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하렘-229화 (229/324)

229화

이라크. 독재자 바살라디 크루드는 죽었지만, 그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진 않았다. 그의 사망으로 인하여 지금까지 억지로 봉합되어있었던 상처.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고, 아랍은 지옥이 되었다.

종교의 이름을 딴 테러리스트들이 날뛰고, 신의 이름을 외치며 날뛰는 그것들을 진심으로 동경하는 어린 것들과 어리석은 자들이 이 땅을 찾아와 지옥에 합류한다.

당장 국경 지역까지 이들이 날뛰고 있는데도 주변국은 움직임을 저어했다. 이들의 탄생에 그들이 손을 보탠 것도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며, 굳이 이들에게 국력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서방세계의 움직임은 과거와는 달리 둔했으며, 직접 지상군을 투입한다는 것은 아직 호사가들의 뇌 속에서나 일어나는 허구에 지나지 않았다.

허나 그런 상황이라 한들.

이들에게 대항하는 이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박해받던 이들. 희생당한 이들의 가족들이 모여서 광기에 대항했다. 그리고….

“대장. 오셨습니까?”

“이번 의뢰는 어느 쪽입니까?”

현지 사정에 맞추어 갈색 군복을 입은 남자들이 건물로 들어오는 남자를 보고서 화색을 띠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국을 위시한 서방국가에선 직접 지상군 투입은 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대신 PMC를 고용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이들은 그중 하나였다.

다만 조금 이력이 특이한 점이 있다면…. 이들은 일반적인 PMC와는 다르게 본래 아랍 국적인 인물들이 많다는 것 정도일까?

아무리 PMC나 군인이라 이 바닥에서 몇 년을 굴렀다 해도 시민으로 완전히 위장하려면 위화감이 들기 마련이었지만, 이들은 당장 군복만 벗어도 현지인과 차이점을 구별하기 힘들어 보였다.

“상황은 어떻게 되어가지?”

“이 지역 치안은 어느 정도 안정되었습니다. 다만 우리가 빠지는 순간.”

“쾅~.”

남자들이 낄낄거렸다. 이들의 말은 사실이었다. 일개 PMC 중에선 상당한 규모를 가진 이 ‘데스웨도우’는 장갑차와 헬기 등을 보유한 강력한 집단이었고, 오로지 이들의 존재에 의해 이 근처 반경 10여km의 치안이 유지되고 있었다.

이들은 싸울 때 말고는 직접 나서는 경우가 거의 없었지만, 이들의 존재 그 자체가 억지력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신의 국가 측에서도 굳이 더 건드릴 생각은 않고 있어서, ‘부업’을 하려면 좀 더 나가야 할 겁니다.”

부업. 언제부턴가 ‘데스웨도우’는 국경 지역에서 위협당하는 난민 중 일부를 난민보호소나 다른 곳으로 보내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 부수입이 꽤 짭짤해서…. 그들은 그리 자주 없는 전투 대행 업무보단 이쪽을 좀 더 선호했다.

하지만 그 소리를 들은 대장이란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이제 글렀어. 난민보호소 대가리가 바뀌어서 수지가 안 맞아. 일반인이랑 섞어서 이것저것 해야 돈이 되는데, 마법사 한둘 솎아내자고 이 장비 다 움직이는 건 너무 낭비지.”

“이런. 그럼 어디서 벌어먹는답니까?”

주 수입 가지고는 누구 코에 붙이기도 힘들다. 간단한 사람 팔이로 추가로 돈을 벌어먹을 수 있었던 게 메리트였는데 그게 날아가니 이 동네에 있을 메리트가 확 사라졌다. 하지만 남자는 그 말에 웃으며 그들 앞에 종이 한 장을 내놓았다.

“그래서 다른 돈벌이를 좀 준비해왔지.”

“이건….”

그 내용을 본 남자들은 감탄사를 내질렀다.

“신의 국가 쪽으로 갈아탄 겁니까?”

“돈만 준다면 못할 것도 없지 않나?”

“역시 대장은 말이 통하는군요.”

건물 안에선 커다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종이. 이란 알자드 무헤자딘 사설 난민 보호소…아니 이제는 유그드라실 난민 보호소 타격 의뢰 계약서를 들고 온 남자, 알자드 무자헤딘은 웃었다.

과거. 아즈라엘이 멸망하고 나서 그 군벌은 아랍 각지에 흩어졌다. 그들의 일부를 규합하여 만든 이 ‘데스웨도우’야말로 그가 가진 진정한 힘이었다.

이들 사이에서 불리는 이름은 ‘모리스’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그는 두 개의 삶을 살고 있었다.

