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스즈키의 예상대로 이 문제는 꽤 오래갔고, 그 날이 끝날 때까지 제대로 결론이 나지 않았다.
라이징 선은 기존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았고, 비 라이징 선은 지금까지 정규 공격대의 압력에 눌려왔던 설움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물과 기름은 섞일 수 없는 법. 결국 양쪽은 파벌이 갈라졌다.
라이징 선 멤버는 열다섯밖에 남지 않았지만, 비 라이징 선 일리미네이터 중에서도 진구지의 꿀을 빨고 싶어 하는 이들도 있었고, 그들로 다시 25명이 채워졌다.
비 라이징 선 파벌은 기존 세력이 모여서 막공, '아마테라스'를 조직했다. 경급 디제스터 레이드를 뛸 수 있는 세력이 완벽하게 양분되어버린 것이다.
혼란 속에서도 최정예화가 되길 바랐던 일본 정부의 바람은 완벽하게 허공으로 날아갔다.
"양측의 관계가 이렇게까지 골이 깊었을 줄이야…. 감당이 안 되는군."
"기회를 균등하게 주지 않으면 분명 한쪽이 들고 일어날 겁니다."
양측에 타협의 기미 따윈 보이지 않았기에, 일본 정부에선 결국 하쿠네가 나타날 때마다 번갈아가면서 투입하기로 했다.
그동안 외국에선 일본의 상황이 개차반으로 흐르는 것을 3D 안경을 쓰고 팝콘을 씹으며 구경 중이었다.
유우베 고죠 총리는 부디 진구지가 빨리 쾌차하여 이 난리를 수습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디제스터는 인간의 사정 따위 봐주지 않았고, 하쿠네는 다시금 나타났다.
"출현 주기가 점점 줄어드는데."
"이거 한국처럼 한 달 만에 나타나는 거 아닌가?"
전조 단계 기간 역시 디제스터에 따라 제멋대로였지만, 보통은 전조임을 인지한 시점에서부터 세 달간 지속되었다. 하지만 지금 이 페이스는 비상히 빠르다. 일리미네이터들은 드래곤 사태를 떠올렸다.
"일단 이번 하쿠네 레이드는 아마테라스에게 맡깁시다."
하지만 지금은 기간이나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이전 라이징 선이 실패했으니 이번엔 아마테라스가 투입되었다.
그들의 대표격인 히로후미는 오랜 시간 동안 진구지 하야토를 탐탁지 않게 봐오던 남자였다. 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난 힘의 크기 하나만으로 모든 걸 손에 쥔 철부지가 모든 걸 쥐고 흔드는 꼴을 보는 것은 배알이 뒤틀렸다.
그러다 기회가 왔다. 그가 죽은 것은 아니지만, 아래 세력은 크게 흔들린 상황. 지금 자신의 가치를 내보인다면 그가 돌아오더라도 히로후미는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거느리고 있을 것이다. 아니 이미 그랬다.
"자아! 들어갑시다!"
공명심이 그의 눈동자를 뒤흔들었다. 그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한둘이 아니었다. 그것이 그들의 힘이 되었다.
…마음의 힘은 말이다.
정확힌, 마음의 힘만.
*
"아마테라스 사망자 6명…."
성질나서 집어치워 버렸지만 일본 쪽에 관심은 가지고 있던 천후는 해당 기사를 확인하고서 혀를 찼다.
"더 추가패턴은 없었고. 그냥 레이드 경험 자체가 없었군."
아마테라스는 라이징 선에 들어가지 못한 이들이 모인 일리미네이터들. 그 뒤 국내 디제스터는 당연히 정규공대가 전부 처리해왔었고, 그들은 6년간 경급 디제스터를 접해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라이징 선에서 임시 공격대장을 빌려오거나 하는 방식도 쓰지 않았다. 그럼 당연히 희생자가 날 수밖에 없었다.
"진짜….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네."
이대론 멸급 디제스터가 나오기 전에 일본이 끝장나게 생겼다. 주전력이 빠진 라이징 선이나, 경험이 없는 아마테라스나 불완전한 공격대였다. 하쿠네의 특성상, 공격대가 헤매기 시작하자 민간인 피해가 끝도 없이 늘어나고 있었다.
"싸부. 계속 보고만 계실 겁니까?"
"흐음."
이렇게 비보가 들려올 때마다 라즈베리의 표정은 우울해져 갔다.
"신경 쓰여?"
"쓰임다. 그래도 1년 가까이 살았던 나라지 말입니다."
"……."
처음 들었다. 천후는 잠시 입을 벌렸다. 그러고 보면, 라즈베리는 항상 옆에 있는 데도 그녀에 대해서 뭔가 제대로 물어본 적은 없었다. 그만큼 그녀를 가벼운 마음으로 대했다는 것이기도 하다.
"어쩐 일로 갔었는데?"
"아."
