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꿈같은 소리였다. 당최 그런 게 가능하긴 한가? 그렇지만 저 여자가 말하니 어째 불가능 할 것 같지 않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인권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그게 가능해? 등록되지 않은 고아가 얼마나 많은데."
"후후. 조금 허세 섞인 발언이었다. 놈들의 수법을 보니, '판매'를 위한 루트는 몰라도 지금 마츠모토 사건처럼 불시 테러를 위해 입양 보내는 아이들은 어느 정도 버젓한 루트를 통하는 것 같거든. 정확히는 그런 보호시설들에 한정 지어야겠지."
당장 하루가 멀다고 테러가 일어나는 지역에선 마법사 아이들을 탄환으로 삼아봐야 별 의미가 없다. 소말리아에서 폭탄테러가 일어난다고 해서 그게 전 세계에 큰 반향이 일어날까? 천만에.
그렇지만 인권에 대한 의식이 확고한 선진국, 미국을 위시한 서양권 국가들이나 일본, 대한민국 등에선 어떨까? 단 한 번의 사건으로 경각심을 극대화할 수 있다. 당장 일본의 상태가 그러했다.
“물론 이걸 우리만 짊어지자는 건 아니야. 엘모세와트란 키워드를 처음 제공해준 월드 리버티나 다른 정규 공격대의 도움도 받아야겠지. 해당 국가의 정부나 보호시설의 협조가 필요할 테고 넘어야 할 과제가 없는 건 아니지만, 이 정도로 한정시켜서 걸러내는 건 못할 것도 없을 거네. 하지만 유그드라실에겐 꿈같은 일일 게야."
순수하게 조사할 사람 수가 달리는 이상 어쩔 수 없는 문제. 하지만 이들은 달랐다.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이 일을 우리가 맡는다 해서 무슨 이득이 있느냐 하는 것인데."
그 말에 천후의 표정은 약간 어두워졌다. 유그드라실이 부탁하는 일을 들어주는 건, 어느 방향이 되던 자선사업에 가까운 모양새가 된다. 물론 유그드라실에게서 돈을 뜯어내고자 하면 할 순 있겠지만, 어차피 자충수에 가까운 문제가 된다.
지구 전역에 텔레포테이션 시스템이 확립되어있는 것도 아닌 이상 유그드라실의 신세는 계속 질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었으니까. 그것 외에도….
"놈들의 범죄는 용서해줄 수 있는 성격이 아니야. 난…. 이건 이득이 없다고 해도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해. 그 범위가 좀 줄어들더라도."
"흐음."
천후의 말에 친란은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곤란하군, 곤란해.'
천후는 사람을, 그것도 어린아이들을 세뇌하여 폭탄으로 삼는 놈들의 행위를 지켜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이 마법사가 아니라 그냥 보통 사람이었어도 똑같은 태도가 나왔으리라.
매우 훌륭한 인간성이지만, 그가 바라는 걸 전부 들어주자면 손해만 쌓인다. 게다가 이번 일은 고아들의 개인정보를 파고들어 가는 일이니 각국 정부에게 좋은 인상을 주긴 힘들 것이다.
짊어지는 리스크가 돈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런 데 아무 대가를 원하지 않는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다만 오랜만에 마음에 든 이 남자는 유그드라실에서 받아내는 것을 한정 지어서 생각하고 있었다.
일단 이 부분부터 깨우치게 해야할까 하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유그드라실에서 받아낼 수 있는 건…. 돈만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주인님에게 숨겨왔던 정보의 일부. 혹은 주인님에 대한 태도의 전폭적인 개선 등을 요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요구하기 전에 유그드라실 구성원이 주인님에게 감화될 수도 있는 일이지요."
"아."
잠깐 틈을 두고 이야기하려고 하던 차에 느릿한 목소리가 그 틈을 채갔다. 고개를 돌려보니 셀레나도 친란과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천후는 크게 깨우쳤다는 듯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티는 안내지만 희주는 그런 그를 보며 기뻐하고 있는 게 보였다.
"으으음."
당했군, 당했어. 하지만 신기하게도 못마땅하지는 않았다. 저렇게 기뻐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독점욕이 강한 편인 친란은 스스로 조금 놀랐다.
"요점은 알았어요. 하지만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거 같네요. 일본 사태가 너무 급박하니.“
“네. 그리고 각 정부의 협조도 필요한 일이니, 이번 사태를 확실히 마무리 지어서 주인님의 입지를 굳건히 하시는 게 도움이 될 겁니다.”
이미 드래곤 레이드를 성공한 시점에서 그는 세계 굴지의 일리미네이터였지만, 이제 데뷔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일리미네이터이기도 했다.
각 정부 사이에는 아직 월드 리버티의 안소니 크라우저와 패트릭의 명성이 굳건했고, 그들은 그런 평가를 받을만한 일을 이미 한 상태. 적어도 그들과 비슷한 수준이 되어야만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서 힘을 합칠 수 있으리라.
