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아빠는 그런 거 인정 못 한다!>
1월은 정신없이 지나갔다. 일본 사태 뒤처리도 있었고, 각국에서 엘모세와트 색출을 시도하며 보내오는 정보들을 유그드라실과 정규 공대 마스터들과 공유하는데 익숙해지는 데만도 시간이 걸렸다.
그러다 보니 눈 깜짝할 사이에 설날이 되었다.
"타임 이즈 컴!"
"이 집의 모든 재화는 우리 것이다!"
설날 하루 전부터 기대감에 부풀어 있던 이브와 에바는 생활 한복을 입고서 들떠있었다. 분홍색을 많이 쓴 한복이었는데, 날이 추운 걸 의식해서인지 옷감이 비단에 조금 더 보강되어있었다.
머리에는 둘 다 흰 머리 위에 작은 나비와 이미테이션 보석이 박힌 배씨머리띠를 쓰고 있었다.
"허어. 이 녀석들. 설날은 너희 용돈 주는 날이 아니다. 그런 소리는 입 밖으로 내면 안 된다."
아이들이 들뜬 목소리에 강호가 찬물을 끼얹었다. 그녀 역시 한복을 입고 있었는데, 이전까지 입고 다니던 남자 한복이 아니라 제대로 된 여성 한복이었다. 아이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편의성을 중시해 지퍼 등을 달아둔 생활 한복이 아니라 정말 전통적인 한복이라는 점일까?
요즘 세상에선 예단으로도 잘 찾아보기 힘든 물건이라, 한눈에 봐도 굉장히 고가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오늘은 다 한복 입기로 한 거야?"
"응. 이런 날 아니면 입기 힘드니까."
"오늘도 안 입어도 되잖아? 굳이 이제 와서."
"음?"
"…아니 선밴 아니구나."
천후는 굳이 설날에 한복 입을 필요 있냐는 쪽의 사람이었다. 어차피 설날에 한복 입는 것도 이제 와선 하는 집만 하는데, 대놓고 다국적인 집안에서 이럴 필요가 있나 싶었던 것이다. 전형적인 박제문화가 아닌가?
하지만 눈앞의 이 여자는 일상적으로 한복을 입고 다니는 사람. 설날에만 한복 입으면서 생색내는 사람은 깔 수가 있어도 이강호는 깔 구석이 없었다.
원래 입던 한복이 남자 거여서 문제지만.
"뭐 어때. 원래 이런 건 있는 사람들은 다 챙겨줘야 하는 거야."
"으윽. 걷기 힘듬다."
안쪽에선 이제야 다 갈아입었는지 셀레나와 라즈베리가 걸어 나왔다. 셀레나야 멀쩡했지만, 라즈베리는 원래 바지를 자주 입다 보니 긴 치마 자체에 익숙하지 않아 발걸음이 굉장히 조심스러워져 있었다.
"으. 여자 한복엔 바지가 없는 겁니까?"
"따지고 보면 아주 없진 않은데. 다들 전체적으로 편한 바지라 펑퍼짐하긴 해도."
"…으으. 그냥 치마 입겠슴다."
스키니 계열을 선호하는 라즈베리의 성향상 그건 아니다 싶었는지 라즈베리는 고개를 내저었다.
"으. 기모노 때보단 낫지만, 이것도 불편하지 말임다."
"기모노도 입어봤어?"
"네. 처음 일본에 갔을 때 맞춤으로 구입한 적이 있슴다. …너무 갑갑해서 그 뒤론 안 입었슴다."
보폭 자체가 자유롭지 못해서 활발한 라즈베리의 성격상 도저히 입고 다닐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만화에서 여자들이 자주 입기에 사봤다가 완전히 돈만 날린 꼴이 되었다.
"근데 희주씬?"
"아…. 저희 다 끝내고 이그네스에게 입혀주고 있슴다."
"…아이고."
희주와 강호를 제외하면 한복 입는 법도 다들 제대로 몰라서, 둘이 따로 사람을 분담해서 입혀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이브, 에바는 생활한복이라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성인들은 맞춤 한복이라 꽤 복잡했다.
"아아. 정말이지 이런 옷은 부끄럽구나."
"괜찮습니다. 잘 어울립니다."
"어울리는 게 문제가 아니라…. 으. 되었다."
한참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안방 문이 열렸다. 보니 전형적인 색동저고리를 입은 이그네스가 귀까지 새빨개져서 걸어 나오고 있었고, 희주는 그 뒤에 아주 연한 분홍에 매화 자수가 그려진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다른 이들과는 달리 불편해하는 기색이라곤 하나도 없어서, 마치 일상복인 것처럼 편히 행동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천후는 둘을 돌아보며 말했다.
"잘 어울려요."
"감사합니다."
"…흥."
순순히 기뻐하는 희주와는 달리 볼을 뿔룩 부풀린 이그네스는 골이 난 듯 다른 소파 저쪽으로 걸어가 털썩하고 세게 주저앉았다. 그때. 천후는 뭔가가 옆구리를 세게 찔러대고 있는 것을 느꼈다. 이브와 에바였다.
