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하렘-221화 (221/324)

221화

"으스스스."

달달달. 방금 온수로 씻고 온 주제에 그새 추웠는지 라즈베리는 자기 몸을 쓰다듬으며 떨었다.

시선을 다른 데 두고 있었다지만 러닝셔츠에 팬티 바람. 춥다고 딱 달라붙어 있느라 부드러운 감각이 여과 없이 전해진다.

이럴 수 있는 것 자체가 천후에 대한 무한 신뢰 그 자체를 보여주고 있었지만….

'이건 너무 무방비하지?'

확실히 라즈베리를 여자로 본 적은 없었다. 지금 이러고 있는데도 마찬가지고. 바로 코앞에서 샴푸 냄새를 풍기고 있는 갈색 머리를 내려다봐도 그랬다.

그의 내면에서 라즈베리는 연하이자 애라는 카테고리에 섞여 있었으니까. 그렇다곤 해도 말만 한 처자가 남자한테 못하는 짓이 없다.

"…너무 편하게 구는 거 아냐? 내가 무슨 짓 하면 어쩌려고."

애시당초 혼자 살던 집에 끌어들인 시점에서부터 문제가 됐는데 이건 더 심하다. 천후는 슬쩍 목소리를 낮추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그러나 아직 그가 뭘 하려는지 짐작하지 못한 라즈베리는 되려 그의 가슴팍에 귀를 붙이면서 답했다.

"네? 에이. 싸부가 저한테 그럴 리 없지 말임다. 싸부 몸에서도 아무 신호도 없고."

태연히 답하는 내용이 가관이다. 그녀 말마따나 심장 박동수도 변함이 없고, 이렇게 가까이 밀착해있는데 아래쪽에도 신호가 없으니 그렇게 생각할 만도 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하나도 없네.'

그 태도에 잠깐 놀란 천후는 그러다 머리를 쓰다듬던 손길을 슬쩍 내려, 감싸 안듯이 바꾼 다음 귓가에 입을 가져갔다.

"그럴 마음이 꼭 신호랑 같이 오는 건 아닌데."

스스슥. 후두부에서 목덜미 뒤로 내려가는 선에 검지를 가져다 댄 그는 가볍게 그 산맥을 따라 손끝은 움직였다. 마치 지문이 피부 세포 하나하나를 훑어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천천히….

"히으응."

입에서 요상한 소리를 낸 라즈베리는 그제야 자기 입을 화들짝 막으면서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춰왔다. 방금까지 태연하던 그녀의 볼이 아주 약간 붉어져 있었다. 눈에는 놀람과 당혹이 서려 있었다.

"싸부…."

"아무리 그래도 이런 복장으로 한 이불 안에 들어오는 건 아니지."

손을 내려 본래라면 브래지어 후크가 있어야 할 등 뒤쪽을 찬찬히 더듬는다. 그제야 자기 복장을 자각했는지, 이불 속에서 라즈베리가 허벅지를 오므리며 한 손을 그 사이로 가져가 틀어막는 게 느껴졌다.

'이쯤이면 됐나.'

약간 경각심만 심어줄 요량이었으니, 이 정도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한 천후는 그녀의 몸에서 손을 떼려 했다.

하지만 그때.

"싸부…. 하고 싶어요?"

"응?"

그 뒤로 계속 눈을 마주치고 있던 라즈베리가 천천히 눈동자를 옆으로 돌리며 작은 입을 달싹였다.

"그런 거라면…. 마스터가 첫 상대라면 좋아요. 저도…."

꼬옥. 조금 더. 지금까진 온기를 느끼고 싶어 붙어있었다면, 이번엔 다른 의미로 그녀가 몸을 밀착해왔다. 물기 젖은 그녀의 머리칼이 좀 더 밀착하며 그녀의 턱밑을 간질였다. 어느새 그녀의 손은 다리 사이가 아니라 그의 양어깨에 살포시 올라와 있었다.

"무슨…."