'이것도 레이든가.'
그렇다면 방관자-유그드라실-가 해결할 수 있는 분명 아니다. 천후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
눈 내리는 계절이 왔다.
올해의 첫눈은 일찍 내렸다. 12월 초가 되었을 때 수북이 쌓일 정도로 오더니, 그 뒤로도 몇 번이나 내렸다.
"후아! 추워!"
"난로, 난로."
"그러니까 난로가 아니래도!"
그 눈길 사이로 우산을 챙겨 든 여자아이 셋이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정확히는 한 아이의 양옆으로 다른 둘이 붙었다. 그 둘은 추위에 차가워진 손을 중간의 아이 겨드랑이나 목덜미 사이로 쏙 집어넣었다.
언뜻 괴롭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아이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으아. 녹는다아."
"손난로보다 이그네스 몸이 더 따듯해."
"후우우…."
중앙의 빨강 머리칼의 아이, 이그네스는 한숨을 내쉬며 둘의 행동을 받아줄 수밖에 없었다.
마력동화를 일으킨 그녀의 몸은 열 변화나, 그로 인해 일어나는 부가현상에 면역에 가까웠다. 리미터로 억누르고 있는데도 그건 마찬가지여서 이렇게 얼어붙은 손을 가져다 대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촉감을 느껴져도 그게 차갑단 느낌은 전혀 없달까?
"잘 다녀왔느냐?"
"응. 별거 없었어."
둘이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지도 꽤 지났다. 희주의 로비가 먹힌 덕분인지, 아니면 둘의 친화력이 이전보다 더 나아진 건지 둘은 괴롭힘과는 전혀 무관한 살을 살고 있었다.
오히려 마중을 나오는 이그네스가 가만히 지켜보니, 남자아이들 사이에선 꽤나 인기가 있어 보였다.
"아. 학교 공부 시시해. 나도 일본 가고 싶은데."
"맞아. 자기들끼리만 놀러 가구."
일본의 전조 단계가 3단계까지 진행됨에 따라 천후와 강호, 라즈베리는 집을 비우는 일이 잦아졌다. 일본 정부에서 제공한 호텔에서 머물거나, 아니면 사무실에서 아예 숙식을 했다.
DS를 만들 당시엔 전조, 웨이브 시기에 이렇게 바빠질 걸 생각 못 한 덕에 미처 대비를 못 했었다. 하지만 이번 일을 거울삼아 DS 본사 옆엔 이럴 때 사용할 임시 직원숙소를 따로 올리기 시작했다.
"속없는 소리 말거라. 일본은 지금 한참 난리인데 그런 말 하는 거 아니다."
"으음~. 그래두 우리도 강호 서방…. 이 아니라 강호 언니 서포터랑 오퍼레이터인데."
"예전엔 이런 일 있으면 맨날 붙어있어 줬단 말야."
그 말에 이그네스는 한숨을 쉬었다.
천후의 집에서 동거하면서 일리미네이터가 무엇이고, 서포터, 오퍼레이터가 뭔지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브와 에바의 처지도 말이다. 그리고 이그네스가 알기론….
이 둘은 이제 서포터, 오퍼레이터가 아니었다. 그냥 이강호 가족이지.
'아직도 말해주지 않았었나. 귀찮은 일을 떠넘겼구나.'
아이들을 집으로 들인 이후, 천후는 둘에게 서포터, 오퍼레이터 일을 그만두게 했다. 본인들에겐 비밀로 하고 말이다. 대신 강호에겐 라즈베리처럼 완전히 고용관계인 사람들을 붙여주었다.
이 위험한 일에, 아무리 서류에만 등록되어있다지만 굳이 함께하게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이강호가 솔로로 활동할 때도 둘이 현장에 함께하는 일은 없었지만, 법정 조건은 지켜야 했기 때문에 중국으로 출장을 나갈 땐 따라가야 했다. 도움이 되는가 여부도 건성으로나마 체크 받아야 했고.
당시엔 그녀의 조부 문제도 있어서 어쩔 수 없었지만, 그걸 전부 씹어 먹을 수 있게 된 이상 아무리 리스크가 적은 일이라도 연관되게 할 이유가 없었다.
문제는 이 둘이 그동안 그렇게 활동해온 것에 은근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서…. 이제 너흰 그냥 식비와 학비를 잡아먹는 꼬맹이일 뿐이지~라고 말해주기 조금 힘들어졌단 거였다.
그래서 천후나 희주, 강호는 그 뒤로도 그냥 사실을 말해주지 않고 있었다.
당연히 이그네스도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껄끄러워하는 것은 다른 이들과는 좀 사정이 달랐다.
"이거 봐, 이그네스. 나 이번 과학경진대회에서 상 받았다?"
