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환란>
하쿠네 레이드에서 일본 일리미네이터 상당수가 사망했다. 특히 B랭크가 4명이나 사망한 여파는 커서, 결국 일본 정부는 정규 공격대들에게 추가적인 보상을 약속하고 그들을 다시 끌어들여야 했다.
그렇게 5개 공격대가 움직이는 틀을 잡게 되자, 그때가 되어서야 조금 상황이 호전되며 사상자 관리가 되기 시작했다.
그 와중 오직 DS만이 유일하게 도심지에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는 식으로 싸울 수 있었는데, 일본 정부에선 모든 레이드를 DS에 의뢰하고 싶어 했지만 공격대 간의 수익 배분 문제로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런 사정이 일본 매스컴의 귀에 들어갔고, 일본 내에서는 자국 공격대인 라이징 선과 아마테라스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었다.
"능력도 없으면 일을 넘겨라!"
"주택가가 초토화하고 있는데 무슨 자존심 싸움이냐!"
"공격대들 놀음에 국민들만 죽어간다!"
시민들의 이런 목소리에 일본 정부와 라이징 선, 아마테라스에선 변명에 급급했지만, 애초에 틀린 말이 아닌지라 대응할 논리가 부족했다. 이로써 일본 정국은 혼돈의 구렁텅이로 말려들어 갔다.
라이징 선의 마스터. 진구지 하야토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런 시점이었다.
*
일본 T대학 병원. 일본 굴지의 병원이라고 불리는 이곳의 특실에 누워있는 한 남자, 친구지 하야토는 버럭하고 소리를 질렀다.
"아야메! 아야메!!!"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저편에서 가만히 앉아있던 스즈키 아야메가 그에게 다가왔다.
"네. 왜 그러세요?"
"젠장…. 언제까지 날 여기에 가둬둘 셈이냐? 상황이 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냐고!"
소리를 지르자 금세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지며 혈관이 돋아났다. DS, 영천후에게 당한 안면 공격의 여파는 한 달 가까운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남아 흥분하면 쉽게 뇌혈관 고혈압 상태가 되곤 했다.
"끄읍…!"
아니나 다를까 침대에서 내려와 그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던 그는 갑자기 이마를 부여잡고는 휘청거렸다. 깜짝 놀란 아야메는 그릇을 내려두고선 그를 부축했다.
"무리하지 마세요. 다 잘되고 있으니까…."
"이년! 웃기지 마라! 네년이 지금 여기에 와 있는 것 자체가 이상하단 말이다! 나를 뭐로 보는 거냐!"
"……."
그의 말에 스즈키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알아주는 극우파 종자였지만, 그렇다고 머리까지 나쁜 것은 아니었다.
진구지 하야토의 전권 대리인인 그녀가 하릴없이 병원에 들르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이미 좋지 않은 조짐임을 짐작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일부러 그에게 일정 이상 정보를 풀지 않았던 스즈키로선 어찌할 말이 없었다.
"이 빌어먹을 병원 특실에 TV 하나 없고, 내 핸드폰도 못 만지게 하는 데 내가 의심조차 하지 않을 줄 알았나? 뭘 숨기고 있는 거야? 응?"
콱! 단숨에 그녀의 긴 머리채를 잡아챈 진구지는 그대로 그녀를 땅으로 내쳐 버렸다.
"꺅!"
"날 더 짜증 나게 하지 말고 어서 말을 해! 이 빌어먹을 년!"
퍽! 진구지의 맨발이 그녀의 흰 얼굴을 걷어찼다. 오뚝한 코에서 흘러나온 피가 바닥을 적신다. 스즈키는 겁먹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진구지는 코웃음을 치며 그녀에게 다가가 얼굴을 맞췄다.
"이봐. 아야메. 뭘 걱정하고 있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버려지고 싶냐?"
"아…."
스즈키 아야메의 눈엔 얻어맞았을 때보다 더 아득한 공포가 자리 잡았다. 그녀의 고개가 크게 좌우로 흔들렸다. 킥하고 웃은 진구지는 왼손을 크게 들어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짜악!
"아악!"
"그럼 말을 해."
"네, 네…."
고통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감정 때문일까. 한줄기 눈물이 아야메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진구지를 다시 침대까지 부축해서 데려가 눕힌 스즈키는 그 이후, 진구지가 병상에 누워있는 동안 있었던 일들을 하나씩 풀어서 이야기해주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얼굴은 점점 딱딱하게 굳어갔다.
"그렇군. 내부는 둘로 갈렸고, 외세가 셋이 엮여서 국부를 갉아먹고 있다는 겐가."
"……."
자기 입맛에 맞게 현 상황을 이해한 진구지는 이를 갈았다.
