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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드하렘-172화 (172/324)

172화

한정된 짧은 시간. 협소한 장소에서 알아낼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대응하기엔 충분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강호의 특성에 억눌리지 않은 상태의 이그네스의 체온은 100도를 넘었다. 입고 있던 옷은 단숨에 불타올랐다.

이그네스는 그럼에도 인간의 형태는 완벽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자기 피부에 자기 손이 닿는 것으로 타거나 하지도 않았다. 주변 공기가 뜨겁게 달아올라 강호는 호흡곤란을 느낄 지경이었지만, 그녀의 호흡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그네스는 마법사용을 격렬하게 거부했고, 강호 역시 밀어붙일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실험은 이쯤에서 그만두었다.

태원에게서 벗겨낸 여벌 옷으로 갈아입은 이그네스는 완전히 상심해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그네스. 괜찮아. 일단 강호 선배가 필수적으로 필요하단 걸 안 것만으로도 다행이잖아."

"그건…. 그렇다만."

이강호가 특성을 발휘하고 있을 때의 그녀는 보통 사람보다 체온이 약간 높은 정도의 보통 여자아이에 지나지 않았다. 머리카락 색은 특이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강호가 없을 땐 도저히 사람으로 살아갈 수 없는 화염 마인이었다.

마법을 사용하지 않아도 그녀의 손에 닿는 모든 것은 타들어 가거나 녹아버릴 것이다.

이 사실은 이그네스를 절망에 빠뜨렸다. 하지만 천후의 생각은 달랐다.

"그 이상의 상황이 오지 않아서 다행이야. 이 정도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어."

"…정말인 게냐?"

"물론이지.“

천후는 최악의 경우 던전 안의 그 모습이 되는 것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성이 유지되고, 체온이 100도쯤 넘는 것 정도는 양반이었다. 일단 그 상태에서도 사람 모양새가 아닌가.

천후는 이것을 돈과 시간만 투자하면 어느 정도 해결을 할 수 있는 문제로 봤다. 그중 전자는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후자.

시간만은 문제였다.

그리고 문제가 있다면 해결을 봐야 한다.

"그러니. 이야기를 좀 하지요. 로이드 영국 총리."

공대원에게 퍼레이드를 넘기고 온 천후는 심각한 표정의 로이드와 엘리제 3세 앞에서 웃음 지었다.

*

로이드는 이그네스가 잡혔다는 소리에 미쳐 날뛰면서 곧장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DS의 대면요청에 응했다.

"기자들 최대한 대기시켜두게. 여왕님께도 대면요청 받아들여 주십사 말씀드려두고. 이미지를 최대한 만들어둬야 해."

멸급 디제스터가 잡힌 것이 끝이 아니었다. 이제 그는 멸급 디제스터가 나타났음에도 빠른 조치로 주변 반경 2,300m의 화재피해만으로 끝낸 영국 역사에 남을 총리가 되었다.

물론 DS 공격대를 부르는데 든 돈 180억 달러, 한화가치 18조 원 이상의 돈은 큰돈이었다.

스코틀랜드 쪽 분위기가 좋지 않은 지금 상황에서 경제적인 타격까지 입으면 힘들어지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자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고, 미국의 월드 리버티나 머니 크래프트를 불렀다면 아마 돈만으로 끝나지 않았으리라.

물론 국민들은 그런 것 알아주지 않는다. 돈이 빠져나간 건 빠져나간 거다. 거기서 다시 돈을 가져올 수 없는 한, 로이드는 최대한 언론플레이를 뛸 수밖에 없었다.

"미스터 DS! 개선을 환영하오! 그대에게 신의 영광 있기를!"

와락! 미리 천후와 말을 맞춰두었던 로이드를 강하게 포옹했다. 천후 역시 의례적인 이벤트를 전부 치러주었다.

"브리튼을 대신하여 감사하오."

노령에도 환영식에 나온 엘리제 3세는 그에게 명예 작위 수여를 약속했다. 그 모든 장면이 영국 내외부로 마구 퍼져나갔다. 공격대가 영국 어디를 가든 환영받는 모습 역시도 말이다.

그러나 늦은 밤. 천후의 또 다른 대면요청을 받아 버킹엄 궁으로 소환된 로이드의 표정은 결코 밝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한 곳으로 향해있었다.

그의 옆자리에 앉아서 성 내부를 멍하니 둘러보고 있는 적발 적안의 소녀에게.

"그러니까…. 저 여자아이가 이그네스라 이겁니까?"

"네."

"세상에. 믿을 수가 없군요. 그럼 원래부터?"

"네. 디제스터가 아니었습니다."

"……."

