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하렘-218화 (218/324)

218화

그 뒤로 이그네스는 말이 없어졌다. 걸음을 늦추지도, 뭔가 다른 행동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입을 조개처럼 꼭 다물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눈은 그치지 않고 계속 내렸다. 내리는 양이 많지 않아서 굳이 피해야겠단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눈의 성질 자체는 함박눈인지라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쌓여 길과 바닥은 어느새 흰색으로 뒤덮이게 되었다.

"일단 숙소로 갈까?"

천후는 하루 만에 여행을 마칠 생각이 아니었기에 런던 시내 호텔에 방을 예약해둔 상태였다. 그의 말에도 이그네스는 별 반응을 하지 않았다. 붉은 눈동자는 빛을 잃고, 그저 자신의 몸을 희주에게 기대고 있을 뿐이었다.

천후는 낮은 한숨을 흘리고는 예약한 호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다행히 호텔에 이르러서도 천후가 한 변장은 통했다. 워낙에 관광객이 많은 곳이다 보니, 별의별 복장을 한 사람들이 많았고, 그걸 전부 풀어헤치는 경우는 없었으니까.

다만 스위트룸을 잡아놔서 상당한 거부가 머무르기로 했다는 것만은 알 수가 있었다.

방으로 들어온 이들은 일단 눈으로 엉망이 된 옷과 몸부터 정리했다.

"욕실은…. 두 개가 있군요."

"….잘 됐구나. 너희끼리 씻어라. 나는-"

작게 숨을 흘리며 하는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희주가 그녀의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이리 오세요. 주인님. 그녀를 잠시 빌리겠습니다."

"네."

"무, 무슨…."

깜짝 놀란 이그네스가 고개를 들어 올려보니, 무표정하지만 엄격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희주가 보였다. 아무래도 이건 오기 전부터 둘 사이에 약속되어있던 부분인 듯 싶었다.

둘이 부부에 가까운 관계라는 것을 알고 있는 이그네스는 둘만의 시간을 방해할 생각이 없었지만, 그들의 생각은 또 달랐던 모양이다.

"그럼."

천후의 대답을 받아낸 희주는 그녀를 휙 끌고 갔다. 딱히 마법을 쓰지 않는 이상, 이 체격차이다. 이그네스는 쉽사리 그녀에게 이끌려 욕실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여자아이가 젖은 채로 그냥 있으면 감기 걸리기 쉽습니다."

그 말과 동시에 자비라곤 한 톨도 보이지 않는 손놀림이 그녀를 덮쳤다. 단박에 입고 있던 상, 하의가 휙휙 날아가며 알몸이 된 이그네스는 얼굴을 확 붉혔다.

"무, 무슨. 목욕 정돈 혼자 할 수 있느니라!"

"30분 후에 말입니까?"

"……"

"아니면 한 시간 후에 말입니까?"

이그네스는 말문이 턱하고 막혀버렸다. 이 말엔 답할 말이 없었다. 눈바람을 고스란히 맞은 덕분에 그녀의 머리칼과 옷은 다 젖은 상태였다. 그녀의 체온이 일반인보다 높긴 하다지만, 그렇다고 조금 지나면 그게 전부 기화되어 뽀송뽀송해질 정돈 아니었다. 아마 그냥 놔뒀다면 실의에 빠져있었으니, 마음이 정돈될 때까진 그저 앉아있었으리라.

솔직히 몸에 물기 좀 남아있다고 감기에 걸릴 몸도 아니다. 그녀의 이 불꽃으로 된 몸은. 그렇지만 눈앞의 이 여자는 그런 걸 봐줄 사람이 아니었다.

스르륵. 옷감이 떨어지며 눈앞에 여인의 나신이 펼쳐진다. 지금 밖에 내리고 있는 하늘의 산물만큼이나 흰 피부와 곱게 솟은 여성의 상징. 그 부드러운 곡선을 따라 내려가면 보이는 잘록한 허리와 그 아래가 보인다.

수십 년 경력을 가진 조각가조차 만들어보라면 난색을 보일 듯한 그림 같은 육체의 향연에 이그네스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아름답구나."

누가보아도 탄성을 지를만한 몸이었다. 이그네스는 그러다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과거의 자신이 어떤 모습이었는진 모르겠지만, 지금은 아이의 몸. 게다가 성장할지 어떨지도 모르는 빈약한 몸만이 그 자리에 있었다.

"나도 그대와 같았다면…."

무심코 이런 말이 나왔다. 그때, 희주는 긴 머리를 정리하며 그녀에게 다가와 가만히 어깨에 손을 올렸다.

"무슨 말씀이신지. 이그네스도 충분히 예쁩니다."

사륵…. 차가운 손이 그녀의 머리칼을 귓바퀴 뒤로 넘기며, 그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간질이듯 파고드는 목소리에 이그네스는 깜짝 놀라 굳어버렸다. 그동안 희주의 손길은 다른 사람보다 약간 붉은 그녀의 몸을 천천히. 어깨에서부터 타고내려 갔다.

"이렇게 매끈매끈하니. 누굴 부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허나…."

