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천후가 음속을 넘는 속도로 돌아다닐 수 있어도 반경 2km 내에 있는 모든 사람을 홀로 피난시킬 수는 없었다. 전부 들고 뛸 수도 없는 노릇이고, A랭크 주문을 사용하고 있을 때 그의 몸은 불타오르고 있으니 타인과 접촉할 수도 없었다.
먼 거리에서 사람들을 말로 통제하는 것 말곤 그라고 대단한 방도는 없었다.
다행히도 금세 정신을 차린 자위대원, 경찰들이 상황파악을 마치고 피난 유도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대단하다…."
천후는 시민들이 피난하는 모습을 보며 무심코 그렇게 중얼거렸다.
재난에 익숙해서일까? 언제 다시 괴물이 나타나 날뛸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그들의 움직임에는 질서가 있었다. 하쿠네처럼 인간에 대한 공격성이 대단한 괴물이 설치는데도 민간인 피해자가 생각보다 적었던 데에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일부 구간, 특히 하쿠네가 사람을 잡아먹던 곳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패닉에 휩싸여있었지만, 그런 걸 제압하는 건 그리 어려운 게 아니었다.
그리고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역시 많은 수의 쉘터였다. 어지간한 골목길 하나마다 설치되어있는 수많은 쉘터 덕에 많은 시민이 빠르게 대피할 수 있었다.
"이런 건 좀 배워야겠지.“
천후는 잠시 이전 달동네에서 일어났던 참사를 떠올렸다. 그때 쉘터가 일본처럼 많았다면 그렇게 많은 사람이 다쳤을까 하고. 하지만 그 감상은 곧 끝났다.
“움직이자.”
공격대가 내뿜은 빛과 섬광과 화염이 터지며 하늘을 수놓는 광경을 본 천후는 어느 정도 상황이 진정된 것 같자 그쪽으로 신형을 날렸다.
*
"확실히… 흉악하긴 하군."
천후가 사람들을 구하느라 분주하던 시간. 홀로 하쿠네의 탱킹을 하던 강호는 입맛을 다셨다. 이놈의 패턴은 지금까지와는 또 조금 다르다.
민간인들을 죽이며 방심할 때 큰 타격을 입히는 게 지금까지 놈을 상대한 방법이라면, 이번엔 아예 전력으로 공격대와 부딪히게 되었는데 이게 꽤 끔찍하다.
등 뒤의 아홉 꼬리는 길이 제한이 있긴 한 건지 제멋대로 늘어나 칼날이 되어서 덮쳐오고, 몸체는 그것만으로도 흉기였다. 하지만 꼬리 공격이 전부 검격에 막히자, 하쿠네의 시선은 이제 이강호에게 완전히 집중되었다.
"캥!"
분노가 섞인 울음소리를 낸 하쿠네의 볼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통신기를 통해 정태원의 지시가 들려왔다.
"브레스. 차단."
짧은 구호였지만 강호는 충분히 알아들었다. 강호는 근처 건물로 재빨리 내려온 이후 정신을 집중했다. 그와 동시에 하쿠네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캬아아아아악!"
그 입에서는 튀어나와야 할 불길 대신 톱날과도 같은 이빨만 훤히 드러낼 뿐이었다. 하쿠네는 당황했는지 입을 닫지 못하고 놀라고 있었지만, 강호는 코웃음을 치며 모드를 껐다.
"브레스 차단 및 전환 완료."
"발사!"
번쩍! 순간 섬광이 터지면서 화염부터 전격까지 모든 속성의 마법들이 하쿠네의 몸에 틀어박혔다. 이강호의 시야에서 일부러 완전히 벗어나 있었던 DS 일리미네이터들의 마법이었다.
컴뱃 캐스팅에 숙련된 덕분에 하프 캐스팅 이상의 위력을 가진 이 공격 집중에 하쿠네는 큰 피해를 보았다.
"캐캥…!"
신체의 상당 부분을 잃은 하쿠네는 그 자리에서 풀쩍 쓰러졌다. 놈의 몸은 빠르게 재생되고 있었지만, 단번에 입은 데미지를 무마할 수 있을 정돈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태원이 소리쳤다.
"카마이타치 소환 패턴 스킵. 1, 2팀 풀 캐스팅 딜레이. 나머지 2초."
촤아악! 위기라는 것을 감지한 하쿠네의 꼬리가 크게 펼쳐지며 사방으로 흩어진 일리미네이터를 노렸지만, 쌩쌩할 때도 막히던 공격이 지금 와서 어떻게 될 리가 없었다.
그때마다 은선이 접근을 차단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2초가 지나고, 다시 한 번 섬광이 터졌다.
