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하렘-207화 (207/324)

207화

<회동>

오로치는 잡혔다. 일본 전국을 뒤흔들던 오로치 사태는 DS 공격대와 그 마스터, 영천후의 활약으로 막을 내렸다.

최악의 크리스마스를 지내야 했던 이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조금 늦은 성탄을 축하했다. 하지만 마냥 축제 분위기일 수만은 없었다.

대한민국 때와는 달리 오로치가 도심지에 끼친 피해는 심각해서…. 도쿄 시내는 완전히 엉망이 되어있었다. 하루아침에 이전처럼 돌아갈 수는 없으리라.

그리고 그동안….

"주인님. 일본 정부에서 사람이 또 찾아왔습니다."

"네? 저 아파요, 아파. 다음에 보자고 해주세요."

오로치의 목 안에서 온몸이 꽉꽉 조여진 대가로 온몸에 분쇄골절을 입었던 천후는 유그드라실에 들렀다가 T 대학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치료야 유그드라실에서 마쳤지만, 휴식의 의미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일본에서 잠시 머물자, 일본 정부 측에선 어떻게든 그를 끄집어내려고 난리를 피우고 있었다.

유그드라실은 엘모세와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영천후에게 힘을 더해주려는 생각인지 일본 언론사에 오로치 레이드 영상, 그중에서도 후반부를 레이드를 성공하자마자 풀었고, 당연히 언론사에선 그걸 최소한의 편집만 거치고서 바로 방영했다.

그 영향력은 막대한 것이었다.

오로치에게 잡아먹히면서까지 사력을 다해서 싸워서 놈을 끝장내는 모습은 한국인에 대한 증오범죄를 멈추게 하는 데 충분했다.

마음만 먹었다면 그는 이 레이드를 거절할 수도 있었고, 하다가 힘들어 보이면 포기하고 돌아가 버릴 수도 있었다.

실제 그만한 위기도 있었는데도 공격대의 마스터가 직접 몸이 상하는 것을 개의치 않고 치고받는 모습은 누구라도 경탄할만한 것이었다.

당장 한국 정부나 DS에 대한 비판여론은 손바닥 뒤집듯이 찬양으로 변했고, 일본 정부는 어떻게든 천후를 통해서 정국을 헤쳐나가 보기 위해 끊임없이 러브콜을 하고 있었다.

물론 거기까지 어울려줄 생각이 없는 천후는 괜히 일본 병원에 입원했다고 생각하며 병실에서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으. 얼른 한국으로 돌아가야지, 원."

지금 상황은 한국 때보다 더 심해서, 그의 병실 밖에까지 언론과 정부인사들이 대기표를 찍고서 기다리는 상황이었다. 병실 안에 화장실이 없었다면 용변 문제만도 큰일 날 뻔했다.

"일본 정부는 정말 절실한가 봐요?"

"네…. 각국과 영토분쟁을 치르던 섬들을 완전히 포기하기로 명문화했고, 대한민국엔 대마도까지 내준 상황이니…. 자민당 최대의 위기니까요."

몇 년 전. 자민당의 길고 길었던, 이른바 55년 체제가 막을 내리고 민주당의 압승으로 총리가 나왔다. 일본의 변화를 단적으로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도호쿠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태 대응 미흡 등으로 인하여, 민주당은 간신히 얻어낸 지지를 잃어버리고 자민당에게 다시 한 번 정권을 내주었다. 통한의 패배였다.

임기 내에 일어나는 대재앙은 해당 정권의 치명타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제 완전히 반대의 경우가 되었다. 그것도 더욱 심각하게.

내부로는 아직 하쿠네가 남긴 내홍이 남아있었고, 혼슈 중앙은 대지진으로 전기, 하수, 가스뿐 아니라 철도와 도로까지 모든 것이 손상되었다. 이 책임이 정권에게 돌아가지 않을 리가 없었다.

뭣보다 하쿠네에서 오로치까지 오면서 있었던 진구지의 폭주를 용인하여 피해가 커진 것이 드러난다면….

이 때문에 일본 정부는 정권이 탈취당하더라도 20년 내의 재기를 노리고 행동하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천후는 전혀 거기에 어울려줄 생각이 없었지만.

"그 치들이 뭐라고 하든 전 관심이 없어요. 받을 것만 받고 나갈 겁니다. 혹시 어딘가를 지지한다면…. 민주당 다음 총리 후보자 정도일까."

미쳤다고 태평양 전쟁 시절 저질렀던 악행을 전부 부정하고 미화하는 놈들을 지지한다고 같이 옆에 사진 찍혀줄까. 그럼 일본에서야 좋아하겠지만, 한국으로 돌아가면 매국노 소리 듣는다.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개인적인 감정상으로도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이었고.