로이드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천후의 대답은 그에게 지옥을 맛보게끔 했다. 그런 한편으론 이 대화가 버킴엄 궁에서 이루어진 게 천만다행이라는 생각도 함께했다. 이곳이 아니었다면 분명 이 대화가 새어나갔을 테니까.

국가 안보 등에 대한 부분을 제외하면 그에게 비밀은 용서되지 않았고, 그의 행동은 실시간으로 체크되고 있었다.

왕이 개인적으로 사람을 만나는 이 장소에서조차 그는 15분에 한 번씩 자신이 아직 방에서 나갈 의사가 없음을 밖에 대기하는 비서실장에게 밝혀야 할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그나마 이곳이었기에 들어와서 같이 듣지는 못했고, 그의 정치 생명은 덕분에 간신히 연장되었다.

“끔찍한 이야기군요. 이건…. 유그드라실의 판정이 빗나갈 줄이야. 아마 이게 공개되었다면 영국이 뒤집어졌을 거요.”

“실제론 멸급 디제스터보다 훨씬 위험했던 적이라고 해도?”

“마찬가집니다. 사람 마음이란 게 그렇죠. 상대하던 게 사람인가 괴물인가에 따라서 인식 차이는 어마어마합니다. 던전 내부 영상을 공개해서 그녀가 녹여버린 사원을 보여준다 한들 같은 영역으로 받아들이지 못할 겁니다.”

“DS에 제시한 퇴치금도 그렇겠군요.”

로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DS에 넘겨주기로 한 퇴치금은 선지급금만 넘어간 상태. 여기서 무난하게 끝난 레이드 영상이 공개된다면 분명 본 퇴치금은 넘겨주지 말라는 식으로 압박해 들어올 것이다.

“그렇다 보니 결국 제 입장에선 국가의 이득을 추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녀가 정말 그저 마법사라면 그녀의 신병을 확보할 수밖에는….”

“!”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그네스는 흠칫 놀라며 자기 몸을 감싸안았다. 명백하게 두려워하고 있었다.

결국 로이드가 내놓은 결론은 퇴치금을 지급하더라도 이그네스를 확보하겠다는 쪽이었다. 그녀의 통제만 확실해진다면 지구 상에서 가장 강력한 일리미네이터를 얻는 셈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그때. 천후가 물었다.

“그 부분 말입니다만. 로이드 총리께선 이그네스의 정체에 대해 일반에 유출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시는군요.”

“당연합니다. 유그드라실의 방침을 생각해보면, 언론사에는 결국 지금까지 이그네스 레이드를 위해 촬영했던 영상이 전부 넘어갈 겁니다. 던전 붕괴 직전과 직후에 고열로 인해 장비가 모두 망가져 공백시간이 있었다지만, 붕괴 이후 당신의 행동은 유그드라실 위성이 포착하고 있었겠지요. 그럼 정체를 유추하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 이상 이 태도를 고수할 수밖에 없는 게 로이드의 입장이었다. 하지만 천후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저는 아마…. 이 영상은 유그드라실이 공개할 것 같지 않군요.”

“네? 무슨?”

그 질문에 천후는 그저 웃었다. 그 웃음에는 약간의 쓸쓸함이 묻어있었고, 그것은 로이드에게 신비함으로 다가왔다.

‘우리가 모르는 것이 있군!’

로이드의 등 뒤로 소름이 돋았다. 과연 유그드라실에게 유일하게 텔레포테이션 허가를 받은 남자. 자신과는 다른 판단근거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로이드는 그때부터 생각이 빠르게 돌아갔다.

“…잠깐. 그럼 굳이 우리에게 이 이야기를 할 이유가.”

“아실 건 아셔야죠.”

“음? …아하. 과연 그렇군요. 이거….”

이해가 빠른 사람이라 다행이다. 천후는 간신히 쓰고 있는 가면을 유지하며 웃었다.

최대의 이득만 들고 가자면 확실히 이그네스의 정체도 숨기고 그냥 한국으로 돌아가면 된다. 하지만 천후는 다른 길을 택했다.

‘유그드라실을 의심을 의심하게 해야 한다.’

유그드라실은…. 영천후 개인의 의향에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아주 깊은 친분 관계인 최완이 아무리 사정을 해도 정보를 감추는 것을 보고서 확신했다.

되려 바로 영천후였기 때문에 숨기는 것도 많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천후는 꽤 길게 생각했고.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항의하는 인간을 늘리면 된다.

되도록 평범한 사람으로. 아주 많이.

마법사와 인간의 공존을 지상과제로 삼고 있는 유그드라실은 일반 여론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리고 각국의 정부는 그 여론을 대표하는 곳이고, 대통령이나 총리들은 말할 것도 없으리라.

