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스노우볼링>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 그리고 DS와의 협상이 결렬 나자 방향을 선회했다. DS를 전조 단계 퇴치 의뢰 대상에서 제외하기로 한 것이다.
"어차피 진구지 하야토가 회복되면 비슷한 일이 또 일어날 테니 일을 키울 필욘 없을 겁니다."
"머니 크래프트와 컨퀘스터는 어차피 때가 되면 다시 협상을 해올 겁니다."
이제 전조 2단계 초기였다. 일본 정부는 마음이 급했지만, 이 둘은 어차피 저 상황이 닥치기 전까진 미리 협상할 필요가 없는 처지였다.
2단계 후기쯤 되었을 때 느긋하게 못 이기는 척, 그러면서도 DS의 건을 들먹이면서 뜯어낼 만큼 뜯어내면 그만인 입장들. 그것을 뻔히 알지만 일본 정부 입장에선 어울릴 수밖에 없었다.
"문젠 과연 그때까지 우리나라 일리미네이터가 버텨낼 수 있는가 하는 거요."
"2단계 초기 수준에선 충분할 겁니다."
'하쿠네', '카마이타치', '시라누이' 모두 퇴치 난도가 높은 디제스터였지만, 이미 한 차례씩은 퇴치한 전적이 있었다. 그 데이터를 기반으로 이미 대응 방법이 메뉴얼화되었다.
메뉴얼에 따라주기만 한다면 문제는 없다. 메뉴얼 하나는 기가 막히게 만드는 게 일본인만큼, 그들의 대응은 훌륭했다.
"애초에 외국의 도움을 받으려는 것 자체가 피로도를 염려해서지 그들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라이징 선이 그렇게 약하진 않습니다."
그 말에 유우베 고죠는 고개를 끄덕였다.
실로 그랬다. 지난 6년간 일본뿐 아니라 아시아 전역에서 활동한 공격대 라이징 선은 여전히 건재했다.
구 일본제국 재건의 꿈을 담아 붙인 이름을 가진 이 공격대는 비록 진구지 하야토가 부상으로 움직이지 못한다지만, 여전히 다수의 B랭크 일리미네이터로 구성되어있는 강력한 공격대였다.
"후. 협잡을 한다고 쉽게 타협하리라 여기는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줍시다."
전후가 바뀐 이야기였지만, 그들의 입장은 그랬다. 돈 밝히는 놈들 때문에 사정이 어려워졌다는 것이.
당장 일본 공항에서 있었던 칼부림도 기사에서는 최대한 조작되어있었다. 일본 국민들은 제대로 된 정보를 얻지 못하고 있었고, DS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 무지를 등에 업고서 그는 웃었다.
*
<아오모리 현내에 하쿠네 출현. 반경 2km의 던전이 펼쳐졌습니다.>
전조 단계가 확정됨에 따라 일본 정부는 유그드라실의 서포트를 받고 있었다. 미미르로부터 경급 디제스터 출현 보고를 받은 공격대의 임시 주인, 스즈키 아야메는 굳은 얼굴로 라이징 선 전원을 유그드라실로 소집했다.
"진구지 씨가 없는 최초의 레이드입니다. 최대한 주의하셔야 할 거예요."
공석을 임시로 라이징 선 외의 다른 회사 B랭크를 불러 25인을 채운 아야메가 처음 꺼낸 말은 이것이었다.
"하하. 너무 걱정이 크십니다."
"이미 패턴 파악이 끝나 있습니다. 위협적이긴 하지만 적이 되진 않습니다."
일본 일리미네이터들은 그 말에 다들 웃으며 그녀를 안심시켜주었다. 지금까지 잡은 하쿠네가 총 3체. 그동안 그들도 놀고먹은 것은 아닌지라, 상대하는 법을 슬슬 꿰고 있었다.
최종 패턴인 독기를 뿜어대는 문제는 어쩔 수 없다 쳐도, 그 외에는 그리 큰 문제가 될 리 없었다.
"스즈키 씨는 너무 소극적이에요."
"……."
이번 레이드의 공격대장을 맡기로 한 다나카가 그렇게 말하자 아야메는 고개를 숙였다. 막 강하하기 직전에 그들에게 할 말로는 확실히 어울리지 않았다.
"걱정 마십쇼. 진구지 씨가 쉬고 있어도 라이징 선이 건재하다는 걸 보여주자고요."
"그래야 외국 정규 공대도 더는 못 뻗대지."
그들 역시 머니 크래프트와 컨퀘스터의 이야기는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 일리미네이터가 전조 단계를 전부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아진다면 어떨까? 몸이 달아오르는 것은 반대가 될 것이다.
그때가면 다시 주도권은 이쪽으로 넘어오리라. DS에 관해서는 또 따로 이야기해야겠지만 말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다나카 씨. 지휘를 부탁할게요."
"맡겨만 주십쇼."
다나카는 지난 6년간 진구지를 보좌하며 죽 공격대장을 해온 남자였다. 그가 이렇게 장담하자 아야메도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그럼 공격대 강하!"
