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하렘-209화 (209/324)

209화

"뭔가…. 어라? 너희 집 가난하지 않았어?"

"집이 가난한 적은 없네요. 회사가 좀 어려웠지."

"아니 하여간. 어라?"

다국적 기업이 뭐? 멍하니 입을 벌리자, 셀레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아빠가 황 씨지?"

"응."

"그런데 나는 왜 아직도 로즈 루셀을 쓸까?"

"어…."

"우리 오빠도 황 씨였는데 말야."

천후는 슬쩍 눈을 피했다. 놀랍게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여태껏 살았던 것이다! 뭐 까짓 자식 성씨 아내 거 쓸 수 있는 거 아닌가 하고!

"에효."

"죄. 죄송."

이건 정말 할 말이 없어서 천후는 입을 다물었다. 다른 사람의 백그라운드에 관심이 없는 것도 정도가 있어야 하는데 이건 너무 심하다. 한번 눈을 째릿 흘겼던 셀레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간단하게 이야기하자면…. 루셀 가는 전통적으로 모계 성을 따르는 가문이야. 그래서 어머니가 가문을 박차고 나와서 아빠랑 결혼한 후에도 나는 어머니 쪽 성을 이은 거고. 그래서 루셀 가 가주가 사망하면 상속금을 받을 권리가 있지."

"그, 그렇군. 그런데 그 루셀 가란 건?"

"아. 그건 모를만한가."

바로 그때. 옆에서 듣고 있던 희주가 입을 열었다.

"루셀은 GMO와 터미네이터 종자 기술 보유로 세계의 식량 사정을 좌지우지하는 다국적 식량 기업의 이름입니다. 루셀 가는 그 기업의 실질적인 주인이고요."

"진짜 처음 들어보는데…."

"모를 수도 있지, 이건. 대중적이지 않거든. 의외로. 너 '몬서트'라고 알아?"

"…모르겠는데."

"비슷한 종류 기업이야. 요즘은 1, 2차 산업 기업은 엄청 커도 잘 모르거든, 보통 사람들은."

"어느 정도 대단한 건데?"

"음~. 루셀이 종자 판매 멈추면 전 세계 식량 위기가 올 수 있을 정도?”

"주 식량 다… 우리 꺼…."

살며시 브이 사인을 치켜드는 걸 보고 천후는 입을 다물었다. 뭔가 스케일이 다른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눈앞에서.

천후는 이해를 포기하고 대신 다른 것을 희주에게 물었다.

"엄…. 희주 씨는 알고 있었어요? 셀레나가 저쪽 사람이란 거."

"네.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 알았습니다만…."

"……."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속으로 으아아아 비명을 지른 천후는 힘이 쭉 빠져서 어깨를 늘어뜨렸다. 오늘만큼 자책감을 느낀 적도 별로 없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던 셀레나는 피식 웃었다.

"됐어. 어차피 성만 받았지, 뭐 없는걸. 이제 프리니도 있고."

"……."

그녀와 완전히 빼다 박은 프리니는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이렇게 두니 나이 차 큰 친자매처럼 보인다. 그녀에게 딸이 생기면 이럴까?

'아니 이게 아니지….'

갑자기 웬 딸 생각을. 고개를 휘휘 저은 천후는 그러다 신경 쓰였던 부분을 물었다.

"그런데…. 얘가 머니 크래프트 마스터라고? 교전 영상과는 다른데?"

그가 배틀 데이터로 본 머니 크래프트의 A랭크는 장신의 여성이었지, 이런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아아. 그건 머니 크래프트의 A랭크 일리미네이터야."

"그런데 왜 얘가 마스터야? 그 사람이 아니라?"

"아아. 그건."

쓰게 웃은 셀레나는 웨이브 치는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머니 크래프트는 돈이 최우선이니까. 그 판단을 가장 정확히 내릴 수 있는 사람을 마스터로 둬. 우리 가문도 그렇고."

"뭐? 이런 열 살짜리 애가 무슨-"

"아니. 프리니한텐 그럴 자격이 있어. 프리니는…. 미래를 읽거든.”

“읽어요. 미래.”

