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마음의 안식은 우정에서>
최완에게 받은 리미터를 착용한 이그네스는 이강호의 도움이 없이도 체온이 크게 떨어졌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라면 이 리미터가 언제까지 버틸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거니, 항상 여분의 리미터를 소지하고 다닐 필요가 있었다.
"꽤나 불편하구나."
팔찌형 리미터를 찬 이그네스는 약간 칭얼거리는 소리를 냈지만, 조치를 받아들였다. 끼지 않으면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이름은 이그네스로 그냥 계속 불러도 되겠어?"
"그래. 굳이 다른 이름을 떠올릴 필요는 없겠지."
유그드라실이 붙인 임시 명칭을 이름으로 부른 것은 그녀가 본명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과 당시의 편의성 때문이었지만, 그 뒤에도 그녀는 그리 개의치 않았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별로 대부분의 일에 관심을 내비치지 않았다. 차를 타거나 비행기를 타면서 마주치는 현대문물들에 놀라움은 표시했지만 거기까지.
어린아이의 몸은 하고 있지만, 실제론 훨씬 나이가 든 사람처럼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모든 것을 넘기고 있었다.
문득 천후는 그녀의 사정에 대해서만 신경 썼을 뿐, 그녀의 취향이나 성격 등에 대해선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반 사건들을 처리하느라 그녀 자신에게는 큰 관심을 둬 주지 못했다. 어쨌건 그녀의 신병을 맡게 된 처지인 이상 더는 방치해둘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사무실에서 다소곳이 앉아 차를 마시는 이그네스에게 말을 걸었다.
"이그네스. 어떻게 생활엔 많이 익숙해졌어?"
"흥. 익숙해지고 뭐고는 없다. 모든 것이 생소하니. 하지만 그대의 아내가 살갑게 굴어주는 것은 좋구나."
"큼. 크흠. 아. 아직 결혼하진 않았어."
"음? 그런 게냐? 동거하고 있는 것 같았다만."
단박에 말문이 턱하고 막힌 천후는 뭐라 말해야 할지 정리하지 못했다. 그동안 이그네스는 고개를 한 차례 갸웃했다. 긴 적발이 옆으로 흘러내리며 깜빡거리는 걸 보면, 이 아이가 원래는 어른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정도였다.
잠시 시선을 빼앗겨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던 천후는 그러다가 답했다.
"음. 곧 결혼하려고."
"그러냐? 잘 모르겠구나. 나라가 다르니.“
오늘날 영국에선 동거, 즉 사실혼 관계가 흔한 편이었지만, 그녀의 머릿속에선 결혼이란 개념이 당연하게 자리잡혀있는 것 같았다.
"흠흠. 하여간. 기억은 여전히 아무것도 안 나?"
"그리 금방 돌아올 것 같진 않구나. 그저…. 꽤 긴 시간 동안 잠을 잤었던 것 같다. 그게 얼마나 길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보는 것마다 모두 신기한 것은 그 때문이겠지."
그녀 역시 자신이 현대를 살아가던 사람이 아님을 무의식적으로 자각하고 있었다. 그 위화감이 그녀를 힘들게 했다.
자신을 받아들여 준 사람이 있는 건 기쁘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은 현실에서 괴리된, 붕 뜬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이 당연히 여기는 대화를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고, 그녀의 이해가 닿는 것은 거의 없었으니까.
"내가…. 지금 이러고 있어도 괜찮은지 잘 모르겠구나. 이 몸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염 마인이다. 그대가 나에게 동질감을 느끼어 나를 거두려고 한 건 알겠지만…."
그녀의 가늘고 고운 눈썹이 살짝 누그러졌다. 그다음 말은 능히 짐작이 갔다.
이그네스는 자신이 위험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리미터가 있다고 하나, 그녀의 힘은 언제 폭주할지 모르는 위험한 것이었다.
현실 세계와의 거리감과 자신의 존재에 대한 회의감이 뒤섞여 그녀를 약하게 만들었다. 그것이 안타까워 천후는 그녀의 머리 위에 손을 가져갔다.
