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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드하렘-231화 (231/324)

231화

라즈베리의 말에 반응하듯 소녀들은 손을 뻗으며 입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라즈베리는 코웃음을 치면서 손가락을 튕겼다.

따악!

그 손동작 한 번에 그녀의 반경 5m 이내에 있던 모든 소녀들이 실 끊어진 인형처럼 파르르 떨면서 주저앉았다.

“어설프지 말임다!”

그 한마디를 내뱉으며 라즈베리가 정면의 소녀에게 덤벼들었다. 캐스팅을 마치지 못한 소녀의 눈이 아주 약간 커졌다.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접촉. 단번에 똑같이 감전되며 다리가 풀려 쓰러진다.

“위험.”

“제압. 어려움.”

짧은 어휘로 의사소통한 소녀들은 주춤댔다. 그럴 수밖에. 이들은 어디까지나 ‘탄환’, ‘폭탄’으로 만들어진 이들이다.

자신의 몸을 바쳐 한 명이나 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가기 위해 만들어졌지, 상대를 죽이지 않고 제압하는 것까지 능통하진 못하다.

서로가 화력을 제한하고 싸우는 싸움. 그럼 유리한 쪽은 당연히 출력이 일방적으로 높은 쪽이다. 거의 논 캐스팅으로 넓은 범위의 사람을 기절시킬 수 있는 라즈베리가 단연 유리하다.

파지직! 파지직!

그녀들이 갈피를 잡지 못하는 동안에도 라즈베리는 확실하게 여러 명을 기절시켰다. 하지만 그때. 귓속에서 이명이 울린다. 그 내용에 집중한다. 파파의 목소리.

그 내용은 간단했다.

‘상처 입더라도 제압해라.’

소녀들의 오오라가 좀 더 크게 부풀어 올랐다. 지금까진 라즈베리처럼 감전을 시키거나, 질식 등을 노렸다면, 이젠 살인까지 염두에 두고서 공격해올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읏!”

복도 저편에 서 있다고 생각한 소녀 하나가 오오라를 피워 올리며 순식간에 달려들었다.

‘강화계!’

천후를 보고 싸부싸부하며 따라다니긴 했지만, 그렇다고 라즈베리가 정식으로 그에게 근접전 수업을 배운 적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강화계 주특기 마법사와 맞붙는 것은 그리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다. 아무리 랭크 차이가 난다 할지언정.

파지지직! 돌진을 막기 위해 전격을 뿌려보지만, 신체성능 강화의 영향으로 지금까지 써오던 출력의 전격으론 막을 수가 없었다. 그와 동시에 소녀의 손날이 그녀의 어깨를 향해 찔러 들어갔다.

“윽!”

풋! 그러나 몸이 움직이는 것보다 빠르게 라즈베리의 단거리 텔레포트가 발동했다. 1m도 안 되는 이동 거리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손날 찌르기는 피할 수 있었다.

푸콱! 달려들던 기세를 이기지 못한 소녀의 손날은 라즈베리 대신 빌딩 유리창에 꽂혔다. 소화기를 냅다 던져도 쉽게 깨지지 않는 강화유리에 단박에 주먹만 한 구멍이 깔끔하게 뚫렸다.

“자라!”

“하윽!”

그 잠깐의 틈에 한 음절의 주문으로 강화된 전격을 투사하자, 이번에는 버티지 못했는지 소녀 역시 몸을 떨며 쓰러졌다.

그동안….

“아.”

다시금 남아있는 소녀들을 돌아본 라즈베리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몇 초 걸리지도 않았지만 그동안 캐스팅을 끝낸 그녀들의 몸에선 흉흉한 오오라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하나하나의 위력은 그리 크지 않지만….

“윽…!”

지금까진 어떻게든 피해를 키우지 않으려 발버둥 쳤지만 글렀다. 지금 당장 그녀들의 공격이 위나 아래층…. 아니 당장 몸을 돌려 사무실 쪽으로 날아가면 그 즉시 대참사다. 여기서 인명피해라도 막으려면!

라즈베리는 최대한 그녀들에게 멀어지면서 복도 창을 등지고 섰다.

콰콰쾅! 한차례 섬광과 함께 폭음이 터지며 8층 복도 전체가 엉망이 되었다. 라즈베리가 등지고 섰던 유리창들은 전부 다 터져나가고,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며 마구 튀어나왔다. 그 와중에도 소녀들은 인파들을 무시하고서 라즈베리에게 가할 다음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연기에 가려서 그녀가 어떤 상황인지 보이지도 않았지만, 그들끼리 성립하고 있는 링크가 그녀가 생존해있음을 알리고 있었기에.

“역시 판단력이 떨어집니다.”

따악! 하지만 그들이 다시금 공격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소녀들 사이에 갑자기 나타난 라즈베리가 다시 한 번 그녀들을 전부 감전시킨 것이다.