고개를 내려 보니 금발 여자아이가 다시금 양손으로 브이사인을 만들어서 자랑하듯이 보여주고 있었다. 표정은 하나도 변하지 않고.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청색 눈동자에 천천히 파문이 일더니 그 색이 백색으로, 그러다가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무, 무슨?”

마법의 오오라와는 또 다르게, 눈에서 실제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렇게 천후가 놀랄 때. 프리니는 표정변화 하나 없이 천천히 주변 사람들을 한 번씩 쓰윽 둘러보다가 천후를 마주 보았다.

“당신은…!”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를 낸 프리니의 눈은 방금까지 보였던 모습에선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더니, 마치 두려움을 느끼는 것처럼 덜덜 떨었다. 놀라운 것을 보았다는 듯이. 덩달아 움찔 한 천후가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왜, 왜 그래?”

“당신은………………. 아주아주 오래 살겠군요.”

“…….”

천후는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

그 뒤. 천후는 프리니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일 년에 몇 번, 원할 때마다 정신의 저변에 존재하는 ‘흐르는 정보의 강’에서 일종의 확실치 않은 비전vision을 본다고 했다.

그것은 완전히 자세한 것이 아니라 일정 키워드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는 것뿐이고, 비전을 보고 있을 때에는 정신이 최대로 고양되어서 모든 것을 파악하지만, 그 뒤로 많은 정보를 잃게 된다고 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루셀 가가 챙긴 이득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유그드라실에서 한 표현을 따르자면 아카식 다이버라던가. 인류의 집단 무의식에 형성된 지식에 접속할 수 있는데, 이걸 조금 비틀어서 한정적인 미래 예지를 할 수가 있어. 굳이 따지자면 이것도 ‘예측’의 영역이지만. 한없이 확정적인 미래예측이지."

"그건…. 마법이잖아?”

그것도 엄청난 대 마법. 미래예측이라니. 그런 게 진짜 있었으면 이미 지구 지배자가 나왔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셀레나는 고개를 저었다.

"음. 정확히는 초상능력이지. 강호 언니랑 비슷하달까. 마법 외에도 인류가 일정 비율로 얻는 특수 능력이 있다는 식이었어. 이런 걸 통틀어서 네츄럴 소스Natural Source라고 부른다던데. 하여튼 너무 남발하면 위험하니, 안전장치로 SA랭크 마법사가 금제를 걸었다…고 하더라.”

“SA랭크라고?”

그들이 세상에 직접 나타나서 간섭했다는 사건은 유그드라실 출범 이후로 공개된 것이 없었다. 그런데 여기서 그들의 흔적을 잡다니?

"그런데 왜 확정형이 아니야?"

"그야. 프리니 본인 말곤 그 일은 기억 못 하니까.”

"믿어… 주세요…."

“믿기야 믿지.”

프리니가 아래서 작은 목소리로 속삭여대자, 천후는 자기도 모르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어린애가 하는 말엔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당장 눈앞에서 눈동자 색이 금색으로 바뀌었는데 안 믿기도 힘들다.

그러다 천후의 표정이 잠깐 심각해졌다.

"흠.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이렇게 쉽게 이야기 해줘도 돼?"

한정적으로나마 미래예지가 가능하다면 정말 납치를 불사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셀레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 자리에 얘 납치할 생각 있는 사람 있어?"

"…없지."

"일단 외적으로는 네가 알고 있던 것처럼 머니 크래프트 마스터는 A랭크 일리미네이터야. 기본적인 대처는 하고 있는거지."

그렇군. 그리고 그녀가 여기에 직접 혼자 모습을 드러냈단 건, 이 멤버에겐 그녀의 존재가 알려져야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건가? 거기까지 생각한 천후는 그러다 흠칫하고 물었다.

“그럼…. 가문에서도?"

“응. 뭐 그렇지……. 말이 가주지, 실제론 역시 아직 할머니가 가문을 쥐고 있어.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이제 이모가 프리니를 앞세워서 가문을 휘어잡을걸. 물론 프리니의 발언력이 지금도 아주 큰 건 사실이야. 하지만…. 응.”

