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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드하렘-176화 (176/324)

176화

한차례 몰려오는 두통에 미간을 꾹꾹 눌러본 이그네스는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그래. 무슨 일이냐?"

대체 뭐시기 가디언즈인지, 저 포즈는 또 뭔지 잘 모르겠지만 용건이 있겠거니 생각한 이그네스가 그렇게 묻자, 막상 별생각 없었던 라즈베리들이 당황했다.

"어. 그게-"

"언니, 뭐 따지려는 거 아니었어?"

"아니 그런 건 아니지 말입니다. 그냥 뭐하는 앤지 궁금했지 말입니다."

글러 먹은 리더의 반응에 한숨을 내쉰 에바는 포즈를 풀고는 물었다.

"야."

"……."

단박에 이그네스의 눈썹이 날카로워졌다. 버릇없는 꼬맹이였다. 사람에게 다짜고짜 반말이라니. 하지만 그 순간, 이그네스는 자기 외형이 어떤지를 떠올려보았다.

거울로 확인한 그녀의 생김새는 영락없이 앞에 있는 아이와 비슷한 연령의 여자아이였다. 나이 차이가 있어봐야 한두 살일까?

"…뭐냐?"

상당히 불쾌했지만, 반말을 쓸 만도 하다고 생각한 이그네스는 인상을 찌푸리고서 되물었다. 그러자 히히 하고 웃은 이브와 에바는 가까이 다가왔다.

"너 몇 살이야?"

"어디서 왔어?"

"으음…."

그다지 악의 섞인 반응은 아니었지만, 너무 전형적인 아이들의 접촉 방식이라 이그네스는 당황했다. 그렇다고 기껏 다가온 아이들을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이그네스는 힘들게 말을 꺼냈다.

"영국에서 왔다. 나이는…. 잘 모르겠지만 스물은 넘었겠지."

"음?"

"스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신가 하며 갸웃거리는 모습이 조금 귀엽다. 하지만 그걸 넋 놓고 바라볼 때가 아니란 걸 깨달은 이그네스는 여기서 한 번 더 자세히 설명하려고 했다.

바로 그때.

"호호오. 과연. 그런 설정인 거군요."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라즈베리가 턱을 괴고는 씨익 하고 웃었다.

"좋습니다. 제 소개를 하죠. 제 이름은 라즈베리 미키스트리. 고대에 나타난 악의 부족 '가룽가'와 싸우다가, 그 수장과 함께 봉인되었다가 깨어난 전사입니다. 나이는 후우. 기억하기 어렵군요."

"뭐?"

지금 이게 무슨 소리야? 가룽가가 뭐? 이그네스는 당황해서 작은 입을 딱 벌렸지만, 다른 둘은 '아하'하고 뭔가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나는 라즈베리가 쓰는 변신 팔찌를 만든 고대의 기술자야. 같이 부활했어."

"난 부활한 라즈베리를 옆에서 돕는 경찰관이야. 아. 남자다?"

"자, 잠깐. 무슨 소릴 하는 거냐? 남이 기껏 진지한 이야기를 꺼냈거늘. 난 정말로 어른-"

"알아. 그런 설정이지?"

"사람 말을 듣거라!"

착 하고 셋이 동시에 엄지를 치켜드는 걸 보고 이그네스는 소리를 빽 질렀지만, 그들은 들을 생각도 없는지 웃고 있었다.

이그네스는 뭔가 크게 잘못 돌아가고 있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

잠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 때는 한 달 전. 라즈베리가 막 천후의 집에 입성했을 무렵.

이브, 에바와 같은 2층에서 생활하는 데다가, 당분간 둘의 뒤치다꺼리 담당이 된 라즈베리는 둘과 어떻게 하면 더 친하게 지낼 수 있을지 생각해보았다.

"후후. 방법이 있슴다."

자고로 어린 것들을 꼬시는 데는 맛있는 것과 신기한 것이 모든 걸 좌우하는 법. 라즈베리는 날마다 배송되어오는 블루레이 박스들을 쓰다듬으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재미있는 거 보여준다고?"

"진짜?"

그렇게 어느 하루. 라즈베리는 생글생글 웃으며 둘을 자기 방으로 초대했다. 둘의 방과는 달리 완전히 영상 감상에 특화된 방이었기에, 둘은 신기해했다.

"와. 딥다 크다, 이거. 언니 이거 뭐야?"

"스피컴다."

"스피커?"

에바가 아는 스피커라는 건 보통 PC에나 쓰는 작은 것들밖에 없었는데, 거의 그녀의 키만 한 것들이 대여섯 개가 방 안에 있는 것이 놀라웠다.

"후후. 좋은 무비 이즈 좋은 장비!"

"어. 응."

"대충 알아들었어. 그런데 뭐 보여주게?"

