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남! 자! 친! 구!
무시무시한 내용에 경악한 천후는 침을 한번 꿀꺽 삼키며 물었다.
"나, 남자친구?"
"응. 이브 남친 있어."
생글거리며 하는 말에 천후의 몸이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덜덜덜 떨렸다. 잘못 들었나 싶어 에바에게 시선을 보내니, 그녀도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
얼음 동상이 돼서 움직이지 못하는 꼴을 저쪽에서 보고 있던 이그네스는 한숨을 쉬며 부연설명을 해줬다.
"둘 다 학교에서 인기가 있는 편이다."
"그건 다행이네."
괴롭힘당하는 것보다야 인기 있는 게 낫지.
"남자아이들에게도 말이다."
과연. 그런가. 이야. 우리 아가씨들이 남자애들한테 인기가 있단 말이지. 허허허….
실성한 듯이 천후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기 시작하자,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셀레나가 물었다.
"천후. 괜찮아?"
"아. 그럼 괜찮고말고. 와. 요즘은 초등학생도 연애를 하는구나. 하. 하하하."
"어…. 일단 진정할래?"
"나는 진정하고 있어. 매우. 매우 냉정하다."
"네 다리나 보고 그런 소리를 해."
얼굴은 웃고 있는데 다리는 드럼 큰북 페달이라도 밟는 것처럼 달달달 떨리는 것이 아무리 봐도 진정한 걸로 보이지 않는다.
"아냐. 정말 진정하고 있다고. 아 그런데 셀레나."
"응?"
"내 샷건 어디 있지?"
만난 이후 처음 본 이 이상 상큼할 수 없는 얼굴로 천후가 입에서 내놓은 말이었다.
"샷건 같은 거 없어!"
"어디서 사지? 악션?"
"안 팔아!"
빽 하고 셀레나가 소리 지르자 천후는 양 주먹을 꾹 쥐고 부들거렸다.
"말도 안 돼…. 내 딸을 감히 채가려 들어?"
'글렀네, 이거.'
완벽하게 딸바보 아빠 모드로 들어갔다. 그것도 전형적인 과보호하는 아빠. 사실 천후와 이이들의 나이 차이는 열 살 차이지만, 사실상 양육을 떠맡은 상황이기 때문에 정말 아빠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소리를 들었으니 신경 쓰이지 않을 수 없단 건 알지만. 참. 전형적이기도 하다.
한편. 단 한 마디로 천후의 멘탈을 우주 저편으로 승천시킨 이브는 태연자약하게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더니 누군가와 통화를 시도했다.
"여보세요. 아. 규현아."
쫑긋. 모르는 이름이 나오자 파들거리고 있던 천후의 몸 떨림이 딱하고 멎더니, 스으윽 하고 몸을 이브 쪽으로 기울였다. 그런 천후의 움직임은 새까맣게 모르는 이브는 신이 나서 말했다.
"나 세뱃돈 받았다~. 내일모레 놀자."
"…큭!"
먼저 놀잔 소리를 듣다니. 어떤 복이 터진 놈이야, 이거? 다시금 다리가 전자동으로 떨린다. 그때였다.
"응. 응. 승규랑, 재경이도? 응. 이그네스? 응. 알았어. 그럼 허락받고 톡 보낼게."
통화를 끝낸 이브는 천후에게 다가와 물었다.
"오빠. 나 애들이랑 내일모레 놀이동산 갔다 와도 돼?"
"놀이동산?"
"응! 에바랑~ 이그네스도 같이 데리고 갈 거야. 그렇게 6명이랑 갈 건데."
"…어느새 당연히 가는 걸로 정해졌나."
저쪽에서 듣고 있던 이그네스는 골치가 아픈지 이마를 꾹꾹 눌렀다.
"으으음…."
천후는 고민했다. 심각하게 고민했다. 여기에서 안된다고 하면? 무지 실망하겠지? 그러니 천후는 다른 대답을 골랐다.
"그럼. 괜찮지. 어른이랑 같이 갈 거니?"
"음~. 아냐! 괜찮아 우리끼리 갈 수 있어."
"알았어. 그럼 조심해서 다녀와야 해.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주고."
"응!"
예이 하고 좋아하며 돌아서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천후는 그녀가 다시 폰 화면으로 고개를 떨구자 바로 표정을 딱딱하게 바꿨다.
그래. 여기서 안 보낼 순 없다. 미움받긴 싫으니까. 대신…!
"후…후후후…."
들썩. 들썩들썩. 음흉하게 어깨를 들썩이며 웃는 모습을 본 저편에서 본 라즈베리는 눈을 빛냈다.
"보임다. 싸부의 생각이. 저에게도…!"
