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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드하렘-204화 (204/324)

204화

<여덟 머리의 뱀>

오로치가 도쿄로 이동하고 있다는 연락에 유우베 고죠는 결국 중국과 러시아의 A랭크 파견 동의서에 서명했다.

그들은 당장 유그드라실을 통해 공격대에 합류했다.

"고맙습니다, DS. 이 사례는 꼭 하도록 하지요."

그들과 함께 온 외교관들의 말에 천후는 담담히 말했다.

"사전에 이야기되어있던 것에 협력해주시면 됩니다."

외교관들은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규모가 큰 보육원 아이들의 출경 기록 말입니까? 그 정도라면 얼마든지 협조해 드리지요. 이 정도론 답례가 되지 않아서 하는 말입니다."

"이걸로 대외적인 문제 하나가 완전히 해결되었으니."

천후는 일본으로 오기 전, 자문을 맡은 친란이나 셀레나에게 머니 크래프트나 컨퀘스터가 어떻게 행동할지에 대해 들었다.

그래서 그때를 대비해, 제2안을 두었다. 거래가 가능한 쪽으로. 그것이 중국과 러시아였다.

A랭크 국가 일리미네이터를 보유한 이 두 국가는 21세기에 다시 떠오르기 시작한 강대국이었으며, 사회통제가 강해지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런 중계를 해준 것만으로도…. 시민들의 개인 정보를 팔아넘기는 것을 그리 어렵지 않게 받아준 것이다. 같은 내용으로 유럽이나 미국 쪽에 접근을 했다면 튕겨 나왔을 것이다.

'이러고 싶진 않았지만….'

결국 남의 뒤를 캐는 일. 중국과 러시아에서 영천후는 '말이 통하는 사람'으로 여겨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을, 마법사를 위협하는 적을 추적하려면 자기 손을 더럽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망설이지 않는다.

"시간은 조금 걸려도 좋으니, 최대한 자세하게 조사해주셨으면 합니다."

"걱정 마십시오."

한편, 그들이 붙어서 이야기를 나누는 걸 멀찍이서 바라본 유우베는 치를 떨었다. 이미 오기 전부터 작정한 상황이란 걸 눈치챈 것이다.

'너무 경솔했구나.'

지금껏 영천후의 선량함에 매달려 그와 DS에 온갖 누가 되는 일은 다 저질렀다. 진구지는 막지 못했고, 멸급 레이드에도 웨이브 퇴치에도 참가시키지 않았으며, 결정적으로 한국인 관광객, 체류자, 재일교포가 증오범죄에 시달리고 있을 때도 그들을 억누르는 데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그 답변은 결국 이런 식으로 돌아와 버렸다.

이것들에게 살점을 전부 뜯기고 나면 일본은 얼마나 큰 타격을 입을까? 유우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DS에게 지불될 현금과 채권은 대한민국, 중국, 러시아 정부 교섭 결과와 비교하자면 정말 티끌과도 같은 것이었다.

유우베는 희망을 밝히기 위해 모인 이들 앞에서도 얼굴을 펼 수 없었다.

*

레이드 시작을 앞두고 수많은 일리미네이터가 한자리에 모였다.

보조팀을 맡은 일본 일리미네이터가 70명가량. DS가 40명. 정규공대 2개 50명. 그리고 중국, 러시아 A랭크들까지.

이렇게 사용하는 언어도, 생김새도 다 다른 이들을 한자리에 모아두고 보니 한마디씩 하는데도 시장바닥이 되었다.

DS 인원 중에서도 작은 소란은 있었다.

"후우. 사장님이 물어온 일이니 하긴 한다지만, 그닥 맘에 들진 않네. 이 나라 그냥 확 망하면 좋겠는데."

"그렇게 무시당하고도 굳이 잡아줘야 하나…"

웨이브 퇴치 경합에서 밀린 거나, 일본 내에서 일어난 소란을 보고 실망한 것은 천후 뿐 아니었다. 다들 대놓고 말은 안 했지만 회의론이 감돌고 있었다.

돈이 되고말고 이전에, 고마운 줄 모르는 배은망덕한 녀석들로 보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런 말 하지 말아요들. 레이드 직전에."

공격대장이자 천후의 측근들인 두 공격대장이 그런 분위기를 수습하려 들었다. 다행히 그렇게 거친 분위기는 아니었기에 금세 말은 나오지 않게 되었지만, 마음속으론 그냥 그걸 가지고 가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때.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라즈베리가 나섰다.

"아님다. 일본은 꼭 구해야 함다!"

"응? 됐어. 일본은 끝났어. 이제 네가 좋아하는 만화도 만들기 힘들 텐데."

그녀와 몇 달 알고 지내면서 얘가 상당한 수준의 일본 애니메이션, 특촬 오타쿠라는 걸 알고 있었던 공격대원들은 시큰둥하게 손을 내저었다.

오로치 사태로 일본 내수는 시궁창이 되어서, 한두 해 정도론 지금 수준으로 회복되지 못할 것이라 짐작하고 있었다.