“우리 손으로 키워준 곳을 뭉개는 꼴이 되지만. 어쩔 수 없지. 돈이 되니까 말이야.”

수년간 자신이 양복을 입고서 서방 세계를 돌면서 쌓아올린 정수는 단 하루 만에 날아갔다. 그것은 저항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키는 쪽이 반대가 되면 어떨까?

“이건 또 재미있을 것 같군.”

과연 그때 너희는 지킬 수 있을까?

나는 내가 쌓아올린 걸 부수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데…. 너희는 과연 어떨까?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

기본적으로.

일리미네이터가 메인 퀘스트, 파급 이상의 디제스터를 잡을 때는 그 지역에 대피령이 내려진다. 그러면 사람들은 최대한 가까운 쉘터로 대피하고, 그동안 군경이 시간을 끌다가 일리미네이터가 디제스터를 처리한다.

그 덕분에 디제스터가 나타나 대피령이 내려지면 거리는 텅 비어버린다. 적어도 미국의 경우는 그랬다.

“이봐! 저쪽!”

“오케이!”

흑인 남자의 외침에 백인 청년이 건물 사이를 오가며 디제스터를 유인했다.

대피령이 내려졌다곤 해지만 디제스터가 나타난 곳 주변의 사람들이 바로 연기처럼 사라질 수 있는 것은 아니므로, 일리미네이터는 군경과 합을 맞춰서 확실하게 사람들이 대피한 곳에서 디제스터와 싸워야 한다.

그 유인을 위해서 포인트 맨 역할을 맡은 백인이 까딱하면 잡힐만한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디제스터를 유혹하며 도망치고 있었다.

“헤헤. 이거 참 고맙구만!”

다행히도 이번에 나타난 파급 디제스터는 아주 표준적인 녀석이라, 예상외의 행동을 해오지 않았다. 덕분에 그는 쉽게 예정된 장소까지 놈을 끌어들일 수 있었다.

“헤헤. 이게 웬일이람.”

이렇게 운이 좋기도 쉽지 않았기에 백인 남자, 로버트는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미국이 일리미네이터에게 개방적인 곳이라곤 하지만, 그만큼 수도 많고, 경쟁도 심해서 자기 커리어를 쌓으려면 메인 퀘스트를 많이 치렀을수록 좋다. 그런 와중에 이런 일이 걸리다니. 천운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바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그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사람.

“오우. 쉿!”

이미 동료들은 풀 캐스팅을 시작했다. 디제스터도 거의 코앞까지 다가와 자기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상황. 로버트의 머릿속에서 선택지가 놓였다. 버릴 것인가. 지킬 것인가.

“젠장! 레일리! 이동한다! 알아서 조준해서 맞춰!”

“뭐?”

“어린애가 있어!”

더 말할 시간이 없었다. 상황을 파악 못 한 걸까? 이제 1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아이 하나가 길가 한가운데 서서 멍하니 그와 저쪽에서 달려오는 사자를 닮은 디제스터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으아아아!”

소리를 지르며 달린 로버트는 그 소년을 와락 감싸 안고는 달렸다. 도주를 위해서 강화마법을 걸었다지만 주특기가 아니다. 그나마 넷 중 효율이 제일 높아 포인트 맨을 맡았지만, 디제스터를 여유롭게 뿌리칠 정도는 아니었다.

“젠장! 젠장!”

그래도 그는 아이를 버릴 수 없었다. 평생 미합중국의 선량한 국민으로 살아온 그의 가치관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설령 여기서 죽을 위기를 겪고 있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불타올라라…. 죄악의 생명이여.”

“뭣?!”

소년의 짧은 중얼거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은 로버트의 눈이 커졌다. 눈에 광채라곤 없는 소년의 몸에선 은은한 오오라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오. 쉿! 안 돼! 안 돼, 꼬마야!”

로버트는 비명을 내질렀지만, 그것은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했다. 그 직후…. 지면에선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다.

“로버트?!”

막 디제스터에게 화력을 내뿜기 직전이었던 다른 이들은 당황해서 움직임을 머뭇거렸다. 허나 디제스터는 그렇지 않았다.

“아…!”

위기를 느낀 그들의 손에서 각자의 주문이 날아갔다. 하지만 이미 그들을 인지한 디제스터는 그중 몇 개를 피해내 완전히 퇴치하지 못했다.

그것은 곧 반격을 의미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오늘 나타난 디제스터는 파급 치고는 무난하게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 퇴치 직전이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흑인, 레일리는 쇄도해오는 디제스터를 보며 비명을 질렀다.

