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홈그라운드인 대한민국에 돌아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이그네스를 희주와 다른 이들에게 보이는 것이었다.
영국에 있는 동안 사정 설명을 끝내놨었지만, 역시 실제로 접하는 것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보면 그냥 어린애로밖에 안 보이는데."
"나는 어린애가 아니다!"
셀레나의 말에 이그네스는 빽 하고 소리 지르며 반박했다. 그녀를 구해내고 대한민국으로 돌아오는 동안, 이그네스는 기억은 되찾지 못했지만 몇 가지는 본능적으로 깨달은 모양이었다.
"지금 내 몸은 이렇지만, 나는 원래 어른이니라! 어찌 이런 몸이 되었을꼬."
이그네스는 분한지 몸을 부르르 떨면서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물론 그녀는 아주 진지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그저 귀여운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그 모습에 실실 웃은 셀레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 앞에서 쵸파춉스를 흔들었다.
"그래. 그래. 어른이야. 아. 사탕 먹을래?"
"…흥!"
탁. 단숨에 그녀의 손에서 사탕을 가로챈 그녀는 인상을 팍 찌푸리고서도 꽁꽁 싸인 비닐을 열심히도 깠다.
'애다.' '애구만.'
단숨에 모든 이가 그녀의 성격을 파악했다. 거기에 천후는 부연설명을 했다.
"일단 이그네스가 하는 말은 사실이야. 이그네스는 본래 어른인 것 같아. 어쩌다가 이런 모습이 된 건진 몰라도."
"마력동화가 일으키는 특수현상이 아닌 거냐?"
강호의 물음에 천후는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일단 난 저런 적이 없어서 확신은 못 하겠어. 그리고 이그네스는 나랑 또 다른 게, 스펠 세이브나 롱 캐스팅은 못 한다더라고. 이것도 시험해보기 전엔 사실 확실해 보이진 않지만."
"확실하다고 말하는데도! 그런 거 해본 적이 없다!"
비닐과 한참 씨름을 하고 있던 이그네스는 한 귀로 이야기를 듣다가 버럭 성을 냈다.
"알았어. 알았어. 아. 비닐 까줄까?"
"응? …흐, 흥! 되었다. 설마 이거 하나 내가 못 깔까."
말하는 것관 다르게 막대에 단단히 감싸여 있는 비닐을 뜯어내지 못해 고생하던 티가 난다. 천후는 간단히 그것을 쏙 가져와 비닐을 벗겨서 넘겨주었다.
"자."
"윽! 혼자서도 할 수 있었느니라!"
"그려."
"…흥."
살짝 천후를 쏘아보던 이그네스는 그러다 사탕을 입속에 넣자 표정이 불리며 화색이 돌았다.
"제법 맛있구나. 사탕을 이런 막대에 꽂아서 예쁘게 포장해서 팔다니. 신기한 일이로구나."
"응?"
이그네스의 발언에 잠깐 멍해졌던 셀레나가 천후에게 귓속말로 물었다.
"잠깐. 쟤 사물이나 그런 것들에 대한 기억도 없어?"
"그렇더라. 오는 동안 별걸 다 신기해하던데."
"그건… 정말 일반적이지 않은데.“
쵸파춉스도 모르다고? 셀레나는 잠시 멍해졌다.
자신의 인적사항이나 사람에 대한 지식이 날아가더라도, 사물에 대한 기억까지 날아가는 경우는 흔치 않다. 부모에 대한 기억이 일시적으로 날아갔어도 수세식 화장실 변기 물 내리는 법은 보통 기억하고 있는 법이다.
그런데 그 수준에서부터 깡그리 전부 날아가 버렸다니? 이건 마치.
"애초부터 몰랐던 거 아냐?"
"그럴지도 모르지. 결계… 사실상 봉인 안에서 대체 몇 년이나 지냈을지 알 수가 없으니까. 현대인이 아닐지도 몰라. 유그드라실 출범 이전부터 그랬을지도 모르고."
"흐음…."
천후의 말에 셀레나는 골몰하며 생각에 몰두했다. 그동안 희주는 사탕을 입에 물고 행복해하는 이그네스를 빤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럼… 저 아이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지요?"
"음… 그게. 희주 씨. 미안한데 아마 당분간은 강호 선배와 같은 방을 쓰게 하면서 같이 지내야 할 것 같아요. 어떻게 다른 방법이 생각이 안 나네요."
"그렇군요."
희주는 허락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천후는 진심으로 미안했다. 이걸로 다섯이나 같이 살게 되었으니, 그녀가 신경 쓸 일이 더 늘어버린 셈이다. 하지만 이번 일은 정말 방법이 없었다. 라즈베리나 강호처럼 엔체스터 호텔에 따로 살게 할 수도 없으니 말이다.
그 마음을 읽은 걸까? 희주는 천후의 손을 잡아왔다.
"괜찮습니다. 주인님과 너무 닮았기 때문이지요?"
