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하렘-198화 (198/324)

198화

<블러디 메리 크리스마스>

일본 만화나 드라마 등을 보면 착각하기 쉽지만, 일본은 크리스마스가 공휴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크리스마스는 일본의 대목 중 하나였다.

준 계엄령 상태를 유지하던 시내에도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자 오랜만에 사람들이 돌아다녔다.

문을 닫았던 많은 가게들이 셔터를 올렸고, 광장에는 트리가 장식되었으며, 거리에는 캐럴이 울려 퍼졌다.

"이 와중에도 챙길 건 다 챙기는구나."

이 모습은 새삼 감탄스러웠다. 하쿠네 등장이 계속되어, 일본의 각 주요 도시는 한 번씩 큰 민간인 피해를 겪었다. DS가 담당한 큐슈 인근은 그중 제일 나았지만, 그럼에도 지금 트리가 장식된 저 자리는 얼마 전까진 합동 분향소가 마련되어있던 장소였다.

우울하고 힘든 시기. 비극이 너무 익숙해져 감각이 마비될 것 같은 상황이기에 더욱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TV나 라디오를 틀면 오늘은 몇백 명이 사망했다는 소리밖엔 들려오지 않았다. 인간의 마음은 철옹성이 아니며, 함부로 다루면 망가지는 것. 거기에서 도피처를 찾고자 하는 욕망을 탓할 수는 없었다.

"피해가 늘지 않으면 좋을 텐데…."

전조는 이제 3단계에 접어들었고, 하루에 한두 건씩 하쿠네가 나타났다. 두문불출하던 때는 그나마 피해가 최소화되었지만, 지금처럼 자발적으로 밖을 돌아다닐 때 출현한다면 그대로 대형참사로 이어질 수 있었다.

이 아름다운 장식들이 피에 젖고, 트리 아래로 간 뜯어먹힌 시체들이 널브러져 캐럴이 그 위를 장식하게 되는 모습은 아무리 사람의 죽음에 익숙한 천후라도 상상하기 싫었다.

비록 그것이…. 하루 안에 한번은 반드시 일어날 확정된 재앙이라고 해도.

최악의 러시안룰렛이었다.

*

천후는 전조 3단계에 접어듦에 따라 일본에서 상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일본 정부의 초청에 따라 곧 있으면 등장할 멸급 디제스터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수상관저에 와있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거리는 아주 조금이나마 들떠있었지만, 이 안의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총리님. 그런 무례한 놈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라고 한자리에 모이게 한 겁니까?"

"……."

그동안 집중치료를 받아 상태가 많이 호전된 진구지가 유우베 고죠에게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수상관저 내로 들어오자마자 들려오는 말에 천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 머저리와 다시 보고 싶진 않았는데….'

그러면서 천후는 슬쩍 뒤를 바라보았다. 천후는 혼자 온 게 아니라 셀레나와 두 공격대장, 그리고 강호, 라즈베리를 대동한 상태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진구지의 목소리를 들은 라즈베리의 안색이 새파래져 있었다.

"나가 있을래?"

"아, 아닙니다. 같이 있겠습니다."

라즈베리는 잠시 솔깃한 듯했지만, 곧 고개를 크게 내저었다. 언제까지고 피할 수만은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알았어."

그녀의 의견을 존중한 천후는 그대로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먼저 유우베 고죠와 최고의 정부관료들이 보였고, 그 맞은편에 구 일본군 장교복을 입은 진구지 하야토와 스즈키 아야메, 그 외 B랭크로 추정되는 여자들 몇이 보였다.

다른 한편에는 히스패닉 계열과 게르만 계열로 보이는 백인 한 명이 각각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머니 크래프트와 컨퀘스터의 대변인으로 보였다.

"네 이놈. 잘도 뻔뻔하게 이 자리에 나타났구나!"

천후가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진구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에게 달려들려 했다. 하지만 이번엔 그때와는 다르게 총리의 경호원들과 라이징 선 멤버들이 즉시 그를 뜯어말렸다. 유우베 고죠 역시 마찬가지였다.