저 앞에서 블루레이 박스를 꺼내 뒤적거리는 걸 보니 뭔가 영상물을 보여주려는 것은 확실했다. 둘이 침대 위에서 뒹굴며 관심을 보이자, 라즈베리는 씨익 웃었다.

"좋은 검다."

그 말 직후, 화면에는 예쁘장한 여자아이가 변신해서 악과 싸워나가는 변신소녀 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에이. 뭐야."

"별루야."

주 대상은 6~10세 사이인 이 애니메이션은 둘이 보기엔 시시해 보였다.

처음에는.

그러나.

"언니! 다음 화!!"

"얼른! 빨랑!"

둘은 시간이 지날수록 거기에 빠져들어 갔다. 그뿐만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처음 변신소녀 물 뿐 아니라…. 점점 라즈베리가 좋아하는 쪽의 컨텐츠로 슬며시. 천천히. 시간을 들여서 둘을 물들여갔다.

바로 옆방 사는 언니가, 그것도 통학할 때마다 같이 다니는 언니가 이렇다 보니 둘은 쉽게 영향을 받아갔다. 브레이크도 없었다.

"셋이 생각보다 훨씬 잘 지내네. 다행이야."

천후는 2층에서 벌어지고 있는 세뇌 계획(?)에 대해서 전혀 모른 채 잘 지내는 셋을 보며 좋아했고, 희주 역시 개인 취향을 가지고 간섭하는 성격이 아니다 보니 실상을 알고 있으면서도 별말을 하지 않았다.

"너무 늦게 주무시진 마세요."

"네~."

늦게 자는 걸 걱정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리하여…. 한 달이 지난 지금.

이브와 에바는 완전히 라즈베리의 색으로 물들어버렸다.

"크큭. 계획대로."

동료(?)를 늘린 라즈베리는 양손을 꾹 움켜쥐었다는 뭐 그런 이야기.

*

"이그네스 컬러는 역시 레드지?"

"으음. 원래 레드는 리더의 컬러입니다만, 별수 없죠. 그래도 리더 자리는 블랙인 저인 걸로."

오고 가는 대화를 들은 이그네스는 다시금 이마를 짚었다. 분명 리미터를 차고 있는데 머리가 뜨거운 것 같은 건 왜일까?

"후우…. 그대들이 무슨 말을 하는진 알아들었다. 그러니까 그대들은 가상의 집단을 만들어 거기에 맞게끔 역할 연기를 하고 있단 게지?"

"응. 맞아."

"이그네스는 설정 구현에 엄청 충실하네."

"아니라니까! 설정이 아니란 말이다!"

이그네스는 울음이라도 터트리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처음 이후로 몇 번이나 사실대로 설명해주었지만, 아이들이 보기에는 현실적으로 들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아."

답답했지만 한편으론 그럴 만도 하단 생각도 들었다. 어느 날 갑자기 아빠나 오빠가 또래 여자애를 데려오더니 얘가 사실은 어른인데 지금 사정이 있어 애가 되어있단 소리를 들으면 무슨 생각이 들까?

1. 아빠 술 마셨어?

2. 아빠 거짓말도 정도껏 쳐.

믿어준단 선택지가 나올 수가 없었다. 그나마 1번이 안 나온 게 다행이지.

한숨을 푹 내쉰 이그네스는 생각을 바꿨다.

"언제까지고 이럴 수도 없으니. 내 쪽에서 맞추는 게 맞겠구나."

"응?"

"아니다. 너희 말이 맞단 소리다. 다 설정이고, 연기가 맞느니라."

"응. 아는데?"

"후우우우."

이그네스는 자기 입장이 천후나 어른들 외에는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란 걸 이 아이들의 반응으로 확실하게 깨달아버렸다.

이 상황이 얼마나 이어질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이대로 평생 아이로 살거나, 이대로 점점 성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 미지수에 언제까지고 기대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그네스는 현실을 받아들였다.

언제까지고 자신을 받아줄 수 있는 사람들하고만 접촉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 너머와 접촉하려면, 그들이 받아들이고 싶은 자신을 연기하는 게 맞으리라.

“그래서. 네가 이브. 네가 에바. 이쪽이 라즈베리인 거군."

둘은 외모만으로 쉽게 구분이 안 되었지만, 장신구나 옷가지에 구별할 수 있는 부분들을 일부러 넣어놓은 것이 눈에 띄었다. 이그네스는 곧 그것을 구분할 수 있었다.

"맞아."

"근데 맨날 오빠랑 뭐해? 둘이 있으면 심심하지 않아?"

폴짝폴짝하고 양쪽에 앉아 물어오는 것을 보고 이그네스는 흠칫하고 몸을 떨었다. 자기도 모르게 사람이 다가오자 긴장한 것이다.

"그렇게… 심심하진 않구나. 여기엔 책도 있고."

"에이. 공부만 하면 지루하잖아."

"……."

사실 이그네스는 집는 책마다 모르는 것들이 더 많아 오히려 즐거웠다. 하지만 아이들이 보기엔 답답해 보였던 모양이었다.

