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하렘-220화 (220/324)

220화

라즈베리가 천후를 데려간 곳은 다시 거리까지 나와서 한참을 걸어 들어가야 나오는 라멘집이었다. 상가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서 골목으로 들어가는 곳에 있는 데다, 가게 자체도 반지하에 있어 처음 봤을 땐 알아보기 어려웠다.

“여기가 그래도 이 근처에선 제일 낫지 말임다.”

“그, 그러냐.”

거리를 관통하는 동안 추위에 얼어 죽을 뻔한 천후는 이를 달달 떨면서 자리에 앉았다. 도쿄의 큰 식당들은 메뉴판에 한국어가 쓰여 있는 경우도 많은데, 여긴 그런 것도 없어서 천후는 멀뚱히 눈만 굴릴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라즈베리가 금세 상황을 파악해선 물어왔다.

“여기는 돈코츠라고 해서 돼지 뼈 육수 라멘 밖에 안 만드는 곳임다.”

“그래? 메뉴는 꽤 여러 가지 있는데.”

“라멘은 그렇단 검다. 일단은 중국집이거든요, 여기.”

“중국집이야?”

“네. 중화요리집임다. 일본식이지만.”

“흐음.”

“돌아와서, 다른 거 말고 돈코츠 라멘이 제일 나은데, 사리랑 고기랑 어떻게 드리면 됨까?”

“많이. 되도록 많이.”

“예스. 그러면~.”

고개를 끄덕끄덕한 라즈베리는 활기차게 주문을 시작했다. 챠슈가 어쩌구. 점보가 어쩌구 하는 게 소리를 넘긴 천후는 목재로 된 테이블을 만져보았다. 건물 전체에서 약간 누린내가 난다고 생각될 정도로 기름 느낌이 아주 강한 곳이었다.

“잘도 이런 아저씨가 다닐 만한 곳을 알아냈구만.”

“후우. 푸드 파이터의 길을 걷는 자.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 없슴다.”

“…….”

뭐야. 푸드 파이터란 건. 어이가 없어 웃고 있자니, 머리에 두건 쓴 아저씨가 용케도 한 손으로 든다 싶은 커다란 접시 하나를 천후 앞에 내려놓았다.

“우왓.”

“어떻슴까? 여기서 자랑하는 점보 돈코츠 라멘 스페셜이지 말임다.”

“이렇게 많이 나올 줄은 몰랐는데.”

천후는 주룩 하고 식은땀을 흘렸다. 설렁탕 비슷하지만 그거보다 조금 더 누리끼리한 국물에는 4인분은 우습게 넘어 보이는 면이 들어있었는데, 그 위에는 대파 썬 것이 무슨 탑처럼 쌓여있었다.

커다란 그릇 면을 따라서 보쌈 비슷하지만, 간장 등으로 맛을 내놓은 고기인 챠슈가 한 바퀴를 빙 두르고 있었는데, 이것만으로도 가격이 나가보이게 생겼다.

“원래는 시간제한이 걸려있는 메뉴지만 그냥 돈 다 내고 먹는다고 시켰지 말임다.”

“이 녀석….”

천후가 평소에 대식한다는 점을 알고 있던 라즈베리가 고른 메뉴를 본 천후는 쓴웃음을 지었다.

“좋아. 뭐 일단 먹어보자고.”

“예스! 아. 저는 챠슈 많이로 끝이지 말임다.”

보통 크기의 접시를 대서 비교해보자 5배 가까운 양 차이가 났다. 슬쩍 그녀를 쏘아본 천후는 젓가락을 들었다.

“맛없기만 해봐, 아주.”

“그건 보장하지 말임다.”

“그래?”

피식 웃은 천후는 그대로 면을 흡입하기 시작했다. 후루룩. 후루루룩. 그냥 면뿐만 아니라 이제 막 나와서 뜨거운 국물까지 들이켜는 모습에 나와 있던 주인아저씨가 오오 하고 탄성을 질렀다.

“와우.”

라즈베리 역시 놀랐는지 면을 입으로 가져가다가 놀라 눈을 깜빡거렸다. 한편, 천후는 생각보다 맛있자 먹는데 몰두했다.