다나카의 외침과 동시에 큐브 엘리베이터가 떨어져 내렸다. 도착한 곳은 던전 경계 바로 앞이었다.
이미 세 차례 퇴치했던 디제스터인 만큼, 그들은 별도의 지시 없이 배틀 시그널을 전개하며 포지션을 잡았다. 던전은 그들의 신호에 응하여 외곽이 일렁거리며 그들을 받아들였다.
"하쿠네의 던전은 정말 언제 들어와도 으스스하군."
이곳은 아오모리 현 내에서도 번화가인 곳이었다. 하지만 던전이 펼쳐진 지 10분도 지나지 않았음에도 차량의 이동은 전혀 없었다.
집채보다 큰 괴물이 나타났으니 사람들은 당연히 혼비백산해서 쉘터로, 아니면 차량을 통해 던전 밖으로 나가려고 발버둥을 쳤어야 정상임에도…. 던전 경계 인근의 길가엔 사람이라곤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슬프게도 일리미네이터들은 그 광경을 보며 모든 민간인이 도망쳤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포인트로 이동합니다."
하쿠네의 위치는 이미 유그드라실의 서포트로 파악되고 있었다. 그들은 5인이 한 팀을 이뤄서 그곳으로 향했다.
"아아…."
건물과 건물 사이를 뛰어다니던 스즈키는 잠시 아래를 내려다보고는 정신이 아찔해졌다.
경계 부근에선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을 무리를 이루어, 무기력한 얼굴로 한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쿠네가 있는 곳으로.
던전 내에 있는 모든 사람이 스스로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 중에선 아주 간간이 정신력이 강해 멀쩡한 사람이 섞여 있어 사람들을 구해보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지만 모두 허사였다. 힘없이 팔을 늘어뜨린 이들은 외치고, 흔들고, 심지어 때려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스즈키 씨. 집중하세요."
"…네."
질끈 하고 입술을 깨문 스즈키는 그 모습에서 시선을 돌렸다. 던전에 들어온 일리미네이터는 고작 25명. 이 숫자로 수천, 수만의 시민 모두에게 정신 방벽을 거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들이 해야 할 일은 따로 있었다.
그렇게 달린 지 얼마나 되었을까? 희끄무레한 안개가 보이기 시작했다.
"하쿠네. 조우."
가장 앞을 달리던 팀에서 연락이 왔다. 당장에 비행마법 시전을 주문한 다나카는 팀을 분산 배치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안개 너머로 검은색 실루엣이 보였다. 그것은 일리미네이터의 존재를 느꼈는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검정이던 실루엣은 점점 커질수록 그 색이 밝아지더니, 이윽고 안갯속에서 금빛의 털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는 눈매와 얇은 콧수염, 길게 뻗은 주둥이를 가진 놈은 말 그대로 여우였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금빛 털을 두른 커다란 몸체 저 너머로 같은 색의 아홉 꼬리가 안개 안에서 빛나고 있다는 점이랄까?
놈은 비행마법의 여파로 은은하게 오오라를 흘리고 있는 일리미네이터를 바라보다가, 입 끝을 꿈틀거렸다. 마치 비웃듯이.
그 직후. 놈의 주둥이가 크게 벌어졌다. 놈의 입안은 마치 상어를 떠올리게 하는 칼날 같은 이빨들이 촘촘히 박혀있었는데, 하쿠네는 눈웃음치며, 놈의 '앞발'에 잡혀있는 것을 그 안으로 가져왔다.
사람을.
"!"
다나카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놈은 사람의 상반신 중 오른쪽만을 정확하게 물어뜯었다. 날카로운 이빨들은 그것만으로도 인간의 신체를 뜯어 발겼다.
"으…. 어…. 어…."
하쿠네가 내뿜는 환상에 홀려있던 피해자는 죽어가는 와중에도 고통을 피로하지 못하고 그저 꺽꺽 소리만 낼 뿐이었다. 하쿠네는 그런 남자를 손에서 툭하고 떨궜다.
공중 10m가 넘는 높이에서.
퍼걱. 파육음과 함께 사람이 죽어가는 소리가 던전 안을 울렸다. 긴 혀로 피묻은 자신의 앞 주둥이를 핥은 하쿠네는 그러면서 천천히 몸을 안개에서 한 걸음 더 앞으로 빼냈다.
그러자… 앞쪽의 안개가 조금 흩어지며 안개 안쪽이 좀 더 자세히 보였다.
그 안에는 방금 그 남자와 똑같은 방식으로 죽은 수많은 사람들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공격!!!!"
으드득! 어금니가 부서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이를 간 다나카가 소리쳤다. 그 외침과 함께 다섯 방위에서 광탄들이 날아들었다.
"캥!"
그 빛무리를 본 하쿠네의 몸이 빠르게 위로 솟구쳤다. 한차례 안개에서 몸이 완전히 빠져나온 놈의 전신은 아름다운 황금빛 털가죽으로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보는 이들은 저것을 보며 아무런 미도 느끼지 못했다.
