공격대원만 덜렁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영국 측에서 했던 것처럼 DS 역시 무인장비를 투입했고, 강력한 내열성 자재로 만들어진 그것은 레이드 장면을 촬영하면서 주요 정보를 던전 밖의 오퍼레이터들에게 보내주고 있었다.
그중에서 중요한 것들을 추려서 말해주고 있었는데, 들려오는 말이 심상치 않았다.
"후우!"
화염 마인이 된 천후야 말짱했지만, 화염저항 주문에 의존하고 있는 공격대원들은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천후는 양 주먹을 치켜들었다.
"아-------------"
공격적인 자세라 생각했는지, 이그네스가 아리아를 내지르며 감고 있던 두 눈을 팍하고 뜨며 천후를 노려보았다.
푸카카칵! 눈이 멀 것 같은 백열이 터지며 천후가 주춤했다. 게이즈 어택. 보통 사람이 당했다면 그 자리에서 뼛조각 하나 남지 않았으리라.
'역시 이성이 온전치 않나!'
천후는 잠시 망설였다. 지금 이렇게 강화마법을 건 상태에선 천후 역시 힘 조절에 애를 먹었다. 저 작은 몸이 건드리기만 해도 바스러지지 않을까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그렇게 망설이는 사이에 아리아가 다시 한 번 울렸다. 단지 그것만 이미 탄화된 지면에 불이 피어오르며 공격대원들을 덮쳤다.
"으악!"
"이 상태에서도 불이 난다고?"
이제 더 태울 것도 없어서 직접 공격을 받기 전엔 괜찮을 거라 여기던 이들은 당황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 건 어디까지나 공격대원들이었지, 레이나드는 아니었다.
"비행 시작. 회피기동."
비행마법 자체야 이미 던전에 들어오기 전부터 걸려있었다. 굳이 지면에 발을 붙이고 있었던 건 언덕 지형을 이용해 퍼스트 컨택트를 지켜보기 위함이 컸다.
그때가 지난 이상 땅에서 불 올라오는데 버티고 있을 이유가 없다. 레이나드는 비행지시를 하고 이그네스의 행동 양상을 좀 더 지켜보았다.
"아---------"
아니나 다를까. 이번엔 다시 한 번 던전 온도가 크게 오르며, 동시에 그녀의 오른팔에 커다란 불꽃이 맺혀서 날아왔다. 여기까지 3초나 걸렸을까? 저것 하나만도 라즈베리의 풀 캐스팅에 가까운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탱커. 시선 교란."
"네."
차분하게 대답한 천후는 그녀의 앞에 섰다. 어느 정도 거리를 벌려놨었는데 덜컥하고 코앞까지 다가오자, 그녀는 놀랐는지 눈앞에 있는 천후에게 불꽃을 쏘아냈다.
푸확! 직선형으로 날아가는 불꽃을 간단히 몸을 기울여 피한 천후는 그녀의 시선을 방해했다. 그때마다 게이즈 어택으로 일어난 백열이 하늘을 새하얗게 물들였다.
"꺄아-----------"
행동이 봉쇄당하자, 그녀는 아리아 음색을 거칠게 바꾸며 다시 한 번 천후에게서 멀어지더니 양팔을 활짝 펼쳤다. 그러자 이번엔 아예 공기 전체가 뜨겁게 달궈지더니, 던전 전역이 불바다로 바뀌어나가기 시작했다. 땅과 하늘을 가리지 않고.
상황을 본 레이나드는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지금 이 레이드는 게임식으로 말하자면 모든 공격대원이 도트 데미지를 입는 상황이었다. 그걸 장비와 마법으로 데미지를 0으로 하고 있었는데, 이그네스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 도트에 중첩을 쌓아갔다.
아무리 마법이 만능이어도 한계치는 있었고, 상황이 이쯤되면 버틸 수가 없었다. 당장 레이나드의 옷깃에도 조금씩 불이 붙기 시작했다. 그리고 직접적인 화상을 입으면서 캐스팅을 한단 건…. 한 두 번은 모를까 지속적으론 절대 불가능한 짓이다.
더는 레이드 진행할 수 없다고 판단한 레이나드는 빠르게 말했다.
"상황 B 마지막 플랜 실행하겠습니다."
"허가합니다."
"네. 탱커 제외 전 대원 던전 이탈."
