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하렘-243화 (243/324)

243화

<폭로>

로알 아문센이 남극점에 한 번 발을 디딘 이후, 남극도 남극점도 사람이 오가는 곳이 되었다. 매년 수많은 모험가 딱지를 단 양반들이 이를 시도했고, 굳이 도보뿐 아니라 비행기로 그 위를 날아 지나가는 것은 이제 현재의 기술력으로는 그렇게까지 어려운 일은 아니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남극은 여전히 오지다.

남극에 설치된 수많은 과학기지에서 사람이 살아가고 있었지만, 그들 모두가 외부로부터 자원이 유입되지 않는다면 절대 목숨을 오래 부지할 수 없다.

눈보라가 몰아칠 때 캠프에서 나왔다가 30m 거리도 되돌아가지 못해 사망하는 케이스가 아직도 종종 보도되곤 하는 곳이 바로 남극이란 곳이었다.

그리고 이런 얼음투성이 오지에… 화염마인, 천급 디제스터 이그네스 엠프레스가 내려앉았다.

이미 이곳까지 날아오는 도중에도 나라 전체에서 볼 수 있을 정도로 넓은 범위의 화염을 내뿜던 이그네스 엠프레스는 남극점, 완전한 무인지대에 내려앉자마자 지금까진 장난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처럼 작열지옥을 선보였다.

위성에서 촬영한 이그네스 엠프레스는 마치 하나의 태양처럼 구체형으로 밝게 빛나고 있었고, 그녀 주변의 지형은 그 불꽃을 받아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그녀가 남극에 내려선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건만, 벌써 학자들 사이에선 해수면 상승을 걱정하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그것은 절대 기우가 아니었다.

이 사태를 해결하고자 각국 수장들은 머리를 모아 보았지만, 뾰족한 방법이 나오지 않았다.

지상군을 투입하기엔 너무나 극악의 조건이고, 애초에 지상군으로 어쩔 수 있는 대상조차 아니었다.

그나마 가장 현실성이 있는 것은 소멸할 때까지 핵 투발을 하는 것이었지만, 과연 그게 통하기나 할지, 그 여파는 누가 책임질지는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디제스터 전문가들 역시 핵미사일의 공중폭발을 걱정했다.

결국 그들은 아무런 대안도 마련하지 못했고, 미증유의 위기를 해결해줄 수 있는 것은 일리미네이터와 유그드라실 밖에 없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가 되어서야 정부는 반 마법사 움직임 규제를 더욱 강화했다. 여기서 그들이 수틀리면 지구 멸망 시나리오에 직면하게 생겼기에 당연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일리미네이터와 유그드라실은 그들이 부랴부랴 눈치를 볼 때 이미 레이드 준비를 하고 있었다.

*

큐브 엘리베이터는 만능에 가까운 성능을 가지고 있었다. 성층권에서 지상까지 속도 조절에 따라 다르지만, 정말 원한다면 20초 이내에 강하하게끔 해주었다. 그동안 갑작스러운 낙하감각만 이겨내야 하긴 하지만, 그렇게 빨리 내려와도 떨어져 죽는 경우는 없었다.

지상에 닿아 해치가 열리기 전까진 밖에선 볼 수조차 없었고, 강하 장소가 불바다 한복판이라도 너끈하게 버틸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극한의 추위를 보이는 남극이라도 마찬가지였다.

내리기 전까진 얼마든지 괜찮았다. 그렇지만 내린 후에는 달랐다.

"으아아아!"

"미친…. 미친…."

큐브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유그드라실 마법사들은 갑자기 휘몰아치는 칼바람에 비명을 지르며 괴로워했다. 방금까지 엘리베이터 밖에서 보이던 눈보라를 실제로 맞닥뜨리자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아이 멍청이들아! 보호마법 걸고 내리라고 했냐, 안 했냐?"

이 팀의 이번 작업을 주도하게 된 팀장은 같이 내린 열 명 중 두 명이 괴로워하는 꼴을 보고서 성을 냈다.

"블리자드가 우습게 보이냐? 어서 들어가서 걸고 와!"

"죄, 죄…"

"어휴!"

순식간에 사람이 눈보라에 두들겨져 눈사람 꼴이 되어가는 걸 본 그는 한숨을 쉬며 둘을 큐브에 밀어 넣었다. 그 뒤 몇 분이 지나고 나서야 둘은 정신을 차리고 다시 나올 수 있었다.

"아…. 총알이 날아다니면 위기감을 느끼는데 이건 생각도 못 했네요.“

"말이라고 하냐? 이게 총알보다 더 위험해, 이것들아."

팀장은 보호마법의 효과로 마법사들 주변을 피해 가는 눈보라를 보면서 혀를 찼다.

남극점 한가운데에 화염의 신이 아닌가 싶은 괴물이 자리 잡고 있는데도, 남극의 날씨는 여전히 추웠고, 눈보라는 가혹했다.