"나두! 나도 요리로 상 받았어! 곧 자격증도 딸 거야."
"으음…. 대단하구나. 응."
이그네스는 몰려오는 죄책감에 자기도 모르게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으히히. 나중에 이것들 쌓아서 보여주면 오빠도 깜짝 놀라겠지?"
"그, 그럼."
이 쌍둥이들은 어른들이 자기들에게 사실을 숨기고 있는 사이에, 각자 그에 걸맞은 기술을 쌓아가기 시작했다. 그것도 아주 맹렬한 속도로.
둘의 학교 성적은 대단했는데, 사실상 초등교육 수준은 이미 필요가 없단 소리를 듣고 있었다. 도덕이나 체육 등을 제외하면 말이다.
게다가 둘의 특기 분야도 어느 정도 분화되어, 이브는 요리와 장비 조종, 에바는 프로그래밍을 익히고 있었는데 이미 간단한 자작 게임을 몇 개나 만들어냈을 정도였다.
'이러고 있는데 잘렸다는 말을 했다간….'
현대 사회 상식이 아직도 좀 떨어지는 이그네스였지만, 그래도 이 일에 대해선 본능적으로 말하면 안 된다고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단지 그것뿐 아니라. 둘이 이러고 있는 걸 보면…. 뭔가 이렇게 아이답게 반짝반짝 빛나고 있어서, 절대 더럽혀선 안 된단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한참 달라붙어 있던 에바가 말했다.
"이그네스도 얼른 학교에 다니면 좋을 텐데."
"애들 많고 재미있어. 남자애들이 누구냐고 맨날 물어보는데."
"후후. 그러냐? 몸이 조금 더 좋아지면 그래 볼까."
이그네스는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라즈베리처럼 천후도 이그네스에게 학교에 다닐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지만, 이그네스는 아직 그 마음을 정하지 못해 저어하고 있었다. 당장 팔에 차고 있는 리미터도 종종 갈아줘야 했기에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단지 자신의 위험성 때문만이 아니라, 그녀는 본디 성인. 시대가 지나 익힐 지식이 많아졌다고는 하나 어린아이들의 학교에 가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기껏 다닌다 쳐도… 이 몸이 과연 다시 성장할지. 그것이 과연 나이에 맞는 성장 속도일지도 의문인 상황.
이브와 에바는 점점 자라는데 그녀 혼자 어린아이의 모습을 계속 유지한다면, 둘의 마음은 어떻게 될까?
…그때에 가서 자신의 마음은 어떨 것인가.
그런 것을 생각하다 보면, 쉽게 마음을 정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그네스는 천후 등과 입을 맞추어 '병약해서 학교에 갈 수 없다'는 속성을 부여하기로 했다. 대신 많이 건강해진 상태라는 식으로 말이다.
"글쿠나. 좀 더 건강해져야지. 그럼 다음 학년 올라갈 때까지 더 건강해져!"
"올해는 이제 다 다 끝났으니까 내년부터 같이 다니자."
"후후. 그렇게 된다면 말이다."
이 아이들을 상대로 거짓말을 하는 건 마음이 아프다. 하지만 고운 심성을 마주하다 보면 가슴이 따뜻해지기도 했다.
"자아. 그럼 어서 가자꾸나."
"응! 아, 잠깐! 혜미가 잠깐 놀러 오랬는데. 자기네 가게 크리스마스 장식 보러오라고. 잠깐만 놀다 가자."
이브의 말에 이그네스는 잠시 기억을 되짚었다. 혜미라면 둘이 자주 입에 올리는 학교 친구였다. 이그네스는 잠시 곤란해졌다.
이 둘이 아닌 다른 아이들과 접근하는 건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되었다. 하지만 둘이 초롱초롱 마주 보자 점점 마음이 약해졌다.
"…어쩔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이그네스는 잠시 고개를 돌려 저쪽을 바라보았다.
이 둘을 경호하기 위해서 따라다니는 경호원들이 있는 쪽이었다. 이 둘에게는 그 존재조차 비밀이었지만, 이그네스는 그들의 존재를 들어서 알고 있었다.
다행히 그들 중 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이 둘이 돌아다니는 행동반경 정도는 너끈하게 커버하고도 남을 사람들이 고용되어있었다.
"…잠시 기다려 보거라. 일단 허락은 받아야지."
"아. 맞아. 희주 언니!"
둘은 이제야 기억해냈다는 듯이 전화의 결과를 기다렸다. 그 답변이야 뻔히 예상되는 것이었다.
'나도 참 무르구나….'
이그네스는 너무나도 쉽게 마음을 허락해버린 자신을 돌아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흰 입김이 조금씩 내리는 눈송이 사이로 퍼져나가는 가운데, 거리에는 캐럴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크리스마스가 머지않았음을 알리는 노랫소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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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그것은 가족과 지내는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