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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드하렘-242화 (242/324)

242화

"만들 수 있다고요?"

"네. 편법이긴 합니다만."

고인규는 손안에 든 루비를 이리저리 굴리면서 답했다. 그 대답에 천후의 얼굴엔 화색이 돌다가, 곧 침울해졌다.

"그렇지만 형…. 강호 선배의 진리구현자 특성도 가라앉히지 못했어요. 아마 형이 처음 상정했던 정도론 막지 못하지 않을까요?"

"하?"

그 말에 인규는 인상을 팍 찌푸렸다. 평소에는 말로만 미운 소리를 했지만, 이번엔 정말 엄청나게 짜증이 났는지 살기가 느껴질 지경이었다.

"지금 설마 그 생각은 너 혼자 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돌아버리겠네요, 이거. 실력을 의심하겠다는 건데-"

"아니야. 아니에요, 형. 잘못했습니다."

평소엔 온화해 보이지만, 이 고인규라는 인간은 화가 나면 막가는 성향이 있었다. 지금 같은 경우도 화가 나면 그냥 모든 걸 다 집어치워 버릴 가능성이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절대 다시 일을 시킬 수 없다.

그런 성깔머리를 잘 아는 천후는 바로 그의 옷자락을 잡으며 그를 진정시켰다.

"후…. 좋아요. 이번만은 넘어가 주죠. 절 너무 자극하지 마요."

"네네.“

성격 더러운 거 티내긴.

"돌아와서. 강호 씨? 뭐 진리구현자 특성이 안 통하지 않게 된 건 이유가 있어요. 천후. 혹시 '신역神域'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까?"

"신역?"

그 단어를 듣는 순간 머리가 아파져 왔다. 신위를 썼을 때나, S 랭크 마법을 썼을 때 느끼는 노이즈가 일순 들려온 느낌에 그는 잠시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으…. 뭐지? 하여간…. 잘은 모르겠어요. 그게 뭐죠?"

"아아. 이것도 금제였나. 귀찮군. 뭐 이미 들은 이상 괜찮겠죠. 상황이 이 지경인데 지들이 어쩔 거야."

"……."

과연 인생 막사는 인간. 천후는 그의 언동에 감탄마저 느꼈다.

"신역이란 건 말 그대로 '신의 영역'을 말합니다. 그렇다고 이게 무슨 수련, 단련을 통해서 어떻게 되는 건 아니고, 태반은 타고나는 거예요. 카테고리가 다르달까?"

"무…무슨?"

알아듣기 힘든 설명에 천후가 혼란스러워하자, 그는 조금 더 설명을 가다듬었다.

"그러니까…. 마법은 초자연적인 힘이죠? 원래 이런 마법이나 초자연적인 힘은 신에게서 나오는 거예요. 뭐 신이라고 불러도 되고, 세계 그 자체라고 불러도 되고. 멋대로 불러도 상관없는데, 하여간 초월적인 무언가에 닿아있는 힘이라 이겁니다."

사람 손에서 불이나 번개가 나가는 현상이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는 부분이긴 하다. 천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마법을 가지는 사람들은 누구든 상관없이 신과의 연결고리를 획득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그리고 개중에는 조금 더 그 연결고리가 강한 경우가 있지요.

보통 사람에선 중 '네츄럴 소스'라 부르는 사람들이 그런 경우입니다. 신과의 연결을 타고나는 사람이 있고, 어쩌다 보니까 엑세스 권한을 얻는 경우가 있지요. 진리구현자라는 이강호 씨는 후자고."

"아…."

프리니의 경우는 날 때부터 신역에 닿아있었고, 이강호는 검술을 연마하다 보니 닿았다.

"이 신과의 연결고리가 강하면 강할수록 상리에서 조금 벗어난 힘을 가지게 됩니다. 지금까지 그녀가 마법사의 마법을 억누를 수 있었던 건 엄밀히 말하자면 이 신역의 효과입니다. 이건 같은 신역에 닿아있는 이들이 아니면 절대적으로 작용하죠. 다만 같은 신역에 닿아있는 이들은 완전히 억누르지 못합니다."

천후는 이전 이강호가 자신이나, 최완의 힘을 완전히 억누르지 못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그네스의 경우엔 마법사이면서 신역과도 닿았다고 보면 됩니다. 굉장히 특이케이스죠. 마법사는 마법을 사용하는 대신 오히려 더 무뎌져서 이런 경우는 거의 본 적이 없긴 한데…. 뭐 전혀 없는 건 아니었죠. 지금까지."