"좀 진정하게, 하야토! 일을 멸급 디제스터 퇴치 이후까지 끌고 갈 셈인가?"

"큭. 총리님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아무리 극우파 또라이라도 일국 총리의 코앞에서 칼까진 뽑아들 수 없었던 모양이다. 진구지는 이를 갈면서 천후를 노려보았다.

"같은 장소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만으로도 영광으로 알아라."

"뭐라는 거야, 등신 같은 게. 정말 뒤질 때까지 처맞고 싶냐?"

남이 걸어오는 싸움을 굳이 피하는 성격은 아닌 천후는 코앞에서 적반하장으로 헛소릴 하자 같이 열이 끓어올라 주먹을 움켜쥐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정말 무력만으로 한판 거하게 해보자고 하자면 천후도 꿀릴 건 없었다.

비마법전으론 뭐 당연히 상대가 안 되고, 마법전이 된다고 해도 스펠 세이브만 풀면 되는 천후 입장에선 이들이 제대로 뭔가 준비하기 전에 모두 변사체로 만들어버릴 자신이 있었다.

그나마 비마법전을 할 때 유우베의 경호원 중 누군가가 권총이라도 숨겨왔으면 그거나 좀 변수로 작용할까?

"천후야. 진정해라. 말이 안 통하는 놈과 이야기를 나눌 필요는 없다."

"…네."

다행히 같이 왔던 이강호가 그의 열을 식혀주었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그녀의 몸에서 살기가 폭사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후가 커피라면 이 여자는 T.O.P랄까. 말론 말리고 있는데 한마디만 더 지껄이면 다 죽여버리겠다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안 그래도 일본 사태 초기부터 반대했던 입장이다 보니 분노가 남들의 배 이상인 모양이었다.

"큭. 메이지 슬레이어."

병상에 누워있던 동안 그녀에 대해 주워들은 게 있는지, 이강호가 극도의 흥분을 보이자 진구지도 조금 잠잠해졌다. 영천후와 이강호의 조합은 마법이 없어도 인간 종자가 아닌 수준이기 때문에, 진심으로 날뛰기 시작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눈에 훤한 것이다.

한숨을 내쉰 천후는 강호의 양어깨를 잡아 몸을 빙그르 반 바퀴 돌려서 문 쪽으로 밀었다.

"앗. 뭐, 뭐하는 거냐?"

"선밴 좀 머리를 식히고 다시 들어오세요."

"아니다! 난 지금 냉정하다!"

"냉정하게 진구지를 수직 이등분하고 싶겠지."

"바로 그거다!"

"그러니까 나가 있어요…."

앞으로도 별소리가 다 나올 텐데 놔두고 있다간 진짜 피바람이 불게 생겼다. 강호의 이마를 손날로 툭 하고 두들긴 천후는 태원을 시켜서 그녀를 방 밖으로 내보냈다.

"이, 이러는 거 아니다, 천후야!"

쫓겨나면서 뭐라뭐라 하는 소리를 무시한 천후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쓸데없는 자극은 삼가주십시오. 이쪽에도 위험인물이 있으니까…. 저 사람 날뛰면 못 막습니다."

"그, 그러지요."

방금 이강호가 내뿜었던 살기란 건 일반인들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유우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용건이 아니라, 멸급 디제스터 레이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하오. 우리 일본은 이번 멸급 디제스터 레이드를 자국의 힘만으로 해결하고자 하오."

유우베의 말에 방 안엔 웅성거리는 소리로 가득 찼다. 소란스러워진 건 DS 쪽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이야기가 나올지도 모른단 생각은 했습니다만…. 놀랍군요."

"우리에게 나쁜 이야기는 아니야. 일단은."

셀레나의 귓가에 속삭이는 말에 천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멸급 디제스터를 전담으로 잡겠다고 공격대를 만들긴 했지만, 기회를 주지 않겠다는 걸 굳이 극구 우겨가면서 할 필요까진 없었다.