"카악!"
놈의 입을 크게 벌리며 볼을 부풀리는 것이 보였다. 다나카는 즉시 소리쳤다.
"브레스! 회피!"
파팟! 지령이 떨어질 것도 없이 모션을 보고 파악한 이들은 이미 회피를 시작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놈의 입에서 화염이 뿜어져 나왔다.
푸화아아악!
부채꼴로 뿜어진 거대한 화염이 거리를 뒤덮었다. 일리미네이터는 몸을 피했지만, 좀비처럼 걸어오던 민간인들의 몸에는 불이 붙었다.
"캥캥캥!"
하쿠네는 그것을 보며 즐거운지 캥캥대며 다시금 몸에 안개를 감았다. 하늘로 떠오른 놈은 이제 다시 내려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라이징 선이 노리던 바기도 했다.
"끄아아아악!"
"이게 대체 뭐야!!"
교전 상황에 들어가자 하쿠네의 정신 잠식 효과가 크게 떨어져 민간인들이 이성을 되찾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한곳에 몰려있는 사람들과 주변을 뒤덮은 화염. 그리고 백은 넘을 듯한 간 파먹힌 사람들의 시체를 보고서 혼비백산했다.
"모, 모두 진정해주십시오! 유도에 따라주십시오!"
던전이 생성되기 전부터 그 안에 근무하던 경찰관, 소방관 등이 모여서 피난 유도를 시작했다. 25인의 공격대 중 1개 팀 역시 그쪽으로 돌렸다.
항상 지진과 태풍, 자연재해에 시달리던 일본은 디제스터 대비도 가장 잘 되어있는 국가 중 하나. 쉘터의 수나 그 견고함도 세계 제일이었기에, 시민들은 빠르게 인근의 쉘터에 찾아 들어갔다.
"캥!"
하지만 디제스터. 인류의 천적이 그것을 그대로 보고만 있을 리가 없었다. 놈의 아홉 꼬리가 일렁거리며 길이가 길어지기 시작했다.
"꼬리 공격! 본체 딜에 집중!"
저 꼬리가 무엇을 노리는지는 명백했다. 다나카는 꼬리들이 지상으로 뻗어 나가는 걸 보고 안색이 창백해지면서도 외쳤다.
어차피 저걸 대신 맞아주거나, 피하게 해줄 재주는 없다. 이놈이 꼬리에 집중한 사이에 빈사로 만드는 것이 가장 적합한 판단이었다.
외침에 따라 건물 높이에서 피난 유도를 하던 일리미네이터도 몸을 반전해 함께 캐스팅을 시작했다.
"캐캥!"
꼬리를 칼날같이 변형시켜 건물들을 잘라내 피해를 가중시키고 있던 하쿠네는 주변의 오오라가 증폭되자 꼬리의 방향을 돌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땐 이미 어느 정도의 캐스팅이 끝난 상황이었다.
"발사!"
번쩍! 하늘에서 섬광이 터졌다. 하쿠네를 감싸던 안개가 흩어지고, 지상으로는 괴물이 흘린 피의 비가 뿌려졌다.
"캬르르르르…!"
폭발 속에서 몸을 드러낸 하쿠네는 몸 이곳저곳에 큰 구멍이 뚫린 채 신음하고 있었다. 학살에 즐거워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그 눈은 일리미네이터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끄아아아악!"
통신기를 통해 들려온 찢어지는 비명에 다나카는 눈을 부릅떴다. 하쿠네에 움직임이 없는데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린가? 상황은 미미르가 전해왔다.
<하쿠네. 카마이타치 소환. 하쿠네 제2 페이즈로 판단됨.>
"하수인 소환이라니!"
순간 다나카는 상황이 꼬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하쿠네 레이드는 진구지 하야토가 반드시 참가했었다. 그 때문에 최초부터 강력한 공격이 가능했고, 민간인 피해도 최소화되었고, 레이드 시간도 길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그는 없었다. 그렇다면 그가 없는 만큼 다른 상황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했다.
물론 다나카도, 라이징 선의 전력분석팀도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가 없는 만큼 화력이 부족할지도 모른다고, 이에 따라 민간인 피해도 커질 거라고 예상은 했다.
하지만 던전화. 이 디제스터가 친 결계라는 것은 추가적인 인력의 투입을 차단해버린다. 예상했다 할지언정 그에 대한 대비책을 많이 만들 수 없게 했고.
지금 여기에서 최악의 변수가 튀어나오고 있었다.
'진구지의 화력 덕분에 지금까진 아예 스킵 됐던 패턴이 나오고 있다!'
레이드에선 언제나 예상 밖의 상황이란 것이 나오는 법이었다. 하지만 라이징 선의 멤버들은 지난 6년간 그런 위험성을 겪어본 적이 없었고.
그 익숙함의 대가는 참혹했다.
푸확!!!!
"아…!"
스즈키 아야메의 얼굴에 피가 튀었다.
공격대장의 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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