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아쉬울 게 없는 인간>
영국에서 이그네스 사태가 정리된 지도 얼마간이 지났다. 그동안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
먼저 180억 달러로 결정 났었던 퇴치금 중 1/4에 해당하는 45억 달러를 '영국 정부와의 공조'를 통해 영국에 재투자하기로 했다.
"으…. 이렇게까지 상대에게만 유리한 조건을 그냥 수용하다니. 으으."
이그네스의 신병을 넘기는 조건으로 영국에서 보내온 요구사항 확인한 셀레나나 친란이 불만을 표시했다. 발까지 구를 정도였다. 하지만 천후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건 필요했어. 어차피 공돈이었으니까 아까워하지 마. 돈을 그렇게 대하라고 한 건 친란 당신이었잖아."
"그렇긴 하다만. 으음."
친란 역시 상당히 개방적인 사고로 기업 경영을 했지만 막상 눈앞에서 이런 일이 닥치자 초조함을 숨기지 못했다.
"그리고 추가로 내 이름으로 웨스트민스터 사원 재건과 DS 이름을 딴 거리 조성이었지?"
"그래. 영국 건설사에서 시공하기로 했지."
지면이 완전히 죽어버려 그 위에는 아무것도 자라나지 못할 땅이 되어버렸지만, 그 위를 흙으로 한 겹 더 덮어버리고 평탄화시켜 블록을 깔고 건물을 세우는 건 가능한 일이다.
천후는 환수금 외에도 이 건설 자금을 따로 DS의 이름으로 투입했고, 영국 총리와 엘리제 3세를 옆에 모시고 그것을 공표했다.
그걸로 국내에서 막대한 자금을 퍼간다는 여론을 크게 잠재울 수 있었다.
사실 영국 일리미네이터 사이에선 위기감이 대단했지만, 직접적인 피해를 보지 않은 영국 국민들은 이그네스가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100km 밖까지 피신했었던 런던 시민들까지도 그랬다.
그것을 무마할 필요가 있었다. 돈이 좀 들더라도 말이다.
"다행히 유그드라실이 협조적으로 나와줘서 다행이군. 어쩔 수 없겠지만."
"유그드라실이 저렇게 언플하는 건 오랜만이긴 하네."
천후의 사주를 받았던 영국 정부는 유그드라실을 연일 비난했고, 이걸 마법으로 찍어누를 순 없다고 생각한 유그드라실은 다른 식의 포장을 시도했다.
이그네스는 사실 사람이었다. 저건 던전이 아니었다. 라는 것을 밝혔다간 유그드라실의 책임론은 걷잡을 수 없을 테니, 그들은 천후가 레이드 종료 후 이그네스를 안은 채 던전을 깨부수고 나오는 영상 등을 전혀 공개하지 않고 대신 이렇게 나오고 있었다.
'이그네스는 대단히 강력한 멸급 디제스터였다!'
'지금까지 등장했던 10체의 멸급 디제스터 중 가장 강력한 개체였다!'
'DS공격대는 대단히 어려운 레이드를 해낸 것이다!'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분명했다. DS, 영천후를 향한 일종의 화해 제스처. 알겠으니 그만 좀 찌르라는 애걸이었다.
그들은 역사의 전면에 이름이 언급되는 것을 극도로 꺼렸고, 자신들의 순수성을 의심받는 것을 병적으로 기피했다.
그것은 천후의 눈엔 반대로 그만큼 암약하고 있고, 그만큼 순수하지 못한 짓을 하고 있다는 반증 같아 보였지만…. 당장은 심증에 불과할 뿐.
"전용 리미터 건이 해결되기 전까지는 지속해야지."
최완이 넘겨준 일반 리미터는 일주일이 지나자 더는 이그네스에게서 방출되는 마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박살 나버렸다. 여분의 리미터를 항상 소지하고 있었기에 금세 갈아 끼우긴 했지만, 이그네스는 그걸로 많이 침울해졌다.
일주일에 하나씩 50개니까 50주. 대략 1년 가까이 버틸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만족할 순 없었다.
"일단 유그드라실 쪽은 답변을 기다려봐야지."
"그럴 수밖에. 그런데 퇴치금의 일부는 서부 재건에 좀 더 투입하겠다고?"
"응. 5조쯤 더 들어가면 될까. 영국에 부은 만큼은 들어가야겠지, 아마."
당장 인천에 마련되고 있는 뉴타운에 부어진 자금 이상이었지만, 서해안 전역이 피해를 보았으니 얼마가 들어가도 부족한 감이 있었다.
"좋다. 다만 이 정도 공사면 아무래도 엔체스터만으론 무리군. 입찰에만 같이 참가해서 겁을 줄 테니 국내 건설사들을 쓰는 게 어떤가?"
"그게 나을까?"
"이전에 한 번 빼앗겨 보았으니 정신을 차렸을 테지. 아쉬울 게 없는 인간에게 배짱부려봐야 좋을 게 없다는 것 정도는 깨달았을 게야. 감사를 자주 하면 새는 돈도 최소화할 수 있겠지."