“무영창 텔레포트를 본 시점에서 마구잡이 공격은 해봐야 소용없다고 판단해야 옳지 말입니다.”

잠시 아래층으로 공간이동을 했다가 다시 돌아온 라즈베리는 쓰러진 소녀들을 돌아보았다. 이 자매 커뮤니티는 장점도 있지만 단점도 상당해서…. 이 어린 자매들의 경우 자체적인 판단력이 없었다.

몸에 불붙이고 달려드는 게 아니라, 제압만을 목적으로 움직이기엔 너무 생각이 없달까?

“후우우….”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마법을 사용하자 격한 두통이 몰려온다.

그래도 그녀는 생각했다.

해냈다.

의문이 따라온다.

무엇을?

그것은……. 답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주변에 쓰러진 소녀들을 돌아보았다. 감전으로 기절하긴 했지만 죽은 아이는 없다. 이거라면 고칠 수 있겠지.

다행이다. 다행이야. 자원을 낭비하면 안 되지. 고쳐 쓸 수 있는 건 고쳐 써야―

“아니. 아니야.”

그런 게 아니다. 이 정도의 소란이 났으니 이제 아무리 바빠도 유그드라실이 움직이리라. 그들에게 가면 이들 모두 구원받을 수 있으리라. 그것이 다행이야.

어라.

그런데 왜 유그드라실에 올라가는 게 구원이지?

“후. 후후후.”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때. 앞쪽에 쓰러져있던 소녀가…. 간신히 고개를 끌어올려 목소리를 냈다.

“레졔나.”

그것은 어린 여자아이의 성대에서 나올 목소리가 아니었다. 굵은,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

파파의 목소리.

“파파….”

“마음이 망가진 모양이구나. 아무래도 내가 있는 곳으로 와야겠다.”

그런가.

내 마음이 망가진 건가. 파파가 그렇다면 맞는 것이리라. 당연하잖아. 거부감이 들지 않는걸.

아아. 만나러 가자.

파파에게….

“아. 아아….”

그렇게 생각했는데도.

레졔나는 자기도 모르게…. 뻥 뚫려버린 건물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눈을 두는 곳은 바로 근처의 DS본사. 그러다 다시 한 번 고개가 돌아간다.

요 몇 달을 살았던 곳.

녹색 안광이 흘러나오던 눈동자가 아주 잠깐. 진정되며 갈색으로 돌아왔다.

얼음처럼 굳어버린 얼굴은 천천히 풀리며, 단 한 번. 입가가 구부러지며 미소란 것을 지어냈다.

그 입가가 움직였다.

“…싸부. 즐거웠어. 안녕. 나의 히어로.”

화악.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이 잦아들었을 때. 그곳에 라즈베리는 없었다.

그날.

유그드라실은 DS 본사 건물 인근 빌딩에서 엘모세와트의 처리를 받은 마법사들이 부상을 당한 채 쓰러져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

“라즈베리 언니 안 오네.”

“오늘 야근인가아?”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아이들은 알자드 사건 이후 집에서만 지내던 라즈베리가 없자 의아해 했다.

게다가 밤이 되어 가는데도 돌아오지 않으니 더욱 그랬다. 라즈베리가 종종 일본에 가서 자리를 비울 때도 있었지만, 그땐 보통 천후와 함께 가거나 어디 간다고 말 정돈 남겨두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런 전조도 없이 떠나서는 밤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아이들은 톡도 보내보고, 전화도 해봤지만 그녀가 답해오지 않자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도대체 어떻게 되어가는 거냐?’

걱정 정도가 아닌 사람이 여기에 있었다.

아침. 이그네스는 라즈베리에게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만약 오늘 제가 돌아오지 않으면 당분간 몸조심하세요. 경비가 아무리 늘어봐야 마법사한텐 안됨다.”

“무슨 소리냐?”

뜬금없는 말에 깜짝 놀라 반문하자 라즈베리는 그저 웃었다. 웃으며 자기 말만을 했다.

“어른들이 바빠서 돌아다니는 이상, 큰일이 생기면 믿을 사람은 이그네스 뿐입니다. 잘 대처해줄 거라 믿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소리냐고 묻지 않느냐!”

소리를 질러봤지만, 그 말을 끝으로 라즈베리는 그대로 집을 나서버렸다. 놀라서 따라 나가보았지만, 그녀는 이미 사라져있었다.

항상 천후의 가족을 쫓아다니던 경호원들은 그녀가 텔레포트로 사라지자 쉽게 그녀를 찾아내지 못했다.

마법사가 사사로이 마법을 사용하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텔레포트는 상당히 눈에 띄는 불법 마법 사용. 이전부터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던 이그네스는 곧장 어른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 뒤로는 라즈베리를 찾기 위한 인력이 더 투입되었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안심하고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아이들이 눈치 못 채게 몇 번이나 확인했는데도 그랬다.

