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하렘-187화 (187/324)

187화

<쉽게 되는 일이란 없다>

"오랜만이네, 라즈."

"네. 오랜만입니다, 아야메 언니."

1층의 사내 카페 한편에 마주 앉은 라즈베리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스즈키는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띠고 있었다.

청초한 인상의 여자였다. 작은 체구와 당장에라도 흩어질 듯한 연약한 인상은 남자의 보호본능을 자극했다. 이 모습에 라즈베리도 끌렸었다. 그녀의 보호자를 자처하면서 설치던 시절도 있었다.

예전에는.

"건강하게 지냈던 것 같네."

"배곯을 일이야 원래 없었습니다. 지금은 DS에서도 연봉을 받고 있고."

"하긴…."

A행크 일리미네이터, 아니 마법사라는 것이 드러난 순간부터 노블레스 클럽에선 그녀에게 접촉해 사실상 보호 아래 두었다. 지금이야 DS에 있지만, 그녀가 1, 2년만 더 기다렸다면 다른 정규공격대 어디라도 손쉽게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말 그대로 배고플 일은 없는 처지인 게 그녀였다.

"그보단."

"응?"

빙긋. 자상하게 미소 짓는 그녀를 본 라즈베리는 잠시 시선을 피했다. 저 모습을 보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여러 번을 반복하던 라즈베리는 결국 진지한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

"저보단 언니가 문제입니다. 미스터 진구지는 그 뒤로도 계속 그러고 있습니까?"

"……."

스즈키의 안색이 아주 약간 어두워졌다. 라즈베리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것은 라즈베리에겐 충분히 대답이 되었다. 라즈베리는 그녀의 손을 양손으로 꾹 움켜쥐었다.

"언니. 정신 차리십시오. 그와 계속 함께하는 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라즈베리…."

"대체 무슨 정신입니까? 제 건 이후로도 반 강간을 돕다니. 아야메 언니.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스즈키의 눈동자가 약간 일렁였다. 라즈베리는 순간 마음이 약해졌다. 그리고 그 순간 느꼈다.

'틀렸다….'

이 여자는…. 마음이 너무 심약하다. 그것도 아주 고약한 방향으로.

스즈키 아야메는 아주 선량한 B랭크 일리미네이터다. 수입의 상당 부분을 사회복지시설에 기부하고, 그걸로도 모자라 아예 재단 하나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라즈베리가 일본에서 적응하지 못해 고생할 때는 직접 집에 찾아오거나, 혹은 자기 집에 지내게 하면서 음식을 직접 차려주었을 정도였다.

길을 가다가 다친 고양이나 동물을 보고 고쳐주지 못하면 너무나 힘겨워하고, 그것들 전부 감싸 안으려고 진정으로 노력하는 착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심성이 모두 긍정적으로 작용하진 않았다.

"언니가 하는 행동은 미스터 진구지에게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라즈베리…."

울 것 같은 목소리를 내는 그녀를 보면 한 마디 한 마디 자아내는 게 힘들어진다.

그녀는 주관이 없었다.

진구지 하야토는 완벽하게 비틀려 있지만, 자의식과 자신감의 덩어리이기도 했다. 그와 그녀의 조합은 최악의 시너지를 불러왔다. 그녀는 진구지의 여자가 된 이후부터 모든 행동을 그에게 맡기고 있었다.

진구지의 판단이 이성적으로 '그르다'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런 건 큰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이제 그가 없으면 무서운 것이다.

스스로 판단해 행동하는 것이.

진구지가 극단을 달리는 만큼, 그녀의 수동적인 경향성도 극단화 되어갔고… 이윽고 그가 명하는 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가 되었다.

그녀는 자기 처지를 알면서도, 거부할 마음조차 품지 못하는 훈련된 개였다. 아주 말 잘 듣는 개.

그것을 확신한 순간, 라즈베리의 얼굴에 아주 잠깐 슬픔이 머물렀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 아주 잠깐.

그녀의 얼굴은 곧 무표정해졌다.

"…알겠습니다. 더는 말하지 않죠. '저는 변신 히어로가 아닙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면. 간섭하지 않겠어요."

"……."

"다만 제가 말씀드렸다는 사실은 기억해주세요."

"응…."

덜컹. 더 들을 것 없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난 라즈베리는 인사도 없이 그 자리에서 몸을 돌렸다. 스즈키는 그 사이 식은 커피 잔을 하염없이 양손으로 붙들고 있었다.

*

"이야기는 끝났어?"

한편. 카페에서 다시 사장실로 올라온 라즈베리는 천후의 질문에 기색을 확 바꾸고는 씩씩하게 답했다.

