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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드하렘-244화 (244/324)

244화

유그드라실 지부장들 사이에서 한결같이 찢어지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들은 눈동자에 당혹과 두려움을 띠고서 천후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평정심을 잃은 상태라는 걸 알아볼 수 있는 상황. 그들의 태도에 놀란 것은 일리미네이터들 뿐이 아니었다.

정보 접근 권한이 상대적으로 낮은 유그드라실 직원들 역시 놀라고 있었다.

"저게… 진짭니까?"

"말이 필요합니까?"

그들 중 하나가 물어오는 말에 천후는 지부장들 쪽으로 턱짓했다. 그들의 반응 그 자체가 증거라는 듯이. 놀란 그들은 태도를 정비하려 했지만, 이미 최초에 보인 반응이 너무나 컸다.

한편, 이야기를 들은 공격대 마스터들의 표정엔 큰 변화가 없었다.

"역시 그랬었군. 혹시나 하고 있었는데…."

패트릭은 두꺼운 입술을 혀로 핥았다. 그들 역시 확신까진 못하고 있었지만, 그렇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그걸 확신하게 됐나?"

"지금 이 상황 자체에서. 아무리 SA 랭크가 신선놀음을 한다지만 지금 상황에서까지 나오지 않을 정돈 아니니까요."

패트릭의 질문에 답변한 천후는 당황한 유그드라실 직원들 쪽으로 다가가며 말을 이었다.

"SA 랭크 활동이 최근에는 없었다지만…. 마법사가 나타난 지 천 년. 그동안 움직인 기록들은 남아있습니다. 그것들을 살펴보면 그들은 좀 더 사소한 일에도 몸소 나서곤 했죠. 네츄럴 소스를 가진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찾아간다든가."

"윽…!"

사실 천후가 이 건에 대해 확신한 건 역시 엘리제 3세의 증언을 듣고 난 후부터였다. 과거, 이그네스가 힘을 완전히 각성하기 전에도 이미 그녀의 건은 SA 랭크가 직접 나서서 처리할 정도였다.

그런데 자기들이 건 봉인이 풀린 것도 모자라, 그 힘이 만개할 때까지 얼굴을 비치지 않는다? 그게 오히려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SA 랭크는 왜 나서지 않는가? 천후는 두 가지 결론은 내렸다.

첫째. SA 랭크가 현재 전혀 움직일 수 없는 상태이거나.

둘째. 아예 그들이 세상에서 사라졌거나.

이중 천후는 후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이 움직이지 못할 일씩이나 하고 있으면 유그드라실이 이렇게까지 여유가 없을 것 같진 않았으니까.

"그, 그런 근거 같잖은 것으로 그들을 욕보이려는 건가? 뒷감당을 어찌하려고!"

"뒷감당? 뭐 까짓거. 해주죠. 뒷감당이란 거. 해줄 테니까…. 어디 한 번 불러나 보던가."

"뭐?"

"그네들이 자기들을 의심한 죄로 저를 죽이던, 지지던 다 감내할 테니까 이 자리에 불러내 보기나 하라고요. 대체 여태까지 뭐한 건지 물어나 보게. 왜? 그것도 못하시나?"

"……."

그들의 안색은 이제 차갑게 질려있었다. 순간 그들은 홀의 분위기가 판이해졌음을 알았다.

지금까지는 그들이 일리미네이터를 일방적으로 내려다보는 입장이었다면,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애초에 유그드라실의 권위는 어디에서 나왔던가? 바로 SA 랭크 마법사의 존재 그 자체였다. 홀몸으로 국가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진정한 초인들이 우리의 곁에 있으니 개기지 말고 해달라는 거 다 해줘라.

우리 때리면 SA 랭크한테 다 이를 거야! 빼애애애액! 하고 소리 지르는 데에서 그들의 힘은 출발했다.

협조적으로 보이는 그들의 태도의 근간은 압도적인 폭력의 우위, 그 믿음에서 나오고 있었고, 거기서 나오는 공포가 그들을 세상 마법사들의 대표로 설 수 있게끔 해줬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 그것이 깨진 것이다.

기만과 압제에 지친 자들 중 하나가 그 폭력의 존재 여부를 의심해 대항했다. 마침 그 자리는 온 세상 일리미네이터가 다 모인 자리. 여기에서마저 도망칠 순 없었다. 도망친다면 없다는 것이 되니까.

그리고…. 그들은 그 폭력을 현현할 수 없었다.

"역시. 못하는군요."

"……."

"세상에 없으니까."