그러나 이게 얼마나 갈지는 알 수 없었다. 직접 태양이 내려앉은 셈이니, 기후 변동은 필연. 그것이 본격화되기 전에 어서 레이드를 성공해야 했다.

이들은 그 준비 작업을 위해 남극 곳곳에 내려와 있었다.

"자. 농땡이 피우지 말고 너희도 어서 설치를 도와! 1초가 아깝다!"

"네!"

팀장의 호통에 죽다 살아난 남자들은 이미 넓게 원을 그리며 퍼져있는 동료들 사이에 들어갔다. 그들의 몸에선 마법의 영향력을 보여주즌 오오라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500명인가. 많군.'

팀장은 같이 작업을 진행하며 그렇게 생각했다. 이렇게 10명 1개 팀으로 50팀이 남극 곳곳에 내려와, 이그네스가 남극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결계를 만들고 있었다.

이그네스를 잡겠다고 유그드라실에 모인 일리미네이터 숫자보다도 많은 수이니, 이것은 사상 초유의 인원 동원이었다.

이거라면 어떻게든 되리라.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

"적습니다. 8,000명 중 고작 500명입니까?"

현장의 팀장의 생각과는 다르게, 유그드라실에서 나오고 있는 말은 이것이었다.

"아니…. 우리도 사람 손이 부족합니다. 최근 난민보호소 건으로 본사 직원들이 많이 내려가 있어요. 그뿐 아니고 다른 유지해야 하는 부분들도 있고."

"그것참, 지구가 멸망하고 나서도 유지가 되나 좀 보고 싶군요."

일리미네이터들 사이에 복귀한 천후는 앞에서 웅얼거리는 유그드라실 지부장들을 보면서 이죽댔다. 그의 태도에 유그드라실 측에서도 성을 냈다.

"말이 심하시오! 애초에 사태가 이렇게 커진 것 자체가 DS, 당신의 책임도 있지 않습니까? 엘모세와트를 너무 자극한 건 어디까지나-"

"10년 동안 그 암적 존재들을 묵혀놓고 있었단 것조차 밝히지 않은 인간들이 할 소린 아니죠. 어디 진짜 근원적인 부분까지 다 까발려볼까요? 아무리 봐도 제 손해는 없어 보이는데?"

유그드라실 측은 당장에 입을 닥쳤다. 저 말에는 대꾸할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일리미네이터라면 모를까, 영천후는 이미 이그네스의 정체를 알고 있었고, 그들이 영국에서 사건이 일어났을 때부터 그녀의 정체를 숨기려 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엘모세와트의 존재 역시 무능을 숨기고 싶어 자기들만의 싸움을 해왔고, 자칫 잘못하면 노아의 방주 시즌 2를 찍게 생긴 지금 시점에 와서조차 여력을 남기고 있었다.

"제가 보기엔 당신들이 사태를 아직도 만만하게 여긴다고 보이는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린 정말로 최선을 다하고자-"

"그럼 당장 한국 지부장이라도 풀어주시고, 레이드 인원에 합류시켜주시죠?"

"……."

난색을 보이는 모습에 천후는 코웃음을 쳤다. 이 반응엔 천후 뿐 아니라 다른 일리미네이터들의 얼굴 역시 딱딱하게 굳었다.

최완은 세상에 얼굴이 알려진 몇 안 되는 S 랭크 마법사였는데, 그는 아직도 근신 중이라는 이유로 활동하지 못하고 있었다.

"도대체가. 멸급 수준까진 뭐 그렇다 칩시다. 그런데 이번 일에까지 당신들이 뭔가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인상을 도저히 받을 수가 없군요. 엘모세와트 추적도 마찬가지였던 것 아닙니까?"

"영천후…!"

듣고 있던 그들의 얼굴에 노기가 끓어올랐다. 아니, 정확힌 두 가지였다. 맞는 것 같다는 얼굴과 화를 내는 얼굴들.

이것이 앎과 모름의 차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지금 천후의 논리에 설득되고 있는 이들은 유그드라실의 전력 공백에 마찬가지로 의문을 느끼고 이는 이들이었고, 화를 내는 이들은 그 이유를 아는 자들.

그중 후자가 말했다.

"역시 당신을 내려보내면 안 됐는데."

"아주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잘도 이 상황에서 그런 소릴 하는군요."

"당신들. 염치라는 게 있나?"

대화를 듣고 있던 패트릭과 안소니가 다가와 천후를 두둔했다. 그들의 표정은 한층 일그러졌다.

"당신들까지 DS의 말에 동의하는 겁니까?"

"당장 싸우러 가는 입장이 우리니까 당연한 일 아닌가? 여력이 있으면 더 내놓으라는 말이 그렇게까지 어려운 요구는 아닌 것 같은데 말이네."