푸가각! 하쿠네의 본체가 더는 아름답지 않게 부서지자 놈의 저항은 그제야 끝났다. 그와 동시에 날뛰던 꼬리들의 움직임도 잠시 잠잠해졌다. 그러나 그 직후였다.
파스스슷. 땅에 주저앉았던 꼬리들이 움찔거리더니, 거기에서 다리들이 돋아나 갑자기 여우모양새를 취했다.
"키잉!"
이강호와 다른 공격대원들을 한 번씩 쳐다본 놈들은 그대로 몸을 돌려서 아홉 방향으로 흩어져 도망치기 시작했다.
"마지막 페이즈! 추격 섬멸!"
그 말과 동시에 온전히 수를 유지하고 있던 24명의 공격대원이 하늘에서 흩어져 놈들을 쫒았다.
"아홉 중 하나라도 살아남으면 곧 본체로 재생됩니다!"
그렇게 되면 경급 디제스터와 연전을 하는 꼴이 된다. 절대 바라지 않는 전개였다. 공격대원들을 사력을 다해 여우를 쫓았다.
"캥!"
"키이익!"
다행히 꼬리가 변한 그것들은 그리 강하지 않아 C랭크라도 2인 1조로 팀을 꾸리면 해치울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좋은 싸움이었다."
푸욱! 단박에 마지막 남은 여우의 목을 내려친 이강호는 검날에 묻은 피를 흩어냈다. 그것을 기점으로 반경 2km 너비에 펼쳐져 있던 던전이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던전 내부의 사이한 안개들이 흩어지며 태양 빛이 온전하게 지상에 닿았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 태원이 선언했다.
"수고하셨습니다. 하쿠네 레이드 성공입니다."
역시 정예 멤버를 전부 끼고 온 보람이 있어서 공격대원 중에는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퇴치된 하쿠네의 본체가 있는 곳, 경기장은 이제 완전히 녹아내렸으리라.
교전하느라 이미 엉망이 되어있긴 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어떻게든 수리해서 쓸 수 있는 정도였다면, 이젠 아무것도 없는 폐허로 변했을 터였다. 주택가가 아닌 게 어디냐만 그래도 아쉬운 일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태원 씨. 그리고 강호 선배. 잠시 이쪽으로 와보겠어요?>
"아. 사장님. 어디로 말입니까?"
<하쿠네의 본체가 있는 곳입니다. 너무 가까이 오진 마시고, 눈으로 제가 보이는 곳까지만 다가오세요.>
"음?"
그곳은 이제 지면과 건물이 녹아내리면서 배출된 유독가스로 자욱해졌을 곳이었다. 마법의 영향으로 어느 정도 버틸 순 있겠지만, 전투 직후 찾아갈 필요까진 없을 텐데?
그렇지만 사장이 까라면 까야 하는 법. 태원은 군소리하지 않고 천후가 있는 곳으로 찾아갔고.
놀라운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이…이건…."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액체였다. 정확히는 구 형태로 한 점에 모어서 허공에 떠 있는 녹색 액체.
태원은 보는 순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하쿠네의 독기를 한데 모은 겁니까?"
<네.>
여전히 화염 마인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 천후는 그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
공격대원들이 본체를 버려두고서 꼬리를 쫓아다니고 있을 때, 천후는 경기장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이 상태에서는 아직 독기로 변형되지 않았군."
아무래도 꼬리가 전부 잡히기 전에는 변형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것을 확인한 천후는 통신기로 전투 경과를 듣다가 마지막 한 마리가 잡히기 전에 놈의 시체를 염동력으로 공중에 띄웠다.
그 시체는 강호가 마지막 꼬리를 해치운 순간 갑자기 변형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순식간이었다. 말짱하게 시체 형상을 유지하고 있던 놈이 갑자기 소립자단위로 붕괴하면서 그 전체가 독성성분으로 변해갔다.
미처 띄우지 않았던 지면에 흐르던 피 역시 갑자기 녹색으로 변한다 싶더니, 지면을 하염없이 녹이며 파고들어 갔다. 그에 의해 생겨난 유독 가스에 천후는 인상을 찌푸리며 자리를 조금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지면에 흐르던 피보단 본체 자체가 더 컸기 때문에, 경기장 전체가 녹아내리지는 않았다.
<일단 입체적으로 염동력을 작용하고 있긴 한데…. 혹시 일부 새나갔을 수도 있으니까 그 이상 다가오지 마세요. 공기 중에 섞인 걸 조금이라도 흡입하면 폐가 녹아내릴 겁니다.>
"……."
천후의 말에 태원은 대답하지 못하고 그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강화마법은 지속시간형이고, 비행마법도 엄밀하게 따지자면 강화계니까 천후에게 효율이 높은 것은 알겠다.