"네?"
미친 거 아냐? 아무리 공격대장의 명령이 절대적이라지만 이건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아무리 영천후가 굉장하다지만 그를 혼자 두고 던전에서 빠져나가라는 건 이해할 수 없었다. 브리핑 때도 없었던 행동이었다.
"어서! 플랜이 있습니다!"
레이나드는 그런 공격대원들을 다그치며 먼저 던전 밖으로 나가버렸다. 놀란 공격대원들은 천후와 레이나드를 번갈아 보다가, 큭하고 침음성을 내며 던전 밖으로 나갔다.
"아----------"
많은 이들이 밖으로 뛰쳐나가는 것을 본 이그네스는 분노한 것처럼 소리치며 양손에 백색 빛을 맺어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쉰 천후는 정신을 집중하며 주문을 읊었다.
"나. 정명한 별의 적자가 고한다…."
순간. 엄청난 속도로 스펠 세이브가 해제되며 그의 몸이 적홍의 불길로 뒤덮였다. 던전 밖으로 백열 광선을 내쏘려던 이그네스는 그를 보고서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아!!!!!!"
던전 내부는 이로써 완전히 화염으로 뒤덮였다. 하지만 천후는 그녀의 눈동자에서 공포를 보았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미쳐 날뛰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을 안쓰럽게 바라보던 천후는 통신기에 가볍게 말했다.
"시작해주세요."
*
던전에서 나온 공격대원들은 상당히 먼 거리까지 대피하고서야 지면에 내려올 수 있었다. 그들은 안도하면서도 불신의 눈길로 레이나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레이나드라고 그 시선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강호 씨."
"네!"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 누구보다도 걱정하고 있던 강호는 자기 이름이 불리자 흠칫 놀라며 답했다. 당장에라도 뛰어들어가고 싶던 참이었다. 간호는 몸을 숙이며 던전으로 향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레이나드의 입에선 다른 소리가 나왔다.
"들어가란 게 아닙니다. 강화마법을 푸세요. 그리고 특성을 켜세요."
"네?"
"특성 켜시라고요. 빨리!"
"아…!"
순간 모든 것을 이해한 이강호는 빠르게 강화 마법을 가라앉히고 특성을 발휘하는 방아쇠가 되는 동작, 검을 뽑아 보였다.
스르릉. 아름답기까지 한 발검음과 함께, 대원들 몸에 걸려있던 모든 마법이 전부 꺼졌다. 순간 공격대원들은 거의 건식 사우나 수준까지 올라가 있는 주변 온도 때문에 헉 소리를 내며 괴로워했다.
변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츠…. 츠츠츠츠….
금이 가서 안쪽이 언뜻언뜻 들여다보이는 던전 내부의 미친듯했던 화염이 잦아드는 것이 보였다.
"아!"
이미 달아오른 온도까진 어쩔 수 없었지만, 불 자체는 전부 꺼져나갔다. 지상의 것도. 공중의 것도.
이그네스의 것조차….
그 순간 모든 공격대원은 정태원이 이번 레이드를 왜 왜 공돈 벌러 오는 거라고 했는지 이해했다.
"졸라…. 지금까지 그럼 우린 레이드 왜 뛴 거야?"
멍하니 누군가 내뱉은 말에 다들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게 가능한 걸 알았다면 그냥 던전에 들어오기 전부터 해도 됐을 게 아닌가? 하지만 그 말에 태원이 엄하게 답했다.
"멸급 디제스터 레이드에 지극히 가까운 실전연습을 할 기회가 흔할 것 같습니까? 우린 정말 좋은 경험을 한 겁니다."
"……."
다들 얼굴이 썩어나갔다.
'그놈의 훈련!'
'시바…. 돈만 안 줬어도….'
공격대원들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레이나드는 여전히 심각한 표정으로 통신기에 대고 물었다.
"사장님. 괜찮으십니까?"
그의 목소리엔 여유가 없었다.
당연했다.
던전 안의 온도는 화염이 가라앉았는데도 200도를 넘어서고 있었으니까.
불만이나 투덜거리던 공격대원들이 얼굴이 그 순간 딱 굳었다. 사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온도가 아니다. 강화마법이고 뭐고 죄다 날아가 버린 상태로는. 호흡할 산소조차 없을 게 분명했다.
