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화
<레드 쥬얼>
“뭐, 뭐라고요?”
지목당한 유그드라실 마법사들은 당황해서 뭐라 말하려 했다. 물론 태원은 그들이 반박할 시간 따위 줄 생각이 없었다.
“일리미네이터가 사용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방어주문조차 이그네스의 공격을 제대로 막아내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이동 범위를 막을 재주는 더더욱 없고요. 이 상황에서까지 손 놓고 있을 생각입니까?”
“그건!”
“세계가 위험해서 우리를 불러 모았다면 당신들도 힘을 보태세요. 큐브 엘리베이터 사용 허가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게다가 사장님께선 여러분들이 이그네스의 행동반경을 제한할 수 있는 확실한 수단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셨죠.”
“음? 그게 정말인가?”
안소니의 물음에 레이나드가 대답했다.
“네. 일정 인원수가 모여서 결계를 형성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잠깐! 그, 그 정보는…!”
유그드라실 마법사들은 당황했다. 유그드라실의 결계 전개, 기억 왜곡 등은 지금까지 철저하게 비밀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천후 역시 이전 뭄바이에서 돌아온 이후 겪었던 일이 아니었으면 그것을 떠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잘도 유그드라실의 활동방식을 알고 있군.”
“사장님은 유그드라실에서 10년을 살았는걸요.”
그 말에 일리미네이터들은 다들 이해했다. 하지만 유그드라실 마법사들은 얼굴이 똥색으로 변했다. 그들의 여력이나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죽어도 밝히기 싫었던 것이 그들의 마음이었으니까.
“그리고 이건 곧 유그드라실에 방어, 보조마법 주특기 마법사가 그만큼 많다는 뜻이죠. 그러니 우리 DS는 유그드라실 8천 마법사의 참가를 요청합니다. 지구의 평화를 위해서….”
그 말을 끝으로 레이나드는 선글라스를 고쳐 썼다. 어느새 현장 분위기는 그게 당연한 것 같다는 것으로 변해있었다.
그들 말마따나 전 인류의 위기라면 이제 언제까지고 이런 거대 요새와 수천 마법사를 데리고 택시 놀음이나 할 수는 없는 법이다.
우리에게 희생을 강요할 거면 너희도 피를 흘려라. 그 논리에 유그드라실은 쉽게 대응하지 못했다.
“자, 잠시. 이 자리에는 발언에 책임질 수 있는 분이 없습니다. 우리가 결정을 내릴 시간을 주시지요.”
그나마 간신히 끄집어낸 말이 이것이었다. 그들의 표정엔 낭패와 당황이 섞여 있었다. 마법사나 일리미네이터가 자신들에게 반발하거나 추가적인 요구를 할 거란 생각을 전혀 해본 적이 없는 것 같은 모습이랄까?
“네. 그럼 빨리 부탁하지요. 지금 이 시각에도 ‘이그네스’는 남하하고 있으니까.”
태원의 말에 유그드라실 마법사들은 자기들끼리 모이더니 곧 홀에서 모습을 감췄다. 그는 그 모습을 보면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로 시간은 벌었다.
이건 유그드라실 입장에서도 사상 초유의 사태. 그 판단이 빠르게 내려질 리가 없었다.
그때. 이야기를 침착하게 되짚고 있던 안소니가 물었다.
“그러고 보니 해법이 두 가지라고 했던 것 같은데. 나머지 하나는 뭐지?”
“네? 아아….”
그러고 보니 그렇게 말했던가? 정태원은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사장님이 바로 그 두 번째 해법을 찾으러 가셨죠.”
*
영국에서 영천후는 여전히 국빈이었다. 그의 방영은 언제나 환영받았기에, 그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미리 늘어서 있던 의장대가 트럼펫을 불어대며 그를 맞이했다.
평소라면 이런 의례적인 행사에도 어느 정도 어울려 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천후는 그럴 정신이 없었다. 모든 행동이 한시가 급하다.
그는 계단을 나는 듯이 뛰어 내려와 카펫 저편에서 환대하고 있는 로이드 영국 총리에게 한달음에 달려갔다.
“와우. 멋진 퍼포먼스군요.”
로이드 쉘든 영국 총리는 그게 일종의 팬 서비스인가 싶어서는 박수를 쳤다. 하지만 천후는 그 반응에 전혀 어울리지 못하고, 그저 여유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도착하자마자 죄송합니다만, 여왕님을 알현할 수 있게끔 해주시겠습니까?”
