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화
마법사들이 멀어져가는 것이 보였다. 천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신위를 걸었다. 발끝부터 불길이 올라와 흑염을 살라 먹고서 하늘 저 끝까지 불꽃 기둥이 일어났다.
“하아….”
이프리트들은 후퇴하는 마법사를 멀리 쫓지 않았다. 유그드라실 마법사들이 만들었던 결계 범위까지만 쫓아가던 놈들은 이그네스 근처에서 불꽃이 치솟아오르자 추격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아-----”
한편, 신위에 휩싸인 천후를 본 이그네스는 천지 사방에 띄워놓았던 화염구를 꺼트리고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런 작은 힘으론 제압할 수 없다고 느끼는 건지, 아니면 공격하기 싫어하는 건지는.
이 모호함은 당장 해소할 길이 없었다. 그런 것을 신경 쓸 수 있는 여유도 없었다. 천후는 그녀와 대적하면서 단 하나만을 깨달았을 뿐이다.
‘이대론 답이 없어.’
반쯤 이성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공격하는 지금의 이그네스에겐 현재의 전력 가지곤 절대로 레이드를 성공할 수 없다. 추가적인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러나 더 주어질 것은 없었다.
고 랭크 일리미네이터는 전부 모였고, 유그드라실도 자기 딴엔 할 수 있는 만큼 했고 더 사람을 보낼 생각도 없었다. 이것이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는 최고 전력인 것이다. 거기서 한 단계 더 올라갈 무언가가 더해지려면….
결국 숨기고 있는 여력을 드러내는 수밖에 없다.
지직. 지지직.
노이즈가 들려온다. 아직 음성으로 변화하진 않은 노이즈. 그러나 이제는 안다. 이것이 ‘목소리’임을. 아마 그가 지금부터 하려는 짓을 해버리면 이것은 말끔하게 들리리라. ‘시험’해봤을 때도 그랬으니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모르겠지만….
방법이 이것뿐이라면. 한다!
“스펠 세이브, S 랭크 한정 봉인…. 해제…!”
빛이 있었다.
*
“정말로 이 괴물을 세상에 돌아다니게 놔둘 생각입니까?”
목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보느냐에 달린 문제다.”
그중 하나는 익숙한 목소리였다.
“당신의 뜻은 존중하지만…. 이건 미친 짓입니다.”
누구의 목소리인지는 모르겠다.
“나의 뜻은 아니다. 방법의 문제다. 이것 말곤 방법이 없으니 하는 것뿐.”
아니. 아닌가?
“대안 없는 문제란 말입니까?”
어쩌면…. 다른 하나도 알고 있는 목소리인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가야의 의지가 있는 한. 별을 멸하면 다른 대안이 생기긴 하는데.”
문득. 들었다.
“관두죠.”
체념한 건지. 실의에 빠진 건지 모를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아저씨?”
그 생각을 하는 순간. 머릿속이 찢어질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너는 아무 생각도 하지 마라.
마치 그런 의지를 가진 것 같은, 인위적인 고통이 그를 휘감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와아. 이제야 여기까지 왔네. 오랜만이야.”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눈을 뜨면 그곳은 암흑밖에 없는 곳이었다. 그 자신의 몸조차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지금 당장은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는 느낌이 들었다.
중요한 건 목소리다. 이 어둠 저편. 혹은 바로 옆 귓가에서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
“어릴 땐 자력으로도 자주 오더니. 나이를 먹고 나니까 힘들어졌나 보네. 뭐. 컨트롤의 문제가 있긴 하지만.”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걸.”
말하고자 의식하고 나니 목소리는 나왔다. 신기한 일이었다. 육신을 인지할 수 없는데 말은 할 수 있다는 건.
혀를 움직이는 느낌도 들지 않는데 말…. 아니, 염파라 불러야 할 만한 것이 공허를 맴돈다.
“하하. 별거 아니야. 그냥. 난 내 유일한 친구가 몇 년이나 나를 찾지 않다가 다시 찾아왔길래 놀랐을 뿐이지. 그렇게 불러도 대답조차 안 하고서 말이지.”
뭐가 그리 즐거운 건지, ‘소년’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묻어있었다.
그를 ‘소년’이라고 생각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목소리…염파의 톤이나 말하는 투가 그렇게 느껴졌을 뿐이다.
그렇지만 그는 어쩐지, 이 추정이 틀리지 않았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어쩐 일인 거야? 이번에도 진리 구현자한테 배때기라도 뚫렸어? 그런 거 같진 않은데. 지금은 죽어가는 상황도 아니잖아?”