엘모세와트를 대비하기 위한 지명도가 필요했지만, 그건 기간을 좀 더 길게 잡는 걸로 어느 정도 대체 가능한 문제였다.

어느 정도 의견을 정리했을 때, 컨퀘스터 대변인 쪽에서 유우베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럼 타 공격대들은 웨이브를 상대하게 되는 겁니까?"

"그렇소. 웨이브 처리에 정규공격대의 힘을 빌리고자 하오."

"그렇다면 컨퀘스터는 받아들이겠습니다."

"머니 크래프트도 수락합니다."

어느 공격대건 멸급 디제스터와 상대하는 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투입되면 국가 전체에 내상을 입힐 수 있을 만큼 크게 뜯어 먹을 수 있지만, 그만큼 위험부담이 극대화되는 게 멸급 디제스터 레이드였다. A랭크 일리미네이터가 있더라도 말이다.

알아서 진짜배기랑은 자기들끼리 치고받겠다는데 굳이 끼워달라고 사정할 필요는 없었다. …만약 실패하면 그때 다시 이야기하면 되는 문제니까.

"알겠습니다. DS도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렇기에 천후 역시 군소리 없이 대답했다. 하지만 그때. 유우베가 잠시 곤란해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 그 부분 말입니다만…. 이번 웨이브 퇴치에서 DS는 제외하고자 합니다."

이강호를 내보내길 천만다행이었다.

*

"지금까지의 성과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까?"

내용은 단순한 물음이었지만, 입에서 나온 음색에는 불쾌감이 짙게 깔려있었다.

일본 전역이 난장판이 될 동안, 유일하게 영천후가 참가한 DS만이 독기가 뿜어지는 걸 완벽하게 차단할 수 있었다. 절대 성과로 그들이 다른 공격대에 밀릴 이유가 없었다.

유우베 역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게 아니오. 그런 게 아니라…. 알고 있겠지만 일본 국내에서 한국에 대한 여론이 그리 좋지 않소. 그렇기에 전조 단계가 아니라 웨이브 상황에서까지 DS가 참여한다면…."

유우베는 말끝을 흐렸다. 그 뒷말은 쉬이 짐작이 갔다. 이들은 정치인이고, 정치 생명의 존속에 가장 민감하다. 지금 그것에 위협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네놈들 조센진들이나 재일 놈들이 살인, 강간을 해대고 있으니 당연한 거다. 쓰레기 같은 것들."

진구지가 비웃음을 지으며 하는 말을 듣고서, 천후는 맥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실제로 입증된 건 마츠모토 요시타케 단 한 건. 그것도 유그드라실에서 외부의 지배를 받았다고 공인한 일이었지만, 뜬소문을 현실처럼 생각하게끔 하는 덴 충분했다.

물론 진구지까지 그것을 믿고 있진 않았다. 하지만 진구지는 그걸 알고 있더라도 잘못된 소문을 오히려 부풀려 퍼트리려는 쪽의 인물.

공조란 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그리고 DS의 전조 단계 레이드 참가도 가능하다면 현 시간부로 중단해주셨으면 하오.”

'여기까지군.‘

천후는 타협의 여지가 없음을 알았다. 이게 현시점에서 일본 정부의 스텐스. 절대 한국 정부나 DS에 대한 옹호론을 편다거나, 뜬소문을 잡아보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돈만 보자면 나쁠 것도 없었다. 돈만 보자면….

그동안 DS는 다른 정규 공격대보다도 두 배 가까운 금액을 받아가며 하쿠네를 잡았으니, 금전적인 이득은 충분히 보았다.

다만 이 이후로 일본에선 한국에 대해 나쁜 이미지가 박히고, 마츠모토 요시타케와 같은 피해자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해보려던 첫걸음도 일본에선 내딛지 못하리라. 어쩌면 그걸 악용해 일본에서 몇 건의 테러가 더 발생할지도 모른다.

