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취존은 힘들다>
오로치 사태는 끝났지만, 그 뒷수습은 오로치 사태 그 자체보다도 오래갔다. 지진피해는 너무나 심각했고, 영토 할양에 의해 내각은 완전히 붕괴. 다음 총선 결과는 이미 나와 있단 소리가 들리고 있었으며, 이것은 복구 작업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이 와중 천후 역시 본의 아니게 일본에 자주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한국 정부의 협조 요청도 많았으며, 일본 쪽에서도 차라리 국가 간 이야기가 나오는 동안 그의 중재가 있길 바랐기 때문이다.
각국 정부에 일방적으로 양보하는 분위기를 보이는 것보다, DS의 제안으로 이런 방향으로 정해졌다…는 식으로 책임회피를 조금이라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천후도 바보는 아닌지라 그런 기조로 흐르는 것을 최대한 차단했지만, 이래저래 일본은 타국이고, 그 나라 안에서 내용을 왜곡하려는 움직임 전부를 막을 수는 없었다. 다만 이미 일본 언론은 정부의 통제에서 상당히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이제 와선 왜곡하려고 해도 쉽지 않았지만 말이다.
“아…. 이놈의 일본 이제 슬슬 가기도 싫다.”
그런 이유로 오늘도 하네다 공항행 비행기에 탑승한 천후는 피곤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유그드라실은 오로치 사태가 끝나자마자 큐브 엘리베이터 지원을 중단했고, 텔레포테이션 시스템은 이야기가 어느 정도 정리되기 전까진 일본에 도입할 생각이 없었던 덕에, 천후는 조금 과장해서 인천 국제공항은 이제 눈 감고도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
자기 몸 하나 편하자고 풀어버리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가 되니 어쩔 수가 없었다.
“이렇게 자주 가시니 몸 상하실까 걱정되지 말임다.”
“…그때마다 따라오는 너도 말이다.”
천후는 퍼스트 클래스 옆자리에 앉은 라즈베리를 보고서 혀를 내둘렀다. 그녀는 비장한 얼굴로 양 주먹을 꽉 쥐었다.
“티끌 모아 태산임다. 아껴야 잘살지 말임다.”
라즈베리는 이후로도 일본에 일이 있을 때마다 따라왔다. 단순히 천후의 옆에 붙어있고 싶어서 그러는 것만은 아니고, 올 때마다 양손에 뭔가 그득그득 전리품을 챙겨서 돌아오곤 했다.
그렇게 벌써 10번은 넘으니, 아낀 비행기 푯값만 해도 상당했다. 라즈베리 역시 그게 신경 쓰였는지, 열변을 토하다가 움찔하며 물었다.
“가, 같이 오면 안 되는 거였슴까?”
“그런 건 아니지만 말이다. 어차피 비행기 표야 일본 정부에서 보내주는 거니까.”
이게 DS 회사 돈에서 나가는 거면 이미 셀레나 측에서 매서운 태클이 들어왔겠지만, 일본에 다녀오는 비용은 전부 일본이나 대한민국 정부 측에서 내주고 있었다. 천후 개인으로 한정하자면 여타 체류비용까지 전부 그쪽에서 내주고 있었으니 그녀가 따라오든 말든 부담은 없었지만, 그래도 신경 쓰이는 건 별수 없었다.
“근데 진짜 용케도 매번 따라온다. 용무가 있긴 한 거야?”
“흠흠. 지금까진 딱히 용무가 없을 때도 따라온 적이 있던 게 사실임다만.”
“…….”
너무 쿨하게 인정하는구나. 천후가 힘 빠진 눈으로 바라보자 라즈베리는 흠칫하더니 고개를 붕붕 저었다.
“아, 아님다. 지금까진 그랬지만 이번엔 확실한 용무가 있슴다! 내일 ‘특촬 히어로 총집합. 무적의 영웅들’이 개봉하지 말임다!”
“으, 응.”
이전. 라즈베리의 취향을 알아보겠다고 노력해봤다가 영혼까지 탈곡기에 구겨 넣어져 탈탈 털린 천후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차마 무서워서 더 못 물어보겠다.
‘취향은 소중한 거야. 그냥 혼자 좋아하게 내버려둬야지. 존중. 존중.’
천후는 그렇게 마음먹었지만, 라즈베리는 이미 불이 붙었는지 콧김을 내뿜으며 중얼거렸다.
“쇼와 시절부터 지금까지 모든 특촬 히어로들이 등장하는 이 극장판은 굉장한 검다. 심지어 출연 배우조차도 상당수가 그 시절 실제로 연기했던 배우들이 다수 참전! 이젠 중견 배우가 되어서 몸값이 장난이 아닌데도 출연해줬지 말입니다. 이 불초 제자 라즈베리는 기대되고 또 기대돼서…!”
“어, 어. 알았다. 잘 모르겠지만 알았으니 진정하자? 웅?”
당장 울기라도 할 것 같은 모습에 당황한 천후는 그녀를 진정시키곤 물었다.
“일본 상태가 이 지경인데 잘도 그런 게 상영을 하는구나.”