그 질문에 라즈베리는 퍼뜩 멍한 얼굴을 거두고는 손가락을 꼬물댔다.
"저…. 그게…."
"너무 불편한 이야기면 안 해도 돼."
"아닙니다. 그렇게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니까요. 음. 그러니까…."
한국어에 상당히 익숙해진 그녀는 자세한 이야기를 시작하려 들자 임다와 ~지 말입니다를 붙이지 않았다.
"저는 노블레스 클럽을 전전하면서 정규 공격대 여러 곳에 입단을 부탁했었습니다만, 전부 거절당해왔습니다. 미국, 유럽은 미성년자 보호에 워낙 신경을 쓰다 보니 정말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때 마침 미스터 진구지와 만났습니다."
한참 애니메이션과 만화를 보며 안 그래도 와패니즈였던 라즈베리는 진짜 일본인+칼 차고 다님에 이끌려서 그의 뒤를 따라다녔다.
"하지만 저에게 관심을 둬 준 건 미스터 진구지가 아니라 그의 애인인 스즈키 언니였습니다. 언니는 라이징 선의 레이드에 게스트 참가까지는 시켜줄 수 있다고 했고, 라이징 선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게 해줬습니다. 그래서 라이징 선 사무실 근처에 숙소를 잡고 한 1년 정도 살았습니다."
"그랬구나. 그럼 그동안 진구지를 지금 나처럼 대한 거야?"
그 말에 라즈베리는 그녀치고는 흔치 않게 인상을 찌푸리면서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원랜 그럴 뻔했는데. 그 사람이 좀 이상한 사람이라."
"응?"
그가 또라이인 건 만나봐서 잘 알게 되었지만, 서구인인 그녀가 저런 감정을 내보일 일이 있나? 천후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라즈베리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 사람을 일단 저를 제대로 상대해주지조차 않았습니다. 노블레스 클럽에서 만난 이후로는 직접 본 적도 거의 없었어요. 그나마 가끔 저에게 오는 모든 말도 전부 스즈키 언니를 한 번씩 거쳐서 왔었고요. 당연히 호의를 가지고 있더라도 친해질 순 없는 관계였습니다. 게다가…. 알면 알수록 끔찍한 사람이었습니다."
"……."
라즈베리의 목소리에 점점 불쾌감이 느껴지자 천후는 걱정스레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나온 말을 멈출 생각이 없는지 이야기를 계속했다.
"어느 날 갑자기 스즈키 언니가 불러서 그녀의 집에 가보니, 미스터 진구지가 와있었습니다. 라이징 선에 입단시켜준다는 말을 했어요. 당연히 저는 엄청 좋아했죠. 그런데 입단엔 조건이 있다고 했습니다. 전 뭐든지 하겠다고 했어요. 정말로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아. 잠깐…. 라즈베리. 내가 상상하는 그런 건 아니겠지?"
"……."
어느새 라즈베리의 눈에 눈물이 맺힌 채 얼굴이 시뻘게져 있었다.
"…그런 핑계로 덮쳤단 말야?"
"미수였습니다. 어떻게든 뿌리치고 나왔으니까. 그때 한 소리가 아직도 기억납니다. 위대한 대일본제국의 아래에 굴복한다는 표식을 남겨야 한다느니 어쩌니. 무서웠습니다."
"……."
"스즈키 언니는 그러는 걸 전혀 말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절 그 자리에 데려갔으니 사실상 협조한 거죠. 다 포기한 눈으로 말입니다. 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천후도 마찬가지였다.
"그 뒤로는…. 회유와 협박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버티지 못하고 나와 버렸어요. 전… 사무라이는 정정당당한 무사라고 생각했는데. 진구지는 사무라이도 뭣도 아니었습니다."
"……."
"아. 그래도 일본을 싫어하진 않습니다. 변신 히어로. 최곱니다."
왼손으로 크게 원을 그리며 오른손은 허리춤으로 가져오는 포즈를 취한 라즈베리는 배시시 웃었다.
그녀는 진구지에게 변신 히어로를 바랬지만, 직접 접한 그는 결코 히어로라 할 수 없는 정신 나간 쓰레기 같은 인물이었다.
그걸로 한 번 이상이 깨졌을 텐데도, 그녀의 동심은 아직도 남아서 히어로를 꿈꾸고 있었다. 강하다면 강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라즈베리에 대해서 좀 더 알아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알자드의 말도 있고, 라즈베리의 친화력이 워낙 뛰어난 편이라 흐지부지 넘어간 면이 있었지만 그녀와 길게 이야기를 나눠보면 표면적으로 보이는 모습관 전혀 다른 면이 언뜻언뜻 보였다.
물론 이것을 전부 파헤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 배경을 어느 정도 알아야 그녀의 사부라 불릴 수 있지 않을까?
사부 놀이가 아니라, 진짜 사부가 되려면.
"미안해. 안 좋은 생각이 나게 했네."
