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하렘-222화 (222/324)

222화

다음날.

결국 천후는 라즈베리와 함께 ‘특촬 히어로 총집합. 무적의 영웅들’을 아침 일찍부터 보고 나왔다.

“우…. 우오오. 우오오오…. 배가 부름다. 저, 아침밥도 안 먹었는데 배부름다.”

“진짜 많이 나오긴 하더라.”

수십 명 가까운 쫄쫄이들이 제각기 뭔가 하는 걸 같이 본 천후는 아직도 눈이 어지러워서 손으로 눈두덩을 꾹꾹 눌렀다.

“싸부. 어땠슴까? 꽤 재미있지 않슴까?”

“으으음. 뭐 대사라거나 포즈는 멋있더라.”

라즈베리와 영천후가 해당 영화를 본 감상은 약간 달라서, 천후의 경우 그들이 취하는 포즈나 이런 것들을 일종의 군무로 받아들여서 멋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가까웠다.

제대로 된 총검술 연무를 보았을 때 느끼는 감각이랄까. 각 캐릭터의 특성에 맞게 시작, 마무리 동작. 그리고 손동작 표현 등은 확실히 볼 만했지만, 뭐 그 외 특수효과 등은 사실 아무리 잘 만들어도 그에겐 조잡해 보일 뿐이었다.

“모두의 미래를 위하여~ 같은 건 좀 오그라들지만 그래도 한 번은 볼만하네.”

수십 명이 한꺼번에 날아올라 킥을 날리는 건 좀 웃기긴 했지만. 천후는 라즈베리를 배려하여 이것까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헤헤. 그렇지 말임다. 제가 싸부한테 바라는 것도 저런 거지 말임다.”

“야야. 좀 살려줘.”

아무리 연기라지만 저런 건 못 해준다. 하지만 라즈베리는 그의 팔을 감싸 안으며 웃었다.

“괜찮슴다. 싸부 스스론 잘 모르는 것 같지만, 싸부도 엄연히 저쪽 과지 말임다.”

“말도 안 돼.”

“진짜임다. 예를 들자면, 싸부는 제가 나쁜 놈들에게 납치당하면 구해주러 올 거지 말임다?”

그 말에 천후의 고개가 당연하단 듯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당연한 소릴 하고 있어.”

“거보십쇼. 아니면 만약 제가 사실 나쁜 조직의 일원이라도 설득하실 거지 말임다?”

“그것도 당연한 소리잖아.”

“…….”

그 대답에 라즈베리의 눈동자가 아주 약간 흔들렸다가 돌아왔다. 입가에는 아주 작은 미소가 걸렸다.

“역시 싸부는 변신 히어로 체질이지 말임다.”

“내 참.”

기준 한 번 모호하구만. 쓴웃음을 지은 천후는 그녀의 머리를 마구 흩트려 놓으며 말했다.

“쉰 소리 하지 말고. 이제 슬슬 돌아가자.”

이번 일본 방문은 어디까지나 공식적인 절차를 통해서 온 거다 보니까, 돌아갈 때도 일본 정부에서 마련해준 비행기를 타고 가야 했다. 그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가 늦는다면 기다려주기야 하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말한 천후는 라즈베리를 끼고서 큰길까지 나가 마중 나오기로 한 리무진을 기다렸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저기….”

“?”

누군가가 바지를 잡아끄는 느낌에 천후는 시선을 돌렸다. 보니 이제 초등학생이 막 될까 말까 한 아이 하나가 말똥말똥 그를 올려보고 있었다.

“응? 무슨 일이니?”

“형아. 형아 DS 맞죠?”

“…….”

일본어는 못 알아듣지만, DS란 단어는 알아들은 천후는 흠칫하고 굳었다. 평소 일본에서 돌아다닐 땐 차를 타거나 호텔에 처박혀 있었던 덕에 선글라스 하나로도 어떻게든 위장이 되었지만, 거리를 대놓고 걸어 다니다 보니 알아보는 사람이 나온 것이다.