홀에서 감돌던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유그드라실 측은 천후 때와는 달리 안소니의 말에 쉽게 대응하지 못했다.

천후가 일리미네이터 사이에서 막 떠오르고 있는 태양이었다면, 안소니 크라우저는 그들의 원로이자 영원한 형님 같은 존재였다.

이제 일선에선 서서히 물러나고 있었지만, 그의 영향력은 여전히 컸고, 유그드라실을 제외하면 가장 최정예화 된 마법사 모임, 노블레스 클럽을 움직이고 있는 것도 그였다.

영천후의 경우는 유그드라실이 과거의 정리를 들어서 조금 함부로 대할 수 있었지만, 그에게는 절대 그럴 수 없었다.

한참 말을 고르던 그들은 조금 시간이 지나서야 한숨을 내쉬었다.

"흥분해서 실언을 한 건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저희의 여력이 충분하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이유는 설명해 드릴 순 없지만, 우린 지금 500명을 따로 떼어내어 강하시켜둔 것만 해도 상당히 무리를 한 상태입니다."

"정말 믿을 수가 없는 말이군. 좋네. 그럼 자네들 자신들보다 다른 쪽을 이야기해 보지. 유그드라실은 SA 랭크에게 연락할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나? 이 정도 사달이 났으면 그들 중 하나가 나서야 하는 문제가 아닌가? 연락은 취해봤나?"

"그것이…."

안소니의 말에 그들은 더더욱 곤란해 하는 기색을 보였다. 일리미네이터들의 얼굴은 더더욱 일그러졌다.

유그드라실의 전매특허는 바로 SA 랭크 마법사의 위명을 이용한 반 협박이었다. 그들은 유그드라실 발족 초기 잠시 나타나 전 세계의 국가 수장들이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을만한 데몬스트레이션을 벌였다고 알려졌었다.

단순히 랭크만 생각해봐도 그들이 나서면 지금 지구 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아예 일리미네이터가 필요도 없지 않을까?

인간과 공생하기 위해 마법사의 희생을 보여준다. 그걸 위해 활동을 자제하고 있다는 게 지금까지의 해명이었다. 지들 딴엔 그럴싸해 보였나 보지만, 일리미네이터들 입장에선 이야기가 달랐다.

'지들이 무슨 신이야? 세상을 그따위로 내려보게?'

그들에게 붙은 설화나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럴만하긴 했다. 화산 폭발을 진정시키고, 죽은 자를 살려내고, 눈먼 이를 눈뜨게 하고… 그러나 그렇다 해도 사람이 사람을 저렇게 바라보는 것이 용납되는 것이란 말인가? 아니 그래. 그렇게 보는 것까지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주도록 하자. 우리는 가련한 필멸자. 손가락으로 누르면 죽는 개미들. 하지만 당신들도 같은 이 행성에서 살아가고 있는 존재들이라면, 도저히 개미들론 답이 안 나오는 문제엔 나서줘야지?

여태까지 있는대로 협박을 하고, 그걸로 유그드라실이 꿀을 빨게 해줬으면 나름대로 당신들이 진짜 필요해 미칠 것 같은 시점에선 등장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이그네스 엠프레스는 바로 그런 존재였다.

"영국에서 DS가 맞붙은 하위 개체 이그네스만 해도 진리구현자가 없었다면 공격대로 잡아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네. 그런데 이그네스 엠프레스는 그 특성조차 통하지 않는다지? 그럼 그들의 도움을 바라도 될 때가 아닌가?"

"그, 그건…. 아직 때가 아니라고…."

"뭐어?"

"이런 미친…. 그럼 대체 언제가 때야?"

결계를 치고, 보조팀 수를 수백 단위로 늘리고 있긴 했지만 그녀의 광역 화염을 온전히 받아낼 수 있을지 의문인데 저런 소리나 하고 앉아있다. 당연히 참을 수가 없었다.

바로 그때.

"아니죠. 그들도 사람인데 지금도 때가 아니라고 할까. 그런 게 아니겠죠."

잠시 침묵하고 있던 천후의 입이 다시 열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그에게 집중되었다. 각 공격대의 마스터들과 유그드라실 측 인원들의 것까지.

천후는 그 시선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안소니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안소니. 그들의 도움은 기대하지 마세요. 그들은 안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못 도와주는 거니까."

"뭐?"

생각도 못 한 소리에 노인은 멍하니 반문했다. 반면, 같은 이야기를 들은 유그드라실 측에선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잠깐! 추가 인원을 투입하겠네! 그러니 제발-"

다급함이 묻은 목소리. 그 목소리를 들으며.

"왜냐면…. 그들은 이제 이 세상에 없으니까."

"그 입 제발 닥쳐엇!"

단두대의 칼날과도 같은 선언을 떨구었다.

============================ 작품 후기 ============================

SA 랭크 같은 거... 으 읎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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