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이그네스는 단숨에 그룹의 리더가 되었다. 11살. 올해 초등학교 4학년 올라가는 나이로 부모도 없이 아이들끼리 놀이공원에 온 상황.
남자아이들도 겉으론 허세를 부리고 있지만, 실제론 바글바글대는 사람들 때문에 은근슬쩍 겁을 먹은 게 사실이었다.
게다가 설날 직후가 아닌가. 사람은 평소보다도 훨씬 많아서, 사실 아이들끼리 올 곳은 아니었다.
"으. 다리 아파."
"나도…."
"그럼 잠시 쉬었다 가자꾸나."
그 상황에서 다섯 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확실하게 이끌고 있는 것이 그녀였다. 놀이공원은 실내와 실외로 나뉘어 있었고, 각 구역에서 구역까지는 아이들의 발로 걸어 다니기엔 상당히 멀었다. 게다가 주요 놀이기구의 대기열도 상당해서 진이 빠지기 일쑤였다.
그걸 다 통제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둘을 데리고 워터파크에 갔다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떠올린 천후는 혀를 내둘렀다.
"대단한데, 진짜."
저 칭얼거림을 다 들어주면서 통제하다니. 진짜 어른이라도 힘든 일인데 그녀는 태연하게 해내고 있었다. 적어도 천후가 보기엔. 하지만 같이 변장하고 있던 라즈베리의 감상은 달랐다.
"그래도 버거워 보이지 말입니다."
"워낙 어디로 튈지 모르니까."
"네. 그러니까 조금 손을 덜어줘야겠슴다."
슥 하고 그에게서 떨어진 라즈베리는 폰을 꺼내 통화를 시작했다.
"이브. 어딤까?"
<응? 라즈베리 언니, 왜?>
"싸부가 걱정된다고 저를 뒤따라 보냈지 말임다."
<글쿠나. 잘됐다. 우리가 어디냐면 어~.>
평소라면 그럴 필요 없었네 어쩌네 하는 소리를 했을 이브도 지금 상황에선 도움의 필요성을 느꼈는지 흔쾌히 자기들 위치를 알렸다.
물론 별로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있었던 라즈베리는 허락을 받자마자 천후에게 경례를 착하고 올려붙이며 말했다.
"그럼 불초 제자, 현장에 가보겠슴다!"
"크윽. 부탁한다."
여기서 직접 나가면 아무래도 군소리를 듣고 만다. 아이들이 '도움'은 필요로 해도 '어른'을 필요로 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아이들의 구분 안에서 라즈베리는 설날이 지났고 뭐고 어른이 아니었다. 그냥 언니지.
"자자. 도와주러 왔슴다. 어떻슴까, 이그네스. 천군만마 아님까?"
"……."
전화한 지 5분도 안 지나 뻔뻔하게 앞에 서서 으스대는 꼴을 본 이그네스는 한숨을 쉬었다.
"많이 쉬었으니 이제 움직이지 말임다. 저거 탑시다, 저거-켁."
라즈베리가 반강제로 아이들을 죄다 이끌고 놀이기구로 향하려는 것을 잡아끌어 막아낸 이그네스는 생각했다.
'애가 하나 더 늘었다….'
피곤한 날이었다.
*
이그네스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래도 라즈베리가 생각이 없는 건 아니어서, 적어도 팀을 둘로 나눌 정도는 되었다.
구체적으론 이랬다.
"나! 나 놀이기구 더 타고 싶어!"
"으…"
나는 아직 실내외 놀이기구에 관심이 지대하다. 이브 팀.
"휴우. 이상해. 여기 안에 냄새나는 거 같아. 나가서 돌아다닐래."
"그럴까."
실내는 이제 갑갑하다. 사람 많은 놀이기구는 질렸다. 에바, 이그네스 팀.
"그럼 제가 이브네랑 같이 다니지 말임다."
"…잘할 수 있겠지?"
"에에엥~? 누가 누굴 걱정하는 겁뉘꽈아? 언니임다. 언니."
"……."
노골적으로 두고 보자는 눈빛을 쏘아 보낸 이그네스는 흥하고 몸을 팩 돌렸다.
"2시에 팩토리아에서 모이기로 한 것, 잊지 마라."