“으, 응? 그게 뭐-”

“형 DS 맞죠? 저 사인해주세요, 사인!”

“…….”

아이가 큰 목소리로 옆에서 외치자, 순식간에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체형을 가리는 점퍼에 선글라스를 끼긴 했지만, 시선이 이렇게까지 꽂히면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이런.’

최대한 조용히 지내다 가려고 했는데 다 틀렸다. 아니나 다를까?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그를 빙 둘러쌌다. 아이부터 어른을 가리지 않고.

“DS! 진짜 DS다!”

“왜 아키하바라에 와있지?”

“옆에 있는 여자가 애인인가?”

웅성웅성. 주변이 시끄러워지자 라즈베리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와의 관계가 이런 식으로 오해받는 것은 그가 바라는 방향이 아니었다.

한편, 천후는 처음 자신을 알아본 아이가 인파에 눌려서 간신히 자신에게 매달려서 버티는 것을 보고서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잠깐! 잠깐만요! 라즈베리, 통역 좀 해줘!”

“아, 넵.”

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자 그 많은 사람들이 움직임을 멈췄다. 그 사이에 넘어지기 직전이던 아이를 일으켜 세워준 천후는 그 아이에게 물었다.

“사인은 어디에 해주면 되지?”

“와!”

눈을 빛낸 아이는 그대로 등을 보였다. 펜이 없어 펜을 찾자, 가지고 있던 사람이 인파 중에 있어 잘도 건너 건너 천후의 손으로 들어왔다.

그것으로 아이의 등에 이니셜을 새겨준 그는 좋아하는 아이를 앞에 두고서 말했다.

“안녕하세요. 영천후입니다. 일본에서 사적으로 돌아다녀 본 적이 없어서 직원 안내를 통해서 이쪽으로 오게 됐네요. 오늘 아침에는 변신 히어로들이 나오는 아이들 대상의 영화를 보고 나왔습니다. 어두운 세상에 한 줄기 빛이 되는 내용이었어요.”

그가 선선히 웃으며 말하자 사람들 사이에서 해당 작품의 이름이 오갔다.

“싸, 싸부.”

이러면 그의 이미지가 어찌 될지 알 수 없기에 라즈베리는 당황했지만, 천후는 그저 웃음을 유지하며 말을 계속했다.

“오로치 사태 이후 일본 내 상황이 좋지만은 않은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저런 영화가 상영된다는 것이 대단하군요. 응원하겠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천후는 마침 저쪽에서 인파 때문에 리무진이 접근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한번 진정시킨 군중들은 그가 움직이자 좌악 갈라지며 길을 터줬다. 거기까지 가는 동안 양옆의 아이들에게 보이는 대로 사인을 해준 천후는 손을 흔들면서 차에 탑승했다.

“후우….”

간신히 인파를 헤치고 나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천후를 보고 라즈베리가 고개를 숙였다.

“싸, 싸부. 죄송함다. 제가 우겨서….”

“응? 아아. 됐어. 아마 별문제 없을 거니까.”

“그래도….”

울먹이는 라즈베리의 머리를 툭툭 두드리듯이 쓰다듬은 천후는 리무진을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

그날 이후. 그가 아키하바라에서 출몰했다는 것이 언론에 공개되었다. 일반인이 그렇게 많았으니 숨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걸 가지고 별 이야기가 다 나왔었는데, 영천후 오타쿠 설부터 풍속관광에 이르기까지 나오는 의혹도 다양했다.

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설득력을 가지는 주장은 바로…. ‘DS 가디언즈’에 대한 것이었다.

“이미 일본에 사전 광고가 들어간 상태거든. 그게 얼마나 나갈까 한번 떠보러 왔다, 히어로 물에 대한 수요를 직접 눈으로 보러 왔다…정도로 마무리된 것 같네.”

“필사적이구나. 일본 정부도.”