가슴께에서 웅얼거림이 계속 들려왔다.

"제가 살던 동네에선 제 나이 정도면 다들 경험 정도는 다 해봤다고 하고…. 알자드 네에선 십 대에 결혼하는 경우도 흔했고. 그래서…. 저도 관심정돈 있어요. 그, 남자라거나. 야한 거…라거나."

말하는 게 너무 노골적이라 천후가 오히려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그의 그런 모습이 다른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는지, 약간 더 몸을 위로 끌어올려…. 이젠 전신을 완전히 밀착해오며 속삭였다.

"진구지 땐… 상황이 너무 무서웠으니까. 친하지도 않았고. 그래서 싫었지만. 저, 마스터가 상대라면…. 아. 언니들이나, 다른 사람들에겐 비밀로 할 테니까…."

"아니, 잠깐. 라즈베리?"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걸 눈치챈 천후는 어떻게 말을 꺼내려고 했지만, 라즈베리는 약간 고양상태에 들어간 건지, 평소의 반짝이는 눈동자가 지금은 살짝 풀려있었다.

심심풀이용으로 틀어둔 TV에서는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특유의 관중들 웃음소리가 끊임없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그 소리와는 어울리지 않게, 이제는 샤워 후에 남은 물방울뿐 아니라 이불 안의 온기로 조금씩 스며 나온 땀으로 러닝셔츠가 약간 젖은 갈색 머리의 여성이 가만히…. 뒷머리에서 떨어져 가던 그의 큰 손을 잡았다.

차마 뿌리칠 수 없어 가만 놔두면, 그녀는 그것을 천천히 이끌어 자신의 등허리 아래, 곡선이 아래로 꺾이다 다시 튀어 오르기 시작한 부위로 가져다 놓고 그 위에 자기 손을 다시 올려 터치를 유도한다.

손바닥만큼이나 작은 삼각팬티 가운데 골짜기에도 어느새 습기가 차있는 게, 미세하게 찔러 들어간 중지 끄트머리에 느껴졌다.

'아. 위험하다!'

방금까지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분위기가 이렇게까지 되면…. 동생으로 보고 있었고 뭐고가 문제가 아니다. 생리적인 수준의 반응이 일어나려 용트림을 시작하는 걸 느낀 천후는 깜짝 놀라 그녀에게서 확 떨어졌다.

"지, 진정해. 장난이었어. 이건-"

"……."

천후가 뭐라 변명을 하려고 하자, 라즈베리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배시시 웃었다.

"그럴 거 같았슴다. 사실 저도 장난이었지 말임다."

다시 평소의 말투로 돌아온 라즈베리는 휴우 하고 숨을 내쉬며 그동안 더웠는지 러닝셔츠를 팔랑거렸다.

흰 러닝셔츠 안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아, 젖은 그 틈새로는 몸이 여과 없이 보인다. 슬랜더인 그녀는 희주나 셀레나처럼 볼륨은 없었지만, 적어도 자신이 여성이라고 어필할 정도의 것은 가지고 있었다.

"아."

잠시 그렇게 열을 식히고 있던 라즈베리는 그러다 벌떡 일어나서 타이츠를 갖춰 입었다. 허리 아래로 고스란히 노출되어있던 긴 다리는 검은 장막에 가려져 갔다.

이러고 나니 위에는 여전히 러닝 차림이었지만, 에로도는 크게 떨어졌다. 그제야 천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윽. 너무함다. 옷을 입으니까 더 좋아하다니."

"시끄럽다. 느낌 되게 이상했단 말야."

뾰로통한 음성에 답한 천후는 잠깐 시선을 피하며 진정했다. 뭐랄까? 금기 저지르는 기분? 동생에게 손대는 기분이라 잠깐 머릿속이 멍해졌었다.

절대로 양립할 수 없어야 정상이었던 카테고리가 사실은 하나로 통합되어있었단 걸 느꼈을 때, 그것에 남성으로서 반응했을 때 느꼈던 기분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허나 정작 라즈베리는 옆에 폴짝하고 다시 붙어 오더니,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중얼거렸다.