이전에 일리미네이터 누군가가 지나가듯이 말했던 것처럼…. 오로치 사태 종료 이후 일본 경제는 엉망이 되었다. 탄탄하던 일본 내수시장도 마찬가지여서 이른바 오타쿠 컨텐츠라 불리는 만화, 애니메이션, 특촬물의 경우 그 편성이 극도로 쪼그라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특촬 히어로물의 극장판이 상영되다니. 놀랍다면 놀라운 일이었다.
“상영 계획 자체가 오로치 사태 이전부터 잡혀있었지 말임다. 원랜 새로운 특촬물 시리즈를 시작한 직후에 상영되는 게 정석임다만, 올해는 특촬 히어로 시리즈 방영이 완전히 불가능해진 상태라 더욱 의미가 깊어졌슴다.”
“눈물 나는 사연이구나….”
“그러니! 이 라즈베리가 봐줄 수밖에 없는 검다!”
번쩍번쩍. 눈에서 빔이 튀어나올 것 같은 기세에 천후는 시선을 피하며 고개만 끄덕였다.
“아, 알았다. 알았어. 그럼 그것만 보고 다시 돌아올 거야?”
“아. 아님다. 엔화도 폭락했겠다, 쇼핑 좀 해야지 말임다. 헤헤. 싸부랑 같이 다니면 세관 걱정 안 해서 좋슴다.”
“…….”
글러 먹음의 결정체를 보는 느낌에 천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천후와 그 가족들이 일본에서 뭘 사갈 땐 일본 출입국 게이트에서 검사조차 하지 않는데, 바로 옆에서 그걸 악용하는 사람이 이렇게 떡 하니 있었던 것이다. 막상 천후는 일본에서 뭐 사가거나 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말이다.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천후는 시트에 몸을 묻었다. 비행기가 날아올랐다.
*
일본도 그렇지만 대한민국도 이제 대선이 머지않은 상황이었다. 천후가 드래곤을 막 잡을 때 임기를 9개월 남기고 있었던 해명진 대통령은 이제 그 힘을 거의 완벽하게 잃고 있었고, 국내에서는 DS를 누가, 어떻게 국내에 잡아둘 수 있는가로 대선이 갈릴 거란 판단이 지배적이었다.
일본 역시 오로치 사태 피해 수습은 거의 마무리 된 상황. 지금까진 어쩔 수 없이 자민당 총리인 유우베가 정국 수습을 위해서 계속 자리에 앉아있었지만 그건 가시방석에 지나지 않았고, 곧 총선을 예고하고 있었다.
일본의 경우 국내 일리미네이터 층이 크게 붕괴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텔레포테이션 시스템 도입에 사활을 걸고 있었다. 사전에 이야기되었던 것처럼 미국은 일본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하고 있었고, 대 중국 포위망의 중점 자체를 일본이 아닌 대한민국으로 두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그 위기감은 더욱 컸다.
그 덕분에….
“아이고. 영사장님. 피곤하지 않으세요? 어떻게. 오늘 저희가 요정에 자리를 좀 마련해 봤는데 오시지 않겠습니까?”
“이번에 거기에서 민주당 젊은 위원들도 많이 올 겁니다만….”
“…….”
천후는 본회의가 끝나고 양국 정치인을 가리지 않고 손바닥을 비비며 다가오는 걸 보고서 얼굴색이 새하얘졌다.
‘죽겠네, 진짜.’
라즈베리를 따로 보내길 정말 잘했다. 그녀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그녀도 이런 아부의 대상이 되었으리라.
정치인 컨트롤의 필요성은 느끼고 있었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다가오니 천후 역시 굉장히 힘겨워했다. 이런 부분에 대해선 마땅히 자문 얻을 곳도 없었는데, 그나마 그에 근접한 친란은 미묘한 웃음을 지으며 ‘원하는 대로 움직이면 된다’ 같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수준의 말만 던져주어서 더욱 힘들었다.
이들의 ‘접대’에 딱 한 번 따라가 본 적이 있었는데…. 나이 먹은 영감탱이들이 대체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지 적나라하게 볼 수 있었던 덕에 천후는 완전히 학을 떼고선 그쪽에는 연을 끊었다. 그 당일에도 불쾌감을 표시하며 나왔다.
천후가 이들에게 바라는 것은 접대가 아니라 정식적인 루트를 통한 비전의 제시였고, 그래 달라고 노골적으로 말로 표현을 했는데도 이들은 방법론을 수정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늘 이 자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양쪽 노물들이 파리처럼 붙어서 왱왱대는 것에 지친 천후는 한숨을 내쉬고는 발걸음을 빨리하며 말했다.
“본회의가 끝났으니 먼저 돌아가 보겠습니다. 용건이나 제안이 있으시다면 서면으로 부탁합니다. 그럼 이만.”
“아아!”
“자네들이 그를 불쾌하게 만든 것이 아닌가!”
“아니 이거, 참. 일본 민주당 안 되겠구만! 자리를 마련해주겠다는데도 괜히 같이 나서서!”
차마 그를 잡진 못하고 뒤쪽에서 자기들끼리 호통 지르는 소리를 들은 천후는 청사를 나와 잠시 바람을 쐬었다.