순식간에 면을 반 이상 해치운 그는 그대로 그릇을 한 손에 들고서 국물을 들이켰다. 그쯤 되자 주인장뿐 아니라 주변에 와있던 손님들까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걸 바라보며 라즈베리는 떡하니 입을 벌렸다.

*

“어으. 잘 먹었다. 이제 좀 몸이 뜨끈뜨끈하네.”

“끝내줌다. 푸드 파이터…. 푸드 파이텀다. 이럴 거면 타임 어택 도전할 걸 그랬슴다.”

“그런 거 하면 부담돼서 잘 못 먹어. 근데 진짜 괜찮았네.”

“주인아저씨도 다음에 꼭 다시 와보라고 했지 말임다.”

옆에서 재잘거리는 걸 간단히 받아준 천후는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7시. 늦은 시간은 아니지만, 말만한 처자랑 같이 다니다 보면 순식간에 늦은 밤이 되리라.

그게 걱정돼서 라즈베리를 슬쩍 내려보았지만, 그녀는 그런 걱정은 애초에 접어뒀는지 팔을 끌어안은 채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이거 참.’

이래서야 쉽게 빠져나가기도 힘들게 생겼다. 쓰게 웃은 천후는 그러다 갑자기 몰려오는 칼바람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으흐흐흐. 와. 진짜 춥다.”

“싸부 옷이 너무 얇아서 그렇슴다. 좀 두껍게 입으시지.”

“원랜 회의 끝나자마자 호텔에서 지내려고 했으니까.”

“으음. 옆에 인간 난로가 있어도 화력이 부족할 줄이야.”

미묘하게 분해하는 기색에 천후는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화력은 이그네스가 낫지.”

“큭. 단순 화력에선 이길 수 없지 말임다. 그치만 라즈베리에겐 이그네스에게 없는 볼륨 옵션이 있지 말임다.”

라즈베리는 그렇게 말하면서 팔을 더 세게 끌어안아 왔다. 하지만 뭐랄까…. 약간 푹신한 거 같은데 이게 그녀가 입고 있는 점퍼 덕인지, 자기 입으로 말하는 볼륨 기능(?) 덕인지 파악하기 어려운 미묘한 느낌만 있을 뿐이었다.

“…볼륨 기능은 수리 중임다.”

“왜 자기가 말하고 부끄러워하냐?”

“하, 하여간 그렇슴다!”

답지 않게 바락 소리 지른 라즈베리는 그러다 뭔가 떠올렸는지 오 하고 탄성을 지르며 말했다.

“싸부. 추운데 떨지 마시구 옷을 사지 말입니다.”

“옷을…사?”

“돈 둬서 어디에 씁니까?”

태연하게 하는 말에 천후는 입을 다물었다. 하긴. 옷값 얼마나 한다고. 하지만 정말 자본주의에 찌든 발상이다. 옷을 무슨 일회용처럼 이야기 하다니.

“이 근처에도 옷집 정돈 있지 말입니다.”

“그래. 그럼 점퍼 하나 정도만 살까.”

“네. 그럼 이쪽임다.”

아키하바라 하면 오타쿠~라던가 전자제품 계열을 많이 떠올리지만, 다 사람 사는 곳이라 의류 매장 정도는 있었다. 올해 일본은 엄청난 추위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아웃도어 매장은 더더욱 눈에 띄었다.

거기서 적당히 두꺼워 보이는 점퍼를 집어서 계산한 천후는 라즈베리가 말똥말똥 올려다보는 걸 보고 물었다.

“왜?”

“으음~.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다른 것도 좀 더 입어보시지 말임다.”

“다른 거?”

“제가 코디해드리겠슴다.”

“…입어보는 정도라면야.”

“움후후.”

그 말에 눈을 반짝 빛낸 라즈베리는 그를 아웃도어 매장에서 남성복 매장으로 끌고 왔다. 거기서 매의 눈으로 옷을 바라보던 라즈베리는 티 몇 개를 천후에게 대주었다.

“이것들 어떻슴까?”