톡. 작은 머리에 손이 닿은 순간 이그네스는 어깨를 튕기며 천후를 올려보았다. 그는 가볍게 웃으며 결을 따라 손을 움직였다.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것을 몇 번인가 받아낸 이그네스는 그의 손을 떼어내게 하고는 눈썹을 세웠다.
"손버릇이 나쁘구나. 레이디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대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엑? 아. 미, 미안해."
이브나 에바나, 다른 여자들이나. 딱히 접촉을 싫어하진 않았기에 익숙해져 버렸지만, 사실 그녀의 말이 정론이다.
'그러고 보니 애가 아니었지.'
그녀의 본질은 알고 있지만, 겉보기엔 10살 전후의 어린아이였고, 천후는 그것에 구애받을 수밖에 없었다. 당황한 천후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화 풀어. 사탕 줄까?"
"먹을 걸로 사람의 화가 풀릴 거라 생각하는 건 너무 일차원적이구나."
"으음."
지당한 말입니다요. 막대사탕의 막대를 빙글빙글 돌린 천후는 무안해져서는 그걸 다시 집어넣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 슬쩍 사탕을 바라보던 이그네스가 슥 하고 손을 내밀었다.
"…뭐 그대 나름의 성의일 테니, 이 정도로 넘어가도록 할까."
못 이기는 척하는 말에 아주 희미하게 탐욕이 섞여 있었다. 육체에 영향을 받는 것은 주변 사람들뿐만은 아닌 듯했다. 천후는 얼른 그녀에게 사탕을 넘겼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부루퉁해져서는 말했다.
"까서 줘야 할 게 아니냐."
"아아. 말을 하지."
"일일이 말하게 할 셈이냐?"
"하하."
이 브랜드는 막대에 감겨있는 비닐의 끝이 굉장히 단단히 마무리되어있어서, 그녀는 포장을 쉽게 벗기지 못했다. 이전에도 그랬던 걸 도와줬던 적이 있었는데, 그 뒤로도 쭉 그랬던 모양이었다.
껍질을 벗겨 그녀에게 넘겨준 천후는 이그네스가 작은 입을 벌려 얌하고 그것을 입에 넣는 것을 보고 가만히 지켜보았다.
요즘은 이 나이 먹은 꼬마 아가씨를 지켜보는 게 낙이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크윽…. 분함다. 뭐하는 존입니까, 저긴. 도저히 파고들 구석이 없지 말입니다."
사장실의 다른 방에서 슬쩍 문만 열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라즈베리는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
이그네스를 영국에서 데려온 이후부터 천후의 관심은 완전히 이그네스에게 올인 되었다. 아무래도 이런저런 문제가 많다 보니 당연하다면 당연했지만, 불만 품는 사람도 나오기 마련.
"언니. 싸부가 너무 하십니다. 사무실에서도 계속 붙어있구."
"그런가요? 당분간은 당연한 것 같습니다만."
라즈베리는 일단 발동만 하면 완벽한 브레이크인 희주를 포섭하려고 했지만, 그녀는 라즈베리 때도 그랬던 것처럼 이그네스의 존재를 처음 데려온 그 순간부터 용인하고 있었다.
"주인님께서 완전히 자의로 행동하시는 것은 매우 긍정적인 일입니다."
"으…."
오히려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기뻐하고 있었다. 천후는 여전히 자기욕망이 적은 편이었다. 그런 그가 자신과 유사성을 띤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람을 데려왔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큰 변화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으. 눈부셔. 당신은 나에게 너무 눈부신 존재."
"?"
도저히 이렇게까진 생각 못 하겠다. 희주의 설득을 포기한 라즈베리는 결국 다른 사람들을 포섭하려 했지만….
"응? 뭐…. 애 하나 정도 늘어난 걸로 뭐라고 할 게 있어?"
"귀여워서 좋다만."
"친란 님은 지금 회의 중이십니다. 용건이 있으시다면 저에게 말씀해주시겠습니까?"
그의 주변 사람들 모두 그리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심지어 친란은 아예 전화도 그의 수행원이 받을 지경이었다.
"안됩니다. 위기감이라곤 없습니다."
