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하렘-188화 (188/324)

188화

"네?"

뜬금없이 왜 라즈베리 이야기가 나오지? 천후가 놀라서 눈을 끔뻑거리자 인규는 인상을 썼다.

"동거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정말 타인에게 관심이 없군요."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됐어요. 뭐.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희주는 눈치채고 있었나요?"

"네…. 조금은."

희주가 작게 답하자 인규는 입맛이 쓴지 씁 하고 소리를 냈다.

"알겠어요. 일단… 이야기가 길어질 테니 두 아이 쪽부터 말할게요."

그렇게 말한 인규는 빈 종이 한 장을 마련해 그것에 그림을 그리며 설명했다.

"초자연현상이 간섭한 흔적이 역력하지만, 부정적으로 작용하고 있진 않아요. 억지로 당시 기억을 심하게 끌어내려고 하지만 않는다면, 앞으로도 괜찮을 겁니다."

"휴…."

그 말에 천후는 정말이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확답도 꽤 여러 번 들은 이야기지만, 그때마다 그랬다.

"단, 이 모든 게 초자연적 능력의 작용이 있어서란 걸 잊어선 안 돼요. 앞으로도 최대한 둘에게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게끔 노력해야 합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니, 정작 중요할 때 어떻게 작용할지 알 수 없는 법이니까요."

"…너무 겁주는 거 아녜요?"

"몰랐어요? 의사는 원래 겁주는 게 일입니다. 그리고 의학의 영역을 넘어선 일에 대해선 아무리 겁을 먹어도 이상하지 않아요. 이 조화는 보고 있는 저도 놀라울 정도니까."

에바가 크게 다친 이후 PTSD를 심하게 겪고 있을 때. 인규는 둘이 그것을 평생 안고 갈 수밖에 없으리라고 판단했다.

정신계열에 능통한 마법사는 유그드라실에도 그리 많지 않았다. 강제적으로 일정구간을 지우고, 삭제하는 강압적인 조치가 아니라, 일상생활을 염두에 둔 자연적인 조작이나 치료의 영역에까지 이른 사람은 없었으니, 둘을 치료할 방법은 마법으로도 전무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둘의 상태가 호전되었다. 정기적인 약물 처방 및 상담 치료를 몇 년, 아니 몇십 년은 받아야 간신히 도달할 수 있는 정신 상태로 안정화되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천후에게 사건의 전말을 들은 그는 그 뒤로 훨씬 더 주의를 기울이며 둘을 살폈다.

"본래 정신에 있어 완치란 말은 붙일 수 없는 거예요. 완화되었다고 할 수 있겠죠. 일단 의사로서 소견을 말하자면 더는 저를 찾아올 필요까진 없을 거예요. 다만 마법사로선 좀 더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음…."

"그 둘은 이쯤하고. 그 라즈베리라는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하죠."

그렇게 말한 인규는 방금 라즈베리가 받았던 검사지를 보여주었다. 하나는 집과 나무를 그리는 그림 검사. 다른 하나는 설문 검사지였다.

그림에는 재주가 별로 없는지 삐뜰빼뚤하게 그린 그림에는 부모로 보이는 남자와 여자, 그리고 라즈베리가 집 밖에 서 있고, 집은 문, 창문, 굴뚝에 마당까지 솜씨는 없지만 있을 건 다 있는 집이 그려져 있었다.

나무 역시 뿌리부터 가지, 열매, 나뭇잎 등이 전부 그려져 있었다.

어릴 적 자주 그려보았던 그림 검사지를 들여다보던 천후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정상 아니에요?"

"아…."

단박에 한숨을 내쉰 인규는 미간을 꾹꾹 눌렀다.

"정신과 진료를 10년쯤 받았으면 감이라도 잡아야 하는 데 이거 참…. 하나 있는 동생이란 놈이 눈치라곤 개 코만치도 없어서 죽겠네요."

"……."

참. 친한 형이지만 이럴 때 보면 얄밉다. 그렇게 천후의 마음에 못마땅함이 가득 들어찰 즈음.

"저도 오늘 처음 본 사람에게 본격적인 검사를 해볼 생각은 없었으니까. 성향 검사만 했어요. 성격이나 현재 부족하게 여기는 것 정도만 걸러보려고 했다고요. 그런데 이건…. 지나치게 작위적이에요."

"그냥 불만이 없는 게 아니고요?"

"천후. 세상에 아무 불만도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단언이 튀어나오자 천후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부연설명을 했다.

"간략한 그림을 그리다 보면요. 누구라도 생략하는 부분이 있기 마련이에요. 불만사항 이전에 그냥 이 간략화 하는 과정에서 이것은 필요 없겠다…라고 생각하는 부분을 무의식적으로 제거하는 게 당연하다고요. 그런데 이 사람은 그런 게 없어요."

