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화
“잠깐만, 천후야! 정말 무시할 생각이야?”
인천 국제공항. 영국으로 향하는 출입국 게이트 앞에 선 천후는 셀레나가 물어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런…. 이미 다른 정규공격대는 모두 유그드라실에 모여있다고 들었는데. 이럼 입지가….”
“입지고 뭐고. 웃기지 말라 그래. 지들 마음대로 디제스터 판정을 내려놓고 이제 와서 나보고 탱 서라고? 그것도 이그네스를 상대하기 위해서?”
“으음….”
그 말에 셀레나는 입을 다물었다. 천후의 말대로 유그드라실은 일방적으로 이그네스에게 천급 디제스터 판정을 내려놓고서는 일리미네이터들에게 잡아달라는 식으로 행동하고 있었다. 일단 정규 공격대와 노블레스 클럽도 그것 때문에 마지못해 모여있는 상황.
“이딴 식이면 나도 해달라는 걸 다 들어줄 순 없잖아. 베풀어준 건 생각도 안 하는데.”
“그, 그래도….”
“자기들이 제멋대로 굴었으면 똑같이 돌아올 거란 걸 깨닫게 해줘야지. 언제까지고 질질 끌려갈 순 없어.”
천후의 태도는 강경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디제스터는 퇴치해야 할 인류의 적. 하지만 매지션 레이지를 일으킨 마법사는 리미터를 통해 관리하는 경우도 있었다.
전자는 필사를 의미하고, 후자는 살 수 있는 가망성을 주니 당연히 타협할 수 없는 것이다.
“일단 비행기야 바로 탑승하면 되지만, 얼마나 오랫동안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어. 이그네스는 벌써 뉴기니에 닿기 직전이라.”
지금까지는 망망대해였다지만 육지를 만나면 어떤 태도를 보일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천후는 고개를 저었다.
“이그네스는 그렇게 쉽게 공격성을 드러내지 않을 거야. 영국에서도 그랬고, 얼마 전 마법을 사용했을 때도 서울 한복판에서 떠 있었으면서도 인명피해를 내진 않았어. 이제 와서 갑자기 선공을 할 거란 생각은 안 들어. 오히려 함부로 접촉하는 게 더 위험할 거야.”
“그건 어디까지나 추측이잖아.”
“아, 됐다고! 상황 급해지면 알아서 내 앞에 큐브 엘리베이터든 텔레포터든 대령하겠지! 아쉬운 놈들이 움직이라고 해! 난 저놈들이랑 더 일 못 하겠으니까!”
“으, 응.”
탁. 셀레나가 들고 있는 비행기 티켓을 거칠게 낚아챈 천후는 그러다 셀레나가 겁먹은 듯이 움츠러들어 있자 한숨을 내쉬면서 그녀를 끌어안았다.
“후. 미안하다. 네가 잘못한 게 아닌데. 너한테 성질 낼 일이 아니지.”
“…나라고 네 마음을 모르는 게 아니라구, 바보야.”
그가 얼마만큼이나 큰 배신감을 느끼고 있을지, 그녀라고 짐작 못 할 바가 아니었다. 모든 결정은 천후가 내렸지만, 그 후에 있는 세세한 지시는 전부 그녀의 몫이었기에 그녀는 그 누구보다도 그의 마음에 공감했다.
그렇지만 공감하는 건 공감하는 거고…. 현실적인 어려움이 그의 발목을 잡는다.
당장 유그드라실은 ‘아이고오~. 세계가 멸망하게 생겼다아’ 거리면서 발작을 하며 공격대를 모았고, 다른 이들은 그 소환에 응했다.
이미 이 콜링은 전 세계의 의사 그 자체가 되어있는지라, 이에 반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쌓아온 신뢰를 모두 집어 던지는 수준에 가까웠다.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 수습할 수가 없는 일이랄까? 하지만 천후는 천천히 그녀의 머리를 쓸어 넘겨주며 말했다.
“미안해. 진짜로. 일단 너무 걱정하지 마. 나도 생각 없이 움직이는 건 아니니까. 일단 나도 사람은 보내놨어.”
“사람?”
“그래. 사람.”
그렇게 말한 천후는 하늘 위를 올려다보았다. 아마 지금쯤 도착했을 터였다.
자기 뜻을 대신 전해줄 사람들이.
*
구체 형태의 유그드라실 하단에는 많은 인원이 대기할 수 있는 홀이 있었다.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는 아메리칸 리버티, 머니 크래프트, 컨퀘스터, 노블레스 클럽 대부분의 A랭크 일리미네이터, 그 외 각 국가에서 소집된 고 랭크 일리미네이터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홀의 벽면에는 유그드라실 위성으로 촬영한 영상이 비치고 있었는데, 지금은 당연히 ‘이그네스 엠프레스’가 남하하고 있는 장면을 줄곧 보여주고 있었다.