일본에서 직접 이득을 뜯어내는 한국, 중국, 러시아 외에는 끔찍한 경제적 타격을 입을 것이 자명했다. 아니 사실 인접국이기 때문에 이들도 받아서 어느 정도 상쇄될 뿐, 피해에 노출될 터였다.

그리고 문화산업이라는 것은 막대한 자본과 소비 위에 존재하는 것. 당분간 먹고 사는 것도 챙기기 힘든 세상이 오면 소비가 따라줄 수 없는 일본 문화 산업을 엄청난 쇠퇴를 겪으리라. 여기엔 당연히 라즈베리가 좋아하는 만화, 애니메이션, 특촬물 역시 포함됐다.

하지만 라즈베리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님다. 물론 만화는 좋아합니다만, 일본을 반드시 구해야 하는 이유는 따로 있지 말입니다."

"응?"

그럼 무슨 이유지 하고 다들 돌아보자, 눈을 꾹 감고서 한껏 무게 잡고 있던 라즈베리가 일순 눈을 팍 뜨며 외쳤다.

"일본이 망하면! 일본 야동을 못 봅-웁! 웁!"

"얘가 못하는 소리가 없어!"

'야'자가 나온 순간 무슨 소린지 짐작한 하연은 안색이 창백해져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랭크는 라즈베리가 위였지만 라즈베리는 워낙 예의도 바르고 갑질하겠단 생각도 없는 타입이었고, 뭣보다 영천후의 측근 중에서 가장 접근성이 좋은 편이었기 때문에 DS 일반 대원들은 알아서 잘 지냈다.

종종 잘 대해주면 자기도 모르게 영천후의 사생활 정보를 슥슥 푸는 경우도 있었으니 더욱 그랬다. 그래서 그냥 나이에 비해 철이 덜 든 아이 정도로 생각했는데 갑자기 이런 소리라니?

하지만 입을 틀어막혔던 라즈베리는 되려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왜 그러심까? 뭐 잘못 말했습니까?"

"당연하지! 그, 그런 망측한 소리를!"

"음? 하연 언니는 그럼 한 번도 야동 본적 없습니까?"

시선이 단숨에 하연 쪽으로 쏠렸다. 특히 남자들의 시선이. 대량으로. 어떻게 알아들었는지 외국인들까지.

눈으로 범해지는 기분인지라 하연은 얼굴을 확 붉히며 소리쳤다.

"뭐, 뭘 그렇게 보고 있어욧!? 성희롱이에요! 고소할 거예요!"

"아. 참고로 전 주에 한 번 정도 봅니다."

"아으윽!"

성 관념이 근본적으로 다른 상대와 이야기를 하니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다. 결국 하연은 후닥하고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요즘 들어선 하도 한국어를 잘하게 돼서 깜빡했지만, 라즈베리는 동구권 출신. 태어났다는 나라는 전쟁이 한번 휩쓸고 지나가 성비가 무너져 여자가 남자보다 많았던 국가. 저런 이야기를 굳이 음성화하지 않았다.

"연아. 욕구는 자연스러운 거야. 야한 거 정돈 볼 수 있지."

"당신에게 그런 소리 듣고 싶진 않아…."

위로하겠단 건지, 아니면 다른 의도인 건지. 최성아가 굳이 근처로 다가와 실실 웃으며 한 말에 하연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 여자가 그런 소릴 하면 무섭다. 남자 배우를 누구와 매칭시킬지 너무 보이니까.

"하여간 그렇습니다. 독일 거론 힘들어하는 사람도 한국인은 많다고 들었지 말입니다."

"큭…. 부정할 수 없다."

"서양 걸론… 안 서….!"

"야츠노미야 시오 좋지. 나도 좋아해."

"응? 마지막에 중얼거린 거 정태원 아니야? 이거…."

"네? 무슨 말씀이신지. 흠흠."

표정 하나 안 바꾸고 부정한 태원은 헛기침을 하고는 말했다.

"하여간 그렇습니다. 우리는 인류애를 발휘해서라도 오로치를 퇴치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 야동을 위하여!"

"오오!!!"

"…진짜 다 죽이고 싶다."

조금 삐걱대던 분위기가 요상한 걸로 통합되는 걸 본 여성 일리미네이터들은 경멸감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미묘하게 얼굴을 붉히며 그냥저냥 입을 다문 사람들이 있었단 또 다른 이야기.

그때 마침 외교관들과 이야기를 마치고 돌아왔던 천후는 공대원들의 분위기가 고조되어있자 미소 지으며 다가왔다.

"어라. 어째 다들 파이팅이 넘치네요. 무슨 일 있었어요?"

"그냥 라즈베리의 장난에 좀 어울려주고 있었습니다."

태원은 그렇게 간단하게 답했다.

사람 마음이란 게 그렇게 쉽게 풀리는 것은 아니고, 저렇게 얼렁뚱땅 넘어가기엔 일어난 일들이 너무 무겁다. 다만 한순간 기분을 풀 거리 정도는 되었기에 태원과 다른 사람들도 그에 어울려준 것이다.

"일단 일본 정부와 이야기는 끝났어요. 레이드는 당장에라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인원 구성 쪽도 끝났습니다. 일본 일리미네이터들이 말을 잘 들어주더군요."