"그냥 그런 사람일 수도 있는 거잖아요."

"만에 하나 거기까진 이해해줄 수 있죠. 하지만."

인규는 설문 검사지를 해석한 내용을 보여주었다.

"이것 역시 경향을 판단하는 수준의 검사예요. 문항마다 일정 점수를 매겨 놓고서 답변을 보고 유형파악을 하는 검사죠. 그런데 결과가 어떻게 나왔는지 아세요?"

"…어떤데요?"

"0. 정확히 0 나오더군요. 200개 문항 중 타입을 A, B, C, D 4개로 나누고 거기에서 수를 더하고 빼는 항목이 다 다른데 그 넷이 전부 0이 나왔다고요."

천후는 입을 다물었다. 이건 확실히 이상했다.

"이건 억지로 이렇게 하기도 힘들어요. 이 설문을 줄줄이 꿰고 있지 않은 한. 절대 우연이라고 할 수 없어요."

"그렇…죠."

"게다가…. 검사지의 답에 일정 경향성을 띄면서도 0점이 나왔단 게 더 마음에 걸리네요."

"무슨 뜻이죠?"

"그러니까…"

"…양분되었나요?"

희주의 질문에 인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눈치채고 있었군요?"

"조금은…."

흐리게 대답한 희주는 양쪽으로 마구 동그라미를 쳐놓은 종이에 시선을 두었다.

"다만… 내면에 대한 이야기는. 어려운지라."

사람의 내면에 대한 확언은 타인을 단정 짓는다는 것과 같다. 당연히 희주의 성격상 쉽게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설명은 제가 하죠. 그러니까. 이 사람의 답변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 경향성을 띄어요. 그냥 점수만 보고서 판단하면 설문자를 골탕 먹이려고 한 것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지만, 답변한 문향들을 하나씩 꼼꼼히 보면 티가 납니다. 아주 긍정적이고 활발한 사람과 부정적인 사람이 동시에 반 절씩 맡은 것 같달까?"

"…그게 무슨 뜻이죠?"

오가는 말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왠지 불안감이 몰려와 묻자, 인규가 답했다.

"확답할 단계는 아니지만. 적어도 겉으로 보이는 게 다는 아닌 사람이란 겁니다."

*

천후가 아는 라즈베리는 말을 잘 듣고 옆에서 광선을 쏘는, 나이에 비해 조금 행동이 어린 여동생 같은 이미지였다.

희주와도 이야기가 잘 통해 집안에서도 가장 대화를 많이 하고, 아이들도 잘 돌봐주는 착한 아이.

하지만 설문에서 나타나는 경향성을 보면 그것은 두 가지 중 하나에 속할 뿐이었다.

다른 하나는 트라우마에 파묻혀 모든 것을 손에서 놔버린 것 같은 경향성이 보였다.

"그냥 보면 제멋대로 마구 응한 것 같은데. 사실 그게 아닌 거예요. 그러면서도 이 경향성을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한 흔적도 있습니다."

"이중인격…이란 건가요?"

"글쎄요….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지만."

말끝을 흐린 인규는 천후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엔 어느새 걱정이 가득했다. 이렇게나 가까이에 오랜 시간 있었는데 그녀의 진면목에 대해 전혀 몰랐다는 것에 대해 천후는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인규는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당신의 잘못이 아니에요. 희주도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 같고. 당신 앞에선 유독 더 밝은 모습을 보인 모양이니 더 눈치채기 어려웠겠죠."

"죄송합니다…. 라즈베리의 몇몇 언동이나 불면증을 보고 기색은 느꼈지만, 언젠가 자기 사정을 말할 거라 생각해서 시간을 두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불면증이요? …하하."

늦게 잔단 소리는 들었지만, 그건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천후는 양손으로 자기 얼굴을 덮었다.

"요는 아마 무슨 사정이 있는 사람일 테니, 지켜보란 거예요. 아마 그 아이에겐 정상적인 상담이나 검사가 무의미할 것 같네요. 이 정도로 완벽하게 구분해서 검사지에 대응할 수 있을 정도면 제가 물어보는 모든 것에 모범답안만 제출할 수도 있을 겁니다."

"알겠어요. 좀…. 충격이 크네요."

"사람을 알아간다는 건 누가 되었던 그런 법이죠.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죠. 그 빨간 머리 여자애가 이그네스란 거죠?"

"네."

"이야. 아주 그 건 가지고 상부에선 난리가 났었어요. 지부장님이 아주 고생하시던데. 커버 쳐주느라."

"…그 정도였어요?"

천후의 되물음에 고인규는 피식 웃었다.

"알잖아요. 상부는 당신 사람 취급 안 하는 거."

"……."