“이…멍청이가.”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라즈베리를 지켜보는 것이 이그네스가 맡은 역할이었다. 그녀의 사소한 행동들 모두 상세하게 이미 천후나 희주 등에게 말해둔 상태였다. 그렇지만 이번 행동은 너무나 갑작스러워서 도저히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가 한국에 있었다면 그나마 나았을 텐데.”

그가 있었다면 확실히 라즈베리의 일탈을 막을 수 있었을 테지만, 오늘 그는 없었다. 차선책인 이강호 역시 오늘은 천후가 일본으로 향한 관계로 DS 본사에서 디제스터가 나타났을 때를 대비해 대기상태였다.

덕분에 그녀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렇게 집에서 연락을 기다리며 마음을 졸이는 것밖에는 없었다. 그것이 너무나 불합리해서 화가 날 지경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기다리던 그녀에게 연락이 왔다.

라즈베리가 아니라. 천후로부터.

<이그네스.>

“…….”

그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이그네스는 일이 틀어졌음을 깨달았다.

이것은 지금까지 걱정한 이그네스에게 경과를 보고하기 위한 전화였으니까….

이그네스는 발밑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다.

*

사건 연락을 가장 먼저 받은 것은 영천후였다. 라즈베리가 무단으로 텔레포트를 사용했단 소식을 들은 그 시점에서 천후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사람으로 가득 찬 도시가 서울이다. 핸드폰을 버리고 잠적해버리면 라즈베리의 외견이 그나마 눈에 띈다지만 그래도 찾기 힘들어진다. 게다가 한 번 마법을 사용하기 시작한 이상, 투명화를 할지, 하늘을 날지, 연속 텔레포트를 할지 알게 뭔가? 어떤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더라도 잡아내기 힘든 게 당연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라즈베리는 이후 한 번 포착되었다. 저택에서 빠져나온 그녀가 DS 본사 주변에서 목격된 것이다. 천후는 당장 사람을 붙였다. 그리고 그다음부터 들려온 보고는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대로 지나가던 행인을 습격하더니, 다시금 텔레포트 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그 시점에서 천후의 참을성은 한계에 다다랐다.

“유그드라실에 큐브 엘리베이터 사용을 요청합니다.”

동해를 단번에 건널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텔레포터는 DS에도 없었다. 아직 일본 정부와 텔레포테이션 시스템 사용 협의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배와 배. 혹은 섬과 섬을 통해 중계소를 만들어 연속 텔레포트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가장 빨리 한국에 귀국할 수단은 큐브 엘리베이터였다.

본디 유그드라실은 이그네스 사태 이후부터 천후가 사적으로 큐브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려 드는 걸 견제해왔지만, 이번 건에 한해서는 빠르게 허가를 내렸다.

라즈베리 미키스트리는 A랭크 일리미네이터. 그녀가 민간인을 습격하고 다닌다고 한다면 서울 시내를 쑥대밭으로 만들고도 남음이 있었고, 이걸 사적사용이랍시고 금하기엔 너무 큰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덕분에 그는 발목을 잡는 한, 일 정치인들의 손길을 격하게 뿌리치고 빠르게 귀국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게… 대체….”

DS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빌딩의 한 층 옆면이 시원하게 날아가 버린 현장에 도착한 천후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했던 유그드라실 측. 특히 한국 지부장 최완은 그가 도착하자 어깨를 짚어왔다.

“천후야.”

“무슨 일이 일어난 거예요?”

“진정해라.”

“어떻게 진정하란 거야!”

“…….”

그의 눈에 핏발이 선 것을 본 최완은 입을 다물었다. 여기선 그의 말이 타당하다. 진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라즈베리가 습격한 아이들은 전부 엘모세와트의 처리를 받은 마법사들이었다. 아마도 연관관계가 있었겠지.”

“그 라즈베리는 어디에 있냐고!”

“현장에 도착했을 때부터 사라지고 없었다. 마법의 흔적을 찾았지만, 어느 시점에서 일반 탑승물을 이용했는지 더 연결되지 않았다. 일단 확실한 건 라즈베리가 여기에서 교전을 벌였다는 그 자체지. 추정으로는 아마 그녀는―”

옆에서 최완이 뭐라고 말을 했지만 천후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혼란스러웠다. 모든 게.

그녀와의 이별이 이렇게 갑작스러운 것이 된 것이.

천후에겐 오늘 제압당한 아이들이 마치 라즈베리가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선물처럼 느껴졌다.

물론. 그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였다.

천후의 목에서 쇳소리가 나왔다.

“어딜 간 거니. 응? 라즈베리.”

답을 해줄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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