꼭두각시인가. 게다가 누군가 조종할 필요도 없이 알아서 따르는 꼭두각시라….

천후는 입맛이 써졌다. 그동안 셀레나는 프리니의 머리를 정리해주며 말했다.

“난 루셀 가에서 그리 좋지 않게 떠난 케이스라서, 미국에 함부로 오가기 어려운 처지거든. 그래서 좀 꺼렸던 거야.”

“으음….”

“셀레나 언니. 내 전의 대용품.”

“그래그래~.”

귀에 거슬리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그 순간 셀레나가 그녀의 옷매무새를 다듬어주는 척하며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을 막았다.

“자아자아. 뭐 그런 별것 아닌 이야기니까. 식사해야지. 사람들 기다린다.”

“아. 그렇지.”

한참 신 나게 고기를 굽다가 멈춘 상태. 식탁엔 어느새 사람들이 착석해서 음식 나오는 것만 기다리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인 천후는 고기 굽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 뒷모습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 셀레나는 먼저 착석하러 발걸음을 옮겼다.

그 덕에 프리니는 잠시 제 자리에 홀로 남았다. 바로 그때.

“정말 똑 닮았군요.”

“…….”

천후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다가온 희주는 그녀와 마주 보았다. 흑안과 벽안이 허공에서 만나며 얽힌다. 둘 다, 표정에 변화 하나 없이…. 그것이 당연하다는 것처럼.

그러다. 둘 중 희주가 먼저 아주 희미하게…. 입가를 굽혔다. 그녀와 친하지 않으면 구분하기 힘든, 아주 작은 미소. 그녀는 가만히 손을 뻗어서 프리니와 손을 맞잡았다.

그 순간….

“당신. 완성형…. 어떻게…? 인류에서 나올 수 없는데….”

우뚝. 희주의 움직임이 잠시 멈췄다. 하지만 그녀는 곧 그저 턱짓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라즈베리 미키스트리를 향해.

프리니는 그녀에게 시선을 두었다가 다시 돌리며 말했다.

"불완전…. 완성도 격차…. 비교 불가…. 하지만, 실존. 그렇다면 나…. 네츄럴…. 완성형…. 불완전. 이 자리에 모인 거. 운명.”

희주의 고개가 아주 작게 끄덕였다.

“네. 하지만…. 이곳은 우리 셋의 운명보다 중요한 것을 논하는 자리죠.”

“…….”

프리니의 눈이 깜빡였다. 표정 하나 없이. 마치, 눈앞의 흑발 여자처럼. 그러다, 단 한 번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뒤. 희주는 천후가 고기를 옮겨오는 것을 보고는 프리니와 함께 손을 잡고 식탁으로 향했다.

*

식사시간 동안엔 가벼운 사담들이 오갔다. 크리스마스는 어떻게 보냈느냐. 신년엔 어쩔 생각이냐. 내일 낚시나 하자 하는 이야기들.

그것들을 마치고서 아이들은 개들과 놀다 지쳐 슬슬 곯아떨어질 즈음이 되자, 안소니가 사람을 시켜 천후를 불렀다.

저택 안. 안소니 크라우저는 일부러 만들어놓은 듯한 화로 앞 흔들의자에 앉아있었다. 주변에는 불을 쬐기 딱 좋은 위치에 소파가 놓여있었다. 거기엔 이미 패트릭과 프리니가 앉아있었다.

"앉게."

천후는 사양하지 않고 프리니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런 그의 옆에는 희주와 셀레나가 함께 했다.

모일 사람이 다 모인 것 같자, 안소니는 화두를 던졌다.

"그래. 엘모세와트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네. 그것들을 그냥 놔둘 순 없어요.”

“그건 그렇지.”

안소니의 안구 아래엔 피로가 자리 잡았다. 세계 최초로 정규 공격대를 만든 남자인 만큼, 놈들에게 그 누구보다도 여러번 당한 것이 그였다.

“하지만 놈들의 행동은 교묘하네. 고아들의 출경 기록을 전부 조사하는 건 각국 정부의 협조를 받으면 못할 것도 없겠지만, 놈들도 그 움직임을 눈치채고 대응할 거야. 더 음성화될지도 모르지.