"…아! 싸부. 넵. 별거 아닌 사담이었지 말입니다."

"그, 그래?"

예상 밖의 태도에 천후는 잠시 당황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뭔가 밝은 이야기가 오갔을 것 같진 않았는데.'

일본에선 민간인 피해가 날마다 일어나고 있고, 스즈키의 애인 진구지도 다친 상태. 하물며 라즈베리는 그녀 때문에 곤욕을 치를 뻔했는데 이런 모습이 나오다니.

하지만 억지로 강한 척을 한다고 보기엔 너무나 밝다. 덕분에 천후는 조금 혼란스러웠다.

그때.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희주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주인님. 이번에 그녀도 함께…."

"아. 그럴까요?"

"네? 무슨 일임까?"

"아아… 사실은 이번에 유그드라실에 올라갈 일이 생겨서. 같이 갈래?"

"오우! 물론임다. 가겠슴다."

라즈베리는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DS에서 바로 텔레포테이션의 수혜를 입은 사람이기 때문에 유그드라실에 올라가 본 적이 거의 없었다. 단숨에 그녀의 눈은 호기심으로 번뜩였다.

"거기라면 DS 가디언즈의 비밀기지 디자인을 떠올리기 적격이지 말입니다."

"음? 뭐 하여간 같이 가는 거지?"

"넵!"

활기차게 대답한 라즈베리는 그러다 중요한 걸 물어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싸부. 그런데 유그드라실엔 왜 올라가는 검까?"

"아아…"

그러고 그걸 말 안 했나. 천후는 사무실 다른 한쪽에서 바른 자세로 책을 보고 있는 적발의 주인 쪽으로 시선을 주며 말했다.

"이그네스 전용 리미터에 대한 답변이 왔어."

*

최완과 대화한 이후 천후는 곧바로 유그드라실에 이그네스의 전용 리미터 제작을 의뢰했다.

그 뒤로 최완이나 유그드라실 쪽 지인들에게서 간간이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유그드라실 상층부에서 찬반 대립이 아주 거셌다는 것 같았다.

덕분에 시일이 상당히 지난 지금에 와서야 제작해볼 준비나 좀 해볼 테니 올라와 보란 소리를 들은 것이다.

"이그네스 혼자 올려보내면 다짜고짜 가둘 수도 있으니까, 나랑 강호 선배까지 해서 올라가 볼 생각이었어."

"유, 유그드라실은 악의 조직임까?"

라즈베리가 긴장해서 하는 말에 천후는 쓰게 웃었다.

"글쎄…."

악의 조직이냐고 물으면 또 대답하기 어려워진다. 현재 세상은 유그드라실이 없으면 사실상 제대로 돌아갈 수가 없으니까. 세상을 유지하고 있는 단체를 악이라 부를 수 있을까?

"하여간 그랬었는데…. 아저씨가 절대 감금 의도는 없다고 보증을 했으니, 대신 겸사겸사 상담 좀 받으러 가려고."

유그드라실로 올라가는 큐브 엘리베이터 안에는 천후와 라즈베리, 이그네스 뿐 아니라 이브, 에바, 강호, 희주까지. 집안에 사는 모두가 올라 있었다.

"그렇슴까? 그런데 무슨 상담인데 이렇게 많이 갑니까?"

"아. 말 안 했던가?"

그러고 보면 라즈베리와는 과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서로가 말이다. 천후는 자기 오른쪽 관자놀이를 가볍게 두드리며 답했다.

"정신과."

"…?"

이 많은 사람이? 라즈베리는 더더욱 의문스러워했다. 사연을 일일이 말해주기엔 너무 구구절절해서 천후는 그저 쓴웃음만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동안 유그드라실에 도착했다.

"왔군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눈앞에는 170 후반의 키에, 귀가 덮일 정도로 머리를 기른 남성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느다란 눈매에 얇은 은테안경을 쓴 그는 몸에 걸친 흰 가운의 주머니에 양손을 꽂고 있었다.

"선생님, 안녕!"

"안녕하세요. 그동안 잘 지냈나요?"

"응!"

먼저 인사해오는 이브와 에바에게 간단히 손을 흔들어 맞이해준 그는 천후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이렇게 보는 건 오랜만이네요. 천후."

"그러게요. 오랜만이에요, 인규 형."

꾹. 내민 손을 마주 잡은 천후는 만면에 미소를 띠면서 답했다.

고인규. 유그드라실에서 지내던 시절, 천후의 정신과 주치의였던 남자였다. 천후가 유그드라실에서 완전히 자기편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다섯 명 중 한 명이기도 했다.