“저게 천급 디제스터라니.”
“생각보다 소형인데?”
“영국에서 나타났던 이그네스도 소형 디제스터 였으니까. 그 상위 개체라고 하니.”
일리미네이터들은 그 외형을 확인하고 웅성거렸다. 주변 수백m를 불꽃으로 뒤덮고 있었지만, 그 본체는 아주 작았다.
“안소니. 저건 역시….”
“맞는 것 같군. 이게 그가 나타나지 않고 있는 이유인가.”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이그네스의 정체를 알고 있는 정규 클랜 마스터 급의 표정은 더더욱 좋지 않았다.
그들 사이에선 몇 가지 정보 공유가 되고 있었는데, 이그네스의 정체 역시 그중 하나였다.
게다가 잠깐이나마 별장에서 만나 시간을 보냈던 사이이기도 하다. 이런 식의 은폐가 작용하는 현장을 직접 보게 된 그들의 마음이라고 절대 편치 않았다.
“영국 레이드 당시 상황을 생각해보자면, 능력적인 면으론 천급 판정을 내릴만합니다.”
“그렇지. 거기에 진리 구현자 특성이 제한적이 되었다면 더더욱.”
“하지만…. 그렇다고 디제스터로 발표를 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마법사라고 밝힐 수 없었던 거겠지. 지난 10년이 수포로 돌릴 순 없는 일이니.”
진정 강대한 마법사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이그네스의 힘. 그녀를 마법사라 밝힌다면 그 공포가 증대되리라.
특히 지금처럼 마법사에 대한 여론이 안 좋은 상태에서는 더더욱. 안소니 크라우저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중요한 건 그녀가 저렇게 힘을 발휘하면서 남하하고 있다는 그 자체지. 막지 못하면 어떤 재앙이 일어날지 모르네. 퇴치를 하건, 아니면 다른 수를 쓰건 최대한 빠르게 행동할 필요가 있어.”
“그 말씀이 맞습니다.”
개인적인 정이 어찌 없을까? 둘이 별장에서 보았던 이그네스는 프리니 루셀과 비슷한 나이의 어린아이였다. 그런데 그걸 주살해야 하는 입장이 되었으니.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놔둘 수도 없다. 이전처럼 밖으로 빠져나올 수 없는 던전이라도 생성되어있으면 모를까, 그게 아닌 이상 그녀가 손을 한번 뻗는 순간 그때마다 세상이 잿더미로 변할 것이다.
“그렇지만 어떤 방식으로 트라이를 하던 그가 있어야 하는데…. 아예 모습을 보이지 않을 줄이야.”
안소니는 약간 실망감을 드러냈다. 그의 심정은 이해해줄 수 있었지만, 이렇게 모든 이들이 모인 상황에서 소집에 응하지 않는다면 그것만으로도 그는 세계의 적이 될 것이다. 기껏 얻은 텔레포테이션 허가도 다시 거둬갈 가능성이 높았다.
바로 그때였다.
“조금 늦었습니다.”
홀 한편, 큐브 엘리베이터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내렸다. DS 일리미네이터들이었다.
“오. 왔는가?”
“아니…. 아닌 것 같습니다. 그는 없군요.”
인파 사이에서 그들을 살펴본 패트릭은 그 안에서 천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동안 두 명의 남자가 인파를 헤치고 앞으로 걸어 나왔다.
레이나드와 정태원, 두 공격 대장이었다.
“오. 저 사람들은?”
“DS 공격대장들이다!”
일리미네이터 사이에선 탄성이 터져 나왔다.
DS는 영천후가 있음으로써 완성되지만, 다른 일리미네이터들은 그 완성형보다는 미완성된 형태에 더 주목했다.
DS는 영천후가 없어도 강하다. 천후가 대한민국 내의 모든 일리미네이터를 순삭하고 다닌다면, DS 일리미네이터들은 외국에서 나타나는 경급 디제스터를 사냥하고 다닌다.
이때는 보통 예상 난이도에 따라서 이강호, 라즈베리 등의 투입을 조절하곤 했는데, 보통 이들이 투입되지 않아도 쉽게 퇴치를 했고, 그 배틀 데이터야말로 다른 일리미네이터들에겐 교본 그 자체였다.
그리고 앞에 선 두 사람은 그 교범을 만든 사람들이었으니, 그들의 랭크가 C랭크인 건 아무런 흠이 될 수 없었다.
“윽? 우리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은데요?”
