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이야기를 마친 천후는 심란해져서 상담실 밖으로 나왔다.
그녀가 어릴 적부터 간직해왔던 연결성 있는 물건 같은 건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가 기억을 되찾기 전에는 말이다.
천후는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전용리미터 제작은 잠시 미뤄둘 수밖에 없었다.
"이야기는 다 끝난 게냐?"
"어. 음…. 이그네스. 그게 말인데."
천후는 그에 관련된 이야기를 그녀에게 그대로 전해주었다. 이그네스는 상당히 충격을 받았는지 말이 없어졌다. 하지만 이건 숨긴다고 어쩔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기에, 천후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알…았다. 일단은…. 나도 노력을 해보마. 옛일이 기억나게끔."
"미안해. 도움이 안돼서."
"그런 소리 말아라. 이렇게까지 해준 게 얼마나 어려운지 모르는 바가 아니니…. 나는 오히려 기쁘다. 고맙구나."
빙긋하고 웃어 보이는 그 모습은 앙증맞을 정도였지만, 천후는 거기에서 처연함을 느꼈다.
'젠장….'
돈은 수영장에서 수영 할수 있을 정도로 넘쳐나는데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니. 천후는 자신이 참을 수 없이 작게 느껴졌다. 게다가 그를 그런 심경으로 만드는 사람은 또 있었다.
"싸부. 결과는 어땠슴까?"
조심스레 다가와 물은 말에 천후는 잠시 답변을 고민했다. 라즈베리 문제 역시 알아봐야 할 것 중 하나였다. 사람의 문제는 복잡하다. 가까워질수록. 천후는 그것을 날이 갈수록 배워나갔다.
"아. 별거 없었는데. 활발하대."
"…그렇슴까?"
천후의 거짓 대답에 라즈베리는 안심한 듯이 크게 웃어 보였다. 저게 어떤 의미인지를 이제부턴 생각하고 대해야 한다는 것이 천후에겐 상당히 어려웠다.
그때. 같이 기다리고 있었던 이브와 에바가 다가왔다. 둘은 양팔로 간신히 품을 수 있는 커다란 공모양의 무언가를 끌어안고 있었다.
"오빠. 얘네 뭐야?"
"막 떠다니면서 말한다?"
<해방요구. 해방요구. 납치는 범죄입니다.>
<저희를 데려가면 절도죄에 해당합니다.>
그 구체들은 그렇게 소리를 내면서 움찔움찔 대며 둘의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힘은 그리 강하지 않아 둘은 그것들을 쉽사리 포획하고 있었다.
그것들의 정체를 알고 있는 천후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어라. 어디서 났어?"
"응? 오빠 찾아왔다고 하면서 여기로 알아서 들어왔는데?"
"오빠, 언니 들어간 동안 그래서 얘네랑 놀았어."
"그렇구먼."
천후가 고개를 끄덕이자, 구체들은 다시금 소리를 냈다.
<놀다 틀림. 괴롭힘이 옳음.>
<몸체 위에 올라탐. 기물파손 우려 있었음.>
"딱딱해서 괜찮잖아!"
앓는 소리에 이브는 깔깔 웃으며 플라스틱으로 된 그것들의 몸체를 손바닥으로 찰싹찰싹 때렸다.
<폭력! 폭력 반대!>
<부서짐! 부서짐!>
호들갑 떠는 것치고는 정말 아무런 흠집 하나 남지 않는다. 그 모습을 보고 쓰게 웃은 천후는 둘에게 줘보라는 듯이 손을 내밀었다. 이브와 에바는 순순히 그것들을 놔주었다.
그러자 그 두 구체는 허공으로 둥실 떠오르더니, 천후의 주변을 빙글빙글 맴돌았다.
구체의 중앙에는 눈이나 입처럼 보이는 구멍이 파여있었고, 거기서는 LED 램프가 말을 할 때마다 깜빡였다.
천후는 그 둘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오랜만이네. 프레이. 프레이야."
<278일만임!>
<278일 13시간 6분임! 반가워 천후. 반가워!>
그것들은 신이 난 건지 그의 주변을 좀 더 맹렬하게 돌면서 그를 환영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에바가 물었다.
"오빠. 얘네랑 아는 사이야?"
"그럼. 아는 사이지."
웃으면서 긍정한 천후는 둘을 양팔에 하나씩 끌어안고는 말했다.
"오빠 어릴 적 친구들이야. 프레이. 프레이야."
*
유그드라실에서 보호라는 이름의 감금을 당하던 시절. 천후의 인성 발달속도는 느린 편이었다.