그렇게. 작은 사건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
아이들이 간다는 놀이공원은 서울에서 지하철만 타고 가면 찾아갈 수 있는 곳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다들 열살. 아니, 이제 떡국 먹었으니까 열한 살. 나름대로 대모험인지라, 모인 아이들은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 애들이랑만 와보는 거 처음이야!"
"나도! 가면 바로 바이킹 타자, 바이킹."
"그거 무섭잖아."
조금 먼저 와있던 남자아이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으며 이브 일행이 그들에게 접근했다.
"헬로~."
"왜 이리 늦었어."
"여자는 원래 준비가 오래 걸려."
오호호하고 가볍게 남자아이들의 신경질을 받아넘긴 이브는 그러다 조금 뒤에서 탐탁잖은 얼굴을 한 이그네스를 끌고 와서 소개했다.
"자. 이그네스도 데려왔어."
"…이그네스다. 영국에서 왔다."
"와! 진짜 외국인이다!"
"얘들도 외국인이야."
"아 그랬지? 근데 얘들은 맨날 봐서 외국인 안 같잖아."
웅성웅성. 자기들끼리 뭐라 하는 소리에 이그네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어린애들이다 보니 용어 구분 같은 게 전혀 안 되고 있었다.
'이러면 사실상 내가 보호잔가.'
설날 직후다. 놀이공원에 사람이 얼마나 많을지는 상상도 가지 않았다. 거기서 이 녀석들을 챙길 생각을 하자니 벌써 눈앞이 깜깜하다.
게다가 신경 쓰이는 것 그것뿐 아니었다.
<코드네임 플레임. 상황을 정기적으로 보고해주기 바란다, 오버.>
"……."
귓가에 달고 온 작은 블루투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이그네스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알겠으니 내가 말할 때까지 말 걸지 말아라."
"응? 이그네스. 뭐라고?"
"아니다. 혼잣말인 게야."
담담히 답한 이그네스는 슬쩍 고개를 돌려서 뒤쪽을 보았다. 그러자 검은 정장에 선글라스를 쓴 사람 둘이 흠칫 놀라 딴청을 부리는 게 보였다.
'이게 뭐하는 짓인지….'
이그네스는 오늘 아침에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이그네스. 이제 믿을 건 너뿐이야!"
"무슨 소리냐?"
"이브가…이브가 남친과 마지막 선을 넘는 걸 막아야해! 따라가면서 그런 기색이 보이면 바로 말해줘!"
"……."
뭐라는 걸까, 이 덩치만 큰 아저씬. 이그네스는 황당해 했지만, 천후는 진지하게 부언했다.
"걱정 마…. 어려운 일을 너에게만 맡기진 않는다. 우리도 뒤따라붙으면서 상황이 급하면 강경수단이라도…!"
"됐다. 됐어… 알아서 막을 테니 나서지 마라. 부탁이니."
눈 속이 핑글핑글 돌아가고 있는 게 암만 봐도 제정신이 아닌지라 이그네스는 결국 그들이 미행하는 걸 돕게 되었다. 이렇게 통신기까지 끼고 말이다.
그동안 남자아이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이브는 그중 한 명을 이그네스에게 데려왔다.
"자. 오늘 이그네스 짝이야."
"아, 안녕!"
또래보다 약간 키가 큰 녀석이었다. 아이는 이그네스 앞에 서더니 얼굴을 붉히고 뭔가를 내밀었다.
"이. 이거!"
"음? 무어냐?"
"선물이야."
보니 아이들 용돈 수준에선 꽤 비싼 초콜릿이었다. 잠깐 빨간 눈을 깜빡이던 이그네스는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고맙구나."
"헤헤…."
아이는 부끄러운지 고개를 숙이고 뒷머리만 북북 긁었다. 그동안 이브가 다가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재경이가 예전부터 너 보고 싶다고 계속 말했었어."
"아아."
그게 이 아인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귓가로 또 다른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휴. 휴~. 인기 좋지 말입니다. 부럽지 말입니다.>
"……."
단박에 인상을 찌푸린 이그네스는 저쪽에서 딴청 부리는 검은 양복 중 작은 쪽을 노려보았다.
'집에 돌아가기만 해봐라.'
그동안 아이들은 제각기 짝을 맞췄다. 남자 셋, 여자 셋 모임. 그중 이브는 이미 남자아이와 손을 잡고 있었다. 어째 보니 남자애만 부끄러워하고 이브는 신경도 안 쓰는 눈치다.
<저 손을 떼놔!>
캬오오. 귓속에서 들리는 신경질적인 소리를 무시한 이그네스는 담담히 말했다.