위험부담이 없는 건 자신들뿐, 영천후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 순간 그들의 머릿속에서 불만은 완벽하게 싹 날아가 버렸다.
바로 그때.
"네. 생각보단 버틸만하군요."
그들이 한 최악의 상상에 비해 훨씬 멀쩡한 목소리가 통신기를 통해 들려왔다.
*
신위를 발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주변의 불길이 잦아드는 것을 느꼈다.
"켰군."
진리 구현자 특성에 대한 연구는 지난 몇 달간 어느 정도 해뒀다. 효과범위는 그녀의 시야. 혹은 그녀의 육감에 좌우됐다. 지금처럼 던전이 반쯤 부서진 상태에선 내부까지 영향을 미칠 거라 생각했는데 맞아 떨어졌다.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도 이 지옥을 잠시간 이겨내야 했을 테니까.
"후우…."
공격대원들을 전부 나가게 한 건, 보조마법이 전부 지워지면 그들이 이 환경에서 버틸 수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천후가 내부에 남은 건 믿는 게 있어서였고.
이전. 그녀에게 몸이 꿰뚫렸을 때. 강호의 특성 영향권 안에서도 신위의 영향은 남아있는 것을 직접 체험했었다. 그 감각은 여전히 남아있었고, 덕분에 지금 천후의 몸은 아주 희미한 붉은빛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리고….
"아………."
천후의 앞에서 노래하던 나신의 여자. 이그네스는 천천히 힘을 잃고 고개를 떨궜다. 폭주하던 힘이 끊어지자 그녀의 몸은 한차례 희미하게 붉은빛으로 빛나며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흡!"
놀란 천후는 바로 그녀를 양손으로 안아 들었다. 그리고 순간 놀랐다.
"아니?"
온몸의 외곽선을 감싸던 불꽃이 사라진 그녀는 이제 완전히 인간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타오르는 것 같은 진한. 멜라닌 색소의 영향력을 벗어난 완벽한 붉은 머리에 우윳 빛깔의 흰 피부. 키는 이브나 에바보다 간신히 조금 더 커 보였다.
"왜 이렇게 됐지?"
분명 불꽃으로 화해있을 땐 이것보다 컸다. 라즈베리와 비슷한 정도였고, 실루엣 자체도 성인 여성에 가까운 것이었는데 이런 어린아이가 되어버리다니?
"이것도 마력동화의 영향인가?"
게다가 놀랍게도 그녀는 이 미친 듯한 악조건 속에서도 혼절만 했을 뿐, 무리 없이 호흡하고, 열에도 영향을 받고 있지 않았다. 화염과 열에 대한 극단적인 면역성을 지니고 있는 듯했다.
이건 다행이었다. 즉시 신위의 영향력을 그녀에게까지 확장해두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잠시간의 시간 차이가 있었다. 그녀에게 이런 특징이 없었다면 몇 초간 이 열화 지옥에 그대로 노출됐을 것이다.
하지만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당장 안고 있는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이 손을 댔다간 화상을 입으리라.
함부로 옷을 입혔다간 그대로 타오를 것 같아 천후는 그녀를 안은 채 던전 경계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보다 훨씬 상태가 심하군."
적어도 천후는 스펠 세이브를 텅 비운다고 어린애가 되진 않는다. 한동안 상당히 허약해지긴 하지만 말이다. 그래도 생명에 지장은 없어 보이니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파지직.
"……."
던전 경계까지 도착한 천후는 그녀를 안고 나가려고 하자 경계가 가로막는 것을 느꼈다.
"아마 이것도 던전이 아니겠지…."
천후의 눈에 분노와 적의가 서렸다. 이그네스를 한 팔로 안아 든 천후는 천천히 왼손을 끌어당겼다.
"내 앞길…."
그의 발끝에서부터 희미한 홍색 기운이 타오르고 올라와 그의 주먹으로 전사됐다. 그는 그것을 그대로 내질렀다.
"가로막지 마!
파직, 파직. 파지지직!
그러자 간신히 형상을 유지하고 있던 던전 경계가 이윽고 무너져 내렸다. 그 순간. 던전 내부에 가둬져 있던 뜨거운 공기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천후는 그 뒷바람을 맞으며, 의식을 잃고 있는 이그네스를 소중히 감싸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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