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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드하렘-200화 (200/324)

200화

일본의 상징과도 같은 장소라고 한다면 역시 후지산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일본의 영산이라고 불리는 이 산에는 매해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명소였다. 그 산 아래에 지어진 신사, 센켄다이샤 역시 대표적인 관광지로 꼽혔다.

이런 무속 신앙적인 믿음 때문일까? 일본 내 상황이 안 좋아지자, 많은 일본인들 역시 후지산을 찾았다. 부디 이 암흑의 시기를 넘길 수 있게 되기를 비는 마음으로.

그 덕분에 그 주변 여관은 때아닌 호황기를 누렸다. 일본 전체가 위험해진 시기였기에 외국인의 발걸음은 끊겼지만, 그 대신 자국인들이 찾아와주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그들의 마음이 마냥 편하지는 않았다.

"요즘 정상이 영 이상하지?"

"음…. 눈이 다 녹아버렸어."

"한 번 터지는 게 아닐까?"

"에이. 설마…."

관광객들에겐 쉬쉬하고 있었지만, 현지인들 사이에선 후지산 폭발에 대한 의심이 점점 증폭되고 있었다. 후지산 정상의 눈은 만년설은 아니지만 올해처럼 눈도 일찍, 그리고 많이 온 해는 새하얗게 뒤덮이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눈이 전부 사라져 있었다.

후지산은 기본적으로 휴화산이고, 최종분화는 1700년대에나 있었던 일이었지만, 2000년대 이후로 재분화 가능성을 의심할만한 사건은 여럿 있었기에 그 불안은 점점 증폭되어갔다.

가장 현지인들을 두렵게 한 건 최근 한 달 사이에 열 번이 넘게 일어난 지진이었다. 일본이 아무리 지진에 익숙한 나라라지만, 이건 아무리 그래도 너무 빈도가 잦았다.

그렇다고 여기에 기껏 일궈둔 터전을 버리고 떠날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 그들은 불안해하면서도 그저 전전긍긍해 할 뿐이었다.

*

신칸센을 타고 있던 소년, 가토 유지는 창문에 얼굴을 기대고서 후지산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원래 그는 도쿄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멸급 디제스터 전조가 생각보다 길어지고 피해가 심각해지자 당분간 시골로 내려가 있자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도 많아서, 도쿄를 떠나는 열차는 요즘 언제나 만석이었다. 그의 어머니도 간신히 2주 전에 표를 예약하고 나서야 이렇게 앉아서 내려갈 수 있었다.

"엄마! 봐봐! 후지산!"

"그래…."

그의 어머니는 불안과 피로가 뒤섞인 얼굴로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녀와 유지는 몸을 피했지만, 그녀의 남편은 아직 도쿄에 남아있었다. 시골에 있는 부모에게 몸을 의탁하는 것도 부끄러운 일인데 돈벌이를 멈출 순 없다는 이유였다.

그와 그녀의 부모님은 그런 것은 신경 쓰지 말고, 일단 불안감부터 해소하게 해줬으면 했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도쿄로 상경해 자기 힘으로 살아온 유지의 아버지는 독불장군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남편의 안위를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말이다.

바로 그때였다.

쿵…! 쿠르르르릉…!

"꺅!"

"지진이다!"

빠르게 달리던 신칸센이 속도를 늦추기 시작했다. 이 흔들림은 범상치 않았다. 매그니튜드 6, 아니 7 이상이 아닐까? 짐칸에 올려두었던 짐들이 굴러 떨어지고, 앉아있던 사람들조차 몸을 가누지 못하고 앞좌석에 몸을 들이박았다.

"유지!"

퍼뜩 아들을 떠올린 그녀는 기우뚱거리는 아들을 끌어 앉고서 좌석에 바짝 엎드리고 나서야 안심할 수 있었다. 이제 막 유치원에 들어간 유지는 이런 흔들림에서 넘어져 구르는 것만으로도 크게 다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지는 자신이 방금 얼마나 위험한 상태였는지는 까맣게 모르는지, 반짝이는 눈동자로 물었다.

"엄마! 저거 뭐야?"

"응?"

"산에 뭐 이상한 게 있어!"

순간. 불길한 느낌을 받은 그녀는 고개를 들어서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은 거기에서 붙박인 듯이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이, 이럴 수가…."

그녀의 눈에 비치고 있는 것은 지옥이었다.

눈으로 뒤덮이지 않고 몸을 완전히 드러내고 있던 후지산의 정상부에선 간헐적으로 폭음이 울리며, 그때마다 시뻘건 용암들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단순히 흐르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뛰쳐나와 주변의 마을들을 덮쳤다.