그렇게 말한 인규는 천후를 빤히 마주 보았다. 안경 너머로는 무심한 눈빛이 보였다. 순간 천후는 깜짝 놀랐다.

"알고 있었어요?"

이전 정신지배를 당했을 때 잠깐 보였던 것 말고는 그런 낌새를 거의 보여주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했지만, 고인규는 담담히 답했다.

"당신 어릴 적엔 정말 엉망진창이었으니까. 당신은 어릴 적엔 거의 항시 신역에 닿아있었어요. 자아가 좀 성립되면서 오히려 문이 닫혔었는데, 보아하니 다시 닿은 적이 있는 모양이군요."

"……."

어릴 적 기억은 애매하다. 하지만 아마 그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리라. 굳이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는 처지니까.

"신위를 사용하거나 하다 보면 그렇게 될 때가 있어요."

"그렇군요. 당신도 선천적으로 닿아있는 경우였죠. 돌아와서…. 그나마 당신은 당신 의지로 그것을 조절할 수 있는 모양이지만, 그녀의 경우 그렇지 않았던 거예요. 본래 가지고 있던 마력 폭주만 해도 혼자선 감당이 안 됐는데, 거기에 신역까지 섞인 셈인 겁니다. 그러니 당신이 말한 대로, 이전에 만들려고 했던 전용 리미터와는 또 다른 이야기가 되기도 해요. 반 강제로 신역과의 링크를 강제로 끊어버릴 수 있는 리미터는 또 전례가 없는 이야기지요."

"그렇지만 형은 만들 수 있단 거죠?"

"네. 뭐… 만는다는 표현은 조금 안 어울릴 테지만."

그렇게 말한 고인규는 살짝 미끄러져 내려간 안경을 검지로 추어올렸다.

"일단. 이걸 만드는 작업에는 몇 가지 절차가 필요해요. 그리고 도움도 필요하죠. 당신의…."

재료가 희귀하거나 고가인 걸까? 하지만 지금의 천후에게 돈 문제는 큰 걸림돌이 아니었다.

"뭐든지 말씀하세요."

"정말로 괜찮겠습니까?"

"물론이죠!"

천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대답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고인규는 희미하게 웃다가…. 어느 순간 싸늘하게 눈매를 가라앉히며 입을 열었다.

"정말 그렇다면….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 지금부터 제가 한 말을 어디에도 유출하지 말 것. 최완 씨나, 이미연 씨에게도 말입니다."

"…네?"

"지금 제가 당신에게 받아내야 할 '것'은…. 본래 유그드라실에서 쉽게 유출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 지금 제가 해드린 설명부터 최완 씨라면 금제라서 말을 못했을 겁니다. 제 개인의 일탈이 너무 크게 번지지 않았으면 해서요. 저도 계속 벌어먹고 살아야죠."

유그드라실의 허가는 받아서 리미터 제작을 의뢰한다지만, 인규의 경우 유그드라실에서 해주라는 범위를 넘어서는 것까지 만들어주려는 것이다. 전용 리미터의 제작이 끝난 순간, 그는 어떤 방식으로든 책임을 지게 되리라.

'그 여파를 조금 줄이고 싶은 건가.'

천후는 그제야 자신이 고인규에게 굉장히 무리한 부탁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생각에서 나온 죄책감이 그의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알겠어요."

"좋아요. 그럼 두 번째. 이제부터 제가 요구하는 재료가 왜 필요한지에 관해서 묻지 말아줘요."

"그야…."

대체 뭐가 필요한진 모르지만, 어차피 설명을 들어도 못 알아먹지 않을까? 이것은 첫 번째 조건보다 더욱 수락하기 쉬운 것이었다.

"그러죠."

적어도 그때까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긍정의 말을 내뱉는 그 순간.

대기실 조명이 갑자기 전부 꺼지더니, 바닥과 천장, 벽이 은은한 연보라색의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냥 빛나는 것도 아니고, 지금까지는 보이지 않던 수많은 선과 도형들이 복잡하게 엮여있었다.

게임이나 판타지 소설 등에서나 만나볼 수 있을 것 같은 일종의 마법진처럼 보이는 것들이 그의 공방뿐 아니라, 이 대기실까지 가득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이건?"

