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사장실로 불려 온 라즈베리는 심상치 않은 시선들을 보고서 약간 당혹스러워하는 듯했다. 분위기가 경직된 것을 느낀 천후는 일단 그것부터 풀었다.
"일단 라즈베리. 너무 긴장하지 말고, 물어보는 것에 아는 만큼만 대답해줬으면 해."
"네에. 저야 싸부가 물어보면 뭐든 답해드리지 말입니다."
평소와 같이 순순한 태도에 천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게 아니고…. 알자드에 대해서 물어보려고 해. 정확히 어떤 관계인지 말해줄 수 있겠어?"
"알자드 말임까?"
뜬금없이 나온 이름에 그녀는 잠시 당황했지만, 곧 자신이 아는 바를 말했다.
"음…. 알자드는 제가 어릴 적부터 제 서포터를 해준 사람이었습니다. 처음 만난 건 일리미네이터 활동을 막 시작할 당시였고, 집안에서 알선해줬습니다. 어차피 저는 그때 워낙 어려서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고, 등록하자마자 노블레스 클럽에 들어갔습니다."
"첫 만남은 그렇고."
"네. 음…. 그리고 알자드 개인은 터키나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국경에서 난민 보호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저도 그와 함께 지내는 동안 거기서 지낸 적도 꽤 있습니다. 의외로 수완이 좋은 사람입니다."
여기까지는 알고 있던 바와는 큰 차이는 없었다.
"그…. 보호소 환경은 어때?"
"환경. 음…. 솔직히 난민보호소 환경이 좋아봐야 한계가 있습니다만, 그래도 같은 보호시설 중에선 괜찮은 편입니다. 일단 유소년 중심으로 보호하는 것도 크게 점수를 받고 있고. '경비'도 훌륭합니다."
"경비?"
"장소가 장소인지라 아무래도 자체적으로 난민들을 지켜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무장한 사람들이 건물을 지킵니다."
"그렇군…."
"그런데 갑자기 알자드에 대해선 왜 물으십니까?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그녀의 질문에 천후는 잠시 말이 막혔다. 그녀의 표정에는 당황하거나 곤란해 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정말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어보고 있는 듯했다.
그런 그녀에게 어디까지 말을 해야 할지 판단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는 곧 마음을 먹었다.
그녀를 집에서 내쫓거나, 거리를 벌리지 않는 한 그녀에게 그의 행동은 노출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이번 일이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던 그녀에게 알려지는 건 어차피 시간문제다. 그렇다면 강호의 말마따나 직접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었다.
결정을 내린 천후는 크게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가 말했다.
"오로치 사태 때 테러 사건이 일어난 건 알고 있지?"
"네. 한국인들 대상으로 마법사들이 레이지를 일으켰다던가."
"그래. 알자드는…. 그 사건에 관련되어 있다고 의심받고 있어."
"……."
라즈베리의 눈이 커졌다가 찬찬히 가라앉았다. 뭔가 말하려다가,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면서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으로 바뀐다. 반박해올 줄 알았던 천후는 그 모습에 크게 놀라면서도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일어난 사건 중 일부에 관여하고 있다고 의심받는 중이라, 최대한 많은 정보가 필요해. 그래서 부른 거야."
"그렇…군요."
라즈베리를 포함한 아이들 앞에서는 엘모세와트나 테러 관련 이야기를 나누는 걸 극도로 피해왔기 때문에, 그녀는 DS와 정규 공격대, 정부들이 이들의 꼬리를 잡으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도 모르는 상태였다.
그렇지만 그녀도 성인이고…. 어찌 보자면 난장판에 더욱 익숙한 인물. 이야기를 듣자마자 감을 잡은 그녀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알자드가 그렇다면 저도 의심을 받고 있겠군요."
"라즈베리."
그가 저어하는 기색을 보이자 라즈베리는 크게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닙니다. 싸부. 기분이 상했다거나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전 알자드와 친밀한 편이긴 했지만, 그가 뒤로 무슨 일을 하는지까지 전부 알고 있는 건 아닙니다. 그러니 그의 행동에 대한 보증을 할 순 없어요. 그의 혐의를 부인해줄 수 있는 증거가 저에겐 없습니다. 제 결백을 증명할 증거도요."
"……."
"저는…. 사람이 사람을 의심하는 게 꼭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건 당연한 거니까. 대신에…. 싸부도 제 혐의가 벗겨지면 저를 다시 믿어주실 거죠?"
마지막 조심스러운 물음에 천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보고 라즈베리도 작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하긴 절 믿지 않았다면 이 자리에서 직접 물어보지도 않았겠죠. 아. 그럼 당분간 전 어떻게 지내야 합니까?"