즐거운 듯이 제멋대로 말하는 목소리에는 은근히 힐난하는 느낌이 실려 있었다. ‘소년’의 말마따나 너무 오랜만에 찾아온 걸지도 모른다.
그동안 소년은 무언가를 느꼈는지 목소리를 바꿨다.
“아하…. 이런 상황이었구나?”
소년은 그가 어떤 일을 겪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는 듯 했다. 그의 목소리가 다시 은근해졌다.
이전처럼.
“힘이 부족해진 거였구나? 어쩐지. 어쩐지. 네가 이유 없이 이렇게 될 리가 없는데 말이지. 와. 생각해보면 대단한 발전인걸. 이거 정말 잘하면 그 남자가 바란 대로 될지도 모르겠어.”
깔깔깔. 악동 같은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째서일까? 그 말을 듣자 그에게서도 풋 하고 같이 작은 실소가 뿜어져 나왔다.
“아핫. 그렇지? 네가 생각해도 웃기지? 말도 안 되는 일이야. 계획도 어느 정도 생각이란 걸 해가면서 세워야 할 것 아냐.”
소년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묘하게 정말 그렇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만다. 그래도, 그나마 그는 실소에서 그칠 수 있었다.
아. 그나저나 ‘내’가 왜 이런 곳에 와있더라-
“하하. 힘이 부족해졌던 거잖아? 너는 S 랭크 마법을 썼어. 지금 네 역량으론 완전히 다룰 수 없는 힘이지.”
아아. 그랬다. 설명 고마워.
“뭘 고마울 것까지야. 오히려 고마운 건 내 쪽인걸. 아. 헐렁헐렁해진 게 느껴지네.”
응?
“아냐.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니지. 돌아와서. 너는 힘이 필요한 거지? 통제할 수 있는 힘이?”
어…. 아마 잘 기억은 안 나지만. 그랬던 것 같아.
“히히히. 정신 차려. 그러다 날아가 버린다?”
날아간다니? 어디에?
“네가. 사라져 버린다구.”
“…헉!”
그제야, 그. 영천후는 간신히 자아를 확립할 수 있었다. 보이는 것은 여전히 암흑이었다. 천후는 자신이 이야기하고 있는 상대가 이전의 그 소년임을 알았다.
“이런….”
여기로 들어왔단 건 자신이 의식을 잃었거나, 아주 폭주하고 있거나. 둘 중 하나라는 것을 의미했다. 그나마 죽진 않은 건가?
“빨간 아이는 그다지 사람을 공격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으니까. 이야. 대단한 인내심인데. 저 상태면 완전히 집단 무의식에 녹아버린 수준일 텐데도 잘도 저렇게 공격성을 드러내지 않네.”
“…….”
“지금 넌. 음…. 물 위에 둥둥 떠서는 그냥 그렇게 있는 상태야. 신위만 걸려있고. 하하. 대실팬데?”
“넌 대체…. 뭐냐?”
자기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천후는 결국 질문을 던졌다.
“후후.”
그 질문에 소년은 웃었다. 눈앞에 있었다면 아주 즐거운 미소를 지었을 거란 생각이 들 정도의 음색이었다.
“놀라워. 정말 놀라운걸.”
“뭐가 말이지?”
“그 질문 말야…. 그 말. 10년 만에 처음 들어보는 말인걸?”
그랬던가?
“전에도 물었던 것 같은데.”
“아니. 그때는 이 공간에 대한 의구심.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 자체에 의구심을 느낀 거지. 이번과 그건 달라. 너는 지금 ‘나’에게 물었지. ‘내가’ 대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
“굉장해. 너에게 그런 질문을 받아볼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어. 기분이 좋은걸.”
목소리만 들어선 춤이라도 추고 있을 기세다. 웃음소리가 계속됐다. 하지만 그 웃음은 조금 뒤 잦아들었다. 목소리는 다시 진지하고, 무거워졌으며, 낮아졌다.
“하지만 미안한걸. 그 질문엔 답해줄 수 없어. 그렇지만 아마 넌 이미 알고 있을 거야.”
“선문답 하잔 게 아니야. 알고 있다면 물어보지도 않았지.”
“아니. 그렇지 않아. 넌 이미 알고 있어…. 알고 있는 걸 떠올리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
우웅. 우웅. 순간 천후는 어지럽단 느낌을 받았다. 이 육신도 없는 이상한 공간에서 느끼는 어지럼증은 대체 뭐란 말인가?
“아아.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 네 자력으론 죽었다 깨나도 안 되는 일이 있는 법이니까. 자아. 우리 다른 이야기를 하자. 그래. 좀 더 중요한 이야기를. 그러기 위해서 이곳에 왔잖아? 안 그래?”