"응? 왜?"
"뭐야? 우리 안 어울려?"
"나는!"
"아니. 어울리지. 어…. 셀레나도 라즈베리도 선배도 다들 어울려."
"어휴! 그때그때 말해!"
"못 됐어, 못 됐어!"
푸푸푹. 춉으로 찔러대는 것 말고도 말 자체가 가슴이 쓰리다. 틀린 말이 아닌지라 천후는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음. 너무 여러 번 말하면 입 발린 소리 같잖아."
"괜찮아, 에바는 입 발린 소리 베리 오케이."
"받아주겠어. 난 쿨하니까."
"……."
강하시네들. 제가 졌습니다. 천후는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어버렸다.
*
구정이라지만 딱히 차례를 지내진 않았다. 부모님 영정 사진도 없는데 절하기는 좀 그러니까. 음식은 차려놨지만 말이다. 그런 건 그냥 혼자서 나중에 따로 하기로 했다.
대신에 완전히 노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렇다고 이 추운 날씨에 밖에서 노는 것도 그래서, 집에서 윷놀이나 하다가 뒹굴뒹굴거 거리는 나태한 상황이 됐지만 말이다.
"역시 어디 밖에 좀 나갈걸 그랬나."
한강가서 연이라도 날렸어야 했나 하는 생각이 얼핏 들었지만, 이미 때늦은 후회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건 아웃도어 파인 천후나 강호뿐이었고, 다들 그다지 밖에 나가고 싶어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올해 겨울은 최근 10년 사이에 가장 매서운 추위를 보이고 있었는데, 설날이 된 지금도 다르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그래도 아주 춥다 정도로 끝났지만, 일본의 경우 후지산 분화 때 나온 화산재가 태양 빛을 가려 기온을 낮추는 바람에 정말 지옥과도 같은 겨울을 보냈다.
이런 데 나가서 뭐 하고 싶을 리가 없었다. 스키나 한번 타러 가는 정도면 모를까.
그리고 설날. 아이들이 기대하는 건 연날리기도, 윷놀이도, 팽이치기도 아니었으니.
"……."
"……."
점심을 마치고 아까 전부터 오도카니 앉아서 급 얌전한 척을 하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자기도 모르게 입술 끝이 씰룩거린다. 세배 이야기 언제 나오나 하고 대기 중인 것이다.
속 보이는 녀석들 같으니라고. 슬쩍 희주와 눈을 맞춘 천후는 소파에서 내려와 바닥에 앉아 땅을 착착 소리 나게 두드렸다.
"그래. 그럼 이제 세배해봐라."
"오오."
"타임 이즈 컴."
샤샥하고 번개 같은 속도로 앞에 서는 것이 웃긴다. 셀레나나 강호도 쓴웃음을 지으면서 같이 앉았다. 그동안 둘 옆에 라즈베리 역시 와서 섰다.
"어? 언니도 하게?"
"네. 아. 세뱃돈은 안 받을 검다."
"우오. 부자."
"오늘따라 멋져 보여."
"후우. 제가 좀 잘났지요."
샥 하고 허세 넘치게 머리를 쓸어 넘긴 라즈베리는 그러다 이그네스를 바라보았다.
"이그네스는 안 합니까?"
"윽."
이그네스의 표정이 살짝 찌푸려졌다.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했더니 저것이 굳이 입에 올린 것이다. 과연 이브, 에바는 그녀에게 달려들어 양손을 잡고 끌어냈다.
"이리와, 이그네스."
"절하는 법 알려줄게."
"절하는 법을 모르는 게 아니라…. 하아…."
머리가 아프다. 이것들 좀 말려보라고 천후나 다른 사람들에게 시선을 보내봤지만, 다들 약속이나 한 것처럼 고개를 샤샥하고 돌렸다.
저 둘이 이그네스를 동갑내기 취급하는 건 정말 어떻게 할 수가 없는 부분이라 완전히 손을 놔버린 것이다.
"알겠다. 알겠어. 같이 하면 될 게 아니냐. 대신 난 세뱃돈 받을 거다."
"응? 당연한 거 아냐?"
"오늘뿐이야! 하루를 일 년처럼!"
"참으로 명언이구나…."
듣는 쪽이 부끄러워 얼굴을 붉힌 이그네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라즈베리가 엣헴하고 헛기침을 하면서 말했다.
"자. 그럼 하나, 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정말 보기 드물게 다소곳하게 절하는 걸 보고 천후는 싱글벙글 웃었다.
"그래. 너희도 새해 복 많이 받고. 건강하고. 예쁘게만 자라라."
"마지막은 걱정 마!"
"맡겨만 두슈!"
무한 근자감에 이그네스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동안 천후는 준비해놨던 봉투를 꺼내서 둘에게 나눠주었다.
"자. 세뱃돈."
"감사합니다~."
"잘 쓸게, 오빠. 알라뷰!"
샤샥샤샥. 그 뒤로는 수금원이 수금하듯 한사람씩 돌면서 봉투회수 타임이 있었다. 둘은 봉투를 열어보기 전에 이미 포만감을 느끼는지, 만족의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얼마씩 들었슴까?"
