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퉷. 시가를 입에서 뱉어낸 최완의 몸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싶은 순간.
"켁!"
"이 죽일 놈…!"
어느새 노인에게 다가와 그의 목줄을 틀어쥔 최완은 한 손만으로 노인의 목을 움켜쥐면서 노성을 토했다.
노인은 유린을 바라보았지만, 명령이 끊기자 소녀는 멍하니 누운 채 아무런 행동도 보이지 않았다. 틀렸다는 것을 깨달은 노인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크… 진정해. 난 아무것도 몰라."
"그러시겠지."
노인이 입으로 따발거리지 않아도, 당장 노인의 눈동자에서 초점이 흐려지는 것을 최완은 볼 수 있었다.
노인의 정신에 심어진 트리거가 작동해서 거래의 구체적인 방법, 접촉한 인물을 완전히 잊어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 조치는 매우 강력해서 최완조차도 그것이 진행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끄…. 끄으…. 사, 살려…."
"칫."
털푸덕. 최완은 목이 졸려 꿈틀대는 노인을 거칠게 던져놓았다. 그의 기억은 날아갔지만, 그가 인신매매, 마법사 매매를 하려고 했다는 모든 증거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 자는 이제 법으로 처벌받게 되리라. 이 경우, 돈으로 빠져나오기도 힘든 법으로.
"얘야. 괜찮으냐?"
"……."
노인을 제압한 최완은 바로 소녀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속옷이 벗겨지고 범해지기 직전의 상태 그대로 눈만 깜빡이면서 답하지 않았다. 이지를 완전히 상실한 듯한 모습. 최완의 주먹이 떨렸다.
"빌어먹을 것들…."
조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어떤 결과가 나올지야 쉬이 짐작이 갔다. 그녀의 기억을 헤집어봐야 나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리라.
그녀를 이곳까지 데려왔었던 여자, 보육원의 교사 역시 원격 지배를 당한 피해자에 불과했다.
그들에게 마법적으론 뭔가 유의미한 정보를 얻어내긴 힘들 터였다. 이미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었기에 알 수 있었다.
"일어나거라. 아저씨랑 함께 가자꾸나."
"마스터의 명령이 없으면 따라갈 수 없습니다."
"…네 마스터는 자격을 상실했으니, 다시 기다릴 필요가 있단다."
"……."
유린은 노인에게 시선을 옮겼다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최완은 잠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것 역시 최대한 말을 골라서 한 것이다. 지금 상태에서 '더는 이럴 필요가 없다'느니, '네 마스터는 죽었다' 등의 이야기를 할 경우 높은 확률로 폭주하거나, 그나마 남아있는 희미한 이성마저 무너져 내리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자아."
최완이 손을 내밀자, 소녀는 그것을 빤히 바라보다가 잡았다. 그는 그 자그만 손을 꾹 움켜쥐고서 저택을 빠져나왔다.
그때까지 저택 밖에서 양상을 지켜보고 있던 유그드라실 직원이 다가왔다.
"상황은 끝난 겁니까?"
"그래…. 여전히 꼬리는 제대로 못 잡았지만. 아이는 구해냈다."
"다행이군요. 정규 공격대들의 협조를 얻어내길 잘했어요. 벌써 열세 건입니다."
"……."
남자 직원의 말에 최완은 쉬이 그렇다고 답할 수 없었다.
정규 공격대와 각국 정부의 협조를 얻어서 거래 대상이 되거나, 테러의 폭발물로 쓰일 뻔한 아이들을 구해내는 경우는 확실히 많아졌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중국과 러시아.
이들의 협조를 얻어낸 것은 좋지만, 엘모세와트에게 마법사를 주로 구매하는 '고객' 역시 이들이 가장 많았다.
막 떠오르기 시작한 신흥 부자나 정치가들이 개인 보디가드용으로, 혹은 과시용으로 멸종위기종으로 지정된 동물들을 애완동물로 기르는 것처럼 사들이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DS의 영향력으로 인하여, 정당 차원에서 그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해주고 있지만 언제 태도를 손바닥 뒤집듯 바꿀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후우."
"왜 그러십니까? 한국지부장님. 정말 잘 된 일 아닙니까? 그동안 몇 년이나 꼬리도 잡지 못하고 있다가 결과를 내니 저는 너무 좋은데요."
젊은 직원이 하는 말에 최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무고한 어린아이를 구해냈고, 악의 조직의 일각을 무너뜨렸으니 기뻐하는 게 당연하다. 당연하지만.
'그게 문제란 거야.'