"이 미천한 놈들은 내가 없는 동안 아주 별짓을 다 했군. 뭐? 나에게 책임을 물어? 얼굴도 마주 보지 못할 것들이."
코웃음을 친 진구지는 그대로 아야메의 입술을 자기 입으로 덮었다. 아무런 전조조차 없는 행동에 놀랐지만, 그녀는 곧 덜덜 떨면서도 그것을 받아들였다. 한참을 그녀를 탐하던 진구지는 그러다 마지막에 그녀를 거세에 밀쳐내고는 말했다.
"상황은 알았다. 일어날 때가 됐군. 하지만 그 전에…."
"아…."
그 순간. 아야메는 진구지의 눈에 욕망이 번들거리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보통. 그가 이런 기색을 보일 때 그녀에게 하는 요구는 하나였다.
"여자. 여자를 불러와."
"하, 하야토. 그건…. 저로는…."
소극적으로 저항해보지만, 진구지는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안돼. 네년은 이제 질렸어."
"……."
"꾸물거리지 말고 데려오라고. 버림받고 싶어?"
"그…. 그러지 마세요! 할게요! 할 테니까…."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아니 실제로 울면서 외친 아야메는 병실 문 밖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병실엔 여자 셋이 들어왔다. 그들은 모두 탐탁지 않게, 혹은 질색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에게 몰려들어서 암컷의 행위를 시작했다.
그중 하나와 진하게 입을 맞춘 진구지는 병실 저편에서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스즈키를 향해 말했다.
"의사나 간호사 같은 게 오면 귀찮아지니까 나가서 문단속이나 하고 있어."
"……."
그 말 이후, 진구지는 더 해줄 말이 없다는 듯이 행위에 집중했다. 여자 중 하나를 침대에 바로 눕히는 것을 바라보던 스즈키는 얼음장 같은 얼굴로 병실 밖으로 나왔다.
문밖으로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광란의 소리를 들으며, 스즈키는 문에 기대어 꿇어앉았다.
"흑…. 흐윽…."
양다리를 끌어안은 그녀는 그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는 흐느꼈다.
*
라이징 선엔 여자가 많다.
이것은 일본 내뿐 아니라 세계 일리미네이터 업계에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이었다.
보통 정규 공격대의 성비가 남자 6에 여자 4였다면, 라이징 선은 남자 2에 여자 8이었다. 물론 여기엔 이유가 있었다.
진구지 하야토 때문이었다.
진구지 하야토는 색욕이 강했다. 그러면서도 여자를 돈을 주고 사서 쓰는 것은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상대를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몰아붙이거나. 혹은 상대가 직접 자신을 가져달라고 애원하게끔 만드는 상황을 좋아했다.
그 첫 희생양이 스즈키 아야메였다.
자기 주관이 약한 성격이었던 아야메는 비뚤어져 있긴 하지만, 자기를 완전히 휘어잡아 결정을 대신 내려주는 그를 좋아했다. 하지만 아직 몸을 허락할 정도는 아닌 상황에서…. 그녀는 강제로 범해졌다.
아야메는 그 상황에서 감정오류를 일으켰다. 남성으로서 참을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내가 계속 거절한다면 그는 나를 버릴지도 모른다는 위기감도 있었기에, 그녀는 그 사건을 조심스레 묻었다.
그것이 방아쇠가 되어. 그는 폭주하기 시작했다.
한차례 허용한 몸은 이제 완전히 그의 것이 되어서, 다른 사람에겐 갈 수 없는 몸이 되었다. 너무나 더럽혀져서, 그럴 생각조차 들지 않게 되었다.
그녀는 그렇게 완벽하게 그의 것이 되었지만, 진구지에게 아야메는 소모품에 지나지 않았다. 진구지는 순종적인 그녀에게 빠르게 질려갔다.
불행히도. 그에 대한 애정을 도저히 버릴 수 없었던 아야메는 어떻게든 그의 사랑을 받고 싶었다.
그때. 진구지는 제시헀다.
"다른 여자를 데려와. 그럼 널 사랑해주지."
한눈에 보아도 미친 소리였지만. 당시의 아야메에겐 광명처럼 여겨졌고…. 그에 따랐다.
물론 진구지에게 아야메란 질려가는 장난감에서 조금 재미있는 장난감으로 승격하는 정도의 이벤트에 불과했지만.
그동안 라이징 선은 점점 그에게 복종하는, 몸을 바친 여자들의 공격대로 변질되어갔다. 아야메가 데리고 온 여자. 자발적으로 진구지의 아래에 들어오기를 원했던 여자들의 공격대.
