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전조 3단계 동안 고생한 직원들 모두에게 천후는 휴가를 주었다. 크리스마스도 머지않았으니, 최소인원만 남기고 아예 신정까지 푹 쉬라고 말이다.
멸급 디제스터가 언제 등장할지, 그때 레이드가 어떻게 될지 모르니 갑자기 불려 나올 수 있다는 전제조건이 달린 휴가였긴 하지만.
하쿠네 레이드에 참여하면서 계속 긴장 상태였기 때문에 다들 달게 받아들였다. 이건 일반 직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대신 조금 다른 게 있다면 일반 직원들은 전부 유급휴가라는 정도?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출근해야 하는 최소한의 인원에겐 그만큼의 추가임금이 지급되었다.
"막상 떠나려니 시원 씁쓸하네."
"그러게 말입니다."
다른 공대원들을 먼저 한국으로 보낸 천후는 라즈베리와 함께 후쿠오카 거리를 걷고 있었다. 아이들 귀국 선물도 챙겨줄 겸, 라즈베리의 '개인적인 용무’에 어울려주기로 한 것이다.
거리는 크리스마스 대목을 맞이하기 위해 걸어놓은 수많은 장식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시기가 시기여서인지, 아무래도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수는 평년보다 크게 못 미쳤다.
내일 당장 멸급 디제스터가 튀어나올지도 모르는 판에 밝게 행동한다는 것은 일반인들에게 엄청난 정신력을 요구했으니까.
"사려는 건 다 샀어?"
"넵. 엔화 폭락해서 엄청 싸게 샀슴다. 이제 전 마음의 풍요를 이뤘지 말임다."
양팔 그득그득하게 정체를 알 수 없는 물건들을 구매해온 라즈베리는 빵긋 웃으며 좋아했다. 그 무게가 거의 자기 몸무게 수준은 되는 거 같아 보이는데도 말이다.
얼굴은 웃으면서도 무게 때문에 기우뚱거리며 잘 움직이지도 못하는 걸 본 천후는 쓴웃음을 지으며 반절 넘게 받아서 자기가 들었다.
"앗. 안됨다!"
"뭐가 안 돼. 다 들지도 못하면서."
"으…. 부끄럽슴다. 한량없슴다."
사부라고 부르는 사람을 짐꾼으로 부려 먹게 된 상황에 라즈베리는 얼굴을 붉혔다. 끌끌 웃은 천후는 더는 말하지 않고 앞서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후쿠오카 광장이었다. 그 중앙에는 커다랗게 장식한 트리가 있었는데, 그것을 중심으로 온 상가로 장식이 이어져 있는 형태였다. 산타와 루돌프, 밤하늘의 별빛을 형상화한 은색 장식들이 빼곡하게 달린 그 모습은 장관이란 말밖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예쁘다…."
"그러네."
멍하니 중얼거리는 라즈베리의 말을 가볍게 받아준 천후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천후나 라즈베리 뿐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 역시 그 앞에 멍하니 멈춰 서서 장식된 트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옆에서 흰색 입김이 흩어졌다.
"이럴 수 있었던 게 누구 덕분인지 이 사람들이 알기는 할까요?"'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눈을 돌려보니, 라즈베리의 고개가 아래로 떨궈져 있었다. 언제나 반짝반짝 빛나고 있던 눈동자는 그 빛을 잃고서 그 자리를 아쉬움이 대신하고 있었다.
천후는 다시 트리를 바라보았다.
여기에 달린 수많은 장식물들은 그냥 나무가 자라면서 열린 건 아닐 터였다. 분명 한 명도 아닌 수많은 사람이 달려들어 하나하나 꼼꼼히 매단 것이리라. 그것들이 모이고 모여, 이 아름다운 거리를 만들어냈다.
이 암흑의 시대에.
슥. 무거운 짐들이 팔목에 걸쳐져 있는 걸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든 천후는 라즈베리의 뒷머리를 감쌌다.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라즈베리."
"…….“
떨궈져 있던 고개가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 자신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천후는 알 수 없었지만.