그녀의 태도는 너무나 태연해서 힘들게 물은 천후나 마음의 각오를 굳히고 있던 강호 역시 당황할 정도였다. 일단 딱히 그녀를 의심만으로 구속해둘 생각은 없었기에 그녀는 평소대로 대하기로 했다.
대신 몇 가지 조건을 걸었다.
라즈베리의 집안과 알자드에게 연락을 취하지 말 것. 그녀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어차피 연락 끊긴 지 오래됐지 말임다. 엣헴. 나쁜 사람들이구만, 이거."
"……."
받아주기가 힘들 정도였다. 여기에 천후는 마지막 조건 하나를 걸었다.
"그리고…. 이번에 그쪽으로 직접 한 번 찾아갈 셈이야. 유그드라실과 연계해서. 그때 동행해줬으면 해."
"알겠습니다. 길안내를 해드리지 말입니다."
씩씩하게 답하는 모습에 오히려 천후가 힘든 한숨을 내쉬었다. 라즈베리는 그걸 보고 배시시 웃다가….
물었다.
"싸부. 제가 저번에 여쭤봤던 거. 기억나시나요?"
"응?"
"극장에서 나와서 여쭤봤던 말."
천후는 기억을 되짚었다. 그때…. 무슨 말을 나눴더라? 그는 간신히 그때 라즈베리가 지나가듯이 물어본 말을 떠올렸다. 분명….
"그거-"
"…믿고 있습니다. 마스터."
스륵. 활기차고 장난스러운 그녀답지 않게. 허리를 90도까지 굽혀 그에게 인사한 라즈베리는 그 뒤 사장실 문을 조용히 열고 나갔다.
천후는 그대로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젠장…!"
이렇게 돌아가는 상황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돌은 던져졌고, 이제부턴 행동을 해야 했다.
최대한 빨리.
금이 간 신뢰를 메꾸기 위해서라도.
"아저씨. 저예요."
천후는 유그드라실에 연락을 취했다.
*
9.11 사태 이후 미국이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인 전쟁. 아랍 민주화 운동. 시리아 내전. '신의 국가'의 대두까지.
아랍의 오늘날은 혼란의 도가니였다.
사우디아라비아 및 아랍 에미리트의 경우 그나마 굳건한 편이었지만, 시리아와 이라크는 사실상 정부가 그 기능의 태반을 상실했다.
광신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생사람을 잡아서 성노예로 쓰거나 참수를 하는 정신 나간 것들이 현실로 나타난 세상이 된 것이다.
외국으로 빠져나가고자 하는 난민은 수도 없이 많았고, 주변 국가들은 그들을 전부 수용하지 못했다.
그 상황에서 나타난 수완가가 바로 알자드 무자헤딘이었다.
아랍 출신으로 과거 멸급 디제스터에게 멸망당한 아즈라엘의 군 장교였던 그는 당시의 인맥과 아비규환에서 생환하며 얻은 경험으로 거대 규모의 난민 보호소를 만들었다.
이러한 난민 보호소는 당연히 주변국의 국경 인근에 만들어질 수밖에 없으니 처음엔 다들 거절했지만, 그는 그 나라가 아니라 서양에서 돈을 끌어왔다.
미국, 유럽…. 이 참혹한 땅에 직접 발을 닿아본 적은 없는, 하지만 관심은 가지고 있는 척은 하고 싶어하는 기업은 얼마든지 있었다.
난민 보호소와 난민들에게 주는 구호물자에 그들의 로고를 박고, 정기적으로 홍보를 함으로써 그들에게 '백색 이미지'를 입혀주는 대가로 그는 자본을 끌어왔다.
또한 각종 SNS, 마이튜브 등. 현지에선 사용하기 힘들지만 서구권에선 당연하게 즐기고 사용하는 컨텐츠들을 그는 능숙하게 다뤘다. 어디까지 보여주고, 어디까지 보여주지 않아야 그들이 움직일지조차도….
총격이 난무하는 가운데 부모가 목숨을 걸고 소년을 구해오는 영상.
난민 아이 중 가장 귀여운 여자아이가 먹을 것을 손에 꼭 쥔 채 '대단하고 우월하신' 서방 세계의 도움에 환호하며 감사하는 영상.
갓 태어난 사생아가 5년 후 귀여운 아이가 되어 개와 뛰노는 영상.
돈을 받아내기 위해 그는 사람의 감정에 호도하는 전략을 사용했고, 그것은 확실하게 들어맞았다.
이러다 보니…. 이제 입장은 반대가 되었다.
그와 그가 운영하는 난민 보호소를 지원하는 것은 '당연한' 것. 지원하지 않는 쪽이 쓰레기가 되었다.
미국의 대기업이라면 당연히 그들에게 지원해주는 걸 고려하게 되었고, 그는 아랍의 혼란스런 정국에서 나타난 성자화 되었다. UN에서도 자금을 받아냈고, 난민 보호소가 세워진 국가 측은 더는 그들을 거부할 수 없게 되었다.