"저는 그렇게 나쁜 느낌은 아니었습니다. 싸부도…. 반응이 있어줬고."

"아니 그건…."

"그런 분위기까지 가서 아무 반응도 없으면 오히려 싫습니다. 여자로 인정받은 거 같아서 저는 꽤 좋았습니다."

"……."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는 타이밍이란 걸 깨달은 천후는 한숨을 내쉬며 TV로 시선을 옮겼다. TV에선 여전히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방영 중이었다. 라즈베리 역시 그걸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지나.

"싸부. 어쩌실 겁니까? 주무시고 가실 겁니까?"

라즈베리 쪽에서 먼저 입을 열었다. 내용도 방금 일이 있었다 보니 굉장히 민감하게 들렸다. 조금 놀라 그녀를 내려보니, 그 달아올랐던 기색은 전부 사라져있었다. 그제야 순수한 의도로 물어봤다는 걸 깨달은 천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달라며."

"사실 별 상관없지 말임다. 싸부가 불편하시다면 가셔도 상관 없슴다, 이젠."

"괜찮아. 어차피 조금 있다가 자면 되니까. 아. 아니면 네가 불편해서 그래?"

그 말에 라즈베리는 고개를 붕붕 저었다.

"아님다. 싸부랑 같이 있는 건 좋지 말임다. 그런 건 아니고…. 실은 내일 극장판에 대비해 지금부터 '복습'을 좀 할 건데. 싸부가 싫어할까 봐 그럼다."

"……."

복습이라. 말 하난 아주 기똥차게 만들어냈다. 라즈베리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해석하자면, 내일 특촬 히어로 총집합 극장판을 보기 전에, 역대 하이라이트 장면들을 지금부터 보겠다라는 뜻이었다.

과연 그 말에 천후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전에 몇 개 보고서 굉장히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DS 가디언즈를 '따위'로 만들 수 있는 것들도 몇 개 있었으니까.

"…최대한 일찍 자지, 뭐. 나 잠 잘 자."

농담이 아니고 천후는 마음만 먹으면 어디에서든, 어떤 상황에서든 잘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 시간엔 조금 이르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때, 그 소리를 들은 라즈베리의 눈매가 약간 찌푸려졌다.

"그렇게 재미없슴까?"

"…사람마다 취향 차이는 있는 법이야."

"크으. 싸부는 너무 로망이 없슴다. 싸부는 어릴 때 에너자이저 파 흉내도 내본 적 없는 겁니까? 동심이 죽었슴까?"

"에너 뭐? 그게 뭔데?"

"!"

과광! 라즈베리는 진정으로 충격받았는지 그 자리에서 눈을 크게 뜨고서 덜덜 떨면서 물었다.

"서, 설마 싸부. 그레이트 웜 볼도 안 봤습니까?"

"뭔데 그게?"

"!!!! 세상에…. 말도 안 됨다. 이 지구가 어찌 되려고 이런…. 잠깐. 설마 갈램덩크도?"

"응? 덩크면 무슨 농구만화야?"

"흑…흑…. 싸부…. 인생 헛살았슴다…. 불쌍함다."

"왜 울어! 만화 좀 안 봤다고 사람이 죽진 않아!"

진짜로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걸 보고 천후가 그렇게 말했지만, 라즈베리는 분연히 고개를 저었다.

"죽슴다. 죽는 검다. 안 되겠슴다. 제가…. 이 제가 싸부를 이끌겠슴다. 일단, 오늘은 복습부터 해야겠지만! 싸부. 따라오십시오. 제가 신세계를 보여드리겠슴다!"

"아냐. 그 신세계 별로 들어가고 싶지 않아. 넣어둬, 넣어둬."

그레이트 웜 볼이나 갈램덩크는 어째 좀 끌리지만 복습까지 어울리긴 쫌…. 그러나 라즈베리는 그 순간 눈매를 착 가라앉히고 무서운 말을 입에 올렸다.

