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하렘-179화 (179/324)

179화

<일본 사태>

"에츙!"

"으익! 디러! 빨리 닦아."

"흠흠."

단풍이 피다 못해 지는 계절이 왔다. 꽤 추워져서일까? 이브는 옷 위에 겉옷을 껴입고 있는데도 재채기를 했다. 보기 싫게 대롱하고 콧물이 내려오자 에바는 기겁하며 휴지를 건네줬다.

"괜찮습니까? 건강 해치면 큰일이지 말입니다."

DS에 정식으로 입사한 이후에도 둘의 통학을 봐주고 있던 라즈베리는 걱정스레 물었다. 과거 사계절을 자랑하던 대한민국은 오늘날에 와선 봄, 가을이 없어진 것 같았다. 얼마 전까진 더워서 반팔을 입고 다녔는데, 요 며칠 사이에 갑자기 쌀쌀해져 이제 그냥 돌아다니면 추웠다.

"그냥 한번 나온 거야. 괜찮아."

"그리고 난로에 기대면 돼."

"누가 난로냐!"

바락 하고 소리 지른 건 이그네스였다. 그녀는 양쪽에서 팔짱을 껴오는 둘을 차마 밀쳐내지 못하고 인상만 찡그리고 있었다.

그녀 역시 라즈베리처럼 통학 길에 함께 해달라는 말을 들었다. 탐탁지 않으면서도 식객 신분으로 그 정도는 해야 한다는 자격지심에 응낙했지만, 그녀의 취급은 라즈베리와는 조금 달랐다.

라즈베리가 '의자는 안되지만 그래도 언니~'라면 이그네스는 '잘난 척하는 친구' 정도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아주 완벽하게 눈에 보이는 대로 생각하고 있다.

"으아! 짜증 난다! 붙지 말아라!"

"에이, 그러지 마."

"이그네스는 따뜻하단 말야."

덕분에 이렇게. 둘에게는 통학 길에 사용하는 인간 난로로 활약하고 있었다. 그녀의 체온은 리미터로 억누르고 있는데도 보통 사람보다 높아서, 이렇게 붙어있으면 금방 후끈후끈해졌다.

"후우. 정말이지."

귀찮은 꼬맹이들이로고. 이그네스는 혀를 차며 라즈베리를 올려보았다. 이것들 좀 어떻게 해보라는 묵언의 시위였다. 하지만 라즈베리는 태연하게 셋이 그러고 있는 걸 폰카로 찍을 뿐이었다.

"앗! 무슨 짓을 하는 게냐!"

"음? 보기 좋지 말입니다. 이런 것도 다 자료화면이 됩니다."

"무슨 자료 화면이냐!"

바락 악을 쓴 이그네스가 핸드폰을 탈취하려고 폴짝폴짝 뛰었지만, 라즈베리는 훙후훙~하고 이상한 콧소리를 내면서 그것을 피해냈다.

요 얼마간 세간 상식을 배우며 저 스마트 폰이라는 물건으로 못 하는 게 없다는 걸 알게 된 이그네스는 강렬한 경계심을 내비쳤다.

"웹에 올리면 진짜로 화낼 게다."

"……. 안 함다, 그런 짓."

"왜 대답이 한 박자 늦는 게냐! 네, 네 사부에게 일러바칠 테다!"

"에에~. 치사함다. 고자질쟁이~."

"으으으윽!"

슬슬 이그네스가 진심으로 화가 나려 할 때 즈음. 둘이 다니는 초등학교 정문에 다 도착했다.

"오. 다 왔다."

"그럼 우리 들어갈게. 이따 봐."

샥 하고 손을 흔들며 교실을 향해 달려가는 걸 끝까지 바라본 라즈베리와 이그네스는 도로 몸을 돌렸다.

"아~. 이 시간에 일어나는 거 힘듬다. 그래도 아침 공기는 꽤 쐴만하지 말입니다."

"네 녀석이 너무 늦게까지 잠을 안 자서 그렇게 느껴지는 것뿐이다. 아침 공기래 봐야 그냥 공기지."

"오우. 새 나라의 어린이다운 의견입니다. 하지만 그건 새벽 시간을 낭비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새벽에 하는 거라곤 만화 보는 거 말곤 없잖느냐."

리미터를 받은 이후, 이그네스는 강호의 방에서 나와 2층에 남은 마지막 방을 차지했다. 거기까진 좋았지만, 덕택에 이그네스는 라즈베리의 진면목을 알 수 있었다.

답도 없는 재패니메이션 오타쿠. 그리고….

"대체… 그래. 네가 보여주는 만화들은 재미있다만, 그것들을 보느라 생활 리듬을 부술 필요가 있느냐? 너 대체 하루에 몇 시간을 자고 있는 게냐?"

"엄-."