놀이공원 실내 음식점 가격이 하나같이 창렬해서 이그네스는 패스트푸드점을 선택했다. 밖에선 팩토리아 세트도 그렇게 저렴하진 않았지만, 이 안에선 가장 저가의 상품이었다.
사실 순수하게 돈 문제만이라면 그건 걱정 없었다. 저기 저 뒤편에 선글라스 쓴 물주 아저씨에게 받아낸다거나, 이러니저러니 해도 A랭크 일리미네이터인 라즈베리에게 뜯어내면 그만이다. 그리고 정 안될 때에는 이그네스 자신이 받은 세뱃돈도 있었고.
'대체 이 돈을 나보고 어디에 쓰라는 거냐?'
'에이. 필요할지도 모르잖아. 너는 어른이고. 그러니까 이그네스는 그대로 가지고 있어.'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0이 6개가 찍혀있는 수표를 보고서 돌려주려고 했던 이그네스는 결국 그 돈을 다시 현금으로 바꿔서 받은 상태였기에, 돈 걱정은 없었다.
그렇지만 기껏 아이들끼리 용돈을 모아서 온 건데 그런 식으로 해결하는 건 좋지 않은 방향이라고 이그네스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럼 에바랑 다른 애들은 맡긴다, 이그네스!>
"…하아."
한편, 팀이 갈라지자 천후는 바로 이브 팀을 쫓아갔다. 이그네스야 초딩이랑 썸씽이 있을 리도 없고, 에바는 걱정 없어 보였으니 이제 원래 목표에 집중하기로 한 것이다.
겉보기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두통이 오늘따라 세차게 몰려온다. 이그네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이브. 우리도 밖에 나가면 안 돼?"
"에이. 나 좀 더 타고 싶단 말야."
"어차피 난 구경만 하는데…."
"치. 아. 그럼 밖에 있는 기구 타자!"
일단 밖으로 나온 이브 일행은 자이로 드롭 줄에 서 있었다. 이브의 남친이라는 규현은 이브보다 키가 약간 작은 아이였다. 이맘때 초등학생들이 으레 그렇듯이 말이다.
아직 어린데도 눈이 나쁜지 안경을 낀 소심한 성격인 그는 거의 이브에게 끌려다니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렇게 싫으면 이그네스 쪽이랑 같이 다녔으면 됐지 말입니다."
"어떻게 그래요…."
라즈베리의 말에 그렇게 대답한 규현은 이브의 눈치를 봤다. 그 반응에 라즈베리는 살짝 휘파람을 불었다. 물론 그 대화를 고스란히 듣고 있던 누구 씨는 부들부들거렸다.
<남친이라 이거냐. 남친이라 이거냐아.>
뭔 짓을 해도 플러스 점수는 없다는 기세였다. 그때를 파고들어, 라즈베리가 장난스레 물었다.
"누가 먼저 사귀자고 하검까?"
<……>
집중력이 상승하는 느낌이 스멀스멀 저편에서 느껴졌다. 역시 라즈베리야. 진행의 명수지. 그러자 규현이 손가락을 꼬물대며 말했다.
"이브가 막 잘해주고 신경도 잘 써주고 꼼꼼하고 그래서…. 제가 먼저…."
"사귀는 거 재미있어, 언니. 막 매일 톡 보내고, 가끔 일기 돌려보고 그런다?"
"…오우."
그런 부끄러운 짓을. 일기를 돌려보다니. 상상도 못 하겠다. 라즈베리의 표정이 새파래졌다. 초딩은 강하구나. 너무나.
잠시 해쓱해졌던 라즈베리는 그러다 침을 꿀꺽 삼키고 아주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그, 그럼…. 진도는 어디까지 나갔습니까?"
"진도? 그게 뭐야?"
"……."
이브는 전혀 모르는지 똘망똘망한 눈으로 물었고, 규현은 알아들었는지 더욱 꼼지락댔다. 그 반응을 보고 라즈베리는 하나하나 물었다.
"손은 잡았고…. 그럼 서로 포옹해봤슴까?"
"응? 안 해봤는데. 이러면 돼?"
샥. 답변과 동시에 이브가 규현을 앞에서 대놓고 끌어안았다.