"…복습이랑 극장 같이 안 가주시면 이를 거예요. 오늘 있었던 일."

"진정해. 진정해라. 심호흡을 해. 그리고 어차피 희주 씨한텐 일러도 별 효과도 없어."

부추기면 부추겼지. 그 말에 라즈베리는 차분히 고개를 저었다.

"희주 언닌 그렇겠지만 제가 이르는 건 희주 언니가 아님다. 전…. 이그네스랑 아이들에게 이를 검다!"

"…!"

엄…. 인질이 좀 쎈데.

"볼게. 같이 보면 되잖아, 까짓거…."

"좋슴다. 그럼 따라만 오십쇼! 이제부턴 슈-퍼 히어로 타임임다!"

결국 라즈베리의 기세에 넘어가고만 천후는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 꺼지고, 거기서 청년 하나가 자세를 취하가 쫄쫄이 셔츠를 입는 것을 바라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괴로운 새벽이 될 것 같았다.

*

2시. TV에서는 여전히 변신히어로들이 분위기를 잡으며 세계의 멸망과 존속을 논하고 있을 때.

라즈베리의 시선은 다른 곳에 있었다.

“싸부. 정말 주무십니까? 싸부우.”

“…….”

쿡쿡. 죽은 게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미동도 하지 않는 천후를 찔러보던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름대로 협박까지 섞었는데 천후는 결국 잠을 이기지 못하고 잠들어버렸다.

애초에 그는 완전히 아침형 인간인지라 잠드는 게 빨랐다. 12시 이전엔 무조건 잠드는 편이었으니, 여태까지 버텨준 게 용한 편이었다.

“하아. 이제부터가 정말 재미있는데.”

슬쩍 볼을 부풀린 라즈베리는 그러다 얼굴을 찌르던 손가락을 조금 아래로 내렸다. 목덜미에서, 그의 가슴팍으로.

찔러보면 사람 살인만큼 들어가긴 들어가지만, 그래도 탄탄하다. 다른 손으로 자기 몸의 같은 부위를 눌러보면 천지 차이다.

“무방비하네요….”

살짝. 마른 입술을 핥은 라즈베리는 천천히 몸을 기울여 그의 팔에 누웠다. 원래 이 자리는 희주나 다른 여자들의 것이었지만 오늘은 자신만의 것이었다.

그건. 꽤 괜찮은 기분이었다.

놀랍게도.

진구지 땐 그렇게나 싫었는데.

“…아까 했던 말. 완전 다 장난은 아니었습니다.”

아니. 상당 부분이 사실이었다. 관심이 있다.

남자의 몸에도. 야한 것에도.

스륵.

일부러 몸을 끌어올려, 그의 입가에 입을 가져갔다. 비겁한 행동은 아니다. 이 정도는 스킨쉽이다. 스킨쉽. 그렇게 생각하며……….

“아…. 위험합니다.”

흠칫. 고개를 붕붕 저은 라즈베리는 간신히 맞닿기 직전까지 간 얼굴을 땠다.

몸 상태가 조금 이상하다. 그리 이상한 감각은 아니었지만.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는 동할 때가 있었다. 그거보다 약간…더 고양된 기분?

“…….”

타이츠가 불편하다. …사실은 처음부터. 약간, 축축한걸. 속박에서 벗어나려 허리춤에 손가락을 걸쳤을 때.

TV에서 기술명을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굉장히 좋아하는 목소리. 그렇지만 지금은….

약간 방해된다.

“2시….”

아직 시간은 충분하다. 잠깐…껐다가 켜도 될 정도로.

그렇게 정한 라즈베리는 방해되는 TV를 껐다.

스르륵하고. 허리춤에 있던 손이 내려오는 소리가 났다.

TV 화면이 다시 켜진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이 지나서였다.

============================ 작품 후기 ============================

이번 챕터 사실상 마지막 쉬어가는 구간은 이걸로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