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하렘-216화 (216/324)

216화

<기억 여행>

잠.

긴 잠.

깨어나 의식을 찾는다. 눈을 먼저 뜨진 않는다. 먼저 하는 것은 의식적인 호흡.

탁한 공기. 잠을 잘 땐 잘도 이것을 느끼지 못했구나 하고 생각하며, 소녀는 눈을 떴다.

"……."

처음 보이는 것은 울을 실크로 덮은 이불. 옆으로는 작은 화장대와 책상. 그 위에는 책과 공책, 필기구가 나란히 정리되어있어 방주인이 꼼꼼한 성격임을 짐작하게 했다.

그 방주인은 느릿하게 고개를 돌린다.

시선을 향한 것은 창가였다.

아침. 아직 이른.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은 강하지 않다. 아직 어둠을 완전히 몰아내지 못한 빛은 아주 약했다.

그래도 이것만으로…. 방 안의 전경은 전부 보인다. 자는 동안 문을 닫아놓았기 때문일까. 주홍에 가까운 햇빛이 비치며 허공에 떠 있는 먼지들이 방주인의 눈에 들어왔다.

방안의 탁함을 느끼면서도 방주인은 그 광경은 한동안 바라보았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빛이 어둠을 좀 더 몰아내어, 그 빛이 좀 더 강해졌을 즈음.

침대에서 내려온 주인은 창문으로 다가가 한쪽을 끝까지 열었다.

펄럭펄럭.

갑자기 들어온 바람에 지금껏 빛의 강도를 약하게 하던 커튼이 나부끼며 흔들렸다. 방 안에 보이던 먼지들 역시 그 바람에 휩쓸려서 사방으로 흐트러진다.

그리고 흐트러지는 것은 또 하나.

"벌써 아침인가."

긴…. 허리까지 닿는. 태양 빛보다도 붉은 머리칼이 방 안을 촘촘히 수놓았다. 그 모습은 마치 방 안이 순식간에 뒤덮이는 듯하다. 치솟아올랐다 내려오는 한올 한올의 머리카락은 마치 불똥처럼 보인다.

"……."

그녀는 한 손으로 거칠게 흩날리는 머리칼을 능숙하게 훑어 모으며,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가만히 있으면, 벌써 출퇴근을 시작한 차들이 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그리고 바람 소리. 새 소리. 온갖 소리.

아침이 오면 당연히 맞이할 수 있는 풍경.

아침이 오지 않아도 언제나 느낄 수 있는 것들.

누구에게나 당연한 것들.

허나.

어두운 밤이 지나면 여명이 찾아온다.

세상을 이루는 대전제.

하지만 단 한 명. 한때 이 대전제에서 벗어나 있던 한 명의 소녀가 있었다.

"……."

소녀, 이그네스의 눈이 왼팔로 떨어졌다.

거기엔 그녀의 팔에 맞춘 팔찌가 있었다. 얇은 은색 팔찌였는데, 특이하게도 그 중간쯤에 붉은 선이 그어져 있었다.

"내일까진가."

입에서 나오는 건 회한과 슬픔이다.

이것은. 표식이다.

그녀가 괴물이라는 표식.

인간이란 형태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를 알려주는 시계.

이제 이 팔찌로는 내일까지밖에 버틸 수밖에 없다는….

아침을 놀라워했던 붉은 눈은 이제 다시금 가라앉으며 침착하게 바뀌었다. 대신에, 그녀의 오른손이 움직인다.

그녀의 몸에 표식은 하나 더 있다. 이것은 의미를 알 수 없는 표식.

그녀와 닮은 색의 보석이 박힌 반지.

"……"

얼마 전. 이것을 소중히 간직하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무언가 의미가 있는 말인가 싶었지만….

역시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아무리 품에 지니고 다녀도. 손에 끼워보아도. 역시 의미 따윈 없었다.

차르륵. 손 위에서 몇 번인가 굴리자, 반지에 엮어놓은 은 체인이 흘러내리는 소리가 난다. 소녀의 입에 미소가 맺혔다.

"….늦겠군. 깨우러 가볼까?"

감상적인 생각을 정리한 소녀는 방을 나섰다. 옆방에서 아직 꿈나라에서 헤매는 꼬맹이들을 깨우는 것이 그녀의 첫 일과였으니까.

그 직전.

소녀는 손에 쥐고 있던 체인을 머리카락이 끼지 않게 조심스레 목에 걸쳤다.

의미는 없다. 있을 리가 없다. 이제 이쪽이 익숙할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소녀-이그네스는 하루아침을 시작했다.

*

아이들은 겨울 방학이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참 열심히도 돌아다녔다. 또래 아이들 대부분 학원에 다닌다고 부모들에게 이래저래 치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짬짬이 시간이 날 때마다 놀러 다녔다.

몇 년이나 또래 친구들이 없다가 생기니까 그 반동이 온 모양이었는데, 이그네스는 처음엔 거기에 몇 번씩 끌려가다가 최근 들어선 거절하고 있는 추세였다.