하지만 염동력, 텔레키네시스는 당연히 강화계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도 무게가 수십 톤은 넘어가는 하쿠네의 몸이 변형한 독액을 저렇게 태연히 공중에 띄우고 있다니?
주특기에 대한 상식을 부수고 있었다. 아니 설령 주특기가 두 개라 하더라도 저 정도면 분명 마력이 미친 듯이 소모되고 있어야 정상일 텐데, 천후는 그다지 걱정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이게 대체…."
<일단 저에 대한 건 나중에 이야기할 테니. 이것에 대한 처리를 좀 생각해보죠. 시험해보고 싶은 게 있어요. 이게 선배의 특성에 영향을 받는가. 선배. 정확히 이 액체에 대해서만 특성을 발휘할 수 있겠어?>
"으음…. 아니. 아마 네 염동력도 같이 풀릴 거다."
<아… 어쩔 수 없나. 그럼 최대한 빠르게 켰다 꺼봐요. 저도 바로 다시 염동력을 사용할 테니까.>
그 말에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인 강호는 특성을 발휘했다. 하지만 그 순간 허공에 떠 있던 액체가 주륵 하고 땅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깜짝 놀라 강호는 급하게 특성을 껐고, 다행히도 그것들이 땅에 닿기 전에 그것들이 다시 구체로 모이기 시작했다.
단지 액체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뿐 아니라, 그 순간 바람에 의해서 흩어져 나가려는 것까지 염두에 둬서 주변 전체를 훑어서 긁어모은 것이다.
"안되는군. 아무래도 육체 자체가 변형한 거라 취급이 좀 다른 모양이다."
<그러게. 이럼 피곤해지는데…. 어디 마땅히 버릴 데 없나?>
시험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지만, 당장은 이걸 담을 수 있는 용기를 찾아낼 수가 없었다. 유그드라실도 노력해왔지만, 지면에 남은 극소량의 시료만 가지고는 시험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천후도 지금은 괜찮았지만, 이걸 영원히 염동력으로 띄우면서 연구에 협조해줄 수 있을 정도의 여력은 없었다. 염동력을 사용하는 데에 붙는 제한조건이 있는 이상. 그러니 최대한 빠르게 이걸 어딘가에 버릴 필요가 있었다.
그 대화를 듣고 있던 태원은 한참 골똘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사장님. 염동력으로 그걸 우주 밖으로 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
천후는 잠시 솔깃해서 독액을 바라보았다. 그게 가능하다면 최고의 방법일 것 같긴 했다. 하지만 그는 곧 고개를 저었다.
<해봐야 알 것 같아요. 그런데 한 번도 안 해본 시도라 잘못해서 실패하면 큰일 날 것 같아서 좀 그러네요.>
바람 타고서 전 세계 대기에 흩어지기라도 하면 수습이 안 된다.
"그럼… 일본 정부에 연락을 취해보겠습니다. 무인도라도 하나 잡아서 거기에 버리는 수밖에 없겠군요. 그리고 일정량은 남겨서 유그드라실과 각국 과학 연구소에서 연구할 수 있게끔 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염동력은 언제까지 유지될 것 같습니까?"
<아.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오늘 내면 어떻게든 될 것 같군요.>
"……."
잠깐 입을 벌리고 놀랐던 태원은 곧 유그드라실과 한국, 일본 양국에 연락을 취했다.
*
"세상에. 독기를 완전히 차단해버렸다고?"
"37톤을 온종일 들고 있을 수 있는 염동력? 이 무슨…."
DS의 조치에 일리미네이터들은 경악에 휩싸였다. 지금까지 하쿠네를 잡고도 흩어지는 독기를 막지 못해 막대한 피해를 낼 수밖에 없었는데 DS에 의해서 그 해결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까지 외국 공격대를 끌어들인 것에 부정적이었던 일본 언론은 곧바로 DS에 대한 찬양 일색으로 돌아섰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번 하쿠네 레이드는 민간인 피해도 거의 없었던 데데가, 교전 위치가 애초에 사람이 없었던 경기장이었기 때문에 거기선 독기가 퍼졌어도 피해가 최소화될 수 있는 위치였다.
미리 이렇게 대처해놓은 상태에서 독기까지 회수를 해버렸으니, 이젠 일본 정부나 라이징 선 측에서 아무리 해도 분위기가 넘어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이번에 회수된 하쿠네의 독액의 90%는 일본의 무인도에 버려질 것이고, 남은 것은 유그드라실 마법사에게 염동력으로 통제되면서 각국 연구소에서 연구될 것입니다.”
겨우 10%라지만 그것만 해도 3톤 이상. 연구용으론 충분한 양이었다.
이 발표를 들으며 다른 이들은 능력의 차이를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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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넥센은 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