"다들 어른 없이 놀이 공원에 와본 적은 없을 테지. 다들 얼마씩 가져왔지?"
그 말에 아이들은 순순히 예산을 말해주었다. 가정형편에 따라서 제각각이었는데, 그중에는 자유이용권만 딱 끊을 수 있을 정도만 가져온 아이도 있었다.
'식사문제가 걸리겠군.'
아침 댓바람부터 달려 나왔으니 점심은 이 안에서 해결해야 한다. 그 와중에 자기 돈이 부족하단 걸 자각하면 부끄러워지리라.
"일단 돈 관리는 내가 한꺼번에 하마. 남는 돈은 계산해서 돌려주마."
"어. 응."
"그래."
이그네스는 단숨에 이 그룹의 리더자리를 꿰찼다. 아이들 입장에서도 따로 귀찮게 이것저것 신경 쓰기 싫었기 때문에 그런 면도 있었다.
요 몇 달간 이그네스는 현대 문물에 상당히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을 인솔하는데 거침이 없었다. 그야말로 작은 보호자 그 자체랄까?
놀이공원에 입장한 이후로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전부 다른 걸 타고 싶겠지만, 흩어지면 찾기가 힘들다. 그러니 일단 놀이기구를 몇 개 선택해서 한꺼번에 타기로 하고, 타기 싫은 사람들은 약속한 장소에서 기다리자꾸나.”
"으, 응."
예의 바이킹 앞에서 한 소리에 이브의 남친이라는 규현이 재깍 대답했다. 이브는 부루퉁하고 볼을 부풀렸다.
"같이 타지."
"무서워…."
"치."
흥 하고 고개를 돌린 이브는 에바의 팔에 달라붙었다.
<나이스. 나이스.>
"……"
귓가에 들리는 소리를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무시한 이그네스는 아이들과 함께 바이킹에 올랐다.
"뒷자리에 타자."
"뭐. 그러지."
바이킹은 말할 것도 없이 뒷자리에 갈수록 무섭다. 재경은 나름대로 멋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마음을 독하게 먹고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이그네스는 아이의 속마음은 짐작하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바이킹이 움직이기 시작한 이후….
"으아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아아아악!"
옆자리에선 찢어지는 비명이 들렸다.
<이그네스. 에바 쪽 상황도 봐줘야 하는데 너무 먼 자리에 앉았지 말입니다.>
귓가에선 쓸데없는 소리가 들렸다.
크게 한숨을 내쉰 이그네스는 바이킹이 높게 높게 움직여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눈을 뜬 채 놀이공원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때마다 휘날리는 붉은 머리칼이 아름답게 공중을 수놓는다.
이젠 소리만 지르는 게 아니라 아예 울먹이고 있던 재경은 그 모습을 보고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름답다…는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이렇게 무서운데 어떻게 얘는 멀쩡하지?'
시시하다는 듯이 덤덤한 표정에 재경은 놀라워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렇게 뒷자리에 앉아서 울고불고 짠 것만 해도 조금 각색해서 학교에서 자랑하면 재경은 용감한 녀석으로 떠받들어질 수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대체 얼마나 용감하단 말인가?
재경의 눈동자가 선망으로 물들었다.
*
"으으으. 무서웠어."
"거봐…."
이브가 솔직한 감상을 규현에게 말할 때, 재경은 타고 있을 때와는 딴판으로 의기양양해서 말했다.
"난 하나도 안 무서웠어! 가기 전에 한 번 또 타자!"
"엑. 싫어."
"역시 재경이는 저런 거 좋아하는구나."
질린다는 혹은 멋있다는 눈빛에 으쓱거리던 재경은 그러다 누군가 자기 머리를 매만지는 것을 느꼈다.
"응?"
"봉두난발을 해서는. 잘 타고 내려왔으면 머리 정리부터 하거라."
"으, 응."
얼굴을 확 붉힌 재경은 자기 머리를 차닥차닥 정리했다. 한껏 허세를 부렸지만, 바로 옆에 탔었던 이그네스가 사실대로 말하면 금방 탄로 날 거짓말이니까.
하지만 이그네스는 별로 그럴 생각이 없는지, 재경의 뒤에서 벗어나 일행의 가장 앞에 서서 말했다.
"자. 그럼 다음은 뭘 타보자고 했지?"
"롤러코스터!"
"왜 계속 무서운 거야…."
"좋아. 가자꾸나."
입구에서 챙긴 팜플렛을 보고 목적지를 확인한 이그네스는 몸을 획 돌려서 앞장섰다. 그러자 아이들이 급히 그 뒤를 따랐다. 짝 구분 없이 우르르 전부 다.
그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던 검은 양복 콤비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어째…."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지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