"난 오늘 책이나 보며 쉬고 싶다. 너희끼리 놀다 와라."

"에이~. 재경이가 보고 싶대~."

"…그러니까 싫단 거다. 하여간 싫다, 싫어."

"치이."

몇 번이나 팔을 잡아끌던 아이들은 결국 설득을 포기하고 나가 버렸다. 이그네스도 아이들을 상대하는 것에 점점 능숙해졌기에 이전처럼 쉽게 휩쓸려가지 않게 된 것이다.

덕분에 그녀는 DS 사장실에서 집에서 가져온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영천후가 집에 아이들을 두고 있다는 것은 DS에서 이미 공공연한 이야기였기에 사원들은 이제 그녀를 보아도 전혀 놀라지 않게 되었다.

되려 걱정하는 것은 천후였다.

"집에 있어도 되는데 굳이."

"됐다. 괜히 혼자 남아 경호원들 신경 쓰이게 하는 것도 미안하니."

천후는 아이들뿐 아니라 사람들 개개인에게 경호를 붙이고 있었는데, 당연히 이그네스에게도 있었다. 그리고 이그네스가 집안에 혼자 남으면 집안에 있더라도 그들은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는 게 그녀의 주장이었다.

"……."

하지만 천후는 그녀가 실제로 하는 생각은 그게 아님을 능히 짐작했다. 그녀의 임시 리미터를 보고서.

전용 리미터 건이 불발되고 나서, 고인규는 일반 리미터를 약간 개조한 리미터를 이그네스에게 제공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일반 리미터는 이그네스의 힘을 언제까지 버틸지 그냥 봐선 알 수가 없었는데, 이 임시 리미터는 중간에 홈이 파여 있고, 거기에 빨간 표시가 점점 늘어나 이윽고 한 바퀴가 꽉 차면 리미터가 한계를 맞이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기능이 더해져 있었다.

천후가 보니 그 빨간 줄이 거의 한 바퀴를 다 돌아있었다. 그는 이그네스가 언제 갑자기 이게 꽉 차서 불을 낼지 모른다고 내심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리미터는 보통 일주일 정도 버티지만, 이그네스의 몸 상태나 정신상태 등에 영향을 받아서 그 사용 일자가 늘어나거나 줄어들었다. 그리고 빈칸이 저 정도 남았으면 이제 정말 순식간에 차올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그네스. 리미터 슬슬 교체하지그래."

"아직 조금 남았다. 물건을 그렇게 쉽게 버리는 건 좋지 않다."

"……."

천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이야기도 몇 번이나 오고 갔는지 모른다. 그녀는 늘 리미터가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 되어서야 리미터를 교체했다.

덕분에 가끔 위험한 상황이 연출되곤 했는데, 그때마다 이런 이야기를 했지만 이그네스는 듣지 않았다.

이후, 희주에게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천후는 이그네스가 자신에게 부담을 주고 있다는 것 자체를 미안해하고 있기에 저렇게 행동한다는 것을 알았다.

리미터도 그리 싼 가격은 아니고, 천후가 그녀에게 제공하고 있는 모든 환경 역시 무상으로 받아들이기엔 미안할 정도로 과분한 것이었다.

그러니 이건 그녀 나름대로 그어둔 선인 것이다. 그에게 부담을 최대한 덜어주기 위한.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해도 듣지 않겠지.'

차라리 지금 보이는 외양처럼 어린아이 그 자체였다면 어른의 선의를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였으련만. 그녀는 그러지 못했다. 그것이 내심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리고 가장 안타까운 점은…. 그래서 그렇게 폭주할 경우 가장 확실하게 자신을 제압할 수 있는 사람의 앞에 자기 발로 찾아와 앉아있다는 그 자체였다.

천후는 슬퍼졌다.

“…….”

스륵.

어쩌다 보니 둘만 남은 사장실 안에선 이내 대화가 없어졌다. 이따금 이그네스가 책 넘기는 소리만이 울렸다. 그녀는 밖에 돌아다니는 것보단 집안에서 독서를 즐기는 편이었는데, 그럴 때의 이그네스를 바라보고 있자면 표정 변화가 전혀 없었다.

소설을 읽을 때도, 수필을 읽을 때도…. 가끔은 감정 이입을 하고, 희로애락도 느껴야 할 터인데도 담담히 내용물을 읽다가 마지막엔 그대로 덮곤 했다.

감상을 물어보면 대답도 약간 특이했다. 재미있었다, 없었다는 이야기보단 이야기의 구조나 클리셰, 반전 요소, 거기에 들어간 사상이나 작가의 의도, 성향 등에 대한 분석적인 이야기가 많았다.

아무래도 이것이 그녀가 책을 읽는 방식인 듯했다.

틱. 틱. 벽걸이 시계에서 초침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공교롭게도 오늘은 파급 디제스터도 나타나지 않아 한가한데도 사장실엔 아무도 올라오지 않았다. 희주조차 잠시 나가서 들어오지 않은 상황. 둘만 있는 분위기는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아이들과 잘 지낸다는 걸 알고 난 이후론 알아서 놀란 식으로 거의 떠맡겼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는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천후가 그렇게 좀이 쑤셔서 뭐라 말을 하려 할 때.