“나야 옷이면 아무래도 좋은데.”

“그럼 입어보시지 말임다. 보고 싶슴다.”

뭐가 그리 신 나는지 싱글벙글하고 있으니 거부하기도 어렵다. 천후는 그것들을 가지고 들어가 그중 하나를 입고 나왔다.

“으…. 이런 끼는 거 그리 안 좋아하는데.”

라즈베리가 가져온 옷은 몸에 딱 달라붙어서 몸매를 그대로 보여주는 옷이었다. 단련된 흉부와 복부, 팔뚝이 돌출되는 식이었는데, 막상 천후는 이런 답답한 옷을 좋아하지 않았다.

“…….”

하지만 주변에서 남자친구를 대동하거나, 혼자 남자 옷을 보고 있던 여성들의 눈은 전혀 달라졌다. 라즈베리가 풋하고 웃으며 그에게 붙자 눈매가 사나워질 정도로.

“역시 일본 여자들은 노골적이지 말임다.”

“응?”

“아니. 아님다. 싸부. 제 옷도 좀 사주세요. 온 김에.”

“짐을 얼마나 늘리려고 그래.”

“에이~. 그러지 마시구~.”

“어디서 귀여운 척이야.”

“헤헤.”

슬쩍 쥐어박아도 혀를 빼꼼 내미는 모습에 천후는 헛웃음을 지으며 그녀와 함께 여자 옷 매장으로 올라갔다. 지루한 시간을 함께 해주는데 이 정도도 못 해줄 건 없으니까.

*

그렇게 쇼핑을 시작한 지 두 시간. 라즈베리는 천후마저 풀 아머 더블 영천후 정도로 변신시키고 나서야 쇼핑을 마쳤다.

“후우. 대충 이 정도면 되지 싶슴다.”

“…너도 여자는 여자구나.”

“헤헤. 칭찬이 과분하지 말임다.”

“칭찬 아니거든?”

부끄러운지 코 밑을 쓱 닦는 걸 보고 이를 간 천후는 짐을 정리하면서 말했다.

“안 되겠다. 일단 호텔로 가야지. 짐이 너무 많네.”

“엑. 호텔로 가시는 검까? 이대로? 저를 버리고?”

“듣는 사람들 오해하게. 버리고 가는 게 아니라 원래 잠은 호텔에서 자려고 했어.”

“에에~. 그러지 마시구 이렇게 된 거 내일 새벽 영화까지 같이 봐주세요. 네?”

“새벽 영화면 그거? 특촬 히어로 대집합 어쩌구?”

“예스!”

“거절한다.”

“으으. 그럴수가아~.”

추욱 하고 힘이 빠졌는지 풀 아머 라즈베리의 허리가 부러지듯이 꺾였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금 벌떡 일어나더니 말했다.

“그럼. 그럼 새벽까지 같이만 있어주시면 안 됨까? 솔직히 심심하지 말임다.”

“…그게 무슨 의미인진 생각은 하고 하는 소리냐?”

천후가 노려보며 묻자, 라즈베리는 대놓고 과장된 태도로 양 볼을 손으로 가리며 연기 톤으로 말했다.

“핫?! 드, 드디어 싸부가 저를 여자로? 앗. 그건 곤란함다. 제 마음의 준비가 아직.”

“됐네요…….”

나이 먹어 성인이 됐다고 해도 라즈베리 상대론 뭔가 그런 느낌이 안 든다. 어깨를 으쓱한 천후는 그러다 다시 물었다.

“그 정돈 해줄 수 있는데, 그런 거면 호텔에 너도 같이 오면 될 거 아냐?”

“상영관이 제한되어있어서 싸부가 묵는 호텔에서 다시 오려면 멀지 말임다. 그러지 마시구…. 여기서 저의 집이 그리 멀지 않습니다. 거기서 새벽까지만 같이 있어주시지 말임다.”

“네 집?”

“네, 왜. 말씀드리지 않았슴까. 일본에서 좀 살았었다고. 그때 사둔 집이지 말임다.”

“…얼마나 가까운데?”

“바로 근처지 말입니다.”

“그래, 그럼.”