어떻게 이런 태도를 보일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싸부의 애정을 독식하고 있는 저 빨강 머리 꼬맹이가 부럽지도 않단 말인가!
"크윽. 싸부와 닮은 크림슨 폼까지 가지고 있는 여자를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단 말입니까?"
라즈베리는 부러웠다. 격렬하게 부러웠다.
지금 이그네스에게 보내지고 있는 천후의 관심과 배려는 얼마 전까지 그녀가 받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이그네스에게 넘어가자 그 박탈감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현재 라즈베리의 감정은 말하자면 막 태어난 아기를 애지중지하는 걸 보고서야 부모의 관심을 이제부턴 동생에게 전부 빼앗길 거라 자각한 언니의 감정과 같은 것이었다.
라즈베리가 포섭하려 했던 사람들은 이미 그 감정에서 벗어난 성인들이었고, 그에게 따로 '사랑'을 받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런 게 아니었기에 더욱 그 감정이 컸다.
그렇게 라즈베리가 손톱만 물어뜯고 있을 때였다.
"라즈베리여."
"도움이 필요한가?"
"핫!? 이 목소리는?"
장난기 묻어있는 연극 투의 목소리에 라즈베리는 과하게 놀란 척을 하며 돌아보았다.
"힘이 필요한가?"
"그렇다면… 주겠다!"
"오오!"
그곳에는 득의양양한 미소를 짓고 있는 백발의 두 아이가 있었다.
*
"쟤가 이번에 같이 살게 된 애예요?"
"와. 머리카락 되게 빨갛다."
이그네스가 처음 왔을 때. 이브와 에바는 그녀를 호기심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집안에 사람이 늘어가곤 있었지만, 또래가 들어온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특히 그녀의 머리카락엔 관심이 갔는데, 빨강 머리 앤에서 볼 수 있는 그런 주황색에 가까운 빨강이 아니라 이런 진홍빛 머리카락은 드문 정도가 아니라 사실 자연적으로 나타나는 적발 중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본인들도 머리카락으로 고생한 과거가 있는 만큼 그걸로 어쩔 생각은 없었지만, '신기하다'가 '말 걸어보고 싶다'가 되는 것은 아주 당연한 과정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음. 당분간은 어른들하고만 같이 다녀야 해."
"응? 왜?"
"우리도 친해지고 싶어요! 같이 사는데!"
아직 리미터를 받기 전. 잠조차 이강호와 같은 방에서 자던 때. 이그네스가 아직 혼란스러워하는 시기 동안 천후는 아이들과 접촉하는 것을 차단했다.
천후 본인조차 그녀의 외형 때문에 힘들어하는데 아이들은 더 그럴 게 뻔했기 때문이다. 결국 천후는 사정이 있어서 그런다고 둘러댔고, 아이들은 못마땅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녀가 집으로 들어온 지도 며칠. 그동안 천후의 양태를 지켜본 결과 이브와 에바가 내린 결론은 이랬다.
"완전히 싸고돌아!"
"왜 쟤만 예뻐해? 나빴어!"
만나지도 못하게 하면서 막상 자기는 칭얼대는 걸 전부 들어주고 있는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자 아이들은 골이 났다.
온종일 옆에서 끼고 다니면서 놔주질 않는 모습을 보니 당연히 이렇게 생각할만했다.
희주나 어른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같은 아이인 이들에게는 상당한 박탈감으로 다가온 것이다.
여자들이 이그네스의 사정을 듣고서 잘 대해준 것도 그렇게 생각하게끔 한 이유 중 하나였다.
그리하여.
"이브. 에바. 둘이 아군이 되니 천마만마와 같지 말입니다."
"천군만마 아니야?"
"쉿. 라즈베리 언니 아직 한국어 잘 못 해."
한 달도 안 되어 이 정도면 대단한 수준이었지만, 한국에서 몇 년이나 사는 동안 오히려 노르웨이 어를 거의 잊어버릴 정도가 된 이브와 에바 수준에는 한참 못 미쳤다. 라즈베리는 그 소리를 빤히 듣고서도 부끄럽지도 않은지 당당히 다시 훔쳐보고 있었다.
