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하렘-210화 (210/324)

210화

“그러니까…자금 부분. 노 프러블럼. 월 가가 원하고 있어요.”

“…….”

경제란…. 안전 위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경제의 가장 밑받침은 신용. 그 신용은 어디에서 오는가? 당장 이 화폐경제가, 금본위제가 하루아침에 무너지지 않을 거라는 믿음에서 온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오늘날도 달러를, 유로화를, 원화를 쓴다.

오늘날…. 적어도 미국의 영향권 아래에 있는 국가는 하루아침에 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그 믿음이 경제를 유지한다. 그러나 이 전제조건을 송두리째 무너뜨릴 최악의 변수가 있다.

자연재해, 전쟁. 그리고 디제스터.

“우리는… 변수 개입을 최대한 예측할 수 있는, 사람 사이의 것으로 한정하고 싶어요. 디제스터…너무 큰 불확정변수.”

“…….”

“그런데 그거 잡을 사람들 위협받으면…힘들어요. 그러니. 참가.”

마법사란 존재를 ‘디제스터 잡는 도구’로 해석하고 나서는 행동이긴 했지만, 도움은 도움이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던 천후는 문득 물었다.

“혹시 친란도 머니 크래프트와 연관이 있니?”

“란 언니는…. 월 가 자체에서 디제스터에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했던 사람 중 한 명…이예요.”

“사실상 머니 크래프트 창시 아이디어를 낸 게 란이었어. 이야. 오래전이네.”

“셀레브리아 언니도 같이…. 제안했었어요. 원래 제자리…. 언니 꺼.”

“윽.”

프리니가 시선을 보내자 셀레나는 샤샥하고 고개를 돌렸다. 쓸데없는 소리 말라는 듯 손을 휘휘 저으면서.

“…이게 뭔 소리야?”

“네, 네? 무슨 말씀이신지 사장님. 오호호.”

평소보다도 과장되게 웃은 셀레나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잖아요. 엘모세와트 쪽 이야기를 하셔야죠. 헤헤.”

“…….”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던 천후는 몸을 돌려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중국과 러시아, 대한민국, 일본은 제 쪽에서 이야기를 해두었습니다.”

“시일을 맞출 필요가 있겠군. 준비가 되면 바로 이야기를 해주지.”

그 뒤로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가 오간 후, 난롯가에서 나누는 이야기의 화제는 다른 것으로 바뀌었다. 주로 일본 사태 때 일어난 일에 대해, 그 파급력에 대한 이야기였다.

모두 일본이 당분간 상당히 긴 시련의 기간을 겪을 테지만,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거란 이야기를 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이후 성장 동력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이미 초고령화 사회가 찾아온 일본에서 이런 재앙이 일어난 이상, 집중된 부가 아래로 풀릴 거란 생각은 하기 힘들었다.

다만 일본의 존재가 아주 중요한 미국 측에서 그들의 편을 들어주는 경제정책이 나올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 외 영천후나 한국 정부 측에서 일본 정치계에 개입하는 것은 아마도 묵과될 것이라는 이야기도.

그렇게 여러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은 이미 11시를 넘기고 있었다. 미래 예지가 가능하고 뭐고, 몸은 어린애인 프리니 역시 피곤한지 몸을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안소니가 흔들의자에서 일어났다.

“늦었군. 나머지는 내일 이야기하지. 며칠 쉬었다 갈 셈이지?”

“네. 기왕 왔으니까요.”

“그래. 그럼 들어가지.”

그 말을 시작으로 안소니, 패트릭, 프리니는 미리 지정된 자기 방으로 찾아 들어갔다.

“자아. 그럼 우리도 들어가서 자자. 배도 부르니까―”

“어딜 도망가?”

“으.”

뻔뻔하게 웃으면서 등 돌리고 도망가려고 하는 셀레나를 잡은 천후는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으면서 귓가에 속삭였다.