“야호! 역시 싸부는 최곰다!”

신 나서 천후의 옆에 다시 붙은 라즈베리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천후를 안내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집은 정말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상가에서 조금 떨어진 8층짜리 아파트의 3층에 있었는데, 아파트 전체가 1LDK를 기본으로 만들어져 있는 곳이었다.

문 앞까지 도착한 라즈베리는 도어 락 앞에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아. 아님다. 갑자기 비밀번호가 생각이 안 나서.”

자기 입술을 살짝 혀로 핥은 라즈베리는 두 번 정도 틀리고 나서야 문을 열 수 있었다.

“불안불안하구만.”

“흠흠! 이럴 때도 있지 말임다.”

슬쩍 얼굴을 붉힌 라즈베리는 먼저 신발을 벗고 들어가서는 말했다.

“자. 누추합니다만 어서 들어오십쇼.”

그녀의 말마따나…. 상당히 누추한 곳이었다. 일본에 다시 돌아올 일이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기본적인 가재도구조차 거의 없이 도배, 장판만 되어있는 수준의 텅 빈 거실이 눈에 들어왔다.

라즈베리의 취향상 들어가자마자 온갖 영상, 음향 장비들과 인형들이 즐비할 거라 생각했던 천후는 호오하고 안을 둘러보았다.

“완전히 다 치워놨네?”

“네. 그래도 하쿠네 잡으러 다닐 때 몇 번 오긴 해서 전기, 수도, 가스는 들어오지 말임다. 청소도 일단은 끝내뒀고.”

“흐음.”

말을 듣고 하나 있는 방을 슥 둘러보니 옷걸이 하나에 매트리스가 깔려있는 게, 정말 딱 잠자는 용도로 쓸 수 있는 곳이었다. 그나마 작은 TV 하나에 블루레이, DVD가 연결되어있는 것이 그녀의 방답긴 했다.

“방을 좀 내놓든가 하지 그랬어.”

“부동산 쪽은 잘 모르지 말임다. 일본어도 기본 회화는 하지만 전문적인 대화가 나오면 아무래도 힘듬다. 그리고 가끔 이쪽 올 때 들렀다 가기도 하니까 그렇게 아쉽진 않슴다.”

“네가 그렇다면 상관이야 없지만, 여기서 지내느니 호텔이 낫잖아.”

“왔다 갔다가 불편하지 말임다. 잠시 찍고 가는 용도론 쓸만함다.”

본인이 이렇다니 별로 할 말도 없어서 천후는 어깨를 으쓱했다. 하긴. 도쿄 집값이 아무리 비싸다 해도 그녀가 DS에 들어온 이후 벌어들인 돈이면 이런 공실 유지 좀 한다고 어떻게 되진 않으리라.

방 한편에 짐들을 내려놓은 라즈베리는 무거웠는지 잠시 스트레칭을 하다가 그의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그럼 싸부 먼저 씻으시겠슴까?”

“응? 아냐. 먼저 씻어.”

“괜찮슴까? 그럼 염치불구하고….”

꾸벅 고개를 숙인 라즈베리는 갈아입을 옷을 가지고 들어갔다. 그동안 천후는 보일러를 틀고, 저쪽에 개어져 있던 이불을 가져와 매트리스 위에 깔고 누웠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알아듣지도 못하는 TV프로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천후는 그러다 샤워기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멎었음을 느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으스스스스스. 으스스스스….”

욕실에서 나온 라즈베리가 달달 떨면서 쏙 하고 이불 안으로 그림처럼 슬라이딩하면서 들어왔다.

“우우우우. 따듯함다. 욕실에서 여기까지만 해도 체온이 영하까지 떨어졌지 말임다.”

“…….”

그럴 거면 입고 잘 옷으로 그런 팬티 바람이 아니라 긴 팔을 입어라. 천후는 딱 달라붙어서 체온을 빼앗아가고 있는 갈색 머리의 여자를 보고서 한숨을 내쉬었다.

이 무한 신뢰를 대체 어째야 한다?

============================ 작품 후기 ============================

아! 통원치료! 아주 좋은 발음이지!

...으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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