지난 수년간의 노력이 그들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말았다.
그것이 문제다.
주도권이…. 넘어가고 있었다.
이것이 어떻게 작용할지는, 최완으로서도 아직 알 수 없었다.
*
"아. 곤란하군, 곤란해."
2층짜리 작은 건물 안. 이제 막 샤워를 마치고 나온 건지, 러닝셔츠 차림에 머리에는 수건을 뒤집어쓰고 있는 남성이 중얼거리며 거실 중앙의 탁자 앞 의자에 주저앉았다.
탁자 위에는 딱 맞춘 크기의 세계지도가 펼쳐있었고, 그 위에는 작은 동전이나 토큰들이 놓여있었다.
남자는 머리를 털어낼 생각조차 하지 않고 그 위에 있는 토큰들을 하나씩 집어 들었다. 중국, 러시아, 미국, 유럽…. 토큰들이 집중적으로 놓여있던 곳들이었다. 그것의 반절 이상이 그의 손으로 들어갔다.
그 수를 세어본 남자는 탁자를 검지로 두드렸다.
"아. 이런. 빌어먹을 비밀주의가 발목을 잡는군. 이건 파악 당했겠는걸."
상대의 움직임이 너무 빠르고 광범위하다. 지금까지 초자연적인 힘에 의지해온 덕에 보안은 꽤 유지되어왔다고 생각했지만, 똑같이 비밀주의로 상대하던 놈들과는 달리 정밀도를 버리고 검색 범위를 넓혀버리니 대응하기가 너무 어렵다.
"정신계열 마법은 처리하는데 시간이 걸려서 문제야. 이건 영감도 못 막겠군."
이 '조직'을 운영하는데 있어서, 남자는 상품의 재료 조달과 완성품의 유통을, 그의 협력자는 상품 가공과 최종 판매를 분담해서 하고 있었다.
여기서 가공역할을 맡은 '영감'이 보안도 겸으로 하고 있었는데, 사람에게는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아도 다른 부분에서 조금씩 남은 걸 역추적해오자 결국엔 덜미를 잡혀버린 모양이었다.
"유그드라실은 쉬웠는데 말이지."
규모와 입장상 사건 하나하나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과는 달리, 각국 정부가 직접 발 벗고 나서자 아무래도 전부 대응하기 힘들었다. 따지고 보자면 인력이 달리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영감'에게도 국제적인 수완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이 흐름은 막기 힘들다. 지구 상에 존재하는 슈퍼 파워 전체가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이상.
아무래도 사업에 지장이 생길 것 같았다. 다행인 점이 있다면…. 그에게도 정보가 들어오는 게 있긴 하다는 점일까?
"이렇게 움직이게끔 한 게 DS라 이거지?"
남자의 입가에 웃음이 맺혔다. 그는 손안에 있던 토큰들을 공기놀이하듯 손 위에서 가지고 놀다가, 어느 순간 그것들을 전부 잡아 한쪽 벽면을 향해서 붕 하고 던졌다.
푹. 푸푸푹! 그러자 그 벽에 걸려있던 다트판에 동전과 토큰들이 그대로 꽂혀버렸다.
다트판이 애초에 꽂히라고 있는 거라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다트가 꽂히라고 있는 거지, 동전은 해당 사항 없는 이야기였다. 저건 일반적인 인간의 힘으론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러닝셔츠와 트렁크 아래로 드러난 몸은 꽤 큰 키에 비해서 얇다. 하지만 그 얇은 몸에는 놀라울 정도로 발달한…. 아니 저 골격으로 만들어내는 게 가능한가 싶을 정도의 근육들이 붙어있었다.
전형적인 스테로이드를 투여해가며 만들어낸 근육.
남자는 시간이 흘러 자연적으로 머리가 마를 즈음이 되었을 때, 덮고 있던 수건을 풀었다.
수건으로 가려져 있던 그 자리엔 어깨까지 닿는 갈색 펌 헤어에, 멍이 든 게 아닐까 의심 갈 정도로 심각한 다크서클을 가진 남자의 얼굴이 대신했다.
"다시 볼 것 같더니만…. 역시 예상은 틀리질 않아. 손님 맞을 준비를 해야겠군."
남자.
알자드 무자헤딘은 그 다크서클 아래로 피처럼 붉은 입술을 핥으며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은 지도로 향했다. 그중에서도 자신이 있는 곳.
터키-시리아 접경지대로.