"그럼 그쪽은 그렇게 하고…. 희주 씨. 정부에서 항의 전화가 왔었다고요?"
"네. 영국 사태 때 너무 정부와 상의가 없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뭐래."
그 말을 들은 천후, 셀레나, 친란은 나란히 이마를 짚고 힘겨운 한숨을 내쉬었다.
"이그네스 레이드 결정 날 때까지 일주일이나 있었잖아요. 그동안 뭐했다고 나한테 이러죠?"
"글쎄요."
살짝 고개를 갸웃함에 따라서 흑발이 물처럼 흘러내렸다. 그녀치곤 꽤 큰 제스처였다.
"아, 짜증 나네…. 안 그래도 패트릭이 전화할 때마다 미국으로 오라고 계속 꼬시는데 진짜 그냥 나가버릴까. 이놈의 나라."
짜증나 죽겠다. 천후는 이를 갈았다.
그라고 대한민국 정부를 무시할 생각은 없었다. 이번 이그네스 사태는 그 사건 전개가 빠르긴 했지만, 정부가 의견을 정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가 그 짧은 시간 동안 온갖 진상 조건을 다 가져다 붙이지 않았는가? 시간은 있었다.
"이번에 영국에서 그래서 뭐 받았는데 저래?"
이그네스가 막 뛰쳐나오기 전이라면 어지간한 조건은 영국 측에선 다 수용했을 터였다. 하지만 그때. 셀레나가 되려 물었다.
"아…. 모르는구나?"
"응?"
"사태 다 끝나고 갔었다더라고."
"……."
"너 이그네스 데리고 한국 온 다음에."
"아무것도 못 받아왔겠네?"
"당연하지?"
"우와…."
몰려오는 갑갑함에 천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이런 걸 일주일 만에 딱 정하기 힘든 건 이해를 하지만, 그럼 아예 미국이나 일본처럼 처음부터 세게 불러서 저쪽이 어디까지 내놓을지라도 들어보던가.
아니면 적극적으로 천후와 연락을 취해서 시간을 끌어달라고 하던가.
둘 중 하나도 안 해놓고서 책임을 그에게 물을 줄이야.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상하다. 분명 해명진 대통령님 전화번호는 따놨었는데."
상황이 상황인 만큼 정식절차가 아니라 구두로 상황만 전파했더라도 천후는 어느 정도 응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말엔 희주가 답했다.
"지금의 그분에겐…. 주도권이 없습니다."
"네?"
"의견을 자신이 끌고서 밀어붙일 수 있는 힘이 그분에겐 없습니다. 임기 마지막까지 마찬가지일 겁니다. 뭣보다… 너무 익숙해져 있습니다. 힘이 없는 것에."
"……."
여당에서 아이콘으로서 내세운 대통령. 그것이 해명진 대통령의 실체였다. 임기가 몇 개월 남지 않은 지금 시점에선 천후가 밀어준다 해도 큰 의미를 가지기 힘들 터였다.
"그럼 이걸 어떻게 대응해야 하죠. 당황스럽네, 이건."
뭣보다 짜증 나는 건 '앞으로도 이럴 수 있다'는 점이다. 그때마다 이런 안건이 올라오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였다.
천후가 짜증을 내비치자, 친란은 깔깔 웃으며 말했다.
"하하. 원래 처음엔 다들 실수를 하는 법이지. 이건 지나치게 미숙하긴 하지만. 문제는 결국 메뉴얼의 부재이니 사례가 쌓이면 자연스럽게 나아질 거다. 그걸 좀 더 빨리 어떻게 하고 싶다면 정치권에서 자네의 사람들을 만들어둬야겠지."
"그런 건 싫은데…."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이상 어쩔 수 없는 굴레지. 자네에게 바라는 게 있는 이상 어쩔 수 없는 굴레. 자네가 직접 정치권에 뛰어들 게 아니라면, 자네가 원하는 바를 대신 부르짖을 인간이 필요한 법. 이것조차 싫다면 뭐 저쪽 동남아 섬이라도 하나 사서 왕 노릇을 하는 수밖에."
"…직접 뛰는 건 정말 싫으니까 대리인을 구해봐야겠군. 사실 해명진 대통령님이 어느 정돈 해줄 줄 알았는데."
"개인의 인간성만 보면 괜찮은 사람이지만, 정치적 영향력은 원래부터 없었던 사람이라 무리다. 실제 그대의 지원을 업고도 꼭두각시 노릇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안쓰러울 뿐이지."
해명진에게 뚜렷한 실행의도만 있었다면 분명 천후의 이름을 등에 업고서 이번 거래는 주도적으로 진행할 수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다루는 인형사의 실이 헐거워진 사이에도 걸어볼 시도를 하지 않았다.
"아쉽네. 기대했었는데…."