“자. 어떻게 된 일인지 전부 털어놓아 보실까? 응?”

“꺅! 간지러워! 애들도 많은데 뭐하는 거야?”

“그 애들 다 자거든?”

애초에 이 방에는 라즈베리나 이그네스는 같이 데리고 들어오지조차 않았다. 으~하고 앓는 소리를 낸 셀레나는 그러다 한숨을 내쉬었다.

“뭐 어때서. 바뀐 건 아무것도 없는데.”

“그건 알겠지만, 사람 궁금하게 해놓고 입 싹 닦을 수 있을 것 같아?”

“치….”

입술을 셀죽인 그녀는 희주와 강호에게 한 번씩 눈을 맞춰보곤 말했다.

“잠깐 우리 자기 좀 빌릴게.”

“그러시죠.”

“쌓인 이야기가 있는 듯하니 그래라. 풀 건 풀어야지.”

둘의 허락을 받은 셀레나는 그와 함께 별장 밖으로 나왔다. 별장 밖으로 나오자마자 보이는 밤하늘엔 별들로 가득했다. 도심지에선 맨눈으론 북극성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데, 여기는 밤하늘 가득히 은가루를 펼쳐 뿌려놓은 듯이 반짝임이 가득이다.

그 아래서 금발의 여자가 웃었다.

“쨔잔. 사실 난 완전 부자의 손녀딸이었던 것입니다. 놀랐어?”

찡긋하고 왼눈을 깜빡이며 하는 말에 천후는 한숨을 쉬었다. 이 시간, 이런 장소에서까지 굳이 입고 있는 정장 치마를 양손으로 누르며, 허리를 굽히고 혀를 내미는 장난기 넘치는 모습은 그러나 그렇게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왜 진작 말 안 했어?”

“굳이 말할 필요 없잖아? 그땐 부자도 아니었고. 가문에서 뭐 받는 것도 없었고.”

“그래도….”

“너도 안 물어봤었고.”

말문이 턱 막힌 천후는 입을 다물었다. 이건 정말 할 말이 없는 이야기였다.

그가 말이 없어지자, 셀레나는 빙긋 웃으면서 다가와 그의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왜 주눅 들어? 뭐 잘못했어?”

“야….”

잘못한 사람인 거 자각시켜놓고 이런 소리 하면 아무리 그라도 사람 새낀데 미안함이 사무친다. 하지만 셀레나는 볼을 쓰다듬던 손을 목덜미로 가져갔다.

“그럴 거 없어. 서로 아무것도 없었잖아. 아무것도 없이 잘 지냈잖아. 난 그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걸. 그래서 강호 언니 좋아하는 거고.”

“…….”

만감이 교차했다. 셀레나는 가만히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오기 싫어했던 건…. 가문이랑 얽히면 피곤해져서지 다른 게 아니야. 음. 어디부터 이야기해야 하지? 그러니까. 나랑 란이랑, 몇몇 가문 아이들이 모여서 특수학교에 다녔던 적이 있었어. 일종의 영재학교라고 해야 하나?”

그녀의 어머니, 케이트 로즈 루셀은 황권복과 결혼하여 가문을 나온 이후에도 가문에서 받을 지원은 최대한 받아왔다.

모계의 성을 잇는 루셀 가의 특성상 그 수혜는 셀레나만이 받을 수 있었는데, 그 덕에 그녀는 어릴 적 세계 굴지의 부자 자제들과 미국의 영재학교에 다녔다.

“그때는…. 뭐랄까. 인생 리즈기 같은 거였거든! 와! 어쩜! 성적이 잘 나왔었어! 음. 좀 지나치게? 정신 차려보니까 지금 프리니 위치에 있더라고.”

루셀 가의 기대를 한몸에 받는 확정적인 차기 가주. 그것이 셀레나였다. 하지만 사건이 터졌다.