그래. 그건 그렇다. 이 어둠 속에 사는 소년이 어떤 존재인지는…지금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그네스.
“그래. 저 빨간 아이지. 이레귤러. 승화되어 자기도 모르게 신역과 현인의 경지에 발을 들여버린 가련한 아이. 저 아이를 구해내고 싶은 거지?“
“그래.”
“그렇지만 너에겐…. 힘은 있지만 쓸 수가 없네? 아하핫.”
힘은…있다. 하지만 통제를 할 수가 없다.
“알고 있지? 잘못 쓰면 어떤 꼴이 나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때마다 사방천지를 때려 부숴서 최완이 그를 제압해야만 했다고 들었다.
“이번에도 그렇게 쉽게 끝날 거란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걸? 가디언이라도 힘들겠지.”
천후도 동의했다. S 랭크를 풀어버린 이상, 그라도 막기 힘들리라.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소년이 말했다.
“그러니. 거래를 하자.”
“전에도 말했을 텐데. 너하고 거래할 순 없다고.”
“왜 그러는 거야? 딱 하루면 된다니까. 나는 약속은 지켜.”
섭하다는 목소리에도 천후는 경계를 풀지 않았다.
“너의 제안을 받아들이면…좋지 않은 일이 생길 것 같아.”
“흐응. 감이 좋은 건지. 이것도 안배된 건지. 쳇.”
소년은 한번 혀 차는 소리를 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웃음 섞인 목소리를 되찾았다.
“뭐 됐어. 너 옹고집인 건 아주 잘 알았어. 생각해보면 어릴 때보단 낫지. 대답이라도 하니까….”
“…….”
“좋아. 그럼 다른 조건은 어때? 너는 나에게 몸을 주지 못하겠다니…. 나도 너에게 큰 건 줄 순 없겠지만. 그래. 이번에 한해서 컨트롤을 할 수 있게 해줄게.”
그것은…. 거부하기 힘든 제안이었다. 혹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어때? 마음에 들지? 다 느껴지거든? 지금 움찔한 거?”
“…나는 너에게 뭘 줘야 하지?”
“헤에. 뭔가 줄 생각이 들긴 한 거야?”
“말해두지 않으면…넌 네 멋대로 내 모든 걸 가져가 버릴 것 같으니까.”
“……의심도 많네.”
목소리가 싸늘해졌다. 천후는 자신의 예상이 틀리지 않았음을 느꼈다.
이 소년은…뭔진 모르겠지만, 대단히 위험한 존재였다. 되도록 만나지 않는 게 좋은 무언가. 그러나 지금은 피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어둠 속이 고요해졌다. 그러나 천후는 소년이 사라졌다곤 생각하지 않았다. 어째선지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들렸다.
“좋아. 그럼…. 나는 너에게 이번 한 번만 S 랭크 마법을 컨트롤 할 수 있게끔 해줄게. 서비스로 SA랭크 신위까지 포함해주면 될까? 대신에…. 나는 너의 ‘메이거스 시스템’을 살펴볼 수 있는 권한을 줘.”
“컥―”
소년의 발언에, 그는 순간 모든 것이 날아가는 느낌을 받았다. 자기 자신이 사라져버릴 것 같은 감각.
“아. 이런. 대놓고 언급하면 안 되는 거야? 짜증 나네, 금제를 몇 겹으로 걸어둔 거지? 뭐 이미 들었겠지? 어쩔 거야?”
“그, 그게 대체 뭔데?”
뭐길래 이렇게 만든단 말인가? 영천후라는 인간의 자아, 그 모든 것이 날아갈 것 같은 느낌에 천후는 공포를 느꼈다. 지금 그 단어를 두 번 다시 듣고 싶지 않았다.
“흥. 겁먹은 주제에……. 다시 언급해서 좋을 건 없어. 어차피 너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어쩔 거야? 급하지 않아? 이번엔 저번처럼 네 자력으로 뭐가 되는 일이 아니야? 자각하고 있을걸?”
소년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전처럼 배가 뚫렸음에도 알아서 숨이 붙어있는 그런 상황이 아니다. 그냥 할 수 없는 걸 하게 해달라는 계약을 하고 있는 상황.
천후는 저울을 재보았다.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것과.
이그네스를 구할 수 있는 가능성.
어느 쪽이 무거운지는 분명했다.
“하겠어.”
어둠 속에서 소년의 웃음소리가 울렸다. 기분 탓일까? 분명 서로 육신이 없을 텐데도, 그 소리에는 박수 소리가 섞여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한참을 그렇게 웃던 소년이 말했다.
“좋아. 그럼 나, 가야의 아들이 너에게 길을 열어주마.”
빛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