영국 때야 이그네스를 데려온다고 모든 걸 감수하고 응해줬지만, 일본에선 그럴 이유가 없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천후는 오로치 레이드 후반의 영상을 몇 번이고 되돌려보았다. 그가 화면을 멈춘 것은 신위를 사용하고자 마음먹기 직전이었다.

"역시 여기서부터 오로치의 움직임이 약간 둔해졌단 말이죠. 정말 약간이지만…."

"그런가요?"

"네. 그리고 태원 씨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이때 라즈베리의 화력에 잠시 공백이 생겼었다는데…."

A랭크 화력 공백은 짤짤이 수준에서도 상당히 티가 난다. 확인해보니 확실히 오오리를 피워올리고는 있는데 방출마법을 사용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희주 씨? 라즈베리가…. 뭔가 감추고 있는 걸까요?"

"……."

천후의 말에 희주는 드물게 답변을 망설였다.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지만, 답이 늦어진다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한참 입을 다물고 있던 그녀는 조용히 속삭였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감추고 싶은 게 있는 법입니다. 그것을 캐내서…. 좋은 결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느릿한 목소리에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천후는 그 말을 듣고 어째선지 그녀가 슬퍼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뭐라고 해야 할까….

'마치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

천후는 희주에게 비밀이 없었다. 자신 자신도 모르는 부분을 제외하면.

하지만 반대는 아니었다.

그녀가 이전엔 어떻게 지냈는지.

부모님은 어떤 분들인지.

고인규와는 어떻게 알게 되었고, 어떻게 그에게 오게 되었는지.

모든 걸 아직 묻지 않았다.

그 일부는 천후가 '물을 필요'자체를 못 느껴서 지나친…. 천후 개인이 가진 정신적인 문제점의 발현이기도 했지만.

그보단 의식적으로 묻는 것을 피한 부분이 컸다.

그녀의 성격상, 캐묻는다면 모든 걸 답해줄 터였다. 이것에 대해선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이게 쉬이 물어도 되는 것이었다면 이미 그녀가 말을 했거나, 적어도 그런 화두가 자연스럽게 나오도록 이끌었을 것이다. 희주는 그런 여자였으니까.

그러지 않았단 것은, 그녀가 천후에게 설정해둔 하나의 터부에 가까웠다. 그리고 천후는 그것을 쉽게 깨트리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그래 주는 것이 그녀를 위하고, 존중해주는 것이 될 수도 있으니까.

그 자신의 삶이 그랬던 것처럼.

"라즈베리는…. 무서워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곧 말해줄 거예요."

"……."

"그 아이는 아주 착하고…. 주인님은 그 아이의 히어로이니…."

스륵. 흔들리는 눈동자를 한 채 희주가 그의 볼을 쓰다듬었다. 그 손에서 느껴지는 차가움이 어쩐지 슬프다. 천후는 자기 손으로 그 위를 덮었다.

"그때가 오면 그 아이를 받아들여 주실 수 있나요?"

머릿속에서 번개가 튀었다. 아련한, 슬픈, 어지러운 감정이 섞인 목소리.

사내가 되어 이것에 답할 말은 하나밖에 없다.

"당연하지."

그건 너에게도 마찬가지야. 희주야.

*

천후가 병원에서 휴식을 취하는 동안 DS 비서진은 자체적으로 일본 정부와 거래 문제를 끝마쳤다.

이미 퇴치금 문제는 레이드 출발 전부터 확정되어있던 것이었지만, 그걸 일시불로 받아내는 것은 아무리 일본이 경제 대국이었다 하더라도 쉬운 게 아니었다.

특히 이번 경우 국가만 3개가 얽혀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다행히도 한, 중, 러 정부 모두 DS에게 지불되는 비용을 가장 우선시해주기로 이야기가 끝나 있었기에 DS는 달러나 유로화, 금, 위안화, 일부는 미국 채권까지 전부 합쳐서 받아내려던 것을 전부 뜯어낼 수 있었다. 그중 일부는 어쩔 수 없이 몇 년 단위로 나눠 받게 되었지만 말이다.

이 뒤에 국가 간 주고받는 아수라장은…. 굳이 보지 않고 빠져나온 셀레나는 피로한 얼굴로 병실로 들어섰다.

"아아…. 죽을 것 같아아아아."

"정말이지. 무슨 엄살이 그리 심한지…."

친란 역시 똑같이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천후는 그 둘을 보고 반겼다.

"수고했어. 란도 고마워. 엔체스터 쪽도 바쁠 텐데."

"음? 아아…. 그 부분은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네. 가문에선 이미 아예 나를 자네의 전담 마크하는 역할로 생각하고 있으니."