유우베는 '그렇게 되는 걸 감수하겠다', 혹은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고. 천후는 그 태도에 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았다.

그렇지만 이 자리에서 무슨 소리를 해봐야 패배자의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천후는 굳이 다리 끄덩이 잡고 사정사정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렇다면 더 나눌 이야기는 없군요. 먼저 일어나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좋은 결과가 있기를 기원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천후는 일행을 데리고 방에서 나왔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그런 와중에 함께 이야기를 들었던 레이나드가 분한 목소리를 냈다.

"멍청한 것들이…. 멸급이 나오기 전에 다시 생각해보는 게 좋을 텐데. 저런 정신병자가 강제로 일본 일리미네이터들을 통합한 이 상태에서 공격대가 제대로 굴러갈 리가 없는데."

로마이어 사태를 직접 겪었던 정태원 역시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있는 힘을 다 끌어모아도 모자른 판에, 내부 반목이 있는 상태에서 제대로 된 결과가 나올 리 없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로마이어는 그래도 영천후를 자원취급은 해서 쓸 수 있는 모든 곳에 쓰려 노력이라도 했는데, 이쪽은 그런 것도 없다.

바로 그때였다.

"인과응보다, 조센진. 평소에도 얼마나 의심받을 짓을 했으면 이렇게 상황이 악화만 되겠나?"

본격적인 이야기를 하기 전에 잠시 휴식시간을 가진 것일까? 뒤이어 방에서 나온 진구지가 비웃음을 지으며 도발해왔다.

"하루에 일리미네이터 열셋을 장사지낸 놈에게 듣고 싶진 않은데."

마지막이 될 도발을 간단히 받아낸 천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유그드라실과 일본 정부가 사건을 은폐한 상태였지만, 정황만 보더라도 아마테라스를 결딴낸 게 누구인지는 훤히 보였다.

이런 놈이 지금 거기서 살아남은 사람들까지 데리고 레이드를 뛰는 걸 아이고 드디어 대통합이 이루어졌구나 하면서 좋답시고 받아들이다니. 천후는 일본 정부의 판단력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흥. 멋대로 지껄여라."

코웃음을 친 진구지는 그러다 그의 뒤편에 서 있는 라즈베리에게 시선을 가져갔다. 잠깐 눈썹을 꿈틀거린 진구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라즈베리가 아닌가? 왜 그런 종놈 옆에 있는 거지?"

"진구지."

흠칫. 자신을 부르자 놀란 라즈베리는 그의 성을 입에 담으며 그대로 얼어붙었다. 잠시 천후와 라즈베리를 번갈아 보던 진구지는 안 그래도 가는 눈을 더욱 가늘게 만들며 웃었다.

"아아. 그렇군. 천것들끼리 배가 맞았나? 이런 것과 자다니. 네년은 받지 않는 게 맞았었군."

"아, 아니야! 난!"

"오, 그래? 아닌가? 그럼 너만은 나와 함께 하겠나? 넌 우리나라 문화를 아주 좋아했었지. 기회를 주마. 어때?"

라즈베리는 바로 앞까지 다가온 진구지가 내민 손을 바라보며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잡고 싶어서 갈등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게 아니라….

"내 제자한테 허튼소리 하지 마. 귀가 썩는다."

탁.

그때. 천후가 몸을 돌려서 그의 손을 쳐내버리고는 라즈베리의 어깨를 감싸 안아 확 끌고 왔다.

"아…."

라즈베리는 말없이 천후를 올려보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울 것 같은 얼굴. 천후는 그녀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어주었다.

"가자. 라즈베리. 네 꿈을 부숴버린 녀석을 계속 상대할 필욘 없어."

"…응. 싸부."

작게 끄덕인 고개는 한 번 가라앉더니 다시 올라오지 않았다. 손끝으로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아예 데려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여기까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잠시 한숨을 내쉰 천후는 그대로 그녀를 한 팔로 품은 채 수상관저를 빠져나왔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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