“나도 거기에 한참 취했는데. 오빠가 그렇게 됐잖아? 그러니까…. 아빠 생각이 나더라. 그래서 돌아왔어. 그리고 다시는 미국으로 가지 않았지.”

“그걸 그냥 내버려뒀어?”

“몇 번인가 회유가 있었긴 했지. 하지만 일정 시점부터…로마이어가 꼬였거든. 그가 가문에서 나에게 연락해오는 경로를 하나씩 차단했지. 그 뒤로는 뭐.”

몇 번이나 셀레나의 귀환을 바라던 가문은 그러다 프리니를 얻게 되었고, 그녀로 완전히 갈아타 버렸다는 그런 이야기였다.

“애초에…. 모계에 집착하는 것 자체가 프리니 같은 아이가 몇 세대에 한 번씩 태어났기 때문이야. 나 어릴 적엔 내가 그런 힘을 가지고 태어난 줄 알았다나. 하지만 아니었던 거지. 막상 할머니도 전대 미래 예지자를 직접 본 적이 없어서 분별을 못 했었거든. 하지만 프리니가 힘을 각성한 순간 확실해진 거지.”

“그런 건….”

“응. 뭐. 빈정 상하는 이야기지. 그리고 미국에 왔단 게 들키면 분명 다시 오라고 할 게 분명하니까.”

“왜?”

“주판이 두 개면 더 좋지 않겠어?”

아하하 하고 웃으며 하는 말에 천후는 그녀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낮게 웃은 셀레나는 그러다 그의 목에 양팔을 두르고 속삭였다.

“그래서 오기 싫어했던 거야. 다른 건 없어.”

“어.”

“자. 별거 없는 이야기였지?”

“글쎄다….”

그녀가 말했던 어린 시절이란 정말로 어려서…. 열다섯 이전의 이야기란 건데, 이미 그때부터 어지간한 성인들도 혀를 내두를만한 일들을 해치워왔단 건 놀라웠다. 하지만 그보다 신경 쓰이는 건….

“먼저 물어보지 않아서 미안해.”

몸을 섞고, 사랑을 말하고, 언제나 함께하는 그녀에 대한 것에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은 것은 일종의 죄다. 희주와는 다르게, 셀레나는 지금까지 이것을 터부시해오지도 않았지 않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셀레나는 그의 코를 살짝 쥐었다.

“말했지? 별거 아니라고. 그리고 너 원래 그런 애란 거 이젠 아니까.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것도 아니란 것도.”

“…….”

“그리고 꼬치꼬치 캐물었으면 오히려 싫었을 거야. 서로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제로에서부터 시작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건…그렇지.”

“봐. 이번 일을 알게 돼서 그래서 넌 날 더 좋아하게 됐니? 더 잡아두고 싶어졌어, 막?”

“…아니.”

그렇진 않다. 그녀가 세계 굴지 가문과 연관이 있던, 과거에 알아주는 천재였던.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런 게 없어도 셀레나는 셀레나다.

크게 고개를 끄덕인 셀레나는 코에서 손을 떼곤, 대신 얕게 입을 맞췄다 땠다.

“그래. 그게 좋은 거야. 적어도 난 그래. 응. 그러니까. 어깨 펴. 보기 싫어.”

“음.”

그 말에 천후는 순순히 어깨를 폈다.

“좋아, 사장님. 이제 좀 볼만한 얼굴이 됐는걸.”

“내참.”

“헤헤. 뭐 어때. 아. 그렇게 신경 쓰이면~. 나중에 내가 사고 하나 쳐도 봐주던가.”

“어째 말이 이상한 데로 빠지는데. 이젠 저번처럼 무슨 선물이니 이런 건 하면 안 돼.”

“그 뒤로도 부분적으론 계속 하고 있었지만 뭐.”

“뭐어?”