천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가 오지랖이 있는 성격이긴 했지만…. 이그네스는 천후에게 조금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그네스는 말하자면 천후의 또 다른 모습. 결과나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이성이 완전히 통제되지 않았다면.
미연을 만나지 못했다면.
최완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래서 날뛰었다면 자신에게 취해졌을 조치를 그대로 받은 모습.
대체 봉인 안에서 얼마나 오랜 시간을 보냈을지 알 수가 없었다. 간신히 거기에서 벗어났더니 자신에 대한 모든 기억을 잃어버리고, 무언가로 억누르지 않으면 도저히 사람처럼 살 수 없는 몸이 되어버리다니.
그 사정을 알아버린 이상 도저히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의미 있는 일입니다. 그러니… 자책하지 마세요."
얼음 같은 얼굴에 그를 안심시켜주려는 듯, 한줄기 미소가 지어졌다. 그것이 너무나 눈부셔 천후는 감정이 북돋아 올랐다.
그는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그저 그녀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
그 뒤에 한 일은 역시 이그네스가 평상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장비를 만드는 것이었다.
"내가 있으니 괜찮은 것 아니냐?"
강호의 순진한 질문에 천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선배가 언제나 곁에 있을 수는 없는 문제니까."
강호는 강호 나름대로 스케쥴이 있는 사람이고, 거기에 이그네스가 모두 맞추기는 힘들었다.
게다가 그녀가 계속 특성을 발휘해야 한다면 일리미네이터로서 활동할 수 없어진다는 점도 컸다. 그녀는 DS에서 천후 다음 가는 최고 핵심 전력이었다.
대부분 초자연적 능력인 디제스터의 광역패턴을 특성발휘를 통해 파훼할 수 있는 시점에서 이미 대체재가 없다. 물론 검이 아니라 권법이나 그런 초고수 중에는 그녀와 같은 진리구현자가 있긴 하겠지만, 그녀만큼 컨트롤이 좋을 리도 없었고, 그들은 디제스터 레이드에서 탱커로 활약할 수도 없었다.
그런 그녀를 이그네스 전담마크로만 사용하는 것은 낭비라고밖에 할 수가 없었다.
"음… 그런데 과연 그런 걸 만들 수가 있을까?"
강호의 물음에 천후 역시 같이 신음성을 냈다.
억눌리지 않은 상태에서 이그네스의 체온은 정확하게 106도. 물 붓고 냄비를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라면 물을 끓일 수 있을 지경이었다. 이걸 외부와 완전히 차단한단 게 가능할지 의문이었다.
"일단 가장 그럴싸한 건 리미터를 쓰는 거고, 그게 안 되면 기술력으로 어떻게든 해봐야죠."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도 시험해보는 겸, 천후는 유그드라실에 리미터를 신청했다. 그리고 그 신청에 따라.
"후우…."
최완이 내려왔다.
"뭐 이런 일로 다 내려와요."
"하아. 이 새끼야……."
시가 연기로 브레스를 뿜어낸 최완은 리미터를 던져주면서 구시렁댔다.
"아. 빌어먹을. 결국 이런 일이 생기네."
"왜요? 지부장들이 아저씨보고 쪼아보래요?"
"알긴 아냐?"
"그래 봐야 제 방침 안 바꿀 겁니다."
"아니까 내가 지금 시가나 피우고 있잖아. 아. 짜증 난다, 진짜."
사장실의 소파에 털썩 앉은 최완은 희주에게 상식을 배우고 있는 이그네스를 힐끗 바라보았다.
"재야?"
"네."
“흠…….”
그녀를 바라보는 최완의 표정이 몇 번이나 변했다. 그 모습 자체가 정보가 되었다.
‘알고 있었군. 그녀의 존재를.’
최완 자체는 강력한 마법사. 천후가 아는 선에서 가장 강력한, 아마 SA랭크가 아니면 아무도 당해내지 못할 최강의 마법사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존재였지만, 인간으로서의 그는 그렇게 완벽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유그드라실이 숨기고 있는 모든 진실에 접근해있는 것 같았지만, 그것을 숨기는 재주까지 타고나진 않았다.
‘그러니 금제가 걸려있겠지.’
표정을 보면 조금이나마 짐작해낼 수가 있었다. 곡해하고 유도한다면 그에게 상당히 많은 정보를 뽑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양아버지만 아니었다면 천후는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극단적인 생각을 가라앉힌 천후는 진지하게 이그네스를 바라보고 있는 최완에게 물었다.
“뭐 해줄 조언 없어요?”
“글쎄….”
입으로 몇 번이나 말을 고르던 최완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잠깐 손 좀 줘봐라.”
“…….”
흠칫. 수염이 잔뜩 난 아저씨가 자기 이야기 한다 싶더니 가까이 오기까지 하자, 이그네스는 몸을 움츠리며 희주에게 기댔다.
“괜찮습니다. …수염이 저래도 무서운 사람이 아닙니다.”