폭발한 화산재와 연기는 청명하던 상공을 뒤덮어 혼탁하게 했고, 검은 구름이 되어서 흘렀다.

이것만 해도 금세기에 손꼽힐만한 자연재해였지만, 그녀의 눈엔 경악할 만한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아…. 아아…."

폭발한 후지산의 정상. 화구에…. 도저히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이 보였다.

시야를 가리는 먼지와 연기 너머로도 선명하게 보이는 그것은 8개의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기다란 목들은 중앙의 하나뿐인 몸체에 붙어있어 한눈에도 기형적인 자태를 뽐내었다. 그 몸에는 파충류 특유의 비늘이 검붉은 색으로 번들거리고 있었고, 거대한 몸을 따라 넘어가면 마치 칼처럼 날카로운 꼬리가 보였다.

"디제스터."

보는 그 순간 알 수 있었다. 보통 디제스터가 아니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용암을 밟고 서 있는 놈은 너무나도 거대했다. 후지산의 높이는 3,776m. 이 신칸센 철로는 그런 후지산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서 달리고 있어 전경을 전부 바라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 화구 위에 있는 놈이 맨눈으로 저렇게 자세히 보인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공룡이다! 엄마! 공룡이야!"

"……."

철없는 아이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저것이 공룡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표상에 존재했던 그 어떤 생명체를 가져다 놔도 저것보다 거대할 순 없었다.

그녀는 저것이 지금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는 공격대들의 최종목표라는 것을 깨달았다.

<열차 출발합니다! 열차 출발합니다!>

그것을 발견한 것은 유지 모자뿐만이 아니었는지, 기관사 직접 방송용 마이크를 잡고서 외쳤다. 그 소리를 들은 모든 이들이 자리에 착석했다. 이 자리에서 당장 벗어나야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놈은 잠시 멈추어있던 열차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놈의 8개나 되는 머리는 대신 다 한 곳만을 향했다.

도쿄를.

유지와 그의 어머니는 그 아가리가 벌어지는 것을 보았다.

"안 돼!!!!”

비명이 터졌다. 그녀에게서만이 아니라 여러 곳에서.

애석하게도.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놈의 몸체보다 커다란 화염 줄기가 창공을 갈랐다.

*

일본 정부는 제대로 된 상황을 파악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을 낭비했다. 후지산 분화와 멸급 디제스터의 출현, 그리고 도쿄 공격이 한꺼번에 겹치면서 혼선이 일어난 것이다.

그동안 놈은 피신하는 후지산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전부 쓸어내 버리고 다시금 화구에 들어가 앉았다.

"칙쇼! 칙쇼오!"

뒤늦게 유그드라실에게 연락을 받아 멸급 디제스터의 소행인 것은 알게 되었지만, 이미 그 시점에서 도쿄의 행정은 마비되어 버렸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도심지에 남아있고자 했던 사람들이 빠져나가려 했던 통에 도로는 없느니만 못한 물건이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도쿄 일부에 화염이 휩쓸고 지나간 이후, 사람들이 붐비는 구간에 하쿠네가 등장. 라이징 선이 급파되어 처리했지만, 초기 이후 최고 수준의 인명피해가 발생해버렸다.

"당장 레이드를 시도하겠소!"

"진구지. 진정하게! 아직 군 병력도 투입되지 않았어!"

아비규환을 눈으로 직접 보고 온 진구지는 씩씩거리면서 노기를 토해냈다. 하지만 유우베는 그보다는 냉정했다.

"재래식 병기가 통할 수도 있네. 레이드가 시급한 건 사실이지만 확인할 건 확인해야지. 던전 생성 여부도 중요하지 않나!"

지금 당장은 던전을 펼 기미가 보이지 않았지만, 만약 가능하다면 끔찍한 일이었다. 후지산은 혼슈 한가운데에 있는 산. 동으로는 도쿄, 서로는 나고야가 있었다. 어느 쪽이든 움직여서 던전을 펼친다면….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주민 대피가 완전히 끝나지 않았기에 더더욱.

"유그드라실의 보고로는 날개는 없다더군요.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렇게 말한 스즈키는 다음 말은 잇지 못했다. 날지 못한다…. 그게 뭐 그리 대단한 문제가 될까? 놈은 머리가 많은 만큼 뿜어낼 수 있는 화염 브레스의 범위는 말 그대로 전방향 全方向이었다. 고고도까지 뿜어내는 것조차 일도 아닐 텐데, 지상형이라 한들 큰 의미가 없었다.

