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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드하렘-177화 (177/324)

177화

DS의 활동은 기본적으로 천후의 결정에 의해서 명령이 아래쪽으로 하달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작은 일들. 파급의 경우에는 보고 형식으로 짧게 천후에게 올라가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천후와 전력분석팀의 의향에 따라 대상을 잡을지 아니면 그만둘지를 결정함으로써 굴러간다는 소리다.

그러다보니 아래에서 위로 서류가 올라오는 경우는 결과보고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훈련 기계를 만드는 곳도 '이런 걸 만들어보고 싶다' 같은 건의는 거의 없는 식이었다. 그나마 급식 업소들이나 좀 그런 게 있을까?

그런 와중. 이례적으로 천후의 책상에는 낯선 서류가 올라왔다. 셀레나가 가져온 일종의 기획서였다.

"음? 이건 뭐야?"

천후는 사장으로서 최종 결재까지 올라온 서류는 일단 전부 확인했다. 그걸 전부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럴 땐 희주나 셀레나, 친란 등의 도움을 받아서 파악하곤 했다. 고등교육까지 밖에-그것도 개인교습이라 상당히 부실한- 받지 못한 그에게는 그것만으로도 큰 공부가 되었다.

이번에 올라온 기획서도 신기해하며 들춰봤는데, 천후의 사정을 알고 있는 셀레나가 작성한 문서치고 상당히 이해가 난해해서 한눈에 파악하기 어려웠다. 캐릭터가 어쩌구 하며 쓰여 있는데, 뭐라는지 잘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물어보자, 셀레나는 베시시 웃으며 말했다

"전에 말했잖아. 디제스터 퇴치업 말고도 추가적인 부수입을 얻을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고."

"아아. 그러고 보니 그런 말을 전에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일단은 가볍게 관련 상품을 제작해서 판매해보려고 해."

"관련 상품? 어떤 건데?"

흥미를 보이자 잠시 어깨를 움찔한 셀레나는 그러다 다시 웃는 얼굴로 돌아왔다.

"응? 아니 왜, 있잖아. 엠블렘 같은 거 말이지."

"아아. 그런 게 돈이 되나?"

천후는 신기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럼 그렇게 해."

"응? 괜찮아?"

"소소하게나마 부수입이 생기면 좋지. 나라고 이 일 평생 할 거 아니니까. 너무 나 하나에 의존한 구조로 만들어놓으면 나중에 내려놨을 때 피해가 크잖아."

안소니 크라우저가 말한 것처럼 쉬는 것도 권리. 천후 역시 60, 70 넘어서까지 괴물과 쌈박질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디제스터는 끊임없이 나타날 터였고, 그때의 DS는 천후가 없더라도 모든 것에 대응할 수 있어야 했다.

금전적으로도 말이다.

"뭐 네가 나한테 손해인 일을 하진 않겠지. 해봐, 한 번."

"크윽!"

가볍게 웃는 모습에 셀레나는 잠시 고개를 휙 돌려 시선을 피했다.

'야, 양심에 가책이!'

찌릿찌릿 아픈 심장을 간신히 진정시킨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럼 바로 진행해?"

"응. 아아. 도장 찍어야지."

역시 주변에 사람은 두고 볼 일이다. 천후는 그렇게 생각하며 선선히 도장을 찍었다.

그러나. 천후는 보지 못했다.

도장을 찍느라 고개를 숙인 그 순간, 셀레나가 지어보인 사악한 웃음을….

*

"이그네스, 놀자!"

"이그네스 숙제 가르쳐줘."

"이그네스 요리 배워, 요리. 선생님 대단해!"

"이그네스 같이 만화 보자."

쨍알쨍알. 매시간 옆으로 와서 쨍알거리는 소리에 이그네스는 미간을 꾹꾹 누르며 소리쳤다.

"아아. 정말이지 시끄럽구나! 왜 이리 적극적인 게냐!"

"꺄!"

"화났다! 도망쳐!"

그녀가 소리치자 쨍알거리던 아이들은 2층으로 쪼르르 달려 올라갔다. 그 모습을 보고서 이그네스는 인상을 쓰면서 천후에게 말했다.

"크으윽! 너도 좀 뭐라고 하거라!"

"응? 아니 뭐. 뭐라고 할 것까지야."

"너어!"

얼마 전. 라즈베리들과 그녀가 의외로 잘 노는 걸 봤단 소리를 들은 천후는 그 뒤 잠시 그녀를 방치해 놓고 몰래 훔쳐봤었다.

"이그네스. 이건 감자칩이란 거야."

"흥. 사람을 뭐로 보는 게냐. 그 정돈 알고 있다. 그 동안 몇 번이나 먹어봤으니."

"는 뻥! 사실은 질소칩이었습니다!"

"아니?! 세상에. 상도덕이 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게냐?"

과자봉지의 30%는 채울까 싶은 용량에 자기도 모르게 경악성을 낸 이그네스는 그 뒤 셋과 같이 TV를 시청하면서 품평을 해댔다.