묵직한 돌직구에 천후는 입을 딱 다물었다. 이전 정신 지배 건에서도 그랬지만, 유그드라실의 핵심적인 자리에 있는 사람일수록 천후에 대해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제 와서 당신을 배제해놓고 지상에서 뭘 하자니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타협한 거지. 안 그랬으면 뭘 했을지 상상할 수도 없네요, 전."

"후우…."

안 그래도 심란한 와중에 이런 소리를 들으니 죽을 것 같다. 감정이 요동을 친다. 천후는 간신히 그것을 가라앉혔다.

"이그네스도 뭔가 문제가 있나요?"

"정신과 의사에게 있어서, 문제가 없는 인간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요. 모두가 마음의 병자~죠. 뭐. 기억이 날아간 것치곤 말짱합니다. 정신적인 부분은 걱정할 것 없어요."

"그건 다행이네요. 그럼 일어날게요, 형."

"응? 어디 가게요?"

"리미터 쪽 이야기를 하러 가야죠. 담당자를 만나봐야…."

"이미 만났잖아요?"

"네?"

천후가 멍하니 되묻자, 인규는 빙그레 웃었다.

"저예요. 전용 리미터 담당자가."

"……?"

이게 뭔 소리여? 천후의 고개가 끼익 하고 기울었다. 그때. 이야기를 듣고 있던 희주가 설명해주었다.

"주인님. 고인규님은…. 마도병장 제작의 권위자이십니다."

"…네?"

"유그드라실에서도 최고의 기량을 갖추고 계십니다. 제 월하홍취를 만들어 주신 것도 고인규 님이십니다."

그 소리에 천후는 깜짝 놀랐다. 뽑으면 항시 D랭크 수준의 강화마법을 유지하고, 디제스터의 혈액에서 특수능력을 강탈해 사용하게 해주는 월하홍취는 마도병장 중에서도 상당히 강력한 물건이었다. 그런데 그걸 고인규가 만들었다니?

"진짜예요, 형?"

"정말 남에게 관심이 없군요. 제 주특기 마법을 알기나 해요?"

"저, 정신 계열 아니었어요?"

"정신과 의사니까?"

"……."

천후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당연히 그럴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기대도 안 했어요. 부여계입니다. 전 마도구 제작 전문이에요. 마법사로서는 말이죠."

천후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부관참시당하는 게 이런 기분일까? 그래도 10년을 알고 지낸 형인데 뭐 하는 사람인지도 자세히 몰랐단 걸 부끄럽다. 아버지 직업 모르는 아들이 된 기분?

"돌아와서. 전용 리미터 제작은 승인이 났어요. 어떻게든 지부장님이 해냈죠. 다만 문제가 있는데."

"뭐죠?"

"제가 못 만들어요. 지금은."

천후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었다. 소재파악도 안 되는 SA랭크 마법사를 제외하면, 사실상 유그드라실에서 마법적으로 못하는 건 누구도 못한다는 소리였으니까. 하지만 인규는 곧 부연설명을 했다.

"아아. 잠깐. 갑자기 심각해지지 말고 들어요. 아예 불가능하다는 게 아니에요. 다만 조금 선결조건이 있어요. 마도구 제작은 리츄얼, 그러니까 의식적인 과정이 충족되는 게 중요해요."

"의식적인 과정?"

"음. 그러니까 과정의 문제랄까? 전설의 검들을 보면 무슨 달빛 아래서만 벼렸네 어쩌고 하지 않습니까? 아니면 매일같이 목욕재계를 한다든가. 그렇게 일종의 조건을 두어야만 강력한 마도구를 만들 수 있습니다. 영창, 수인, 마력 외의 부분도 충족돼야 한단 거죠. 6초 만에 뚝딱뚝딱 만들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간단한 거야 그렇게 만들 수 있지만 말이죠."

"그렇군요."

마도병장 제작과정은 유그드라실 측에서 철저하게 비밀로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건 천후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번 전용 리미터의 경우. 최소한의 선결 조건을 걸려고 해도 저 혼자만의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닌 부분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그걸 충족해줘야 합니다."

"어떤 것들이죠?"

"그러니까.... 최종적으로 리미터가 될 물건이 필요해요. 그 아이가 지금 팔에 찬 팔찌처럼 실제적인 물건이 필요합니다. 그중에서도 그 아이와 긴밀하게 연결된 물건으로."

"긴밀하게 연결된 물건이라면…."

"보통 사람이라면 결혼반지라거나, 돌 반지 같은 것들. 아니면 아주 어릴 적부터 쓰던 신체에 착용하는 물건이어야 합니다."

"……."

참 쉽죠 하는 말투에 천후는 이마를 짚었다.

던전에서 구해올 때부터 알몸이었던 이그네스에게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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