"일단 라이징 선은 레이드 할 전략을 세우게. 그때까지 전력을 온존하고. 지금부터 멸급 트라이를 할 때까지 모든 하쿠네는 머니 크래프트와 컨퀘스트가 맡을 테니."

"…알겠습니다."

이를 간 진구지는 스즈키를 데리고 그 자리를 떠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쉰 유우베가 물었다.

"그 뒤로 '오로치'의 움직임은 어떤가?"

"3번의 브레스를 발사한 이후로는 후지산 정상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 이동할지는 유그드라실에서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야마타노오로치’. 일본 신화에 나오는 머리 여덟 개 달린 뱀의 이름을 받은 디제스터는 분화되어 아직도 들끓고 있는 후지산 정상에 머물고 있었다. 산에서 내려와 사람들을 죽인 이후에 다시 돌아간 걸 보면 아무래도 저 장소가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다행이긴 하지만 브레스가 도쿄까지 닿는 이상 움직이느냐 마느냐는 큰 의미가 없지. 게다가 저 위치는 문제가 돼.”

대한민국의 경우, 드래곤이 서해상에서 나타나면서 그쪽으로 방어를 집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로치는 혼슈 한가운데서 튀어나왔고, 이제 후지산을 기준으로 하쿠네가 활동하게 된다.

즉, 병력 배치할 곳이 동서로 양분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후지산을 빙 둘러서 포위하려면 그것만 해도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

“빨리 잡아야겠군.”

유우베 고조는 마른침을 삼켰다.

*

오로치가 재래식 병기를 무효화 할 수 있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일본 자위대가 나섰다. 하쿠네 덕분에 도로 사정이 엉망이 되긴 했지만, 시험해 볼 정도의 화력은 정말 간신히 어떻게든 끌어모을 수 있었다.

뭣보다 정부의 의사가 정말이지 필사적이었다. 재래식 병기가 통하기만 한다면 미국의 힘이라도 빌려서 놈을 끝장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으니까.

물론 현장에 투입된 자위대원들의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이거 괜히 화만 돋웠다가 큰일 나는 거 아냐?”

“반격당하면 우린 다 죽는 거지.”

반격은 당연히 예상되고 있는바. 버림패로 사용되는 운명이 된 이들은 우울해 할 수밖에 없었다. 멸급 디제스터에게 의미 있는 타격을 주려면 무인화한 병기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점이 너무나 아쉬웠다.

“지금까지 나타난 놈 중에서 재래식 무기 통한 게 딱 한 놈 아닌가?”

“나머진 아예 막혔던지, 거의 안 통했던지. 둘 중 하나였지.”

“그냥 마법사들로 잡지….”

특히나 개죽임이 예상되는 상황에선 말이다. 1할 확률에 걸린 판돈 신세라니. 정말 사양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던, 때는 왔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점이 있다면, 오로치의 몸이 너무나 거대해서 초탄부터 빗나갈 일은 없을 거라는 것 정도?

“발사!”

쾅! 콰콰쾅! 후지산에서 수 km는 떨어진 먼 거리에서 쏘아진 포탄은 정확하게 후지산 정상을 때렸다. 최초의 한발에 이어서 보기만 해도 장관일 정도의 화력의 폭풍!

분화로 인해 고도가 조금 높아진 후지산 정상이 점점 깎여나가 그 충격으로 재분화가 일어났다. 애초에 하루 만에 멈출 활동이 아니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이것만으로도 향후 일본의 기후가 어떻게 바뀔지 기상학자들이 심각하게 논의하고 있는 시점이었지만….

더 큰 문제가 남아있었다.

“키웨에에에에에에!!!!”

쿵. 쿵. 땅 울음 소리를 내면서 오로치의 몸체가 분화구에서 드러났다. 그토록 엄청난 화력을 쏟아 부었는데도 생채기 하나 찾아보기 힘든 꼴을 본 이들은 허망하게 손을 놓았다.

“역시 안 되잖아….”

육자대고 나발이고 지원하는 게 아니었다. 그들 중 몇몇은 후회했지만, 그건 이미 때가 늦어도 너무 늦었다.

이미 분노한 놈의 아가리가 벌어지고 있었으니까….

콰아아앗!

8개의 머리가 사방에서 쏟아진 공격의 원점을 정확히 포착하여 화염을 뿜었다. 나름대로 위장도 하고, 발사 후 이동도 시도했지만 모든 것이 무의미했다.

이렇게….

일본 정부는 2개 연대 규모의 포병 전력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놈에게 재래식 병기가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 작품 후기 ============================

200화 오고 말았는가...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께 정말 감사드리고, 완결까지 열심히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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