이미연의 노력으로 퍼스트 컨택트는 달성했지만, 그녀가 함께하는 시간은 하루에 한 시간을 간신히 넘겼고, 그 뒤로 다시 두께만 50cm가 넘어가는 철문이 닫히고 나면 그는 멍하니 제자리에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미연은 이 처우에 대해서 맹렬하게 비난했고, 이 상황을 잘 모르고 있던 유그드라실 일반 직원에게 알렸다. 명색이 인권단체라는 명패를 내걸고서 사람 하나를 감금해두고서 저 꼴을 하고 있단 게 알려지자, 유그드라실 내에서도 커다란 반향이 있었다.
그리하여 유그드라실 상층부는 타협안을 제시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과 접촉하기엔 아직 때가 이르니, 대신에 인공지능을 탑재한 학습 머신을 투입하자는 것으로.
"프레이랑 프레이야는 유그드라실 메인 AI 미미르와 연동되어있는 인공지능 로봇이야. 이렇게 떠다니는 건 마법의 영향이니까, 과학과 마법의 융합으로 만들어진 결정체지. 항상 내 말상대가 되어주었어."
<천후! 친구!>
<친구! 친구!>
두 녀석은 주변을 통통 튀어 다니며 그렇게 소리를 냈다.
지금에야 이렇게 단순한 말들만 반복하고 있지만, 한창땐 학습 머신의 역할도 톡톡히 해내어 중등교육 초반까지만 해도 이 둘의 도움으로 익혔었다.
"글쿠나."
"깔고 앉는 게 아니었어."
이브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태연하게 이마에 리본 모양의 음각이 파여 있는 구체, 프레이야를 다시 깔고 앉았다.
<하중초과! 기물파손 우려!>
둘의 응석에 프레이, 프레이야는 곤욕을 치르면서도 다 받아주었다. 과거 천후의 마력제어가 전혀 안 될 때도 전부 받아주던 머신들이었으니 사실 이 정돈 아무것도 아니었다.
"미미르의 리소스를 끌어다 쓰는 녀석들이라 정말 바쁠 땐 움직이질 못하는데, 오늘은 여유가 있었나 보네."
전에 왔을 땐 그 덕분에 만나보질 못했다. 천후는 정말 반가운 마음에 미소 지었다. 그때. 천후의 말을 듣고 있던 희주가 조심스레 물었다.
"주인님…. 유그드라실에서 각별히 친한 분이 다섯 분이라고 하셨는데. 혹시 그 중 나머지 두 분이…."
"네. 맞아요. 저 둘이에요."
"……."
태연하게 답하는 모습에 희주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녀는 그 후, 말없이 그의 한쪽 팔을 천천히, 하지만 강하게 끌어안았다
"?"
천후로선 그녀가 왜 그러는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말이다.
천후에게 있어서 이 둘은 어린 시절. 그의 인격 형성 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친구이자 동반자였으며, 존중해주는 것이 당연한 하나의 인격체였다.
비록 그것이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가공의 것이라 할지언정….
"전에 보내준 선물은 잘 받았어?"
<받았음. 매우 고마움.>
<지상 영상물은 마음의 양식.>
이전 첫 월급을 받았을 때, 이 둘을 위해 마련했던 선물은 영화와 다큐멘터리들이었다. 둘은 천후가 사춘기를 넘어선 시점에서부턴 유그드라실 내부 사원 가족들의 교육 등에 쓰이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이런 것들이 크게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곧 미미르에 직결되어 용량을 잡아먹었지만, 미미르는 이를 용인하고 있었다.
"신기하구나. 이런 것들이 날아다니면서 말을 하다니."
이그네스 역시 이브와 에바가 하나씩 차지한 녀석들을 보고서 신기한지 다가와 손을 내뻗었다. 그 순간.
<코드 프린세스…?>
<부정. 확정명칭 이그네스.>
위잉. 위잉. 프레이의 눈과 입에서 나오는 램프 불빛이 빠르게 켜졌다 꺼지기를 반복했다. 깜짝 놀라 이그네스가 손을 떼자, 그제야 프레이야가 말했고, 프레이의 상태가 회복되었다.
<긍정. 이그네스.>
"나, 나를 알고 있는 게냐?"
<영국에서 나타난 멸급 디제스터.>
<라고 위장된 마력 동화 마법사.>
미미르의 정보를 공유하는 만큼, 이 둘은 그녀의 정체를 금세 알아챘다. 하지만 천후에겐 조금 걸리는 것이 있었다.
"프레이. 코드 프린세스란 게 뭐야?"
그 질문에 한참 시끄럽던 프레이의 말이 딱 멎었다. 잠시 램프를 끄고 있던 프레이는 그러다 다시 시끄럽게 소리쳤다.
<모름! 모름! 말실수임!>
"비밀이야?"
<…….>
깜빡깜빡. 램프 불빛만이 점멸하고 대답이 없었다. 답은 프레이야가 해왔다.
<미미르에게 해당 정보 접근이 차단당했습니다. 극비로 분류되어 되어있습니다.>
"그런가…."