"…진짜 의외로 잘 지내네."

문틈으로 그걸 지켜보던 천후는 조금 놀랐다. 이브, 에바와 다르게 이그네스는 눈에 보이는 나이가 아니다. 그녀 본인도 그걸 자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쉽게 잘 지내는 건 힘들겠다 여겼다. 하지만 정말 의외로 잘 지냈다. 툴툴거리면서도 말이다.

어디까지나 이그네스가 어른스럽게 맞춰주는 거지만, 그녀 역시 결국 자신의 외모에 구애받았고, 애 같은 행동이 종종 나오곤 했다.

다른 셋에겐 그것만으로 충분했던 모양이었다.

그 뒤로 천후는 그녀에게 함부로 다가오지 말라는 금지령을 풀어버렸고,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여자아이들이 방정맞게 뛰어다니면 뭐라고 해야 할 게 아니냐?"

"아이고 조상님 오셨습니까."

"윽!"

퍽퍽. 눈썹을 날카롭게 세운 이그네스는 그녀의 팔뚝을 몇 대 (자기 딴엔) 세게 때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도저히 의지가 안 되는구나! 오냐, 알겠다. 알아서 해결하마. 내 오늘은 저것들과 결판을 보리라!"

"응? 어쩌려고."

그 물음에 이그네스는 작은 양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저것들을 내 수준으로 끌어올릴 순 없으니, 내가 같은 수준으로 내려가는 수밖에."

독한 맘으로 말한 이그네스는 계단 중간에 서서 히히 웃고 있는 둘에게 달려갔다.

"네 이 녀석들!"

"와! 잡으러 온다!"

"꺄!"

쿵쾅쿵쾅. 순식간에 집안이 시끄러워지며 위층에서 꺄꺄 대는 비명이 들렸다.

"애구만."

저런 것에 어울려서 같은 수준으로 어울려주는 시점에서 이미 애란 걸 티 내는 거지만 현재의 그녀에겐 자각이 없는 듯했다.

"지금까진 별문제가 없군요."

"아아. 네."

희주가 다가와 하는 소리에 천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기하단 말이죠. 목소리만 들으면 이제 완전 그냥 한국인이에요."

"그렇더군요."

한국에 도착한 이그네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영어 말투를 그대로 가져온 한국어를 구사하기 시작했다.

깜짝 놀라 어떻게 했느냐고 물으니, 그녀 자신에겐 자각이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러고 있었다는 수준이었다. 그렇다고 영어를 못하게 된 것도 아니었다.

"잘된 일입니다. 아이들과도 잘 지내고 있으니…. 아직까진 리미터도 버티고 있습니다."

"네. 하지만 아저씨 연락은 기다려봐야죠."

이그네스 전용 리미터 제작 의뢰에 대한 대답은 아직도 묵묵부답이었다. 이그네스를 넘겨주지 않은 여파가 크게 작용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다행인 것은 그 외의 다른 조치는 여전히 동일하다는 것이다. 큐브 엘리베이터도, 위성 지원도 똑같이 받고 있었다. 사실 이제 와서 천후와 완전히 인연을 끊기엔 금전적인 손해가 너무 클 테니 당연했다.

잠시 거실에서 침묵이 돌았다. 유그드라실 관련 이야기가 나오면 종종 이렇게 되곤 했다. 그때. 희주가 차가운 손을 양어깨에 올렸다.

천후는 그 중 오른손 위에 자신의 손을 덮었다. 이런 마음 씀씀이가 너무 고마웠으니까.

*

2층으로 뛰어 올라간 이그네스는 한참이나 술래잡기를 하다가 결국 지쳐서 침대 위에 드러누워 버렸다. 다른 둘 역시 헥헥 거리며 그녀의 옆으로 다가와 같이 누웠다.

"어딜 옆에 눕는 게냐."

"왜애~."

"안 돼?"

"…허락은 맡으라는 게다."

저렇게 물어보면 당연히 안 된단 말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 이 천연덕스러운 아이들에게 거칠게 구는 것은 이그네스에겐 쉽지 않은 일이었다.

폭 하고 작은 한숨을 내쉰 이그네스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어쩌다 이런 어린 것들과 같이 놀고 있는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원랜 이래선 안 되거늘. 하지만… 어리석게도.

그리 나쁘진 않은 기분이었다.

그것이 어처구니없어, 이그네스의 입가엔 살짝 미소가 맺혔다.

그때였다.

사락. 침대에 흩어 퍼진 머리카락 중 한 올에 무언가가 닿는 느낌이 났다. 이불이 아닌, 사람의 손길.

흠칫하고 놀란 이그네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머리칼을 만졌던 이브는 같이 놀라서 움찔했다.

"어. 어어."

"뭘 하는 게냐?"

날카롭게 물은 이그네스는 그러나 곧 후회했다. 눈앞에 있는 아이는 정말로 미안해하며 주눅이 들어있었다.