"원랜 지부장님이 맞이해야 했는데, 중국에 가계서 말이죠. 자. 일단 들어오시죠."

"네."

천후는 알아서 아이들을 데리고 그의 진료실로 향했다. 그동안 고인규는 그들 중 섞여 있는 희주와 눈을 마주쳤다. 희주는 그를 보며 간단히 묵례했고, 인규는 한차례 가볍게 웃고는 그 뒤를 따랐다.

진료실로 도착한 인규는 자기 자리에 앉아 천후를 마주 보았다.

"두 가지 용건으로 온 거죠? S랭크 전용 리미터와 정신과 상담. 어느 쪽을 먼저 할까요?"

"이미 여기까지 왔으니 상담부터 하죠."

"흠? 별로 그건 상관없는 문제지만. 그럼 그럴까요?"

천후는 유그드라실에서 내려오고 난 이후에도 정신과 진료는 그에게 부탁하고 있었다. 10년간 그의 주치의였기 때문에, 이제 와서 다른 사람을 찾을 이유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이브와 에바 역시 완치되었지만, 혹시 몰라 그 뒤로도 쭉 그에게 정기적인 상담을 받고 있었다.

천후와 치러진 상담은 별로 길지 않았다. 애초에 10년 내내 진료하던 사이고, 오가는 질의응답도 비슷했다.

"꿈이 조금씩 진행되고 있는 건 안정감을 느껴서겠죠. 그리고 마법의 발전도 영향을 미칠 거예요. 마력동화현상이란 게 육체와 정신 양면에 주는 영향력이 워낙 크니까. 너무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 않으면 되겠죠."

"전에도 비슷한 소리 들은 거 같은데…."

"레퍼토리가 다 떨어질 때도 됐죠. 정 뭐하면 약이라도 줄까요?"

천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정신과가 무슨 카운슬링만 하는 곳이 아니다. 정신과 의사는 정신에 영향을 미치는 약물을 처방할 수 있어서 의사인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약물로 쉽게 좌우되며, 그것은 극단적인 심적 상황에서도 그렇다. 그에 익숙해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고, 사실 고인규는 카운슬링보단 약물 처방 쪽을 훨씬 선호했다.

"정중히 사양할게요."

"네. 자. 다음."

휘휘 손을 내저어 천후를 앞에서 치워버린 고인규는 이브와 에바를 불렀다. 둘에겐 사고 이야기 등은 전혀 안 하고, 요즘 학교에서 어떠냐 같은 이야기를 물어보았다.

둘은 신 나서 짹짹거렸고, 인규는 그중에서 몇몇 말들만 차트에 기록하고선 내보냈다.

그동안 가만히 앉아있던 이그네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관심을 보였다.

"대체 안쪽에선 뭘 하는 게냐?"

"응? 헤헤. 요즘은 말만 하는데. 이전엔 막 그림 그리고 그랬어."

"그거 가지고 막 이상한 소리 한다?"

"흐음."

"관심이 있다면 한 번 해보시겠습니까?"

희주가 나지막이 물어오자 이그네스는 잠시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라즈는 어때요?"

"엑? 저도 말임까? 아니. 음…."

"해봐, 언니. 막 설문조사 같은 거 주는데 재미있어."

"으음…."

라즈베리는 당황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 다들 궁금해하는 얼굴들이라, 쉽게 빠져나갈 수 없어 보였다. 어쩐지 희주의 유도에 말려든 느낌이었다.

"으. 알겠슴다. 하면 되지 말임다."

양손을 꾹 움켜쥔 라즈베리와 이그네스는 인규가 제시한 몇 가지 검사에 참여했다. 검사하는데만도 꽤 시간이 걸려서, 막상 말했던 이브와 에바는 졸린 지 하품을 해댔다.

그렇게 상당 시간이 지나서야 둘은 실험을 모두 끝냈다. 그 결과물들을 찬찬히 훑어보던 인규가 말했다.

"결과가 나오려면 조금 시간이 걸려요. 그동안 잠시 다른 거 하면서 놀고 있으세요. 천후, 희주. 둘은 들어오고."

"네."

그가 이런 류의 단순한 검사 체크에 시간이 걸리는 건 이례적인 일인지라, 천후는 신기해하면서도 안으로 들어갔다.

"잠깐 앉아있어요."

둘을 앉혀둔 인규는 잠깐 문밖을 살피더니 문단속을 확실히 하고 자기 자리로 돌아와 앉으며 물었다.

"천후. 저 라즈베리란 여자. 대체 뭡니까?"

그의 눈매는 어느새 싸늘해져 있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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