“아. 그때랑은 좀 달라. 돈을 굴리고 있는 것뿐이니까. 손실 예측하고. 리스크 최소화도 하고. 일본이 저런 상황이었는데 손 놓고 있었으면 오히려 그게 호구야. 상황을 우리가 가장 확실하게 알고 있는데 안 할 이유가 없지.”

“이상한데…. 너 이미 사고치고 말하고 있는 거 아니야?”

이걸 믿어도 되나 하는 눈으로 바라보자 셀레나는 어설픈 휘파람을 불었다. 순간 확신이 든 천후는 이마를 짚었다.

희주나 강호가 좀 얌전한 스타일이라면 이 녀석은 종종 제멋대로인 면이 있어서, 지금처럼 사람을 곤란하게 만들곤 했다.

“그건 그때 가서 이야기하자….”

“응? 치사해! 분위기까지 다 잡아놓고!”

“진지한 분위기 깬 건 너예요, 너.”

“아. 그랬나? 에이, 손해 봤네.”

“어휴, 정말…. 들어가자. 다들 기다리겠어.”

“아하하.”

맑게 웃은 셀레나는 그의 왼편에서 팔짱을 끼고서 방 안으로 들어갔다.

*

한편. 어른들의 대화에 어울리지 못해 먼저 들어간 아이들. 그중에서 몸과 정신만 좀 큰 두 아이들은 침대에 누워서도 눈을 붙이지 못하고 있었다.

“으으으음!”

“시끄럽구나. 아까부터 왜 그리 소란이냐?”

라즈베리와 이그네스는 같은 방을 배정받았는데, 라즈베리는 아까부터 잠들지 못하고 뒤척여대고 있었다.

“으. 아무리 생각해도 아까 그 꼬맹이가 한 말이 신경 쓰이지 말입니다.”

“미래를 읽을 수 있네 없네 한 거 말이냐?”

“네.”

좀 떨어진 식탁에 있긴 했지만 대화 소리가 들렸던 라즈베리는 그 말이 아직도 귓가에 맴돌고 있었다. 하지만 이그네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그냥 평소에 너무 늦게 자서 잠이 안 오는 건 아니고?”

“윽…. 그, 그것도 있지만.”

차마 아니라고 할 순 없는 게 라즈베리의 현실. 11시라니. 너무 착한 아이들을 위한 시간이 아닌가! 심지어 여긴 목가적인 분위기를 내기 위해서인지 방안에는 TV 하나 없었다.

“그, 그런 이그네스는 신경 안 쓰입니까? 미랩니다, 미래! 왕 부자가 될 수 있지 말임다!”

“네 녀석도 돈은 많은 주제에 욕심도 많구나. 난 그런 것 흥미 없다.”

달관한 듯이 말한 이그네스는 자기 위해서 눈을 감았다. 어째 대응이 훨씬 어른스러운 게 굉장히 분하다.

“으으. 완전히 할매지 말입니다.”

“시끄럽다. 멋대로 말하거라. 난 잘 테니.”

“아, 안됨다. 제가 잘 마음이 들 때까지 놀아주세요. 이 시간엔 잠이 안 온단 말임다!”

그렇게 말하며 진짜로 몸을 짤짤 흔들자, 눈을 날카롭게 뜬 이그네스는 뭐라 한소리 하려고 했다. 하지만 막상 라즈베리를 보니 정말 당장 울 것처럼 눈동자가 일렁이는 것이, 함부로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잠시만이다.”

“오오! 역시 할매!”

“때릴 테다!”

정말로 투닥거리는 걸 와락하고 끌어안은 라즈베리는 그녀의 머리칼에 얼굴을 묻었다. 그 뒤, 라즈베리의 숨은 잠시 거칠어졌다가 고르게 바뀌었다.

잠든 건 아니지만, 잠들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사인과도 같아 이그네스는 쯧하고 혀를 차면서도 다시 누웠다.

그리고 그동안….

그녀는 생각했다.

정말…….

‘탐나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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