최완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미미르의 단말인 이 둘에게 파고들어 가봐야 정보가 공개되지 않았다. 다만, 유그드라실이 이그네스에 대한 정보를 사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확신은 얻을 수 있었다.
"그럼 용건은 끝났으니 돌아 가볼까?"
리미터는 제작할 수 없었지만, 천후 개인에게는 꽤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천후의 말에 에바와 이브는 아쉽다는 듯이 둘을 놓아주었다.
허공에 둥둥 떠다니던 구체들은 그러다가 이그네스에게 다가와 구체의 면을 그녀의 얼굴에 비벼댔다.
"으앗. 뭐하는 게냐!"
<우리 무섭지 않음.>
<안 놀라도 됨. 안 놀라도 됨.>
"……."
철저하게 유소년을 위해서 만들어진 녀석들답게 그녀가 만졌다가 놀랐던 것을 신경 쓴 모양이었다. 과도할 정도로 잘 만들어진 인공지능이다.
한참을 그렇게 문대던 녀석들은 그러다 천천히 문밖을 나서려고 하는 천후에게 말을 걸었다.
<천후. 천후. 또 올 거지?>
<다음에도 볼 수 있는 건가?>
지금까지 기계처럼, 아니 기계답게 뚝뚝 끊어지는 말만 하던 녀석들은 이 시점에서 인간적인 말을 하기 시작했다. 잠시 멈춰 섰던 천후는 활짝 웃으며 답했다.
"당연하지. 또 보자."
<잘 가! 잘 가!>
<안녕! 안녕!>
천후는 자신의 유년기를 함께 해주었던 머신들이 내는 말들을 뒤로하고서 다시 지상으로 향했다.
*
며칠 후. 일본 정부 측에선 DS에 공식적인 사과를 했으며, 대한민국 정부에서도 물의를 일으킨 사죄의 말을 꺼냈다.
그때가 되어서야 DS 공격대는 정식으로 다시 하쿠네 레이드에 동참하기로 합의가 끝났다.
사건의 전개에 여유가 있었던 덕분인지, 아니면 상대가 일본 정부였기 때문인지 대한민국 정부는 이번엔 작정한 듯이 일본 정부를 뜯어내기 시작했고, DS 피격의 여파 덕에 일본에선 이를 수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한편. DS에선 공격대를 파견하기 전에 공격대장들과 마지막으로 논의에 들어갔다.
"하쿠네는 매우 강력한 경급 디제스터입니다. 전 여러분들을 믿습니다만, 그래도 만에 하나 일어날 수 있는 희생은 최소화하고 싶습니다. 그러니 하쿠네 레이드 때는 가능하면 저와 강호 선배, 그리고 라즈베리. 모두가 공격대에 참가하도록 하겠습니다. 만약의 경우에도 셋 중 하나는 반드시 참가하겠습니다."
이미 어느 정도 패턴 분석이 끝나있는 녀석이었지만, 하쿠네는 그것만으론 부족한 면이 있었다. 인간을 가지고 놀 줄 아는 놈인 만큼, 최대한 빠르게 퇴치할 필요가 있었다.
지금까지 해외 레이드에선 사원들 수입 보장을 위해서 공격대만 파견하고 말았지만, 이번엔 안전을 생각해야했다.
"옳은 판단이십니다. 데이터는 있지만, 첫 교전이니 최대한 조심해야 할 적입니다."
"그렇지. 아. 그리고…. 이건 사족이지만."
"네?"
"혹시 저번처럼 너 혼자 아는 거 있으면 지금 털어놓고."
레이나드가 선글라스를 들추며 하는 말에 천후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영국 건 때 행동은 좋게 보일 순 없는 것이었으니까.
"이번엔 없어요."
"정말이지?"
"정말이에요."
"좋아. 그리고 앞으로도 숨긴다고 능사가 아니니까. 그런 건 빨리빨리 말해줬으면 해."
"알았어요."
"알겠습니다. 사장님. 방침에 따르도록 하죠."
잠시 천후를 탓했던 레이나드는 다시 바로 사원 모드로 돌아왔다. 천후는 이 둘을 받아들이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역시 직언해줄 사람은 필요하다.
특히 레이나드는 단순히 직언을 하는 사람이라기보단, 인생 선배로서 조언도 많이 해주곤 했다. 단순히 꼰대 소리로 들을 수도 있었지만, 천후는 그것을 달게 받아들였다.
이렇게까지 천후라는 개인을 위해서 쓴소리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의 양아버지였던 최완조차 방임주의자에 가까웠으니까 말이다.
덕분에 천후는 오히려 레이나드에게 고마움을 느끼곤 했다.
"그럼. 하쿠네 레이드 요청이 들어오면 초전엔 무조건 제가 함께 참가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요청은 얼마 지나지 않아 들어왔다.
일본은 전조 2단계 끝자락에 접어들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윌슨! 윌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