지금 이 주장은 일본 정부에서 그 방향성을 주도한 것이었다. 그들 입장에선 천후가 일본에서 무슨 난봉꾼 짓을 하더라도 절대 그를 건드릴 수가 없었다. 그에게 나쁜 소문이 도는 것은 더욱 그랬다.

일본 내 국민 정서도 상당히 애매한 상태였는데 대한민국에 뜯긴 것이 워낙 많지만, 그들을 구해준 주체인 DS를 까는 것은 거의 금기시 되어있어서, 이런 얼버무리기 식의 변명이 통했다.

그가 직접 노출된 덕에 DS 가디언즈에 대한 기대감이 쓸데없이 올랐다는 것은 덤이었다.

“아아….”

지옥이다, 지옥이야. 그래도 어떻게 수습이 돼서 다행이다 생각하며, 하나의 헤프닝이 막을 내렸다.

자본주의를 받아들인 이후. 중국의 중심도시는 빠르게 발전했다. 아직도 중국 하면 싸다는 이미지가 박혀있지만, 베이징이나 상하이 등 주요 도시의 물가는 절대 싸지 않다. 특히 건물은 더더욱….

갑작스러운 발전은 빈부격차를 불렀고, 단숨에 얻은 부를 잃고 싶지 않은 이들은 자신을 보전하는 방법조차 싸구려였다.

정치인과 공안을 매수하고, 밤거리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폭력조직과 연계해 자신들이 새로 만들어낸 아성에 사람들이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쳐낸다. 어처구니없게도 정부에선 이걸 용인했다.

부자에 대한 책임을 늘리는 한편, 일정 선 이상만 넘기면 그들의 보신을 용납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러한 온갖 수단을 누리면서도 안심하지 못하는 것이 자본을 가진 이들의 마음.

인간의 영역을 넘어. 그 이상의 초자연적인 폭력을 소지하고 싶어하는 이들은 언제나 있었다.

그래. 예를 들자면…. 말 한마디에 손에서 전차포와 대등한 위력의 마법을 발휘하는 '물건'같은 것을.

"오오. 이 아인가?"

"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중국. 상하이의 한 저택. 고층 건물로 빼곡한 이곳에서 저택을 유지한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주인의 재력이 얼마나 되는지 보여주는 척도와 같았다.

바로 그 주인인 노인은 반쯤 눈이 풀려 자기를 보고 있지도 않은 여자는 무시하고, 그 옆에 선 어린아이에게 시선을 주었다.

"……."

키는 140cm를 간신히 넘을까? 아직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표정 하나 없이 서 있었다. 안색은 창백하고, 아무런 말이 없는 것이 마치 인형 같았다.

그래. 인형.

그것만큼 그녀를 제대로 표현한 단어도 없으리라.

"이제 인도만 받으면 되는 건가?"

"네. '결제'는 이미 끝났으니. '상품'에 대한 주의사항은 숙지하고 계시지요?"

여자의 말에 노인은 눈 안의 탐욕을 숨기지 않고 답했다.

"알고 있네. 유그드라실의 추적을 받을 수 있으니, 마법은 될 수 있으면 사용하지 말 것."

"개인용도 선에서 사용하는 것이라면 발각될 가능성은 낮습니다만, 빈도가 늘어나면 아무래도. 그리고. 또 하나."

“아아. '사후조치'에 대해서군. 하게나."

노인이 허락하자, 여자는 흐느적흐느적 그에게 다가가 그의 이마를 짚었다. 그 순간 여자의 손에서 희미한 빛이 나오는가 싶더니 꺼졌다.

"발각되었을 때 우리의 접촉 루트를 파악 당하지 않기 위한 것입니다. 그 외에 정신에 영향은 없을 겁니다."

"좋아. 그럼 건네주게."

"네. 자아. 유린. 너의 새 마스터란다."

"……."

유린이라 불린 소녀는 아무런 감정표현도 보이지 않고, 단지 발걸음만 옮겨 노인 앞에 섰다. 겉보기론 그의 손녀뻘 소녀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노인의 입가에 씨익 하고 웃음이 맺혔다.