*
빠지직. 공원의 마스코트 길 안내판 뒤에 숨어서 아이들을 지켜보던 천후는 자기도 모르게 안내판 하나를 부숴버리고 말았다.
마침 지나가던 직원이 깜짝 놀라 달려왔다.
"손님! 이러시면 안 돼요!"
"아, 죄송합니다. 변상해드릴게요."
자기도 놀라서 급히 사과한 천후는 연락처를 받아놓고서 다시금 미행에 집중했다.
"으으…. 빡쳐."
성질을 간신히 억누르면서 말이다.
*
"……"
침착하게 그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 보관한 라즈베리는 험험하고 헛기침을 하며 다음 질문을 했다.
"그럼 뽀뽀는?"
"응? 안 해봤는데?"
귀에서 안도의 한숨이 들렸다.
"해줄까, 규현아?"
비명으로 바뀌었다.
다행히도 규현은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고개를 붕붕 저었다.
<후우우…. 잘했어…. 목숨 건진 줄 알아라….>
'음. 싸부의 팔불출 게이지가 단숨에 맥스지 말입니다.'
무시무시한 말 내용에 라즈베리는 슬쩍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라즈베리는 질문이 끊기자 다시 말이 없어진 둘을 보고서 생각을 정리했다.
'별문제 없어보이지 말입니다.'
그녀가 봤을 때 이브의 이건 연애감정이 아니었다. 그냥 좀 친한 남자애를 다루는 느낌? 규현이 좀 더 어른스러워 보이긴 했지만, 뭐 그래봐야 애고. 그냥 놔둬도 아무 일도 없으리라, 분명.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근데 이브. 아까 그 이그네스라는 애, 누구야?"
"응? 우리 오빠 가족."
"어…. 이브네 오빤 외국인이야?"
"아니? 한국인인데?"
규현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이브의 고개도 기울어졌다. 지금 천후네 집안 상황을 혈연으로 생각해보면 도저히 존재할 수 없는 족보가 떡하니 완성되니 당연했다.
다행히 어려운 건 그냥 넘겨버린 규현은 원래 하려는 질문을 꺼냈다.
"근데 이그네스는 우리보다 누나야?"
"응? 아닌데. 동갑이랬어."
"진짜? 누나 같은데."
"쫌 그래. 성격이야."
"그렇구나. 그럼 이그네스는 뭐 좋아해?"
"음~. 책? 별루 엄청 좋아하는 건 없는데."
집에서 항상 같이 지내는 친구에 관해서 관심을 가지자 신이 났는지, 이브는 이그네스에 대해서 이것저것 정보를 쏟아놓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규현은 고개를 끄덕끄덕거렸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라즈베리가 마지막으로 한 타이밍 늦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어라?'
이게 아닌데? 마음에 걸려 라즈베리가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 자이로드롭을 탈 차례가 되어 이브가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녀가 놀이기구를 타는 동안, 규현의 눈은 그곳이 아니라 다른 쪽을 향하고 있었다.
*
""쉬… 쉬 마려…."
"조금만 참아라. 거의 다 왔으니까."
한편, 밖으로 나온 이그네스는 수라장을 겪고 있었다. 꽃밭과 가장행렬을 구경한 것까진 좋았는데, 갑자기 에바와 함께하던 아이가 화장실에 가고 싶단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그때부터 지옥의 시작. 이렇게나 넓은데 화장실은 많이 없어서, 팜플렛에 표시된 화장실까지 아이가 버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아…."
거의 울기 직전이 되어서 다리를 오므리고 있는 게 심히 안쓰럽고 불안하다. 당장에라도 지려버릴 것 같았다.
이그네스는 잠시 생각하다가, 그의 손을 세게 쥐었다.
"방법이 두가지 있다. 이제 거의 다 온 화장실까지 참던가. 아니면 저 앞에서 물통을 사서 거기다가 보던가."
아이의 얼굴이 완전히 울상이 되었다. 초등학교 4학년이면 이제 가릴 건 다 가린다. 당연히 여자애 앞에서 물통에 오줌 받아오는 걸 보이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애초에 초등학생은 학교에서 변만 봐도 놀림거리가 되지 않던가.