싸늘한 목소리가 얼음으로 만든 비수가 되어 가슴을 찌른다. 순간 그들은 깨달았다.

입장이 완전히 뒤집혔다는 것을.

그들은 더는 세상을 굽어보는 처지가 아니게 되었다.

진흙탕을 구르는, 똑같은 하계인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앞에 있는 자들은, 그 하계의 왕들이었다.

*

가지고 있던 권한과 힘이 흩어진다. 이것만큼 끔찍한 일도 없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유그드라실은 철저하게 해부 당하고 있었다.

"정규 공격대 연합은 다시금 유그드라실에 추가 인력 파견을 요청합니다. 당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주시죠."

"이행되지 않을시, SA 랭크의 존재 여부 공개 및 유그드라실에 전해지던 지원을 중단하겠네."

유그드라실은 결코 공돈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요새에만도 8,000명이 살고 그들이 떠맡은 이들은 더. 훨씬 많다. 난민 보호소에 흘러들어 가는 돈 역시 정규 공격대에 많은 부분 의존하고 있었다.

SA 랭크의 공백을 국가들이 알게 되면 그들에게서 받아내는 돈도 끊길 것이다. 그럼 이제 그들이 하고 있는 마법사를 비밀리에 지키는 활동 그 자체도 끝장이었다. 할 수 있는 건 유그드라실과 큐브엘리베이터를 사용한 택시 역할 정도만 남을 터.

유그드라실 측에선 그들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칼자루를 상대가 쥐고서 흔드는 걸 피하고 받아내느라 정신없는 상황은 처음인지라, 그들의 행동은 너무나 굼뜨고, 정돈되지 않은 것이었다.

결국, 그 뒤로 다시 하루가 지난 뒤에야 2,000명이라는 인원 투입이 확정되었다.

"이 이상은 불가능하오. 최완의 활동 정지 처분도 풀어줄 수 없고."

"이유를 설명해주시죠."

"…지원을 끊으시오, 그냥."

"……."

더 받아낼 거면 그냥 배째라는 태도에 천후는 혀를 찼다. 이렇게까지 나오는 걸 보면 정말로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이란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좋습니다. 어쩔 수 없죠. 레이드 논의로 넘어가겠습니다."

주도권은 확실히 정규 공격대 쪽으로 넘어왔다. 각 공격대의 마스터와 공격대장들, 유그드라실 대표자 3명이 원탁에 둘러앉아 논의를 시작했다.

"결계 효과로 이그네스 엠프레스는 반경 10km 밖으로는 나가지 못할 거요. 또한 결계 안에선 각종 보조마법 효과가 항시 작용하니, 이그네스 엠프레스의 화염에도 어느 정도 견딜 수 있을 겁니다."

"어느 정도라면 정확히?"

"광역 화염을 꾸준히 받아도 7분간 버틸 수 있을 거라 추정되오."

"굉장하군…."

패트릭은 자기도 모르게 감탄했다. 일리미네이터끼리 보조마법을 걸고 어쩌고 할 땐 광역 화염을 꾸준히 피한다는 전제조건을 달고도 5분이었다. 직접 휩쓸리기 시작하면 그것이 초 단위로 줄어들었다.

"투입되는 일리미네이터는 A 랭크 21명, B 랭크 133명. C 랭크 이하는 컷. 각 공격대장은 직접 교전 범위 밖에서 통제하는 걸로 가닥을 잡았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 사람은 많을수록 좋지만, C 랭크까지 전부 보호마법을 걸어주기엔 수고가 너무 많이 들어."

이그네스 엠프레스를 가두겠다는 결계 너비 자체가 넓다 보니, 저들을 보조마법 요원으로 써먹으려고 해도 한계가 있었다. 결국 레이드는 고 랭크 위주로 짤 수밖에 없었다.

"레이드 양상은 역시 초반에 모든 딜을 쏟아 붓는 방식이 되겠군."

"중요한 건 명중 여부입니다. 이그네스 엠프레스는 크기가 작으니까요. 게다가 텔레포트까지 사용하니…."

지금 멤버가 풀 캐스팅을 전부 모아 꽂는다면 핵폭발을 방불케 하는 화력이 나올 터. 이걸 통제하는 것만도 큰일이었다. 지면에 꽂힌다면 그 시점에서 이들도 재앙에 한몫 더하는 꼴이 된다.

"이그네스 특유의 비선공 성향이 있으니, 1차 공격 자첸 어렵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실패할 경우…."

거기까지 말한 패트릭은 영천후를 바라보았다. 안소니나 그나 이그네스 엠프레스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녀를 소멸시킬 계획을 진지하게 짠단 건 정신적으로 대단한 스트레스였다. 하지만 어디 저 남자만 할 것인가?