마음속으론 진구지를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그가 A랭크 일리미네이터이자 공격대의 주인인 것은 변함없는 진실이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그런 그림이 완성되면 완성되어갈수록 스즈키는 자신의 처지가 어떤 것인지 알아갔다.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전혀.
'어떻게 망가지는지 보고 싶은 것뿐이야.'
이미 반쯤 버린 장난감의 발버둥을 보며 즐기고 있을 뿐.
간간이 지쳐, 정말로 그에게서 벗어나고자 하는 그 순간에만 안아주었다. 어리석은 스즈키는 그때마다 다시 재충전되어 그의 악덕을 돕곤 했다.
이것이 얼마나 끔찍한 순환인지 모르는 바가 아님에도 그랬다. 이제 그것 외에는 다른 방법을 전혀 모르게 되어버렸다.
문득. 과거 피해자가 될 뻔했던 아이가 얼마 전 해주었던 말을 떠올렸다.
'언니가 하는 행동은 미스터 진구지에게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알고 있다. 알고말고. 그렇지만….
안 그러면 버려지는걸.
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건 싫다.
이렇게 많은 죄를 지었는데 어떻게 그에게서 벗어나란 거니, 라즈베리?
나는 이제…. 그밖에 없어.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미안해…. 미안해요…. 미안해…."
진심이지만 진심 아닌 사과가 허공에 허무하게 흩어졌다.
그것엔 정말이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
기력을 어느 정도 회복한 진구지는 일본 일리미네이터를 소집했다. 레이드의 한 축을 맡고 있던 라이징 선 잔류 멤버들이야 당연히 그에 응했다. 그에 비해 아마테라스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지가 뭐라고."
아마테라스의 수장 히로후미의 입장은 간단하게 이랬다. 라이징 선을 재규합하든, 뭘 하든 상관없으니 혼자 놀라는 태도였다. 하지만 진구지가 다음 가져온 핑계에는 그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곧 멸급 디제스터가 나타난다. 던전화 디제스터가 아니라면 그걸 상대할 최정예 멤버를 꾸려야 하지 않겠나? 외국 공격대의 참여는 최대한 배제해야 한다.'
외국 공격대는 멸급 디제스터 등장 시 일어날 하쿠네 웨이브만 상대하게 하고, 멸급 디제스터는 일본의 힘만으로 쓰러뜨려야 한다는 논리는 아마테라스 내부에서도 크게 공감을 했다.
라이징 선이나 아마테라스나 25인 공격대였으니 이 상황에서 분열해서 멸급 디제스터에게 대응할 순 없었다. 아니, 던전화만 불가능하다면 웨이브는 외국 공대에 전부 맡기고 일본 일리미네이터 전원이 덤벼드는 것이 가장 이상적일 것이다.
그것에 대해 의논하자는 데에는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히로후미 역시 자신이 이제는 진구지와 동급, 혹은 그 이상의 존재임을 인지시킬 필요가 있었다. 언젠가 한번은 대면해야 할 상대. 결국 아마테라스는 소집에 응했다.
"늦는군."
그들이 모이는 장소는 긴자의 한 요정이었다. 보통의 요정은 방 하나에서 서넛이 은밀한 대화를 하기 위한 곳이었지만, 이곳은 수십 명의 인원이 둘러앉아서 술을 마실 수 있는 방이 있었다.
히로후미는 그중 가장 상석에 앉아 진구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라이징 선의 다른 인원은 다 왔지만, 진구지와 스즈키만은 조금 늦어지고 있었다.
그때였다.
"내가 조금 늦었군."
덜컹. 미닫이문을 세차게 열게 들어온 진구지 하야토는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그는 가슴팍이 다 드러나 보이는 하카마를 입고 있었다.
'많이 회복되었군.'
히로후미는 그의 얼굴이 그냥 보기엔 다치기 전과 큰 차이가 없는 것을 보고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몸 상태에 따라 히로후미의 입지도 달라진다.
히로후미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뻗었다.
"오랜만이오, 진구지. 그대가 없는 동안 다른 공격대를 만들게 되었소."
"아하. 히로후미. 이거 참 오랜만이군."
내뻗은 손을 슥하고 내려 본 진구지는 활기차게 웃으며 같이 손을 움직였다.
허리춤으로.
푸칵!!!
순간. 연회장의 벽면이 피로 물들면서, 땅으로 무언가가 떨어졌다.
히로후미의 목이.
"국론을 분열시키는 매국노 새끼가 어딜 감히 더러운 손을 내미느냐?"
진구지의 차가운 일갈이 한순간에 일어난 일에 놀라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던 이들을 모두 현실로 되돌려놓았다.
그의 손에는 방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일본도가 들려있었다.
"히로후미 씨!"
"이 미친 자식이!"
요정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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