"봐. 모두 기뻐하고 있잖아."
두려움을 가슴에 안고서도, 경사스런 날이 다가오는 것을 기대하고 있는 사람들이 거리에 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아?"
"……."
대가는…. 뭐. 바랬다. 그만큼 받아도 냈고. 그러면서도 목숨을 살려줬으니 정신적인 뭔가가 좀 더 충족되길 바라는 마음은 이해할 수 있었다. 천후라고 그런 마음이 없을 리는 없었다.
허나. 그 전에….
지금 이렇게 기뻐하고 있는 많은 사람을 지켜냈다는 그 자체만으로 기뻐했으면 했다.
이들조차 모두 다치고 죽어, 크리스마스고, 새해고 기념할 생각조차 하지 못해 시체로 나뒹구는 걸 멀리서 그저 지켜봐야만 했다면, 그땐 분명 후회했으리라.
지금보다 백 배, 천 배는 더.
"잠시 이러는 것뿐이야. 분명 언젠가 알아줄 거야. 그러니 너무 아쉬워하지 마. 넌 잘했어. 이렇게 많이 물건들도 사가잖아. 그 덕에."
"…응."
작게 고개가 끄덕여지고 나서야 천후는 그녀를 다시 바라보았다. 라즈베리의 눈엔 다시 빛이 돌아와 있었다.
아주 조금. 의미가 다른 광채가.
그 차이를 구별하지 못한 천후는 그저 밝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
"이제 슬슬 가자. 비행기 시간 늦겠다."
"넵. 싸부!"
라즈베리는 다시 말투를 되돌리곤 그 뒤를 허겁지겁 따랐다.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
"어서 와!"
"웰컴 투 코리아!"
"끄옷!"
집에 돌아오니 산타복 입은 두 아가씨의 보디체크가 맞이해줬다. 그걸 조금 오버하며 받아내 주고 보니, 집안에도 크리스마스 분위기 내기가 한창이었다.
거실엔 작은 트리에, 창문에는 온갖 장식이 가득했다. 천후는 여기까지 와서야 정말 한동안 바쁜 일이 끝났다는 것을 실감했다.
"집이 좋긴 좋구나…."
멍하니 중얼거린 천후는 그대로 소파에 엎어져 누웠다. 그걸 보고 이브와 에바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고생했어."
"밟아줄까?"
"엉? 진짜? 부탁해."
천후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이브는 천후의 등허리 위로 조심스레 올라갔다. 천후의 몸은 기본적으로 단면적이란 게 있다 보니, 둘의 손으로는 도저히 안마 같은 게 불가능했다. 그러다 보니 대신 올라가서 밟는 꼴이 되었다. 이게 고사리손으로 꼬물대는 거보다 훨씬 제대로 안마가 된다.
"어때?"
"으어…. 시원하다…."
"할아버지네, 완전히."
"으헐헐. 으어어…."
이브의 이 등 밟기는 날이 갈수록 그 숙련도가 올라가서, 처음엔 그냥 장난에 불과했지만 이젠 어엿한 안마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오자마자 뭐하고 있는 거냐?”
“으어어….”
그 장면을 어처구니없어하는 눈으로 바라본 이그네스는 반대편 소파에 앉아 책을 들여다보았다. 몸에는 마찬가지로 산타 복장을 걸치고 있었는데, 둘이 하도 조르니 입어줬단 느낌이 강했다. 그때. 한창 신 나게 밟고 있던 이브가 말했다.
“이그네스. 너도 해볼래?”
“뭐? 돼, 됐다! 그런 망측스러운 짓을 어찌하란 게냐!”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낸 이그네스는 아차 하고 자기 입을 가렸다. 좋지 않다. 왜냐면 이 꼬맹이들은….
“에이. 괜찮아, 괜찮아.”
“한번 해보면 재미있을 거래두.”
“그러니까 사람 말 좀 들어라! 싫다지 않느냐!”