천후는 해명진 대통령이 자신이 마법사라고 밝혔던 그 날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그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의 힘은 그 스스로 말했던 대로 쇠해있었다.
"뭐 이쪽은 이쯤 해두고, 징징거리는 소리를 막는 방법은 간단하네."
"응?"
"뭐. 정말 간단한 일이지."
친란은 빙긋이 웃었다.
*
대한민국의 디제스터 관리청은 디제스터 등장부터 퇴치뿐 아니라, 퇴치 이후 디제스터의 사체를 치우는 등의 일까지 담당하는 부서였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퇴치금에 관련된 일이었고, 정부의 예산으로 편성한 퇴치 예비금에서 지급하는 식이었기에 그 인원수나 규모에 비해서 다루는 돈은 상당히 큰 편이었다.
그 외에 마법사가 무단으로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게 규제하는 일도 한다지만, 그건 마법사 개인의 인내심에 너무나 의존한 일이라 사실상 의미가 없었고, 이들도 그냥 딱지만 달고 있는 셈이었다.
그러다 올해 들어 디제스터 관리청엔 한 가지 일이 더 늘었다. DS가 설립되면서 그들을 전담 마크하는 팀이 생겨난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메인 퀘스트를 전부 처리하는 데다, 텔레포테이션 규제가 풀려 순식간에 현장으로 이동하는 만큼 당연했다.
그들과 함께 행동하기 위해 전담팀은 DS 본사 한편에 머무는 것을 허락받아 주야를 가리지 않고 교대근무를 하고 있었다. 해당 사무실에는 DS에게 퇴치업무를 의뢰하는 과정을 밟기 위한 국군 영관 장교도 함께하고 있었다.
"으아… 여긴 천국이야."
그들은 DS에서 지내는 것에 만족하고 있었다. 밥도 어지간한 식당 뺨치게 잘 나오고, 음료도 과자도 안마기 사용료도 모두 무료. 냉, 난방 빵빵하고 일 생기면 텔레포트로 같이 이동하니 힘들게 운전 안 해도 되니 이만큼 편한 곳도 드물었다.
일의 특수성상 주야교대 근무를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문제긴 했지만, 그건 본청도 다를 게 없었다. 되려 아예 본청에서 떨어진 이곳은 반쯤 독립 기관화 한만큼 위에서 쫄 사람도 적고, 옆으로 치일 일이 없으니 스트레스받을 일도 없었다.
하지만 오늘만은 그들을 기겁하게 만드는 말들이 오가고 있었다.
"이번에 DS 본사를 미국에 두기로 했다며?"
"한국을 지사로 두고 본사를 미국에서 운영하겠다지?"
"음. 아예 나가버릴 수도 있겠네?"
"그때 되면 따라가도 되냐고 물어봐야겠다."
"쿠헙!"
키위 에이드를 빨면서 쉬고 있던 관리청 직원은 그대로 사레가 들어 켈록 거렸다.
"크, 큰일 났다."
얼마 전 위에서 내려왔던 책임을 묻는 공문을 전달했던 게 그들이었다. 애초부터 조금 불안하다 생각했지만, 이런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니.
그녀는 바로 사무실로 달려들어 가 본청에 이 사실을 전했다. 단박에 본청이 뒤집혔다. 이 소식은 단박에 장관급 회의를 불렀다.
"이, 이걸 어쩐답니까?"
"그는 결코 애국심이 강한 인물이 아닙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 떠나도 이상하지 않아요."
텔레포테이션 허가는 그 개인에게 떨어진 것. 마음만 먹으면 대한민국을 버리고 떠나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디제스터 출현 건수도 떨어지는 대한민국에 계속 머무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손해니까.
"출국금지를 걸 수도 없을 겁니다. 그가 미국에 가겠다는 타전만 해도 미국은 동시 국적을 인정하고 자국민을 보호하겠다고 주장해올 겁니다."
영국 땐 한차례 놓치긴 했지만 그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옆에 붙어있기만 해도 일 년에 한 번씩 부가수익을 받아먹을 수 있는.
게다가 한국에 돈을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풀고 있었다. 아무리 서해안 지방이 피해를 보았다지만, 총액 6조 이상을 부어버렸다. 하지만 그가 미국으로 떠나면 다시 이걸 계속 받을 수 있을지는?
"이, 일단 자세한 의향을 물어보는 게 어떻겠소? 그런 이야기가 돈다는 것만으로 판단을 내리긴 힘드오."
합당한 발언에 DS로 본사 이전 여부를 묻는 공문이 전해졌다. 그 답은 금세 돌아왔다.
'긍정적으로 검토 중. 다만 아직 확실한 이전 의사는 없음.'
정부인사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한편으론 이것이 무슨 뜻인지 확실히 깨달았다.
귀찮게 하지 마라.
잡을 수 없는 사람을 잡을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마라.
주고 있을 때 잘해라. 사람 마음 수틀리게 하지 마라.
그들은 아쉬울 게 없는 인간이 무서움을 이제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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