“…으. 춥네.”
생각 좀 하겠답시고 제자리에서 서 있던 천후는 몸을 파르르 떨었다.
올해 일본 겨울은 너무나 추워서, 회의에 참가하느라 정장을 차려입고 있던 그도 쪼그라들 수밖에 없었다. 어지간한 기온 변화 정도엔 내색하지 않지만 이건 인간적으로 너무 심하다. 당장 시베리아 한복판에 서도 이 정도의 칼바람이 불지 의문이었다.
“자. 그럼 어쩐다.”
최근 일본에 올 때마다 이 부분이 문제였다. 회의가 종료된 이후, 회의장을 빠져나오고 나면 갈 곳이 없었다. 보통 그는 그 뒤론 보통 일본 정부 측에서 잡아둔 호텔에서 박혀 지내곤 했다.
하지만 이번엔 워낙 빈번한 출장인지라 희주조차 대동하지 않았다 보니 그것도 조금 애매했다. 정말로 TV나 틀고서 줄곧 틀어박혀 있게 생겼다. 아웃도어 파인 천후에게 그것만큼 괴로운 일도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띠롱. 핸드폰 메시지 수신음에 천후는 그 내용을 확인했다.
<싸부. 회의는 끝났나요?>
<어.>
<그럼 이 뒤에 일정이 있나요?>
<없어. 그냥 호텔에 들어가려고.>
그 뒤. 조금 시간이 지나서야 다시 답변이 왔다.
<그럼 싸부. 귀국하실 때까지 저랑 같이 맛있는 거라도 먹으면서 돌아다닐래요?>
“흠.”
맛있는 거라. 이건 좀 끌리는 이야기였다. 그는 군것질은 그리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거리를 돌아다니다 보면 꽤 맛있어 보이는 음식들이 한가득한 것이 일본 거리였으니까.
라즈베리의 취미에까진…. 잘 어울려주진 못하겠지만, 식도락 정돈 괜찮으리라. 마음을 정한 천후는 답했다.
<그럴까? 어디로 가면 돼?>
이후. 답 메시지에 온 라즈베리의 현재 위치를 본 천후는 그를 기다리는 리무진에 탑승하고서 그쪽으로 향했다.
*
리무진을 타고 도착한 곳은 아키하바라 한복판이었다. 일단 라즈베리가 말한 위치까지 가느라 차에서 내린 천후는 거기서 라즈베리 비슷한 것을 찾아볼 수 있었다.
라즈베리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라즈베리 비슷한 것이다. 말로 표현하자면 풀아머 더블 라즈베리쯤 될까? 왼손, 오른손, 어깨, 백팩에 수많은 물건들을 바리바리 지고 있는 것이 아름답다.
“아. 오셨슴까. 으챠챠.”
“아이고…. 이 아가씨야.”
보다 못한 천후는 그것들 중 일부를 빠르게 받아 챙겼다. 그 모습을 보면서 주변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웅성웅성하는 것이 들렸다.
“뭐야? 물주?”
“대박. 저 나이에 저런 차 끌고 다녀?”
“부모 백이 쩌나 보지.”
일본어라 못 알아들어서 다행인 말이 휙휙 날아다니는 것을 무시한 천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꼴로 어떻게 돌아다니자는 거야?”
“으윽. 저, 저는 움직일 수 있었지 말입니다. 에너지 게이지는 분명 반 이상임다.”
“…….”
꾹꾹. 괘씸한 답변을 강력한 꿀밤으로 응징한 천후는 그러다 주변을 돌아보았다. 작게 오가는 소리는 못 알아듣겠지만, 대충 어떤 뉘앙스인지는 알 것 같았다.
눈매를 가늘게 바꾼 천후는 그대로 팔을 뻗어서 라즈베리의 어깨를 끌어았았다.
“꺄! 싸, 싸부?”
“그래서. 그 맛있다는 맛집은 어디야?”
슬쩍 목을 숙여서 그녀의 귓가에 속삭이니, 라즈베리가 흠칫 거리는 게 느껴졌다. 그동안 주변에서 중얼거리던 시선들은 빠르게 흩어졌다.
안 그래도 떡대가 있는 편인데다가, 심기 불편해하는 티를 확 내니 다들 놀란 것이다. 지금 천후가 입고 있는 복장도 정장에 선글라스. 이 추운 날씨에 길거리에서 입을 옷은 아닌지라, 야쿠자 비슷한 걸로 오해받은 모양이었다.
“으….”
한편, 약간 얼굴이 붉어진 라즈베리는 슬쩍 미소를 입에 걸고서 물었다.
“어라. 이거 저 싸부랑 데이트하게 되는 검까?”
평소의 눈에서 빔과는 다른, 약간 장난기 섞인 미소에 천후는 같이 웃었다.
“그럴래?”
“헤헤….”
그 말에 한번 고개를 크게 끄덕인 라즈베리는 왼팔에 착 달라붙어 왔다.
“대환영입니다.”
…주변에서 보기엔 굉장히 위험한 그림이 이렇게 성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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