“기억은.”

이그네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응?”

“…….”

그녀가 입에서 낸 것은 신경 쓰이는 단어였다. 진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 천후는 조용히 말을 기다렸다. 그녀의 입에서 다시 말이 나온 것은 1분 가까이 지나서였다.

“기억은…. 아무리 해도 잘 나지 않는구나. 미안하게 되었다.”

“…….”

천후는 흠칫 놀랐다. 그녀는 원래가 작다. 어린아이의 몸. 이브나 에바와 비슷한 신장을 가진 몸이니 당연히 작지만…. 오늘따라 더욱 작아 보였다. 소파에 약간 묻힌 옆얼굴은 책을 보는 척 숙여져 있었지만, 그의 눈을 속일 순 없었다. 그녀가 바라보는 것은 책이 아니었다.

몸만이 작았던 그녀는 이제 정말로 작아 보였다.

나오는 목소리 역시.

“삶에는 만족하고 있다. 사실 과하지. 그대가 나를 옆에 두는 것은 너무나 사치인 게야. 어디 시설이라도 하나 알아봐 주는 것이 어떠냐? 리미터는 계속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겠지만―”

머릿속에서 전류가 흘렀다. 순간 천후는 자신이 결정적인 착각을 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급하게 그 뒷말을 막았다.

“그런 소리 하지 마.”

“…….”

“그런 소리 하는 거 아니야, 이그네스. 그런 식으로 몰아붙이지 마, 자신을. 네가 널 거둔 건 너에게서 뭔가를 바라서가 아니야. 알잖아, 너라면.”

놀라서 쏟아낸 말에, 이그네스는 책을 펼친 채로 자기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그것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그녀는 그러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천후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목에 걸린 보석만큼이나…아니 그 이상으로 찬란한 빛남이 꺼져있는 적색이 그의 얼굴을 비치며 처연하게 흔들렸다.

“알지. 알기 때문에….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건 슬프구나.”

“…….”

차라리 여기서 그녀가 울었다면…. 오히려 그녀를 보듬을 수 있었을 터인데. 그녀의 눈에는 눈물은 없었다. 마치 세상 희로애락을 다 겪어본 사람처럼 감정을 느껴도 묵묵히 억누르는 것이 느껴지는 그 모습은 보는 사람조차 아연하게 만들었다.

결국, 천후는 그녀를 위로해줄 말을 찾지 못했다.

‘바보 같았다….’

정말 결정적인 착각이었다.

너무…너무 그녀의 어른스러움에, 어른이란 점에 의존했다.

처음 그녀를 구해냈던 날부터 주욱 그녀는 현실에 크게 놀라지 않고, 모든 것에 순응하는 것처럼 보였으며, 크게 패닉도 일으키지 않았다. 그러니 그냥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어른이라고 해도 사람이다.

사람인 것이다.

그녀라고 어찌 크게 변한 세상에 놀라지 않았을까? 그녀라고 어찌 과거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하지 않았을까?

그녀는 그저…. 이미 자신에게 줄 수 있는 많은 것들을 주고 있는 사람에게 더 누를 끼치고 싶지 않아, 모든 것을 그저 감내하고 있었던 것이다. 티 하나 내지 않고.

아이가 아니니까.

어른이니까.

오늘 해왔던 그 말조차도. 어른이니까 할 수 있는 말이었다.

틱. 틱.

초침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둘 사이에는 다시금 말이 없어졌다. 그 사이에 나던 책 넘기는 소리조차 사라졌다.

대신에 생각이 많아졌다. 양쪽 다.

그때였다.

띠링.

분위기에 맞지 않는 소리가 울렸다. 이그네스의 스마트폰 톡 수신음이었다. 그녀는 그 내용을 확인해보고는 곤란해 하는 목소리를 냈다.

“하아. 또….”

“응?”

“아니…. 별일은 아니다. 그…이전에 놀이공원에 갔던 일이 있지 않았더냐? 그때 남자아이들이 아직도 말을 걸어와서….”

“아. 초등학생 인기 짱?”

“…….”

이그네스의 눈매가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 굉장히 삐쳤는지 입술도 꼭 깨물곤 고개를 팩 돌리는 게 이러는 걸 보면 완전히 애 같은데…. 쓰게 웃은 천후는 그러다 뭔가를 떠올리곤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왔다.

“음…. 그럼 한동안 완전히 벗어나 볼래?”

“…무슨 소리냐? 또 놀릴 셈이라면 가만 안 둔다.”

한껏 골이 난 목소리에 맑게 웃은 천후는 그녀의 옆에 털썩 앉아, 그녀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잠깐 나랑 영국 좀 갔다 와볼까?”

“…….”

이그네스의 눈이 작은 몸에 어울리는 놀란 토끼 눈으로 바뀌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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