“음? 네에. 말씀드려보지요. 급한 상황입니까?”
“네. ‘이그네스 엠프레스’ 사태는 들으셨을 겁니다. 저는 어차피 거기에서도 탱커를 맡게 될 게 분명하니, 시간을 길게 지체하기 힘듭니다.”
“아아. 확실히 그렇겠지요.”
로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급 디제스터 이그네스 엠프레스의 존재는 그 역시 들어서 알고 있었다. 영국 일리미네이터 중 일부 역시 유그드라실에 올라가 있을 정도였으니까.
전 인류의 위기 운운하는 일에서 영천후가 빠진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그런데 상황은 지금도 시시각각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는 가운데 그가 이곳에 왔다는 것은….
“이그네스 관련으로 여쭤볼게 있나보군요.”
“네. 짐작하고 계셨습니까?”
“말씀을 아끼고 있는 것 같단 생각은 들었습니다.”
로이드와 엘리제 3세는 총리와 국왕의 입장이긴 하지만, 사적인 영역으로 가면 긴 시간 동안 친밀하게 지내온 관계였다. 그녀의 태도가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는 것 정도는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럼 차에 타시지요. 바로 알현할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예를 표한 천후는 대기하고 있던 차에 몸을 구겨 넣었다.
본래 영국 여왕인 엘리제 3세를 만나는 것은 꽤 복잡한 절차가 필요하다. 그러나 상황이 상황인 만큼, 선 접견 후 절차를 밟기로 한 쉘든은 바로 곧장 차를 버킹엄궁으로 향하게 했다.
“그나저나 이런 상황에서 비행기에 차량이라. 이그네스에 관련된 일이면 큐브 엘리베에터가 동원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들은 그녀를 인간으로 보고 있지 않으니, 지금 제가 이곳에 오는 건도 디제스터와는 상관없는 개인적인 이동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제정신이 아니군요.”
로이드는 어처구니가 없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겨우 그딴 것에 얽혀서 이 1분 1초가 급한 상황에서 시간을 지체시키다니.
‘이거 곧 일이 터지겠군.’
천급 디제스터 등장으로 이미 일은 터졌지만, 로이드가 생각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유그드라실과 영천후의 갈등이었다.
지금이야 급해지면 서로 힘도 빌려주고, 함께 싸우고 하겠지만 걱정되는 모든 사태가 한 번 싹 해결되고 난 이후에는 과연 어떤 관계가 될지.
보통 이렇게까지 극렬하면 서로 갈라지게 된다. 그때가 오면….
‘어느 편에 서야 할지 생각해둬야겠군.’
로이드의 머릿속에선 저울에 유그드라실과 영천후라는 추가 무게 싸움을 반복하는 그림이 떠올랐다. 거기에서 어느 쪽에 영국이란 추를 올릴지 그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러는 동안 차는 버킹엄 궁에 도착했다.
“엘리제 3세께선 당신의 알현을 환영한다고 하셨습니다. 시간이 없으니 의례적인 행사는 모두 생략하겠다 하시는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녀의 움직임은 하나하나가 영국이란 나라의 광고 그 자체다. 그녀의 모든 행동엔 의미가 있어야 했고, 허례와 허식 역시 모두 영국 입장에선 가치 있는 것들이었다. 그것을 치워주는 것 자체가 얼마나 힘을 써주는 것인지 짐작하는지라 천후는 진정으로 감동했다.
그리하여 천후는 이전, 이그네스와 함께 들어갔었던 알현실에서 엘리제 3세를 만날 수 있었다. 최대한 예를 갖춰 인사를 한 천후는 그 후 고개를 숙여 보였다.
“죄송합니다. 제 능력이 부족하여 이그네스가 다시 저런 모습이 되어버렸습니다.”
“아니오. 그게 왜 당신의 잘못이란 말입니까? 자택이 습격당했었다 들었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무사한지요?”
“네. 다행히도….”
“정말 천만다행이로군요. 최근 반 마법사 분위기는 너무 거세서 두렵습니다.”
그녀는 직접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 꿇은 천후를 일으켜 세웠다. 그제야 천후는 그녀의 권유에 따라서 자리에 앉았다.
“사실…. 오늘 이곳에 찾아온 것은 여왕님께 여쭙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인지요?”