"네? 아, 아님다. 이미 다 끝난 일이지 말임다. 사부가 진구지를 두들겨 팰 때 다 풀렸습니다."
말투가 컨셉 말투로 돌아온 라즈베리는 과장된 몸짓을 하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쓰게 웃은 천후는 자기 생각을 이야기했다.
"일단 나도 계속 좌시할 생각은 없어. 민간인 피해가 한도 끝도 없이 커지던데…. 인도주의적 차원으로라도 공격대는 파견할 생각이야. 칼침 한 번 맞을 뻔한 걸로 계속 놔두기엔 일이 너무 커지네.“
"오오!"
라즈베리의 눈이 번쩍번쩍 빛났다.
"역시 싸부! 존경함다!"
"아니. 뭐 당연한 거니까. 대신 교섭은 있어야겠지. 그에 대해서 우리 쪽에서 먼저 말을 꺼내는 건 그림이 좋지 않아. 아마 사람이 올 거야."
"일본 정부와 라이징 선이 사부를 비난했으니까요?"
"응. 그쪽에서 알아서 치워야지. 그걸 그만두라고 내가 사정을 할 필욘 없잖아."
"그건 그렇죠."
그리고 그 시기는 그리 머지않아 찾아왔다.
*
그 후. 하쿠네가 한 번씩 나타날 때마다 라이징 선과 아마테라스는 피해를 봐가며 놈을 퇴치해야 했다. B랭크의 수가 줄어든 상태였기 때문에, 사상자가 늘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두 집단은 만나서 하나의 결단을 내렸다. 우리끼리 싸우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외국의 도움은 빠르게 끌어들이자고.
그 시작점으로 어울리는 건 역시 진구지에게 공격당했던 DS. 그들이 발을 들이기 시작하면 다른 정규 공대들도 다시 접선해올 것이라 여겼다.
그리하여 그 대사로 파견된 것이 바로 스즈키였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네. 안녕하세요."
스즈키 아야메는 저쪽에서 뻔히 보이게 훔쳐 듣고 있는 라즈베리와도 살짝 눈인사를 나누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공항에서의 이미지로 천후를 기억하고 있어 조금 위축되어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시비만 걸지 않으면 기본적으로 천후는 온화한 태도를 보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무슨 일로 찾아오셨죠?"
"이전 사건에 대해 사과를 하기 위해서 찾아왔어요. 그리고 DS에 지원요청을 하기 위해서."
"그거라면…."
천후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스즈키는 허리를 깊게 숙였다.
"라이징 선 전 공격대원을 대표하여 사과드립니다. 일본 정부 측에도 여론몰이를 중단하고 정식으로 사과하라고 요청하겠습니다."
"당신들의 사과를 듣고 싶은 게 아닙니다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천후의 목소리에 노기는 없었다. 무슨 말이 나올지 쉬이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짐작하시겠지만…. 진구지 씨에게 사과를 듣는 건 그의 목을 쳐도 불가능할 겁니다. 일본 정부 측의 사과는 정식 발표 이후, 정부 간의 관례를 통해 진행되게 하겠습니다."
"…고생하시는군요. 사과는 받아들이겠습니다."
정부 간의 발표는 시일이 걸리고, 진구지 하야토는 그 개인이 극도의 우익 종자. 그놈에게선 무슨 짓을 해도 사과를 받아낼 수 없을 것이다. 죽으면 죽었지.
지금 이게 스즈키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사과라는 것을 파악한 천후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이후 사죄금을 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이건 그에 관한 서류입니다."
"알겠습니다. 우리 DS도 인도주의에 따라 다시금 공격대를 파견을 고려해봐야 할 때라고 생각하던 참이었습니다. 다만 파견 여부는 일본 정부와의 협상에 따라 확정 지을 생각입니다. 마지막으로 전조 단계에 공격대를 파견한다 해서, 그게 멸급 레이드에 자동 참전하는 것으로 이어지진 않는다는 것을 미리 밝혀두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미리 정부에 언질을 해두겠습니다. 금전적인 협상은 정부를 통해서 해주시기 바랍니다."
"네. 그러죠."
사무적인 대화를 끝낸 둘은 서로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상황이 너무 악화일로다 보니, 서로 대면하는 것 자체를 부담스럽게 여기고 있던 상황이었다.
덕분에 이야기가 끝나자 서로 긴장감이 풀려서 어깨가 주저앉았다.
"그럼 돌아 가보겠습니다. 아…. 그런데…."
"네. 말씀하시죠."
"DS에 친한 동생이 한 명 있어서 그런데….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가도 될까요?"
그녀의 시선은 라즈베리를 향하고 있었다. 천후는 잠깐 움찔했다가 눈으로 라즈베리에게 의향을 물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러시죠."
작게 한 번 고개가 끄덕이는 것을 본 천후는 그것을 허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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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날이 부쩍 추워진거 같아요.... 감기 조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