"궁금해? 보여줄까?"
자기가 받진 않았지만 얼마나 들어있을지는 궁금했는지, 라즈베리는 둘의 옆에서 기웃거렸다. 괜히 의기양양한 둘은 이그네스 옆자리로 와서 자기네들만의 존을 형성하더니 봉투 개봉 쇼를 시작했다.
나온 금액들은 다들 상식적인 수준이었다. 여자들끼린 말이라도 맞춰놓은 건지, 액수가 정확히 일치했다.
"좀 적-"
"오오. 풍어다, 풍어."
"만선이여, 아주."
"-다들 통이 크지 말입니다."
라즈베리는 입에서 나오려던 말을 바꿔서 곧장 맞장구를 쳤다. 말하는 순간 저쪽에서 살기에 가까운 눈빛들이 촤좌좍 꽂혔기 때문이다. 입을 함부로 놀리면 갈기갈기 찢어질 것 같은 기분에 라즈베리는 몸서리쳤다.
"그럼 마지막으로 오빠 꺼~."
"에이. 똑같겠지, 뭘."
"또 모름다. 신사임당일 수도 있지 말임다."
그래도 집의 가장인데 다른 사람보다 좀 더 들어있을 가능성이 높다. 마침 봉투 역시 가장 얇은 게 '한 장'만 들어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었다.
"좋슴다. 여기에 든 게 세종대왕 님이 아니라는 거에 제 손모가지와 전 재산을 건지 말임다!"
저쪽에서 대놓고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은 강호는 불안한 마음에 천후에게 가서 물었다.
"너무 많이 넣은 건 아니겠지?"
"응? 아니에요. 적당히 넣었어."
며칠 전부터 강호는 천후에게 신신당부했다. 애들 버릇 나빠지니까 세뱃돈 너무 많이 주지 말라고. 안 그래도 물질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애들인데 손에 든 돈까지 많아지면 방탕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천후도 적당히 넣었다. 적당히.
자기 딴엔.
"그럼 까볼까?"
"쿵작작~. 쿵작작~. …응?"
신 나게 배경음을 입으로 연주하던 이브의 움직임이 내용물을 보고 딱 멎었다.
"….으응?"
"….흐으으음?"
같이 보던 에바 역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눈을 꾹 비비고 종이쪼가리를 다시 넣었다가 빼고를 반복했다.
아무리 그래도 내용물이 바뀌지 않자, 둘의 눈동자가 흔들거리다가 허공에서 마주쳤다.
"어~."
"보여줄까?"
"응. 그러자."
합의를 본 둘은 봉투를 가지고 저쪽에서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강호에게 쪼르르 걸어갔다.
"응? 왜 그러냐?"
"오빠 돈 잘못 넣은 거 같은데."
"이거 뭐야. 몰라. 무서워."
"……."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짐작한 강호는 봉투를 받아서 내용물을 확인해보았다.
0이 좀 많다. 한 6개쯤?
"….천후야. 잠깐 나 좀 볼까?"
혼났습니다….
*
"오오. 신사임당. 오오."
"안정적인 색이야."
자기들이 아는 지폐가 나오자 그제야 마음의 안정을 되찾은 둘은 환호하며 즐거워했다.
한편 천후는 강호에게 여전히 잔소리를 듣고 있었다.
"반성해라, 반성."
"큭. 이런 날이 오다니."
내가 선배한테 반성하란 소리를 듣다니. 치밀어오르는 수치심과 부끄러움에 천후는 얼굴을 붉혔다.
맨날 위성이 어쩌네, 회사가 어쩌네 하다 보니까 일반적인 금전 감각이 완전히 망가져 있었던 것이 패착이었다.
"평소에도 이렇게 막 주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응? 아니야. 그럴 리가. 껄껄."
"그으래?"
집안에서 돌아가는 돈 관리는 희주가 하고 있었지만, 이 둘에게 들어오고 나가는 돈 정도는 강호도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보다 보면…. 분명 절대 있을 수 없는 소비가 일어나곤 했는데. 그 출처야 뻔했다. 오늘 이 순간 뻔해졌다.
"하여간 너도 너무 팔불출이다. 앞으론 자제해라."
"어흠어흠."
할 말이 없어서 헛기침만 한 천후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말 돌릴 꺼리를 찾다가, 만족감에 젖어있는 아이들에게 물었다.
"그런데 세뱃돈으로 뭐 할 거야?"
"……."
한눈에 봐도 잔소리 무인도에서 탈출하기 위한 시도인 게 보였지만, 강호는 눈매를 가늘게 뜨기만 할 뿐 놓아주었다. 어차피 이 자리에서 말한다고 들어먹을 성격도 아니고 하니.
물론 천후도 물으면서도 뭘 사겠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나올 거라 생각하고 던진, 말 그대로 도망용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때.
이브의 입에서는 상상을 초월한 답이 튀어나왔다.
"으음~. 남자친구랑 놀래!"
우뚝. 촤좌좌좍.
실실 웃으면서 물었던 천후의 얼굴이 그대로 얼어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