*

이변을 가장 먼저 알아챈 것은 이그네스였다. 아니, 어쩌면 좀 더 먼저 알아차린 사람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가장 먼저 그것에 대해 입에 올린 것은 그녀였다.

“라즈베리. 무슨 일이 있는 게냐?”

“무슨…. 소리심까? 전 평소와 마찬가지지 말임다.”

그렇게 말하는 라즈베리의 눈에는 생기가 없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답변 자체도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그녀와 시선조차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피곤해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사람을 보는 것 같다고 할까?

라즈베리가 평소에 불면증이 있었긴 하지만 이런 모습을 보인 적은 없었다. 그 점이 염려된 이그네스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다시금 물었다.

“그래 보이지 않으니 묻는 게 아니냐? 도움이 필요하면 주변에 말을 해라.”

이그네스나 두 아이들에게는 요즘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천후가 뭘 하고 다니는지 제대로 알려주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뉴스나 주변 경비 인원이 늘어난 것 등으로 뭔가 흉흉해졌단 것은 감으로 알고 있었던 이그네스는 그녀가 최근 들어 회사에도 잘 나가지 않고 집안에 틀어박힌 것을 걱정하고 있었기에 이렇게 다가와 묻고 있었다.

하지만 라즈베리는 그 손을 힘없이 뿌리치며 답했다.

“필요 없지 말임다. 사람은 혼자 살다 혼자 죽는 검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 게냐!”

“남 신경 쓸 거 없지 말임다. 이그네스는 자기나 챙기십시오. 리미터는 무사합니까?”

“너!”

인상을 찌푸린 이그네스가 목소리를 높이자 라즈베리는 흐릿한 눈으로 그녀를 올려보았다.

아아.

이 아이는 역시 착하다.

일부로 화를 돋워봤는데…. 이 와중에도 대체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 걱정하고 있다. 대놓고 말하진 않지만 말이다.

그녀의 말마따나 모든 걸 털어놓고 싶다. 되는대로 막 말해버리고 싶어.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라즈베리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서 꺼져있는 TV 브라운관을 바라보았다. 본래 거기에 비쳐야 할 것은 초췌해진 자신의 얼굴. 하지만 거기에는 활짝 웃으며 손을 뻗고 있는 녹색 눈동자의 자신이 있었다.

처음에는 두려웠다. 저런 것이 보이는 것이. 하지만…. 이 현상이 지속되자 라즈베리는 한 가지를 깨달았다.

이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눈만이 아니다. 귀에서는 이명이 들린다.

낮은 목소리. 노인의 목소리가 자상하고, 희미한 목소리로 명을 내린다.

아이들아. 아이들아. 자신의 의무를 다하거라.

나의 사랑하는 딸들아.

우리를 위협하는 적을 치거라. 네 눈앞의 적을 치거라.

적.

적. 적. 적!

“하하.”

웃음이 나왔다. 세상에. 왜 지금까지 이걸 몰랐을까. 이걸 왜 여태까지 못 들었는지 이해를 못 할 정도였다.

선지자나 종교 지도자의 복음으로 들리는 이 목소리에 저항하는 것은 너무나 힘들었다. 지금 당장에라도…. ‘파파’가 원하는 바를 이뤄드리고 싶었다.

게다가 이 목소리는…. ‘자매’들 전체가 아니라 그녀 하나에게만 명확하게 전달하는 말도 있었다.

그때 노인이 입에 올리는 이름은 지금 자신이 스스로 밝힌 이름과 또 달랐다.

레졔나.

‘레졔나. 레졔나. 적을 쳐라, 레졔나.’

뇌가…. 녹아간다.

잠시 방심하는 순간 계속 들려오는 이 목소리에 정신이 팔리면 자신이 대체 무슨 짓을 할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럼에도 하고 싶다.

그제야 라즈베리는 알았다.

지금의 자신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당연히 정상이 아니지.’

정상이었다면, 자신이 이런 상황임을 천후에게 당장 가서 알렸으리라. 그랬다면 그는 당연히 그녀를 치료하기 위해서 온 힘을 다했을 테니까.

그러나 그녀는 지금….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전혀.

왜 파파의 말을 듣지 않아야 하지? 그건 이상하잖아?

두 가지 가치가 대립했다.

지금의 삶.

라즈베리 미키스트리로서의 삶.

또 하나는 미지의 삶.

저 거울 건너의 레졔나의 삶.

어느 게 더 중한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후…. 후후….”

어느덧 그녀는 거울 속의 자신과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사람 이름은 변경해두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