그녀의 적색 속눈썹이 살짝 누그러지며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신기하게도, 이들과 대화하고 있자니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확실히 천후와 둘이 있을 땐 마음은 편했지만, 한편으론 너무 감싸고 돈다는 생각도 하곤 했다.

'아아. 그렇군.'

순간 이그네스는 자신이 다른 이들과의 접촉을 바라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자신의 작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팔목의 리미터가 없으면 사람을 만지지도 못하는 자신.

하지만 그럼에도 타인을 갈구한다.

혼자는. 너무 외롭다.

좀 더 많은 사람과 가까이하고 싶단 욕망이 그녀의 가슴엔 언제나 들이차 있었다.

막상. 닿으면 불타버릴까 봐 두려워하면서….

이그네스는 이 감정이 지금 현재가 아니라, 아주 오래전.

아마도 자신의 기억이 온전하던 시절부터 주욱 가져왔던 감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사무칠 리가 없었다.

이렇게….

조막만한 아이들이 옆자리에 있단 사실만으로도 기쁠 수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일까.

이그네스가 그들에게 물었다.

"그럼 다른 즐길 거리가 있나?"

마음을 놓고. 어리게. 어리게. 최대한 어리게. 막 다가온 이 아이들이 맞춰서. 그것이 무엇이든지 받아들일 수 있게끔 하고서.

그 말에 셋은 눈을 깜빡거리다 웃으며 말했다.

"그럼! 엄청 많지!"

"그치, 라즈베리 언니?"

"물론입니다. 후후. 저만 믿으시지 말입니다. 어디 싸부 사무실에 블루레이가…. 있군요."

씨익. 다시 한 번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은 라즈베리는 사무실 서랍 구석이 숨겨두었던 비장의 블루레이 디스크를 꺼내서 집어넣었다.

"아마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어째 걱정되는걸.'

이그네스는 아주 잠깐. 자신의 변덕을 후회했다.

*

그리하여 얼마 뒤.

"아. 이그네스, 미안해. 일이 좀 많아서."

수석비서란 명칭과는 달리 온갖 잡일을 뒤처리하는 역할인 셀레나는 약간 피로한 기색으로 사장실에 들어섰다.

이그네스를 돌봐달란 이야기를 들은 지 시간이 조금 지나 급하게 올라온 지라 그녀는 약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바로 그때.

"사람의 마음은 보석."

"결코 깨트리게 놔두지 않는다!"

"우리 DS 가디언즈가!"

"……."

촷. 촤촷. 셀레나의 앞에서 네 명이 각자의 멘트에 맞춰 마무리 포즈를 쨔쟝하고 취했다. 폼만 보자면 등 뒤에서 폭발정돈 일어나도 될 지경이다.

"…뭐하니?"

"히끅."

셀레나의 멍한 물음에 그녀가 들어온 줄도 모르고 같이 포즈를 취해주던 이그네스는 딸꾹질을 하다가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몸 전체에 빨간색밖에 안 남았을 정도다. 하지만 다른 셋은 태연한 얼굴로 그녀를 맞이했다.

"아. 언니 오셨어요?"

"방금 같이 전대물 봤어요."

그 말에 셀레나는 슬쩍 TV 화면 쪽에 고개를 돌렸다. 보아하니 라즈베리가 쌓아둔 컬렉션 중 하나를 풀었다고 짐작할 수 있었다.

"재미있었나 보네…."

"아, 아니다! 아이들에게 맞춰주다 보니! 전혀 내가 재미있었던 건 아니라!"

"응. 알아."

생긋. 언니는 모든 것을 알아요하는 얼굴에 이그네스는 살짝 눈물을 글썽이다가 소파에 뛰어들었다. 이런 꼴을 보이게 될 줄이야!

'으! 생각보다 재미있었던 바람에 나도 모르게!'

사람의 정신이란 육신의 영향을 받는 법이고…. 옆에서 어린애들이 같이 놀자고 부추기자 자기도 모르게 흥이 나서 같이 따라 한 결과가 아주 강력하게 돌아왔다. 이그네스는 울고 싶어졌다.

한편, 그 모습을 훈훈하게 바라보던 셀레나는 그러다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런데 보던 건 너희 구호랑 좀 다른데? 뭐야? 그 DS 가디언즈란 건?"

"그건 제가 만든 전대물이지 말입니다. 제가 싸부 흉내를 내서 블랙으로 리더. 다른 사람들은 다 다른 컬러입니다."

"흐음? ….호오."

그 소리에 잠깐 골똘히 생각하던 셀레나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라즈베리? 그거 좀 자세히 들려줄래?"

"오오."

관심을 둬 주자 신이 난 라즈베리는 셀레나를 앉혀놓고 장황하게 떠들어댔다. 셀레나는 그 말을 들으며 중요한 포인트만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악몽은 그렇게 시작되어가는 것이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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