천후는 품에서 조심스레 이그네스가 남기고 간 루비를 꺼냈다. 그것을 본 엘리제 3세의 눈동자가 아주 잠깐 흔들렸다. 그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다른 것이 아니라 이 보석에 대한 것입니다. 이 루비는 대체 뭡니까?”
“…무슨 뜻이오?”
“이미 짐작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까?”
“…….”
엘리제 3세는 천후의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했다.
“이그네스의 리미터가 풀렸을 당시, 그녀는 이것을 착용하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반지 부분이나 체인 부분은 완전히 녹아버렸죠. 그런데 이 루비는 그녀의 열을 직접 받았음에도 아무런 변형도 일어나지 않고 무사한 상태입니다. 물리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후우….”
천후의 말에 엘리제 3세는 잠시 난색을 표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잠시. 곧 다시 평정을 되찾은 그녀는 작게 숨을 내쉬며 답했다.
“지금부터 제가 할 말은 본디…. 무덤까지 가지고 가기로 한 내용이란 것을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
“원래는 결코 입에 담아서는 안 되지만, 상황이 급박하니 오늘 한 번. 제가 감히 왕가의 명예를 더럽히면서 입을 열겠습니다.”
“폐, 폐하.”
당초 예상한 것보다 심각한 이야기가 나올 분위기이자, 로이드는 긴장하며 그녀를 말려야 하는가 고민했다. 왕의 권력을 모두 잃은 지금, 명예란 그들의 생명인데 그것에 손상이 갈 이야기라면 아무리 DS의 요청에 의한 것이라도 말려야 했다.
그렇지만 그가 움직이는 것보다, 엘리제 3세가 입을 여는 속도가 더 빨랐다.
“그 루비 반지는 이그네스…. 그분의 탄생석으로 만든 일종의 부적이었습니다. 본래 예정대로였다면, 그녀의 마법을 완전히 막아줬어야 할 것입니다.”
“!”
천후의 눈이 커졌다. 로이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제가 어렸던 시절에는…. 마법사는 신화 속의 존재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종종 있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현실에서는 도저히 만나볼 수 없는 이들이었지요. 그렇지만…. 실제로 그런 사람들은 존재했답니다. ‘그분’처럼.”
엘리제 3세는 먼 곳을 바라보는 것처럼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것은 마치 먼 먼.
그녀의 소녀적 과거를 떠올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분을 날 때부터 힘의 통제가 완벽하지 않아서…. 부군께선 그분을 탑에 유폐하시고 그 존재를 숨겼습니다. 그렇기에 그분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지요. 하지만 그러던 어느 날. 런던 시내에서 큰 화재가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은 탑에서 불꽃이 새어 나왔었다고 증언했지요.”
“…….”
“지금처럼 유그드라실이 있는 것도 아닌 상황. 그분을 어찌할 방법은 없었습니다. 그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들?”
“당시에는 다섯 현자로 불리던 자들이었습니다. 요즘 말론…. SA 랭크 마법사들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SA 랭크 마법사가 나타났었단 말입니까?”
“네. 그리고 그들이 나타났던 것은 그게 두 번째였습니다.”
“두 번째?”
“첫 번째는 그분이 태어났을 때. 이 루비를 부군께 전해주시면서 평생 품고 다니게 하면 성인이 될때쯤엔 제어가 될 거라고 했었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나타났을 때. 그들은 말을 바꾸었죠.”
아직도 기억한다. 20세기 초기에도 이미 시대착오적이었던, 갈색 로브에 지팡이를 들었던 이들이 꺼냈던 말을.
“만들어냈던 물건이 버티기 전에 너무 강대해졌으니, 그녀를 봉인하겠다고.”
어린 소녀였던 자신이 그 말에 거부해보려고 안간힘을 쓰며 소리쳤던 것 역시.
“슬프게도…. 부군께선 그분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그분께선 흔쾌히 그분의 운명을 그들에게 넘겨버렸지요.”
“설마….”
“네.”
그 뒤는 일사천리였다.
죽은 것으로 치고자 한 ‘그녀’는 다섯 현자에 의해 왕가의 묘역에.
웨스트 민스터 사원에.
세상에 이름 하나 남기지 못하고―
“그분…. 이그네스는 SA 랭크 마법사들에게 봉인되었습니다. ‘유품’으로. 이 보석 하나만을 남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