촤악. 몸에 물을 적신 이그네스는 보디 워시로 거품을 내어 작은 몸을 꼼꼼히 닦아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함께 씻고 있던 희주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욕조 쪽으로 끌어당겼다.

"들어오시죠."

"……."

확실히 욕조는 혼자 들어가 있기엔 크다. 옆엔 용도가 뻔히 보이는 철제봉까지 달려있는 게, 원래는 가족끼리 들어오라고 있는 용도의 욕조는 아닌 것 같았지만.

순순히 안으로 들어온 이그네스는 희주가 허리를 감아오는 손길에 저항하지 않았다. 뭉클하고 따스한 감각이 어깨 부근에 닿았다.

온탕 안이어서인지, 희주 특유의 차가온 체온은 중화되어서 전체적으로 따듯하다. 열 변화에 둔감한 이그네스는 그중 어느 것도 제대로 느끼지 못했지만, 적어도 그녀가 자신에게 전하고자 하는 마음만은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입이 조금은 풀렸다.

"나도 그대와 같았다면…. 최소한의 보답은 했을 터인데."

그것은 정말 최소한의 보답일 테지만…. 보답한 시늉은 될 터였다. 하지만 이런 몸으론 그것조차 상상할 수 없다. 그때, 그녀의 귓가로 속삭임이 파고들었다.

"주인님은…. 당신에게 그런 걸 바라시지 않을 거예요. 분명, 당신이 어른의 몸을 가졌었다고 해도."

그럴 테지. 이그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흐름에 따라서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기본적으론 바라지 않았을 터.

"허나…. 어찌하면 좋을지 모르겠구나. 녀석에게 답할 길이 없다. 이래서야…. 짐 덩어리일 뿐인데."

"당신이란 존재 자체가…. 주인님에겐 의미를 가진답니다."

"그런 건 너무 비겁한 게 아니냐? 애초에 어디까지 순둥이인 거냐! 녀석은!"

자기도 모르게 바락 소리를 지른 이그네스는 참방하고 물속에 머리를 담갔다. 잠시 머리가 뜨거워져서 심한 말을 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것 역시 진심이었다.

"미안함을 금할 길이 없는 게다…. 나로선."

슥…. 가벼운 손길이 그녀의 적발을 훑었다. 아주 기분 좋은 감각. 천후의 거친 손길과는 다르게, 그녀의 손길은 정말이지 부드러워서 눈을 감고 있자면 당장에라도 잠들어버릴 것만 같은 손길이었다.

"이그네스는…. 착하군요."

"그런 게 아니다…."

"아뇨. 맞습니다. 그러니 이그네스…. 그런 마음을 가지고 계신다면, 부디 주인님이 바라는 바를 따라주세요. 분명…. 그것만으로도 기뻐하실 겁니다."

"……."

이그네스는 고개를 돌려 희주를 올려보았다. 표정없는 동상과도 같은 얼굴이 보였다. 아마 신이 세상에 있다면 그녀에게 일부러 이것을 내려주지 않은 것이리라. 솟아오른 안타까움에 이그네스는 그녀의 볼에 손을 가져갔다. 희주는 가만히 눈을 감으며 그 손길을 받아들였다.

손끝에 느껴지는 감각은 아주 약간 차다. 느끼고자 마음먹어야만 느낄 수 있는 감각.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을 안다. 그 안에 얼마나 커다란 선의가 들어있는지도. 이 무표정 아래에 있는 큰 정도.

고마움이 사무친다.

이그네스는 답했다.

"…그러마."

잠시간, 이그네스는 그녀에게 안긴 채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

둘이 시간을 보내는 동안, 먼저 씻고 나온 천후는 눈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며 한 가지를 확신했다.

'그녀의 기억은 이제 돌아오지 않는다.'

안타까운 이야기였다. 영구적인 전용 리미터를 만들 수 없게 되었다거나, 그녀가 봉인된 이유나 봉인한 주체에 대한 걸 알지 못하게 되었다거나 그런 것들 이전에….

사람이 자신의 근본에 대해 알고자 하는 것은 자연적인 욕구였다. 매우 강력한 욕구. 그녀처럼 눈을 뜨고 일어나니 시대상이 바뀌어 있었다면 그것은 더욱 심했으리라.

그녀가 밖으로 표출하는 욕구가 크지 않아 눈치채지 어려웠지만, 그녀라고 어찌 어떻게 된 일인지 알고 싶지 않을까?

당장 천후 역시 매일같이 꾸는 악몽의 뒷일을 신경 쓰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지 않던가? 그날을 제외하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 어머니와 보냈던 삶을 떠올려보고자 무진 애를 써보지 않았던가?

허나 그 모든 가능성이 날아갔다. 이전처럼 다시 엘리제 여왕을 만나고, 왕성 안에 들어가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것은 이그네스 본인이 크게 거부하고 있었다.

어쩌면 본능적으로 그런다 해도 소용이 없다고 느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것은 너무나 슬픈 이야기였다. 방법이 없는 슬픈 이야기.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떠오르는 다음 명제는 이것이었다. 그녀의 기억을 되찾을 가능성은 이제 사라져버렸다. 그녀는 실의에 빠졌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무슨 말을 해야 할 것인가.