"아아. 걱정 마요. 지금 이 두 가지 조건을 밝히고 허락을 받아내는 것부터가 이미 마도구 제작 공정 중 하나니까. 이전에 말했죠? 리츄얼…. 의식적인 부분이 필요하다고."

마치 천후의 불안을 잠식시켜주려는 것처럼 그렇게 말한 인규의 몸에선 오오라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미 마법을 운용하기 직전의 상황. 그런 상태로, 그는 쓰고 있던 안경을 벗으며….

"그럼. 재료를 받겠습니다. 천후. 당신이 발휘할 수 있는 최고 랭크의 주문을 사용한 상태에서…. 당신의 피를 나에게 주세요."

도저히 불안을 지울 수 없는 말을 해왔다.

*

결국, 유그드라실은 그날 내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이그네스 엠프레스는 오스트레일리아마저 무시하고 날아가고 말았다.

이에 사람들은 조금 안심했다. 이그네스 타입은 비선공 타입답게, 자극만 하지 않으면 의외로 그냥 놔두고 공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멸급 디제스터만 해도 국운을 걸고 덤벼들어야 하는 적. 천급이라면 더욱 강력할 것이고, 실제로 전세계 고 랭크 일리미네이터가 한자리에 모였었다. 싸우지 않을 수 있다면 굳이 건드릴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이 희망적인 관측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그네스 엠프레스는 비선공 타입이었지만, 그렇다고 죽을 때까지 하늘만 날아다니며 지상 구경만 하진 않았다. 어느 시점에선가, 그녀는 날갯짓하다가 지친 새처럼 지상에 내려섰다.

이그네스 엠프레스가 내려선 곳 반경 수십km에는 인간이 살지 않았다. 덕분에 그녀를 자극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인류는 그 사실을 반길 수 없었다.

그녀가 내려선 곳이 남극점이었기 때문에.

<이그네스 엠프레스의 화염 방출이 점점 강해지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얼마 지나지 않나 전 세계 해수면 상승이 예상됩니다.>

"……."

미미르의 보고에 모든 이들은 할 말을 잃었다. 그녀가 자리 잡은 곳은 놀랍게도 인간을 직접 불태워 죽일 일은 없는 곳이었지만, 대신 그녀가 존재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세계를 대재앙에 빠트릴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본격적으로 힘을 발휘하지 않아도, 그녀가 상시로 내뿜고 있는 화염은 남극의 평균기온을 바꿔놓을 정도가 되었고, 그것은 세계 기후와 해수면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단기간이면 모를까, 그녀가 계속 저곳에 있는 것을 방치한다면…. 인류는 그것만으로도 거대한 시련에 봉착하리라.

"세상에…. 하필이면…."

"아냐. 사실 어디에 있었든 비슷했겠지."

당장 어느 나라 수도라도 하나 잡아 내려섰으면 이미 그 시점에서 지옥이 펼쳐졌으리라. 이 정도면 충분히 안전하다.

한편, 그녀의 사정을 알고 있는 이강호나 공격대장들의 눈동자에선 당장에라도 눈물을 떨굴 것처럼 일렁이고 있었습니다.

"형님. 저거…."

"그래, 빌어먹을."

서울에서 벗어났지만, 그녀의 이성은 어느 정도 남아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그녀는 나름대로 필사적으로 생각해 세상에 사람이 존재하지 않을만한 곳으로 몸을 옮긴 것이리라.

남극의 연구 기지들도 일단 배가 닿을 수 있는 곳에 있지, 남극점 한가운데에 있진 않으니까.

아마 남극이 추우니까, 자신의 힘을 어느 정도 약화해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없진 않았을 거다. 그녀가 저곳에 내려선 것은 그러한 선택의 결과였다.

인간으로서의 이성이 남아있으면서 스스로 인간에서 멀어지려 필사적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잔혹한 일인가?

"우린… 그녀와 싸워야 하는 겁니까?"

"그래야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싸울 수밖에 없다. 그 현실이 그들을 미치게 했다. 스스로 저런 결단을 내린 그녀를 굳이 쫓아가 죽여야 하는 것이 자신들의 일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감상에 젖어 빠질 수도 없었다. 그녀는 틀림없이 강력하다. 오로치 따윈 어린애처럼 보일 정도로…. 세계의 최정예가 모두 달려들어야 할 터였고, DS야말로 바로 그 최정예 자체였으니까.

회장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전례 없는 일이 지금 일어나고 있다는 중압감만이 홀에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유그드라실은 마침내 투입인원을 결정했다고 통보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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