"주특기는 원하셨던 대로 방출계입니다. 사용은. 말씀하시면 원하시는 대로."

"좋아. 아주 좋아…."

"그럼.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여자는 어색하게 뒷걸음질로 노인에게서 멀어지더니, 그대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저택의 거실엔 노인과 유린만이 남았다. 노인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최근 중국의 부호들 사이에선 이러한 마법사의 매매가 유행하고 있었다. 개인 경호원, 디제스터와 전쟁을 대비한 지하 쉘터로 모자라 급박한 상황에 초자연적인 힘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점이 매우 편리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겉보기엔 보통 사람으로밖에 보이지 않았고, 호적상으로도 양녀 신분이기에 함께 하는 것이 이상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여차할 때는 손에서 불을 내쏘거나, 텔레포트를 할 수 있는 존재들을 옆에 두고 있으면… 그를 해하려는 세력들도 당황할 수밖에 없으리라.

"그럼 어디. 이리 와보거라."

남자의 '명령'에 유린은 저항하지 않고 그에게 다가와, 시키는 대로 무릎 위에 앉았다. 고운 원피스 아래로 느껴지는 어린아이 특유의 연약한 뼈와 살이 느껴졌다.

"흐흐…."

어떤가 하여 얼굴이나 몸을 더듬어도 그녀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노인은 오랜만에 동해오는 것을 느꼈다. 마법사란 것을 떼고서도, 저항하지 않는 어린 여자아이라는 것만으로도 매매의 가치는 있다.

그는 찬찬히 그녀의 상의를 풀어해쳐 나갔다. 그 와중에도 소녀는 눈만 깜빡거릴 뿐이었다.

바로 그때.

콰아아아앙!

폭음과 함께 거실문이 박살 나며 연기가 피어올랐다. 한참 소녀의 다리를 벌리고 있던 노인은 그 뒤로 보이는 희미한 실루엣을 보고서 깜짝 놀랐다.

오늘은 '거래'가 있던 날. 평소보다 배는 삼엄한 경비가 이곳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아무런 낌새도 없이 누군가가 쳐들어오다니?

"크윽…! 유린! 저 녀석을 공격해라!"

"…속박당한 세상의 이치여."

스으으으…. 노인의 명령에 따라 여자의 입에서 영창이 흘러나왔다. 사람 하나를 죽이는 데는 6초의 풀 캐스팅도 필요 없다. 아주 짧은 캐스팅과 함께, 그녀의 손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푸확! 그 순간, 그의 거실문을 부순 것보다 몇 배는 더 강한 폭발이 일어나며 정면을 완전히 깨끗하게 정리해버렸다. 노인의 눈에는 이제 부서진 문 정도가 아니라 엉망이 된 정원이 보일 정도였다.

"흐. 흐흐흐흐!"

미친. 미친 화력이다. 개인화기로는 도저히 가질 수 없는 화력. 의심받지 않고는 갖출 수 없는 무력이 이 순종적인 꼬마에겐 있었다. 조금 과하긴 했지만, 그 덕분에 쳐들어온 놈은 시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다…고.

노인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보기 싫은 짓은 전부 챙겨서 해주는군. 늙어도 곱게 늙어야지."

"아, 아니?"

유린이 일으킨 흙먼지 속에서 실루엣이 걸어 나왔다. 상대는 이 난장판 속에서도 몸에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피어오른 흙먼지가 그의 몸에 닿을라치면 알아서 흩어진다. 명백하게 자연현상을 엿 먹이고 있는 이 모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극명했다.

"마, 마법사? 설마, 유그드라실?!"

"오냐, 그렇다!"

긴 바바리코트에 입에는 시가를 물고 있던 남자, 최완은 그렇게 답하며 노인에게 달려들었다.

============================ 작품 후기 ============================

감히 아청법을 어기려 들어? ㅂㄷㅂ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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