라즈베리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보통 그녀는 4시나 5시에 잠들고, 그러면서 아침엔 이브와 에바의 통학을 도와주고, 천후의 수련을 따라 하겠답시고 어울렸다. 일리미네이터 일도 해야 하니 DS 본사에도 매일 같이 출근하고 있었고, 거기서도 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불면증을 앓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심각한.

"네 녀석 그러다가 언젠가 쓰러질 게다. 다른 사람들 걱정시키지 말고 지금부터라도 개선해나가거라. 그리고 네 녀석. 못 자는 게 아니라 '안자는' 게지?"

"…으음."

이그네스의 지적에 라즈베리의 어깨가 움찔하고 떨렸다.

"예리함다. 과연 나이를 헛먹지 않았지 말입니다."

"시끄럽다."

이그네스와 라즈베리는 다소 미묘한 관계였다. 이브와 에바는 설명해줘도 믿지도 않았고, 이그네스도 곧 상황 설명을 포기해버렸지만 라즈베리는 달랐다.

애초에 이그네스 레이드 때 참가했던 라즈베리는 이그네스가 본래 성인이란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그녀를 어린애 취급하지 않았다.

물론 아이들과 어울릴 땐 도매금으로 묶어서 취급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그건 이그네스도 어느 정도 필요성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방도 옆방이고, 일정도 완전히 같다 보니 둘은 자연스럽게 대화가 늘었다.

"그렇게 신경 쓸 거 없슴다. 제가 이렇게 사는 게 몇 년째인데 갑자기 그럴 리가 없슴다."

"그럼 더 위험하지 않으냐? 정신 나간 소리 하지 말고 말을 들어라."

"이그네스는 무슨 엄마입니까? '라즈베리! 또 새벽까지 만화나 본 거니? 엄마가 일찍 일찍 자라고 했잖아!'"

목소리 톤을 약간 바꿔서 하는 말에 이그네스는 눈썹을 곧추세웠다. 정말 말을 안 들어 먹는 녀석이다. 그렇게 그녀가 화가 나서 한 번 크게 뭐라고 하려는 순간. 라즈베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런 이그네스는 학교에 다닐 생각 없는 겁니까?"

"…어느 학교 말이냐?"

라즈베리는 말 대신 슬쩍 허리째로 뒤로 젖히며 뒤로 한 번 턱짓했다. 이그네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린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 내가 다녀서 무엇을 하라고."

"하지만 생긴 것에 맞게 살려면 이것도 방법이지 말입니다. 지금 당신의 표면상 나이는 열 살입니다."

"……."

영국 정부에서 직접 위조해서 넘겨준 그녀의 호적상 나이가 그랬다. 이그네스는 입을 딱 다물었다.

라즈베리 역시 더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이그네스는 그녀가 왜 이 이야기를 굳이 지금 꺼냈는지 깨달았다.

서로가 언급하기 싫은 부분에 대해서 굳이 파고들지 말자는 것이다.

'그럼 그렇다고 말을 할 것이지. 성미가 나쁜 녀석이로군.'

알면 알수록, 표면으로 보이는 것과는 조금 다른 면모가 나왔다. 그것을 완전히 벗겨내면 도대체 무엇이 나올지, 이그네스로선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때였다.

"엇. 싸부다. 넵, 싸부. …네?"

폰에서 울리는 벨 소리를 듣고 화색을 띠었던 라즈베리의 안색이 한순간에 어두워졌다. 그녀의 만면, 행동에서 묻어나오던 밝은 분위기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딱딱하게 굳어버린 여자아이만이 남았다.

"네. 네. …알겠습니다. 일단 본사로 가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라즈베리는 얼어버린 그 얼굴 그대로 자신의 엄지손톱을 물어뜯었다. 처음엔 살짝 씹는 것에 불과하던 그것이 점점 격해지자 깜짝 놀란 이그네스가 그녀의 허리춤을 꽉 잡았다.

"정신 차려라!"

"…아! 음. 죄송합니다."

멍하니 그리 말한 라즈베리는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쉽게 보이는 모습이 아닌지라, 이그네스는 조심스레 물었다.

"무슨 일이냐?"

"별 일은 아닙니다. 다음 일거리가 들어왔을 뿐입니다. 거기에 같이 가자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어디길래 그러느냐?"

이그네스의 물음에 라즈베리는 괴로워하는 것처럼 눈매를 찡그리며 답했다.

"…일본."

*

올 한해. 두 건의 멸급 디제스터가 나타났고, 둘 다 '큰 피해 없이' 퇴치되었다…고.

대외적으론 그렇게 알려졌었다.

이그네스에 대한 정보는 DS, 영국 정부, 유그드라실만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리미네이터 커뮤니티에도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한해가 끝날 때까지 얼마 남지 않은 이 시점. 올해 내에 멸급 디제스터를 다시 보는 일은 없을 거라고 모두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믿고 싶어 했다.