알자드는 그에 멈추지 않고, 시간만 나면 깔끔한 양복을 입고 미국, 유럽의 사교장으로 날아가 그들과 춤을 추고 술을 즐기며 자금을 이끌어낸 수완가였다.
아랍 내에서는 그에 대해 친서방주의적인 인물이라는 비난 여론도 있었지만, 당장 그를 대체할 인물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기에 그 목소리도 크지 않았다.
그리고 천후와 최완은 바로 그의 난민보소호로 향하고 있었다. 그가 마련해준 차량과 사람들의 보호를 받으며….
“우릴 직접 만나겠다니 간도 크군.”
“그러게요. 협상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하는 걸지도 모르죠.”
“협상은 무슨. 그런 놈은 바로 큐브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잡아와야 하는 건데….”
“저도 그러고 싶지만, 놈이 등 뒤에 지고 있는 게 너무 크군요. 당장 강제로 잡아들이면 유그드라실이 난민 30만 명을 고스란히 먹여 살려야 판인데. 괜찮겠어요?”
“……그게 괜찮지 않으니 지금 내가 여기 와있지.”
같은 차량에 타고 있던 중년의 남자, 최완은 입을 다물었다.
핵심 공급처들을 알아낸 이후, 유그드라실과 정규 공격대들은 그곳들을 급습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알자드 이름으로 된 비사지 북 계정으로 메시지가 날아왔다.
DS와 유그드라실 대표자를 자기 난민보호소로 초대하고 싶다고.
사지로 들어와 달란 소리였지만, 이것을 거절하긴 힘들었다. 이미 이쪽의 움직임은 들킨 지 오래. 활동을 멈추고 잠적을 타면 만나볼 수 있는 인물이 아닌 데다가, 테러리스트화 될 가능성도 높은 인물이었다.
어쩌면 이 제안이 마지막으로 그를 만날 기회일지도 모르는 상황.
알자드의 혐의는 이미 벗어나기 힘든 수준이었지만…. 그가 등에 업고 있는 인질의 수가 너무 많아서, 평소 유그드라실의 스타일대로 마법으로 뿅 가서 해치우고 할 수가 없었다.
결국 천후는 최완을 설득하여 이렇게 그를 찾아가고 있었다.
"오늘 우리 목적은 그가 활동을 멈추게 설득하는 거예요."
"말을 들어 먹을 것 같진 않은데."
"말로 하려고 했단 증거는 남겨야죠."
"번거롭군."
"그러니까 유그드라실이 욕먹는 거예요."
"그렇겠지."
한숨을 내쉰 최완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일단 큐브 엘리베이터로 터키 국경 인근에 내린 그들은 미리 약속한 장소에서 차를 타고 이동하고 있었다.
바로 옆 나라에서 엄청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터키 시내는 평화로워 보였다. 적어도 이렇게 겉으로 보기에는.
그러나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차를 타고 완전히 국경 바로 앞까지 다가가자…. 그때부턴 조금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점점 터키군으로 보이는 이들을 볼 수 있었고, 아직 국경에 완전히 다다르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의 신분을 확인하기 위해 차를 한 번씩 멈춰 세우는 것이 보였다. 도보로 이동하는 사람은 뭐 말할 것도 없었다.
"저건 무슨 일이지?"
"난민 상대로 장사하는 사람이나, 난민 중 아직 판매할 물건이 남아있는 사람들이 시내로 들어오기 위해서 검문을 받는 검다. 도시 내로 들어와 잠적하지 않을만한 사람인지 확인하는 거죠."
"……"
터키 정부뿐 아니라, 주변 국가 모두 난민들이 기존 도시에 섞여들어 오기를 원하지 않았다. 난민 보호소를 아주 구석진 곳에 세워놓고, 거기에서 모든 활동이 이뤄지는 것 정도나 간신히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이렇게 도시에 들어오고 나가는 이들은 난민보호소 그룹에서도 일종의 리더를 맡고 있는, 나름대로 신분이 보증된 인원들.
반드시 난민보호소로 돌아올 만한 이들만이 이곳을 통과해 시내에서 뭔가를 할 수 있었다.
그동안 검문을 통과한 차는 다시금 비포장도로를 달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앞 유리 너머로 천후의 눈에 여러 가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백색 칠을 한, 완전히 같은 크기의 작은 건물들… 그리고 그 건물단지로 들어가는 입구에 서 있는 인파들이.
차가 그 앞에 멈추자, 천후는 지체하지 않고 내려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가 찾는 인물은 이미 그의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오랜만이군요. 미스터 영. 이런 곳까지 찾아와주셔서 영광입니다."
눈 아래에 짙은 피로를 담고 있는 장신의 남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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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벗어나고 시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