어느새 등에서 뛰어내린 이브까지 달라붙어서 양쪽 팔을 옭아매고 끌고 왔다. 반쯤 죽은 것처럼 늘어져 있는 천후의 옆구리 앞에 선 이그네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네 녀석들 이러면 안 되는 게다. 매일매일 이렇게 왈가닥처럼 굴어서야 누가 데려가겠느냐.”
“괜찮아! 에바는 골드미스가 꿈이니까.”
“골…그게 뭔진 모르겠지만, 하여간 조금 더 조신하게 행동을 해야―”
“에잇! 할머니 같은 소리 하지 말고 얼른 올라가봐.”
“으윽.”
할머니라니. 안 그래도 은근히 신경 쓰고 있었는데. 귀엽게 얼굴을 찡그린 이그네스는 못마땅한 얼굴로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얼른 하고 끝내야지.’
이 녀석들 페이스에 끌려가기 시작하면 온종일 휘둘린다. 마음을 정한 이그네스는 조심스레 작은 발을 천후의 등 위에 올렸다.
“끄흐응.”
“힉! 뭐, 뭐냐? 아픈 게냐?”
“응? 아니~. 갑자기 뭐가 올라오니까 눌려서 그냥.”
“그, 그럼 이상한 소리 내지 마라! 놀랐지 않느냐!”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이그네스는 머뭇대며 다시 발을 올렸다. 그의 등이 널찍하긴 하지만 울퉁불퉁하기도 해서 잠시 균형을 유지하고 나서야 제대로 올라선 그녀는 양손을 꼭 쥐었다.
“왜. 왠지 부끄럽구나.”
“응? 왜애?”
“아니. 아무리 그래도 남자 몸을 이렇게 밟고 있는 것은 좀….”
양말 신을 발끝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이그네스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다리를 움직였다. 그때마다 천후가 이상한 소리를 내는 게 비상히 신경 쓰였다.
그녀의 가치관은 동양처럼 ‘남존여비’까진 아니었지만, 남자 쪽에 좀 더 무게가 가 있었기에 그랬다.
“괜찮아, 그런 거. 너무 신경 쓰지 마.”
“으….”
“그리고 팍팍 밟아, 팍팍. 살살 하면 안 시원하대.”
“으~. 정말이지.”
눈을 꾹 감은 이그네스는 할 수 없이 힘을 주어서 그의 등허리를 밟았다.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이브의 말마따나 익숙해지니 조금 재미있는 느낌이 드는 게….
‘이, 이게 배덕감이라 건가.’
오묘한 감각에 이그네스는 더욱 눈을 꼭 감고 발을 놀렸다.
*
밤.
아이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은 천후는 희주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대로 소파에서 잠들어버렸다.
라즈베리에게는 그렇게 말했지만, 천후 역시 육체, 정신적으로 피로가 쌓여있었다.
자신이 독기를 완전히 차단할 수 있다는 것을 안 이후로, 천후는 DS가 맡는 모든 하쿠네 레이드에 빠짐없이 참가했다. 그뿐만 아니라 큐슈 전역에 나타나는 파급 역시 직접 잡으러 다녔다.
그런 노력 덕분에 큐슈 내에서 DS나 한국에 대한 인식은 다른 지역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좋았다. 그러나 일본 내 전체 여론이 나빠지는 것은 결국 막지 못했다.
그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았고, 그런 비난에 직면할 때마다 그의 마음을 갉아먹었다. 게다가 이젠 이미지를 수습할 방법조차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모두 수마로 변하여 그를 잡아먹었다.
“…….”
그 잠든 모습을 희주가 바라보고 있었다.
창가 너머로 어느새 내리기 시작한 눈이 언뜻언뜻 지나가며 유일한 조명인 달빛을 가렸다가 밝혔다. 그때마다 그녀의 차가운 낯빛 역시 함께 명암을 달리했다.
그가 방안이 아닌 소파에서 잠드는 일은 드물었다. 애초에 희주가 그렇게 잠들게 두지 않았지만, 오늘은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이렇게. 얼굴을 쓰다듬으며.
“…….”