“아, 알고 있다! 수염이 무서운 게 아니다!”
얼굴을 확 붉히고 그렇게 외친 이그네스는 그에게 손을 휙 하고 뻗었다. 최완은 그 손을 잡고서 잠시 눈을 감았다.
“흠…!”
나지막한 기합음. 순간 분명 이강호의 특성이 발휘되고 있음에도 그의 몸에서 흩어져 나온 희미한 오오라가 이그네스의 손을 타고 그녀의 몸을 감쌌다.
“아!”
놀란 이그네스가 손을 빼려 했지만, 최완은 그 손을 꾹 잡았다. 곧 완전히 그녀의 몸을 둘러싼 오오라는 그 형태를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그 위에 둘러쳐져 있는 상태였는데, 시간이 지나자 갑자기 형태가 급격히 변하여 불꽃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거기까지 확인한 최완은 그제야 그 손을 놔주었다. 그는 다시금 소파에 몸을 묻으며 말했다.
“나도 억눌린 상태라 그렇게 확실하진 않다만, 일단 마력동화가 전혀 제어되고 있는 상태가 아니야. 지금 저건 날뛰던 힘을 한차례 크게 뽑아낸 덕분에 안정된 것처럼 보이는 것뿐이지.”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당분간은 그 표준 리미터로 어떻게 되겠지만, 전용 리미터를 의뢰하는 게 나을 거야. 하지만 S랭크용 리미터. 그것도 저렇게 힘이 항시 발휘되는 상태를 막는 리미터는 유그드라실에서도 만들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 잘 될지 어떨진 모르겠군.”
“랭크에 따라서 제작 난이도도 바뀌는 거예요?”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냐. 리미터는 엄밀하게 따지자면 일종의 마도병장. 마도구야. 더 강하거나 비슷한 등급의 마법으로 술사의 힘을 흩어내는 거지. 그래서 범용 리미터는 B랭크까지 밖에 못 막아. 지금은 힘을 완전히 발휘하고 있는 게 아니니 임시방편으로 삼을 순 있겠지만, 아마 오래 못 버틸 거다.”
“그런….”
최완의 말대로라면 이그네스용 리미터는 아예 제작자 자체가 한정된다는 소리다. SA나 S랭크 마법사밖에 만들 수 없다면 정말 힘들 것이다.
“그리고 당분간 마력측정을 하겠다느니 헛짓거리하지 말고. 지금 당장도 자연적으로 마력이 열로 변환되고 있는 판에 마법을 대놓고 사용하면 규모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갑자기 이성을 상실할 수도 있다.”
“그야 저도 그럴 생각이었어요. 절대 일리미네이터 일을 시키거나 할 생각은 없어요. 다만 선배의 특성 없이도 일상생활은 해야 하니까, 그렇게 할 수 있게끔 해주려고 했죠.”
“그래. 그럼 리미터가 좀 더 나을 거야. 진리구현자의 특성에 마법사가 너무 오래 억눌리는 것 자체도 좋지는 않아.”
“끙…. 알았어요. 그럼 좀 돌아와서. 지금 제가 전용 리미터 제작 의뢰를 하면 유그드라실이 받아줄 것 같아요?”
“그건 좀 의견이 갈리겠지. 일단 시간이 필요할 거다. 그녀의 신병을 너에게 맡겨도 될지를 가지고도 말이 갈리니까. 이번에 네가 보인 태도 문제도 도마에 오를 테고.”
그 소리에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느낀 천후는 이를 갈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땐 최악의 경우를 가정할 수밖에 없겠군요. 일단 일반 리미터나 좀 여러 개 가져다주세요.”
“그 정도는 내 선에서 처리해주지. DS 일리미네이터 총원이 50명이 좀 넘었지? 일단 그 정도로. 대금은 확실히 치러라.”
“그러죠.”
원래 리미터도 지상에 쉽게 푸는 물품이 아니었지만, 이 경우엔 이유만 만들면 발급할 수 있었다. 유그드라실 쪽에서도 용도를 짐작하면서도 눈감아줄 터였다. 돈은 벌어야 하니까.
할 말이 다 끝났다고 생각한 걸까. 최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다시 올라가마.”
“네. 안 나갑니다.”
“그래.”
잠시 희주와 이그네스에게 고개를 돌려 눈인사를 한 최완은 그대로 문 쪽으로 향했다. 그렇게 사장실을 나서기 바로 직전.
“아버지. 전…. 저 같은 사람이 더 나오는 건…. 절대 받아들이지 못해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터져 나오려는 감정을 극한까지 억누르고 억누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말에, 최완은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서서 답했다.
“알고 있다.”
덜컹. 사무실 문이 열렸다 닫혔다.
*
DS 본사 건물에서 빠져나온 최완은 다시금 시가를 입에 물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벌어진 입에선 탄식이 흘러나왔다.
“씨발…. 중간에 끼어서 아주 좆 같구만.”
정말 좆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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