유그드라실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

당신에겐 없는 정보를 나한테는 풀었다.

알고 싶어 해라.

그렇다고 유그드라실에 타전해라 라고.

이 자리에서 천후는 의뢰를 넣고 있는 것이었다.

‘단지 그런 이유만은 아니지만.’

그리고 로이드는 그것을 빠르게 캐치했다. 이제 그는 머리를 다르게 굴리기 시작했다.

“어쩐지 행사에 전부 참여해주신다 했습니다. 선금이었군요.”

“거래는 공정해야죠.”

로이드 표정이 확 밝아졌다. 지금까지 해외에서 파견 온 공격대들은 기본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순간 자국으로 돌아가 버렸다. 덕분에 정부에선 그걸 선전용으로 이용해보고자 해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는데 DS는 왠지 들어주길래 무슨 꿍꿍인가 했더니 이런 뒷사정이 있을 줄이야.

“아주 좋은 말이군요. 당신이 바라는 건 그럼 그녀입니까?”

“물론입니다. 괜히 이러고 있는 게 아니지요.”

빙긋이 웃은 천후는 그를 마주 보며 물었다.

“얼마면 되겠습니까?”

“행사만으론 좀 부족하군요.”

“방식이 둘 있습니다. 돈만 돌려받으시던가. 아니면 저희 이름을 같이 쓰시던가.”

“후자가 좋겠군요.”

“반환금이 좀 더 적어질 겁니다.”

“이름이 더 가치 있지요. 제 정치생명에는.”

“좋습니다. 구체적인 사항은.”

“정리해서 보내드리지요. 무리가 있는 금액은 아닐 겁니다.”

꽈악. 천후와 로이드는 굳게 악수를 나누며 거래를 끝냈다. 어차피 이그네스의 신병은 영국에 구속되어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냥 데리고 나간다고 해도 잡을 방법은 전혀 없다.

하지만 천후는 거기에서 이그네스의 정체를 밝히고, 대신 유그드라실에 대한 비난을 요구. 그 비용을 치르겠다고 말했다.

로이드는 현명했다. 이그네스는 탐이 났지만, 그녀에 대한 리스크를 생각했다. 지금은 머리카락 색이 특이한 여자아이 정도로만 보이지만, 저건 당장 얼마 전까지 나라를 망하게 하네 어쩌네 하던 불꽃의 마인이었다.

그걸 과연 자국에서 통제할 수 있을까?

‘그럴 리가.’

애초에 통제할 수 있을 것 같다면 이 자리에 데려오지도 않았으리라. 그렇다면 챙겨주겠다고 하는 보수를 받아먹는 것으로 끝내는 것이 가장 좋다. 이거나 먹고 떨어지란 식이었지만, 그 금액이 조 단위가 넘어가면 그것만 해도 감지덕지한 법.

게다가 그의 이름을 빌려 쓸 수 있다면 정권유지에도 도움이 될 터였다. 받지 않을 수 없는 거래였다.

“정치에 대한 이야기는 다 끝난 겁니까, 로이드.”

“네. 실례했습니다, 폐하.”

“아니오. 그대가 마음을 놓을 수 있는 곳은 나라 안에 몇 없으니까. 흥미로운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고.”

자애롭게 웃은 엘리제 3세는 시선을 이그네스에게 옮겼다. 오랜 세월 풍파가 얼굴의 주름으로 남은 그녀였지만, 그 눈빛은 따뜻했다.

“…….”

그것에 이끌린 것일까. 이그네스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그녀를 마주 보았다.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조용히.

그때. 엘리제 3세가 말했다.

“손을 잡아도 될까요?”

어째서일까. 그 목소리는 아주 잔잔히 떨리고 있었다. 그 물음이 대상이 자신이란 것을 한참이 지나서야 깨달은 이그네스는 깜짝 놀라며 어물거렸다.

이그네스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과연 이 손으로 사람과 맞닿아도 될까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지금은 이강호가 함께 있어 불처럼 뜨겁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본능은 사람과 닿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 설까.

그녀의 손은 그런 상념들과는 다르게…. 천천히 앞으로 뻗어져 있었다.

“…아주 곱군요.”

그것을 가만히 양손으로 잡은 엘리제 3세는 그러다 양팔을 벌려 이그네스를 안아주었다.

“아….”

천후의 손은 자기도 모르게 뿌리쳤던 이그네스였지만, 어째선지 이번엔 그러지 못했다. 그녀가 영국의 여왕이라는 말을 미리 들었었기 때문일까? 아니.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보다는―

‘나는…. 이 사람을 알고 있는 것 같구나….’

이 품안이….

익숙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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