"뒤는 부끄럽겠지. 그러니 참고 어서 따라와라!"
"응…."
화악! 그의 손을 잡아끈 이그네스는 결국 아이가 바지에 지리기 전에 화장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화장실 표지가 보이는 곳까지 오자 거의 로켓처럼 안으로 달려 들어간 아이는 한참이 지나서야 현자의 얼굴을 하고서 밖으로 나왔다.
"살았다!"
나는 죽을 것 같다. 쌓이는 스트레스에 이그네스는 하늘만 바라보았다. 하늘이 너무나 넓다.
그때. 아이가 그녀의 손을 꼭 잡아왔다.
"이그네스, 고마워."
"…됐다, 됐어. 참은 것은 너지 내가 아니다."
장하다, 장해. 그를 토닥여준 이그네스는 아이들을 이끌고 앞장섰다. 그 옆에는 이제 재경이가 아니라 에바가 붙어있었다. 그녀가 은근슬쩍 물어왔다.
"재경이 어땠어?"
"어떻긴 무슨."
"헤헤. 역시 이그네스는 공주님이구나."
"…에휴."
콧대가 높다 이건가. 하지만 애들은 애들이지. 연애대상으로 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그날은 팩토리아에서 식사를 해결하고 한참을 더 있다가 돌아올 수 있었다.
어째 짝끼리 돌아다닌단 취지가 깨지고 그 뒤론 우르르 몰려다녔긴 하지만 말이다.
일이 터지면 언제든지 뛰쳐나가려고 스탠바이 하고 있던 천후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돌아올 수 있었다.
*
그리고 며칠 후….
"이, 이브야. 어떻게 남자친구랑은 잘 지내니?"
힘겹게 힘겹게 쥐어짜 낸 목소리로 천후는 이브에게 물었다. 통학 길까지는 경비를 붙이지만, 학교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활동을 감시하진 않아서 아이들 사이에 있는 사정은 알 방법이 없었으니 별수 없었다.
이그네스는 이런 이야기를 잘 해주지 않기도 하고.
덕분에 천후는 초조하게 답변을 기다리면서 양 주먹을 쥐고 있었다. 하지만 이브에게선 예상외의 답이 나왔다.
"응? 남자친구? 아~. 규현이? 아니? 헤어졌어."
"…엥?"
천후의 눈이 점으로 변했다. 이브가 계속 말했다.
"맨~날 맨날 이그네스 이야기만 물어보잖아. 그래서 짱나서 차버렸어."
"그, 그러니?"
"응. 역시 남자는 아직 오빠가 최고야."
생글생글 웃으며 하는 말에 천후는 떨떠름하게 웃었다. 아직이 아프다, 아직이.
'뭐지, 이 시원 씁쓸한 감각은.'
천후는 그러다 저쪽에서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책을 읽고 있는 이그네스에게 향했다. 그 옆에선 라즈베리가 옆에 앉아 그녀의 볼을 검지로 콕콕 찔러대고 있었다.
"캬. 이그네스 씨 완전 요녀지 말입니다. 요전에 놀이공원 갔을 때 봤던 남자애들 전부 사귀자고 했었다고 들었습니다만. 코멘트 하나만."
"…노코멘트다."
"하나하나 정중하게 거절했지만 결국 전부 울렸단 후문이 있던데."
"어떻게 아는 거냐!"
펄쩍 뛴 이그네스가 노려보는 걸 태연히 받아낸 라즈베리가 다시 한 번 마이크 든 것처럼 손을 내밀었다.
"자자. 어서. 코멘트 하나만 해주시죠."
"노코멘트다!"
"휴휴~. 초등학생 인기 짱. 이야. 완전 부럽지 말입니다. 인생의 황금기지 말입니다?"
"…!!!!!“
참다못한 이그네스는 결국 읽던 책을 들어서 라즈베리의 안면에 던져버렸다.
============================ 작품 후기 ============================
돌아왔습니다......
여러분.....
레알....진짜로.... 생활 질병은 빨리빨리 해결을 보세요... 아이고....
아. 의외로 어지간한 놀이기구는 키가 130cm만 넘어가면 다 탈 수 있다죠. 무서운 세상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