"일본에서 멸급 디제스터 전조현상이 일어나고 있다고 해. 이미 한 달 가까이 동종의 디제스터만 계속해서 나타났다나봐."

"확실한 전조군."

1, 2주도 아니고 한 달 내내 지속되는 동일 종류 디제스터 출현은 확실히 멸급 디제스터의 전조였다.

이 소식에 아시아에는 긴장이 고조되었다.

사람들은…. 믿고 싶어 했다.

지금까지의 통계를. 전례를. 그것에서 벗어나는 일은 없을 거라고. 그것은 디제스터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멸급 디제스터가 나타나는 건 1년에 하나. 그런 대괴수가 몇 번이고 나올 리가 없다. 이그네스라는 전례에 없던 일이 일어났으니 올해는 이제 완전히 안전하다고.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 했다.

허나.

디제스터는 종잡을 수 없는 괴물. 사람이 제멋대로 믿고 있는 그런 데이터 따윈 아무런 가치조차 없다는 듯. 비웃듯이 나타나 버렸다.

"아직 전조 1단계. 멸급이 직접 나타난 상태는 아니고, 곧 2단계가 올 테니 경급 디제스터가 자주 나타나면 그때 도움을 받게 해달라는 딜이 왔어요."

천후는 일본 정부에서 온 공식 공문 사본을 팔랑거리면서 그렇게 말했다.

"어떻게 생각해요, 다들?"

"2단계부턴 가야지. 이미 정규 공격대는 다 수락한 것 같던데."

그렇게 말한 건 셀레나였다.

"멸급 자체를 잡아달란 게 아니라 전조와 웨이브 처리는 전통적으로 정규 공격대가 한몫 챙기던 시즌이었으니까. 이걸 놓치면 안 되지."

대한민국에선 R.D.C를 만들어 거기에서 전부 처리했지만, 사실 그런 경우는 흔치 않았다. 공격대에 휴식시간을 주기 위해 해외 정규 공격대들이 로테이션을 돌면서 퇴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나도 셀레나와 같은 의견이네. 특히 공격대원들에겐 가장 돈이 되는 시즌이니까."

"흐음."

둘의 말에 천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때. 한편에서 진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반대다. 굳이 일본을 도울 필요가 있나?"

그 말을 한 건 강호였다. 그녀는 생각을 숨기지 않는 사람답게, 한눈에 봐도 탐탁지 않아 하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요즘 그 나라에서 하는 소리가 뭔데 우리가 굳이 위험을 감수해줘야 하지? 싫다."

굉장히 불쾌한 기색이 가득했다. 그 말에 천후도 약간 탄성을 냈다.

"아. 하긴. 선배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꽤 많겠네."

DS가 대한민국에 존재하고, 그 구성원 모두가 한국인인 이상 강호의 의견에 동의하는 사람도 꽤 많을 터였다. 감정적인 의견이었지만, 사람이 감정적인 게 뭐가 이상한가?

최근 일본의 우경화 조짐은 심상치 않았고, 자위대가 아니라 보통 군대를 부활시키고자 하는 움직임을 구체화하고 있었다. 고노 담화 재해석 시도와 위안부 관련 발언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라도 듣는 그 순간 분노할만했다.

"굳이 가고자 한다면 이번엔 정부 의향에 맞춰주는 게 어떠냐?"

"그럴까."

이건 꽤 솔깃한 이야기였다. 정규공대 파견만으로도 정부 측에서 일본에게 뜯어내는 게 꽤 될 터였다. 그걸 적극적으로 밀어주면 국내의 지지는 훨씬 탄탄해지리라.

"웬일로 선배가 좀 괜찮은 소리를 하는 거 같은데."

"무슨 뜻이냐!"

발끈해서 버럭 하는 걸 무시한 천후는 다른 이들을 바라보았다. 희주, 셀레나, 친란 모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확실히 그냥 파견하면 괜히 귀찮은 이야기 나올 것 같네. 일본 관련으론 민감하니까. 국민 감정상."

"일반인의 의견이란 게 이럴 땐 확실히 도움이 되는군."

굳이 이미지에 금 갈 시도를 휙 하고 할 필요는 없다. 그 생각에 마지막으로 희주가 쐐기를 박았다.

"…시간을 주었을 때 정부가 어떻게 대처를 하는지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아. 그건 그렇죠."

이그네스 사태야 원체 급했으니 삽질했다 쳐도, 이번에는 멸급 등장까지 시간도 충분하다. 그걸 기반으로 현 정부의 교섭력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럼 그쪽으로 생각해보자. 가긴 가되, 정부 협상이 끝나면 가는 걸로."

DS 상주하는 디제스터 관리청 직원의 발에 다시 한 번 불이 떨어졌다.

============================ 작품 후기 ============================

10월 한 달 동안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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