가장 문제가 되는 건 역시 놈들이 어디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지 잘 모른다는 점이야. 노블레스 클럽 내부에서만 거론되었던 이벤트 자리를 노려서 테러를 한 적도 있었고, 그들의 친척이 사망한 사건도 있었네. 솔직히…누굴 믿어야 할지 모르겠어.”

여러번 반복된 피해로 안소니 크라우저는 지쳐있었다. 앞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것을 실행하려니 그 뒤에 올 여파부터 생각하게 된 것이다.

정신계열 주문을 일방적으로 능숙하게 다루는 이상 그의 태도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천후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선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하게 돼요. 그리고 유그드라실에 완전히 의존하게 되죠.”

“…….”

안소니는 한숨을 내쉬었다. 유그드라실의 태도 문제에 대해선 정규 공격대 마스터쯤 되면 다들 꽤 심각하게 체감하곤 했다.

간도 쓸개도 다 빼줄 것처럼 굴다가, 자기들에게 중요해 보이는 것이 있으면 모든 걸 은폐하고, 자신들이 세워둔 룰을 세상에 강요한다.

마법사의 인권을 이야기하면서도, 마법사 간 치고받고 난리를 치는 경우엔 민간인 피해가 좀 일어나도 눈감아준다.

물론 악랄함의 절대적인 정도만 보자면 유그드라실을 엘모세와트에 대고 비교하는 건 미안할 지경이지만, 그냥 따로 떼놓고 보면 이놈들도 폭주하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집단일 뿐이었다.

“자네 말이 옳네. 하긴…. 그렇게 10년을 맡겨 놓았는데 큰 성과를 못 봤다면, 이제 방법을 바꿔볼 때도 되었지.”

“고맙습니다.”

“그런 이야기할 필요는 없어. 이 이야기를 한 건 자네뿐이 아니니까. 패트릭 역시 늘 날 설득해왔지. 거기에 자네까지 더해졌으니. 이 늙은이가 계속 다리를 붙잡고 있는 건 보기에 좋지 않겠지.”

손사래를 친 안소니는 패트릭에게 눈짓했다. 고개를 끄덕인 패트릭이 말했다.

“미국 정부를 설득해보지. 각 주에 따라서 또 이야기가 갈리겠지만 아마 이 정도의 협조는 얻어낼 수 있을 거야. ‘레인보우 폭로 사태’ 이후 개인 정보 침해에 대해 민감해져서 조금 자금이 들어가긴 하겠지만, 그 부분은.”

“저희도…협조할 거니까.”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프리니가 작은 손을 들며 말했다. 천후는 조금 놀랐다. 머니 크래프트는 정말 지독할 정도로 돈을 중시하는 공격대였다. 그 마스터를 뽑는 방식 자체도 이익을 최대화하기 위해 한정적인 미래 예지가 가능한 어린 아이에게 맡겨두었을 정도가 아닌가?

그런데 이런 일에 손을 보태려 들다니?

“이 일은 돈을 쓰기만 할 텐데?”

천후의 물음에 프리니는 아주 익숙한 이야기를 입에 올렸다.

“엘모세와트 테러…. 변수예요. 아주 까다로운. 제거할 의지가 있을 때. 제거. 디제스터와 마찬가지.”

“…….”

흠칫한 천후가 자기도 모르게 셀레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씁쓸한 얼굴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친란과 비슷한 과였다.

============================ 작품 후기 ============================

간단한 공지입니다. 집안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이 되어서 저도 제 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잠시 며칠간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 대단한 건 아니고, 저번에 잠시 말씀드린 '그 병'입니다만(화끈), 며칠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한다네요.

아. 연재를 쉬겠단 이야기는 아니고, 대리인을 통해서 글이 올라올겁니다만, 평소보다 교정이 좀 덜되어있을 가능성이 좀 있습니다. 이 부분 조금 양해해주십사 하고 공지를 남겨봅니다.

넵.

여러분.... 생활 질병은 무서운겁니다. 미리미리, 싸게 고칠 수 있을 때 치료하시길... 엉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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