어려운 질문. 떠오르는 답변이라곤 하나같이 졸렬해서 스스로 생각해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하는 것이었다. 좀 더 말재주가 있었다면 하고 오랜만에 생각해버리고 말았다.

그때. 둘이 욕실에서 나왔다.

흰 가운만을 걸친 이그네스는 긴 붉은 머리를 손질하면서 슬리퍼를 신은 채 거실을 가로질러 다가왔다.

"후우… 벌써 나와 있었느냐? 남자는 씻는 게 빠르구나."

"음. 이그네스."

"왜 그러느냐? 진지한 목소리로."

바로 옆까지 다가와 올려보며 묻는 얼굴엔 미소가 걸려있었다. 두 쌍둥이와는 조금 다른, 어른의 미소. 그것은 이 남자가 무슨 이야기를 할까 궁금해하는 얼굴이기도 했다.

과연 어른이라고 해야 할까? 그 사이 어느 정도 마음을 정리한 모양이라고 생각한 천후는 말을 고르다가, 결국 원래 하려던 말을 입에 담았다

"나는 과거가 기억나지 않는다면… 지금부터 만들어가면 된다고 생각해."

"……."

"전용 리미터를 만들 때 필요한 소체를 형성하는데 필요한 시간이 10년이라면, 앞으로 10년간 지내면서 만들면 되는 거잖아. 물론 힘들고, 아이들에게 설명도 필요하겠지만… 과거보단 앞을 보면서 살아가자. 적어도 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유그드라실에서 내려와 지낸 시간이 거기서 지낸 10년보다 가치 있었다. 그녀가 과거에 대해 눈을 감을 수만 있다면 천후는 그녀가 과거에 얽매일 시간조차 주지 않겠노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의 말에 빨간 눈의 주인은 무심코 웃었다.

"후후."

"왜, 왜?"

"아니. 그냥 좀. 그것참. 라즈베리가 좋아하는 만화 완결 같은 이야기구나. 우리들의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야."

"으음…."

천후의 얼굴이 목덜미까지 붉어졌다. 맞는 말이다. 과거에 얽매이지 말란 건 사실 애들 장난 같은 이야기일 뿐. 누구나 그것에 따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허나.

"애초에 너는 나를 십 년이나 품고 있을 셈인 게냐?"

"그, 그건. 말을 하다보니까…."

"후후…. 되었다. 알고 있다. 기운이 조금 나는구나."

홍염의 공주는 웃었다.

그것은 마치, 이제부터의 향방을 정한듯한 상쾌한 얼굴이었다.

*

다음날. 영국 여행은 완전히 관광으로 변해버렸다.

이그네스가 기억을 떠올릴 만한 곳만을 돌아다니겠다는 계획을 완전히 그만둔 셋은 발걸음 닿는 데로 돌아다니면서 주변을 구경하하기로 했다.

그중 이그네스는 길가에서 파는 롤리팝을 한 손에 들고, 파란 테의 선글라스와 비니를 쓴 완벽한 어린애로 변신해있었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어머. 너무하는구나, 오라비. 어제 앞만 보고 살라고 해놓고서 애처럼 행동하려니 그런 소리인 게냐?"

"……."

당황한 천후가 아무 소리하지 못하자 깔깔 웃은 이그네스는 그러다 뭔가를 떠올렸는지 앞쪽의 다른 관광객들 쪽으로 쪼르르 달려가 뭐라고 말하고 돌아왔다.

"자. 포즈다."

"자. 자. 어서."

어린아이가 칭얼대듯 하는 소리에 천후는 얼떨결에 희주와 이그네스를 양팔에 안은 포즈를 취했다. 바로 그때.

“후후.”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사진을 찍느라 몸을 숙이고 있던 천후의 볼가에 부드러운 것이 닿았다.

“!”

그 순간, 찰칵하고 플래쉬가 터졌다. 보니 따로 챙겨왔던 디카 촬영을 부탁했던 모양이었다.

받아서 화면을 보니 과연. 거리를 배경으로 두고서 멋들어진 사진이 찍혔다.

……아주 수상하기도 한 사진이.

“헉……. 자, 잠깐. 이건.”

"자. 그럼."

당황한 천후의 반응을 무시한 이그네스는 그 데이터를 폰으로 옮긴다 싶더니, 그걸 다시 어디론가 보냈다. 뭐하는가 싶어 구경하던 천후는 그 결과를 금세 확인할 수 있었다.

폰에서 진동이 끝도 없이 울리기 시작한 것이다.

<우와. 우리한테는 비밀로 자기들끼리 놀러 갔었어!>

<나빴다! 두고 봐!>

잠금을 풀고 톡을 확인하니 아이들이 실시간으로 보내는 메시지가 주르륵 올라오고 있었다.

"윽. 야. 이그네스."

"후후후. 어울리게 살라고 하지 않았느냐?"

앞에서 빙글 반 바퀴 돌면서 답한 그녀는 활기차게 웃었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그녀와는 또 조금 다른 순수한 어린아이의 미소였다.

============================ 작품 후기 ============================

철컹철컹...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