"미안해. 그냥 조금 신기해서. 말 안 해서 미안."

"……."

이그네스의 입술이 몇 번인가 꿈틀거렸다. 눈동자 속 적안은 불꽃처럼 일렁였다. 이그네스는 손으로 자신의 머리칼을 바라보았다.

멜라닌 색소의 영향력을 완전히 벗어난 완벽한 적발. 이것은 자연적으로 볼 수 있는 머리색이 아니었다. 신기해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지 말라니까, 이브. 머리카락 신기하다고 만지는 거 너도 싫어하잖아."

"응."

예전의 기억을 떠올린 이브는 고개를 푹 숙였다.

가슴이 아팠다.

이그네스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작은 손.

그 손의 바로 위 팔목에는 하나의 팔찌가 채워져 있다. 은제의 아무 장식 없는 팔찌. 리미터.

뜨거운 자신의 몸을 보통 사람처럼 만들어주는 장치. 이것이 있는 한 그녀의 몸은 보통사람보다 아주 약간 뜨거울 뿐이었다.

그래.

닿아도. 타지 않는다.

"……."

부르르. 손이 떨렸다. 뇌리에선 몇 번이나 번민이 오고 갔다. 하지만….

어찌 극복 못 할쏘냐.

이그네스는 이브의 손을 잡아 자신의 머리카락에 가져왔다.

"흥. 이깟 머리카락이 뭐 어쨌단 거냐? 간지러워서 놀랐을 뿐이다."

최대한 태연함을 가장하여 말해봤다. 그러나.

쿵. 쿵.

울리는 심장 소리가 귓가를 시끄럽게 하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평소에도 약간 붉은 그녀의 피부 덕에, 부끄러워하는 기색은 잘 보이지 않았으니까.

"오…."

그녀의 말에 둘의 안색은 밝아졌다. 둘은 기쁘게 웃으며 그녀의 머리카락뿐 아니라 얼굴이나 몸도 만져대기 시작했다.

"이 녀석들. 뭐하는 거냐?"

"에헤헤."

"괜찮아. 이제 괜찮아. 우리도 이럴 때 있었는걸."

뭔가를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이그네스는 다른 말을 하지 않고 접촉을 받아들였다. 솔직히 아주 귀찮았지만. 중요하다고 말하는 마음의 소리를 외면할 수 없었다.

"이그네스. 머리 모양 바꿔봐도 돼?"

"…믿어도 되는 게냐?"

"엣헴. 맡겨만 둬."

흥 하고 콧김을 내뿜은 둘은 그녀를 화장대 앞에 앉히고는 뒤에 붙어서 꼬물꼬물 머리를 만져대기 시작했다.

"와. 신기해. 막 무슨 물 같아."

"완전히 구부려도 다시 펴져."

…들려오는 대화가 엄청나게 불안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녀는 기다렸다. 그렇게 조금 시간이 지나.

"손재주는 있는 편이구나."

거울을 본 이그네스는 놀라서 그렇게 말했다. 원래 길게 내린 머리의 아주 일부만 땋아서 포인트를 준 다음 그 위쪽에 작은 나비 리본이 달린 머리핀을 장식해두었다. 매일 하자면 굉장히 피곤한 스타일의 머리였다.

"어때. 맘에 들어?"

이그네스는 순순히 답했다.

"응. 고맙다."

"히히."

이브는 해맑게 웃으며 브이 사인을 그렸다. 그때 즈음. 한창 시끄럽던 2층이 조용해지자 슬슬 올라와 본 천후가 이그네스를 보고 탄성을 내질렀다.

"오. 이게 웬 미녀야?"

"…흥. 입에 침도 안 바르는구나."

"아니. 어울리는데. 누구 작품이야?"

"이브야."

"오. 굿."

쓱 엄지를 세워 준 천후는 그러다 뭔가를 깨닫고 이그네스를 다시 바라보았다. 이렇게 보니 앉아있는 이그네스를 두고 셋이 딱 붙어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았다.

어느 쪽이 노력한 걸까. 천후는 잠깐 그렇게 생각했지만, 곧 머릿속에 가져다 두었던 저울을 치워버렸다.

'분명 양쪽 다겠지.'

미소 지은 천후가 물었다.

"셋이 많이 친해졌구나?"

그 말에 이브와 에바가 이그네스에게 좀 더 딱 달라붙었다.

"응. 우리 완전 친해."

"이그네스 착해."

토닥토닥. 머리 위를 만지는 둘의 손길에 이그네스는 쌍심지를 세웠다.

"윽! 머리카락을 만지랬지 머리를 두드리라곤 안 했다. 버릇없구나!"

"꺄! 화났다!"

우당탕. 단박에 다시 한 번 이번엔 침대 위에서 투닥투닥 전쟁이 일어났다.

"…정말 애구만."

그 모습을 천후는 문 옆에 몸을 기대고 웃으며 바라보았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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