"그때가 돼서야 자네가."

"네. 나설 수 있겠죠."

간결하게 대답한 천후는 손에 올려놓은 것을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반지였다. 작은 루비가 박힌 반지.

'그때가 돼서야 이걸 써볼 기회가 온다.'

그는 침착을 가장하며 그것을 주먹에 꽉 쥐었다. 이것은 리미터. 고인규가 만들어준 이그네스 전용 리미터였다.

엘리제 3세에게 받은 루비는 마치 비율이 축소된 것처럼 손톱 크기만 하게 줄어들어, 어린아이의 손가락에 딱 맞게끔 작아진 반지 몸체와 어울리는 크기로 바뀌었다.

은으로 보이는 반지 몸체에는 흘려 쓴 것 같은, 출처를 알 수 없는 언어들이 음각되어있었다. 밖도 그랬고, 안도 그랬다. 그 음각으로 파인 안쪽엔 검붉은 빛이 마치 현광 물질이라도 발라진 것처럼 주먹 안쪽에서도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때부턴 제가 접근전을 시도하면서 시간을 끌겠습니다."

마음 같아선.

마음 같아선 처음부터 나에게 시간을 달라고 호소하고 싶었다.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모두 이그네스가 비선공 성향을 보인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최초의 기습을 시도해보지도 않겠다는 것을 동의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그네스 엠프레스는 지금 이 시각에도 남극을 녹이고 있는 인류의 대적. 할 수만 있다면 가장 확실하고 빠르게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이 최초의 일격이었다. 그래서 사람을 이렇게 바리바리 끌어모았던 것이다.

그렇게 모인 이들에게 그 기회를 포기하고 자신을 믿어달라는 말은 통하지 않았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미리 천후의 마음을 짐작한 공격대장들이 고개를 저으며 난색을 보여왔다.

"후우…."

온몸이 얼음장처럼 차갑다. 그에게 허락된 것은 차선책에서의 조우였다. 이미 교전이 시작된다면, 그녀의 동요조차도 이용할 수 있다는 합리에 따라서 탱킹을 하면서 그녀에게 접근하는 것만이 그에게 허락된 방도였다.

덕분에…. 그는 인류의 명운이 걸린 이 레이드에서 그녀가 기습에 당하지 않기를 염려해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그 뒤부턴 경과에 따라 3개의 플랜이 있습니다. 다들 메뉴얼을 숙지하시되, 만약의 상황에선 자의적인 판단으로 행동해주시기 바랍니다. 유례가 없는 일이니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릅니다."

공격대장 자격으로 참가한 정태원의 발언에 모두 깊게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드에선 아무리 잘 짜인 작전도 시작 후 3분 이내에 전부 쓰레기가 되기 마련이다. 심지어 저 남극에 내려앉은 화염마인이 상대라면 말할 것도 없으리라.

"그럼…. 레이드는 3시간 후에 시작하겠습니다. 그때까지 모든 준비를 끝마쳐주시기 바랍니다."

태원의 마지막 말이 누구에게 향하고 있는지는 분명했다. 천후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

유그드라실에서 지상을 내려다보면…. 사실 구름으로 막혀있어 땅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천급 디제스터 레이드에 대비해 유그라실 자체가 남극 상공에 떠 있는 상황. 시야를 가리는 구름은 전혀 없었다. 지상에 있는 저 태양처럼 작열하는 화염 구체가 그 모든 것을 지워버렸다.

"……."

남극점은 이미 직경 3km 가량의 구형 구멍이 뚫려있었다. 열로 녹아버린 것이다. 그나마도 열방사가 심하지 않아 저 정도로 그치고 있을 뿐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것의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지금도 노력하고 있는 거구나. 이그네스."

오래 마주 보면 눈이 멀어버릴 수도 있는 화염의 구체. 하지만 천후는 거기서 눈을 떼지 않았다.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알 수 있다.

저 안에 그녀가 있다.

쥐고 있는 반지가 은은한 온기를 뿜어내며, 새겨진 문자에서 빛이 새어나왔다. 저 안에 있는 누군가가. 이것을 간절히 바란단 걸 알아채기라도 한 것처럼.

"이그네스…. 기다려. 곧 갈 테니까."

얼음장처럼 굳어있었던 손에 다시 온기가 되돌아왔다. 천후는 주먹을 꽉 쥐면서 몸을 돌렸다. 때가 되었다.

다시 데려올 때가.

지상으로 수많은 큐브 엘리베이터가 떨어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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