라즈베리가 둘의 잠 깨우기 및 통학 담당을 한 지도 몇 주. 셋은 꽤 친해졌고 이렇게 박탈감 동맹을 열게 되었다.
"근데 그래서 어쩌게? 오빠한테 막 뭐라고 하게?"
"아니. 싸부한테 어찌 그럽니까?"
"우린 그러는데? 히히."
"큭…. 저도 동생 포지션으로 갈 걸 그랬습니다. 하여간 그러진 못하고. 일단 타겟과 접촉해보지 말입니다."
"어떻게? 계속 데리고 다니는데."
"음. 그건…."
이브의 질문에 라즈베리는 할 말이 궁해졌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어딜 가든 대동하거나 사람을 붙여놓거나 하니 접근하기 힘들었다.
"조, 좀 더 생각해보지 말입니다."
"뭐~야. 암 생각도 안 했었어?"
"라즈베리 언니 못 쓰겠네."
"크윽. 소인의 부족함이 부끄럽소이다."
라즈베리는 부끄러움에 몸 둘 바를 몰라했다. 바로 그때였다.
"아. 레이나드 형님. 전력분석실에서 회의요? 네. 가죠. 이그네스. 잠시 여기 있어. 잠깐 기다리면 셀레나가 올 테니 걱정하지 말고."
"흥. 사람을 뭐로 보는 거냐? 굳이 사람을 부를 필요 없다. 제 자리에 앉아있는 걸론 무슨 일이 나거나 하지 않는다."
"그렇긴 하지만…. 하여튼 다녀올게. 아래층으로 내려오지 말고 있어."
꽤 중요한 회의인지라 천후는 그녀를 사장실에 남겨주고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그네스는 작은 숨을 내쉬었다.
"후우. 저렇게까지 할 필욘 없거늘."
걱정된다는 건 알지만, 그녀는 진짜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여분의 리미터도 있는 이상 갑자기 사고를 칠 일도 없거늘. 이그네스는 씁쓸히 웃다가 사장실을 돌아보았다.
안쪽에는 주방부터 침실까지 마련되어있는 이상한 곳이었다. 사실상 집에 가까운 구조. 정문으로 통하는 이 중앙 거실만이 유일하게 집무실의 느낌이 났다.
다른 사물들은 다 익숙했지만, 역시 저 벽면의 'TV'라는 것은 익숙하지 않았다. 아니, 알긴 하지만 자신이 알던 것과 영 다르다고 해야 할까?
지루해지면 저것을 켜서 보면 된다. 하지만 이그네스는 그 전에 신경 쓰이는 것을 처리하자고 생각했다.
그녀의 얼굴이 정확히 살짝 열려있는 방문 쪽으로 향했다.
"그래서. 언제까지 지켜보고 있을 게냐? 할 말이 있다면 얼른 나오너라."
"히끅!"
순간 이그네스의 홍안에 마주친 이브가 딸꾹질을 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다른 둘 역시 놀랐는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하지만 곧 오기가 돋은 셋은 서로를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 안에서 튀어나와 그녀의 앞에 서며 외쳤다.
"제, 제법이군! 그래. 우리가 너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DS 블랙! 라즈베리!"
"DS 핑크!"
"DS 옐로!"
"셋이 모여 DS 가디언즈! 이방인이여! 너의 이름을 밝혀라!"
쨔쟝. 순식간에 (자기들 딴엔) 멋들어진 포즈를 취하며 나타난 셋을 본 이그네스는 자기도 모르게 벙 쪄서는 한참이 지나서야 손으로 눈을 몇 번이고 비볐다.
안 바뀐다. 여전히 포즈를 유지하고 있었다. 심지어 왼쪽의 에바는 한쪽 다리를 들고 있는데, 시간이 지나자 힘든지 달달 떨리는 게 애처롭다.
이그네스는 해탈한 표정으로 생각했다.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모르겠다.'
에바의 학다리가 안쓰럽게 땅으로 떨어졌다.
============================ 작품 후기 ============================
범인은 라즈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