몸은 크지만, 얼굴만 딱 두고서 본다면 앳된 티가 남아있다. 희주는 그가 잠에서 깨지 않도록 조심히 그를 매만지다―
“무슨 일이시죠?”
작은 목소리를 냈다. 그 목소리에 응하여, 거실 저편에서 한 명의 인영이 걸어왔다.
라즈베리 미키스트리.
2층에서 내려오는데 발소리 하나 내지 않은 그녀는 말없이 다가와 희주의 옆에 앉았다.
“죄송합니다. 밤에는 내려오지 않기로 했는데.”
“오늘은…괜찮습니다.”
흔치 않은 일. 희주는 그녀에게서 감정적인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녀가 이 자리에 함께하는 것을 용인했다.
옆자리에 온 라즈베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양 무릎을 굽혀 끌어안은 채 고개를 박고 있던 라즈베리는 그러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싸부는…. 너무 착합니다.”
“…….”
“전 싸부처럼은 생각하지 못합니다. 아니….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사람들이 무사하니 그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다니. 그건 대단함을 넘어서 무서운 것이었다. 현실이 아닌, 가상매체에서나 존재할만한…….
그래. 마치 변신 히어로처럼.
허나 그것은…….
“라즈베리.”
스륵. 차가운 손길이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라즈베리는 자기도 모르게 그 손길에 의존했다.
신기하게도.
처음 그녀와 만났던 그 날부터, 그녀의 몸짓. 그녀의 목소리가 그녀의 주의를 끌었다. 신경을 돌리게 만들어주었다. 지금도 그랬다. 잠시 무너지려고 했던 그녀의 이성이 이 순간 다시 되돌아왔다.
그래서일까?
쓸데없는 이야기가…. 입에서 나왔다.
“밤이 되면….”
“네.”
“밤이 되면…. 무섭습니다. 잠드는 것이.”
밤의 어둠 사이로. 나지막한 음성이 나왔다 흩어졌다.
“분명 똑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도. 다른 행동을 해버립니다. 그게…. 꿈인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
“제가 맞는지조차도….”
쉽게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희주는 그것을 분석해서 맞춰보려 들지 않았다. 그저 좀 더 손을 옆으로 가져가, 자신의 어깨 위에 그녀의 머리를 기대게끔 했다.
“괜찮습니다. 오늘이라면.”
“…….”
“오늘은…. 푹 주무세요.”
라즈베리의 갈색 눈동자가 작게 흔들리다 그 모습을 감췄다. 손길에 응하여 얼굴을 묻었다.
곧. 거실엔 아무 소리도 나지 않게 되었다.
세 사람의 숨소리 말고는.
………….
지직.
지지지직.
잡음에 귀가 시끄러워 눈을 뜨면.
그곳은 환상과도 같은 이상향.
넓은 꽃밭에 백발의 노인과.
자신과 똑 닮은 여성이 서서 말한다.
아이들아.
아이들아.
너희의 임무를 다해다오.
거절할 수 없는 목소리.
그렇기에 접하지 않으려 잠을 기피했던 목소리가 들려와.
“…….”
그녀는 눈을 떴다.
짙은 어둠. 시간은 알 수 없다.
눈앞엔 목표가 보였다.
어렵지 않은 일. 이미 이전부터 기회를 노리던 일.
‘마음’이 아프다.
그러나.
몸은 아프지 않지.
이런 아픔 따윈 쉽사리 제압할 수 있다.
그러니 해내는 것은 간단하다.
그렇게 생각할 때.
“좀 더…주무세요.”
“아. 아아…….”
거실에 녹색 불빛이 떠올랐다. 소녀의 눈에서 피어오른 안광. 인간의 것이라 생각하기 어려운 것. 하지만 그것이….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허무할 정도로 쉽사리 흩어졌다.
형형하던 빛은 이제 다시 갈색으로 돌아와, 천천히 그 몸을 기울였다.
희주는 그녀의 머리를 조심히 받아내어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렸다.
“가여운 아이….”
누구에게 향하는 것인지 모를 말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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