*
오로치 사태 이후 시작된 엘모세와트 저지를 위한 노력은 점차 결실을 보고 있었다. 그들의 테러 목표가 되는 선진국 위주의 광범위 추적은 쉽게 떨쳐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10년 이상 유지되어온 비밀조직이라지만, 기본적으로 한 번 구축해놓은 시스템을 쉽게 버리기는 어렵다.
게다가 이들 역시 유그드라실과 마찬가지로 비밀주의를 우선시해왔기 때문에, 동시 다발적인 증거확보 행위에 대응하는 걸 힘들어했다.
그 결과, 엘모세와트 쪽에서 주로 사용하는 보육원이나 항시 정신지배를 당한 사람들을 찾아낼 수 있었고, 역추적하여 실시간으로 일어나는 거래 역시 몇 건이나 막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 이미 일어나버린 사건에 대응하기 급급했던 유그드라실과 비교하며 엄청난 성과였다.
"그리고…. 가장 큰 성과가 이건가."
천후는 셀레나가 올린 보고서를 바라보며 침음성을 삼켰다. 그는 먼저 그 내용은 희주와 강호에게 함께 보여주었다.
"이건…."
"곤란하게 되었군."
둘 다 얼굴이 굳었다. 천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런 내용을 접하게 될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보고서에는 지금까지 포착된 보육원들과 아이들이 출경한 기록을 통해, 그들이 최초로 머물렀던 보육원, 즉 마법사를 최초로 ‘공급’한 곳을 되짚고 있었다.
이것 역시 전 세계로 나뉘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주라고 생각되는 곳이 세 군데쯤 나왔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아주 눈에 익은 곳에 있었다.
아랍.
이전 친란으로부터 알자드가 보호시설을 운영하고 있다는 곳과 일치하는 곳들이.
"의심을 피해가기에는…. 너무 많아요. 적어도 주 공급처 중 하나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군요…."
"난민 발생이 많으니 마법사가 드러나기도 쉬운 여건인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러면 라즈베리를 의심하게 되는 게 아니냐?"
강호의 얼굴에 저어하는 기색이 비쳤다. 모두가 입에 담기 힘들어하던 이야기를 그녀가 꺼내버리고 말았다.
위의 일이 사실이라면 알자드를 서포터로 두고 있던 라즈베리 미키스트리가 모르고 있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는 그런 말은 전혀, 단 한마디도 나온 적이 없었다.
조금 취향이 독특하지만, 그 특유의 밝은 태도와 사교성을 가지고 있는데 뒤로는 이런 무서운 일을 숨기고 있었을 거란 생각도 들지 않았다.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특유의 불면증이라던가…. 이전 고인규의 발언들. 숨기고 있는 점이 있는 건 사실이었지만…. 그녀가 다른 피해자들과 비슷한 상태라면 저 정도로 끝날 리가 없었다.
얼마 전, 천후는 최완이 구해온 아이들의 상태를 본 적이 있었다. 명령이 아니면 도통 움직이지 않는 반 백치 상태가 된 그 아이들과 라즈베리를 동일 선상으로 생각하는 건 아무래도 힘들었다.
천후는 자기 이마를 천천히 짚었다.
"솔직히….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난…. 그 아이를 상대할 때 뭔가 숨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은데. 하지만 의심하고 있단 인상은 주고 싶지 않아."
"주인님…."
그가 힘겹게 목소리를 쥐어짜 내자 희주가 어깨를 짚어왔다. 어떤 말을 하더라도, 그의 마음이 정리될 시간을 두고 하려는 참이었다. 그것이 그녀의 방식이었으니까.
하지만 여기에는 사람이 하나 더 있었고.
그 사람은 진지하고, 단호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힘들더라도 해야 한다."
"선배."
"말하는 방식은 어떻든 좋아. 하지만 라즈베리에게 물은 건 물어야 한다. 마지막에 그 아이를 잡아줄 사람은 결국 우리다. 그 믿음을 새겨주기 위해서라도 먼저 다가가야 한다."
"……."
"어쩌면 지금까지 그걸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한살이라도 더 먹은 우리가 다가가는 게 맞겠지."
그녀의 말에 천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언제까지고 회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갑자기 일이 닥치게 하는 것이…. 더 위험할 수도 있다.
"…선배 말이 맞아. 진의 이전에, 알자드에 대한 이야기라도 좀 더 자세히 들을 수 있겠지."
친란에게 부탁한 추가 정보 수집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에 대해 사전에 좀 더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천후는 마음을 굳히고, 핸드폰을 꺼냈다.
"여보세요? 라즈베리? 잠깐 할 이야기가 있는데 사장실로 좀 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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