"B랭크만 공격팀에 넣는 식이었죠? 잘됐네요."

이걸로 공격대의 구성은 어느 정도 갖춰졌다.

메인탱커 영천후, 서브탱커 이강호, A랭크 3명, B랭크 16명, C랭크 32명으로 이뤄진 공격팀.

나머지 일본인 C랭크는 전부 보조팀으로 사용하는… 일리미네이터가 나타난 이후 세손가락 안에 드는 규모의 공격대가 갖춰졌다.

이 전력으로도 잡지 못한다면, 노블레스 클럽 전원이 튀어나와야 하리라.

그들을 한번 쓱 훑어본 그는 자연스럽게 앞으로 나섰다.

한쪽에선 절박함이. 한쪽에는 불만이 뒤섞인 기대감이 섞인 시선이 그 하나에 몰렸다. 천후는 그걸 전부 받아내며 말했다.

"DS의 영천후입니다. 지난 한 달간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선 잠시 그것들을 묻어놓고 자신이 가진 모든 역량을 전부 쏟아부어 주었으면 합니다. 이 이후를 보기 위해서라도."

그의 시선은 일본 일리미네이터들에게 향해 있었다.

미래.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어두운 미래뿐이다.

하지만 모두가 죽어버린 미래보단 나을 터였다.

천후는 착 가라앉은 그들에게 작은 희소식을 전해주었다.

"일본 정부에선 오로치 레이드를 벌이는 동안만 한정해서 일시적으로 텔레포테이션 규제를 풀어주었습니다. 웨이브를 담당하는 두 공격대는 DS의 텔레포터의 협조를 받아 최대한 빠르게 대처할 수 있을 겁니다."

"아…!"

지금껏 DS와 비 라이징 선 멤버 측에서 제의해오던 것이 막바지에 와서야 풀렸다. 그들의 표정에 아주 약간의 생기가 돌아왔다.

이거면 됐다. 보조팀이라곤 하지만… 그들의 보조마법, 방어마법으로 인해 공격대원들의 생사가 갈린다.

이들의 사기 역시 매우 중요했고, 다행히 조금 회복된 것을 알 수 있었다. 천후는 화면에서 날뛰는 팔두의 괴물을 바라보며 외쳤다.

"자! 놈을 끝장내러 가봅시다!"

*

오로치의 지상 이동속도는 빨랐다. 발만 보자면 천천히 움직이는 것 같았지만, 몸이 워낙 크다 보니 어지간한 차량 이동속도는 우습게 나왔다.

체중 1만 톤 이상의 괴물이 그렇게 걸어 다니자, 놈이 내려온 도로에는 발자국이 푹푹 찍혔다. 지반이 단단하지 않은 곳은 무너지기 일쑤였지만 놈은 아랑곳하지 않고 걸었고, 길이 막힌 곳은 화염을 뿜어서 길을 열었다.

덕분에 두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오로치는 도쿄 근방까지 다가오고 말았다. 이제 여기서 조금만 더 들어가면 도쿄 시가지가 나올 터였다. 아니…. 이미 놈 주변엔 수많은 건물이 도로를 따라 늘어서 있었다.

그때였다.

"조금 늦었나."

단 한 번. 하늘이 번뜩였다 싶은 순간. 놈의 거구 앞에는 검은색 암전이 나타났다.

"퀴르르르르르…."

그것이 나타나자 오로치는 움직이던 발걸음을 잠시 멈추곤, 여덟 머리를 움직여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구불구불 휘어져 있는 목은 하나마다 어지간한 고층 건물 이상의 크기를 가지고 있었다.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노려보는 모습에서 현실감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것이 현실.

그냥 저 머리 위에 올라탄 채로 뛰어내리기만 해도 사람이 육편으로 변할만한 크기의 괴물이 존재하는 게 이 세상의 현실이었다.

이놈에게 대항하기 위해 사람을 모아왔다. 온갖 희생을 감수하고. 그렇다면…. 결실을 보아야 할 때!

"자…! 나를 봐라, 괴물아!"

쿠웅! 흑염이 땅을 발로 내려찍자, 주변의 땅거죽이 들리면서 크레이터가 생겨났다. 명백한 적대의사. 그것을 시작으로, 사방에서 내려선 일리미네이터들이 허공을 수놓는다.

그것은 마치 뱀 한 마리와 벌 떼의 싸움.

뱀은 이것이 어제의 재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키웨에에에에!"

"레이드 시작!"

뱀과 벌 떼가 서로 어울리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쿠폰, 코멘트 감사드립니다.

자유연재란에 '이제 내가 몹이다'라는 글을 함께 연재하기 시작했습니다.

레이드물의 에프터 스토리 혹은 안티테제 격인 글입니다.

원래라면 9월 말에 시작했어야 할 물건입니다만, 이래저래 일이 있었어서 이제 해보게 되네요. 그래도 상황은 이전에 심각하게 말해놓고선 호전되어서(부끄러워서 입다물고 있었습니다만) 괜찮을 것 같네요. 그래서 시작하기로 한거고...

혹시 시간 여유가 있으시다면 한 번 둘러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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