“적을 줄 알았냐?”
쓰게 웃은 레이나드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 수만 해도 수백이 넘는다. 지휘할 땐 몰라도 이런 자리에서 앞에 서려니 아무리 그라도 긴장됐다. 그렇지만 지금은 앞뒤 가릴 때가 아니었다.
‘동생 놈 밥줄 끊기게 할 순 없지.’
화가 머리끝까지 난 녀석은 자기 할 일 하겠다고 영국으로 날아간 상황. 그러면서도 천후는 둘에게 이 상황을 어떻게든 수습해달라고 부탁해왔다. 그 방법론을 제시하며.
솔직히 그걸 자신들이 수행하는 것은 너무 부담되는 일이었지만…그래도 해내야 했다.
그럴 필요가 있었다.
레이나드는 선글라스를 고쳐 썼다.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잠시 드래곤 슬레이어 영천후를 대신하여 자리에 선 레이나드, 그리고 정태원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저희는 DS의 전언을 가지고 왔습니다.”
“전언이라고?”
안소니의 물음에 정태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 어떤 내용인가?”
이 자리에서 안소니는 연배와 위계 양쪽 모두 최고위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물음에 모든 이들이 집중했다.
“윽….”
그 시선을 받은 태원은 잠시 흠칫했지만, 곧 레이나드가 등을 두드리자 침을 꿀꺽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그 내용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지금 당장 ‘이그네스 엠프레스’를 상대했다간 전멸이 예상되니, 조건이 충족되기 전까진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뭐라고?”
일리미네이터들이 웅성댔다.
이 자리에 모인 것은 지구 전체의 B 랭크 이상 일리미네이터 50% 이상이었다. 그런데 이 전력을 앞에 두고 이렇게 쉽게 전멸을 논하다니?
“말도 안 됩니다! 아무리 천급 디제스터라지만!”
군중들 사이에서 반박의 말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 순간. 태원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그럼 답변해보시죠. 어떻게 싸울 겁니까?”
“그, 그야 초화력으로….”
“영국에서 이그네스 레이드 때만 하더라도 이미 광역 범위가 너무 넓어서 레이드 시간을 5분 이내로 잡았었습니다. 그것도 이그네스가 비선공 성향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언제든지 던전 내부를 불바다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단언컨대 이그네스 엠프레스의 광역 공격력은 우리의 방어력을 월등히 넘어섭니다.
이 부분을 커버하려면 결국 레이드 인원을 최정예화하고 대부분은 방어담당으로 돌려야 하지만…. 이런저런 계산을 해봤는데 무슨 짓을 해도 버틸 수 없더군요. 비행에 한정적인 공간이동에 압도적인 광역기까지….
우리의 머릿수도 중요하지만, 그보단 이그네스의 행동반경을 어느 정도 제한하지 않으면 레이드는 불가능합니다.”
그의 말에 군중들은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둘러둘러 말했는데, 이걸 노골적으로 해석하면 사람이 아무리 많아 봐야 쭉정이들은 이그네스가 손 한번 휘두르면 다 시체가 된단 소리나 똑같았으니 말이다.
일리미네이터의 마법이 이그네스에게 유의미한 피해를 줄 수 있을 정도의 거리는 이미 이그네스의 광역기 사거리 안. 초 화력을 발휘하기도 전에 불길에 죄다 타 죽어버리리라.
여기에서 혹여나 카이팅까지 시도한다면…. 그건 사람 머릿수가 문제가 아니었다.
그때. 그들의 이야기를 한참 듣고 있던 안소니가 물었다.
“의견은 잘 들었네. 그 부분은 우리도 생각하고 있던 바지. 사실 우리 모두 방어엔 그렇게 능통하지 못하기도 하고….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를 영영 놔둘 수도 없잖은가? 이대로는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겠는데.”
“네. 하지만 그렇다고 자살시도를 할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그보다는…. 좀 더 확실한 수단을 쓰자는 것이 사장님의 의견이었습니다.”
“확실한 수단? 그게 뭐지?”
“네. 해법은 두 가지입니다. 그리고 둘 다. 아. 참고로. 이 말 우리 사장님이 참 좋아하는 말인데. 각오가 필요한 일이죠. 누군가들에겐.”
안소니의 물음에 대답한 정태원은 그러다…. 저편에서 남의 일처럼 관망하고 있는 이들.
“해법 그 첫 번째는…. 솔직히 이 상황. 방출 마법 특화의 일리미네이터만으론 해결할 수 없습니다. DS에서는 유그드라실 마법사들의 참전을 요구하는 바입니다.”
유그드라실 마법사들을 지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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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 손가락 빨면서 구경만 할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