친란이 그를 돕겠다고 선언한 시점부터 반쯤 정해진 일이었지만, 라이징 선이 몰락한 이후론 확정적이 되었다.

즉, 각국 대통령을 제외하면 동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인간 취급을 받게 되었다는 소리지만, 천후는 그냥 고개를 갸웃하면서 웃었다.

"고생 많았다며?"

"말도 마. 아으…!"

"만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이 나라의 다리 잡아끄는 습성은 정말 못 어울려주겠군."

감정적인 부분을 최대한 활용해서 파리가 빙의한 것처럼 빌고 빌고 또 빌면서 엄살을 피우는 걸 보다 보면 동정심이 아니라 짜증까지 일었다.

둘의 질린 표정을 보며 쓰게 웃은 천후는 그러다 표정을 굳히고 물었다.

"부탁했던 건?"

"적당히 마무리했네. 일본 내 고아들에 대한 조사협력 쪽은."

오로치 레이드 직전, DS를 웨이브에서 제외할 때까지만 해도 죽어라 말을 안 듣던 그들은 딜이 들어오자 굶주린 아귀처럼 그것들을 주워 먹었다.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럼 일본 쪽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됐군."

"음. 그리고 일본 정계 쪽에서 텔레포테이션 시스템 유지에 대한 논의가 나오고 있던데. 어떻게 생각하나?"

"내 생각은 어쩌고 왜 지들끼리?"

"원래 정치가란 게 그렇지."

뭐 그런 놈들이 다 있담. 천후는 인상을 썼지만, 그렇다고 그걸 내팽개칠 생각은 없었다.

"어느 쪽에서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건데?"

그 물음에 셀레나는 쓰게 웃으며 양손 검지를 펴서 쇽쇽하고 위아래로 움직였다.

"둘 다?"

"응. 내용도 비슷비슷해."

"…좀 시간을 두고 생각해보자. 일단 자민당은 아웃."

웨이브 시기에 보인 텔레포테이션 시스템의 효과는 굉장해서, 일본 내에선 그 수혜를 계속 받고 싶단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이 협상을 어디의 누가 어떻게 타결시키느냐는 바로 다음 대선으로 직결될 가능성이 컸다.

오로치 사태로 인해 디제스터에 대한 공포는 극대화되어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안전하고 싶은 욕구는 누구라도 가지고 있는 자연스러운 것이었기에.

"뭐… 일본 쪽 이야기는 이쯤하고. 나 잠깐 미국 좀 가야 할 거 같은데."

"응? 왜?"

"엘모세와트 쪽 이야기를 좀 해야지. 안소니나 패트릭…. 그리고 머니 크래프트 마스터하고도 이야기를 해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이건 나 혼자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닐 것 같다."

"으, 응? 머니 크래프트까지?"

"그래. 가는 김에 한꺼번에 봐야지. 일본에는 대리인만 왔었잖아. 가는 김에 한꺼번에 보는 게 낫겠지. 그리고 나도 좀 쉬어야지…. 가는 김에 애들도 다 데리고 며칠 놀다 오자고."

"그, 그래? 잘 다녀와."

"……."

셀레나가 실실 웃으며 손을 흔들자 천후는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소리야. 너도 같이 와야지. 금전적인 이야기도 나올 텐데."

"으. 나, 나 바쁜데. 아! 란 어때! 란이 이래봬도 미국 얼굴마담이야?"

"왜 갑자기 날 걸고넘어지지? 나야말로 바쁘다. 아무리 전담이라지만 이제 다시 엔체스터로 돌아가 봐야지."

"윽, 너!"

셀레나가 원망스러운 목소리를 냈지만, 친란은 부채를 펴고서 입을 가릴 뿐이었다.

"뭐냐? 그렇게 만나기 싫은 거냐?"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아으으…."

셀레나는 어쩔 줄 모르고 허우적거리다가, 방 안의 모든 사람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어있자 얼굴을 붉히고 빽 소리 질렀다.

"알았어! 가! 가면 되잖아, 정말!"

며칠 후. 천후는 가족들을 이끌고 미국으로 향했다. 모이는 장소는 머니 크래프트가 준비했기에 그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천후는 볼 수 있었다.

"프리니 로즈 루셀…. 머니 크래프트의 마스터…. 하고 있어요."

웨이브 진 금발에 사파이어를 박아놓은 것 같은 벽안….

마치 누군가를 미니사이즈로 줄여놓은 것 같은 분홍 드레스 차림의 소녀를.

천후의 고개가 자동으로 옆쪽으로 돌아갔다.

"셀레나 씨…?"

이게 무슨 일이죠?

============================ 작품 후기 ============================

여러분. 치질은 무서운 질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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