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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드하렘-249화 (249/324)

249화

"아------"

염정이 노래한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빛무리를 내려보며.

지금까지 화염에 휩싸여 얼굴의 외형조차 보이지 않았던 그녀는 이제 와서야 눈과 입 정도가 구별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런 그녀가 하늘에서 내려와, 백광 앞에 섰다.

"아------"

"아------"

그의 곁에. 그녀와 똑 닮은 빛의 천사 셋이 나타나 그의 곁에서 노래했다. 아리아가 어울리며, 섞인다.

홍염은 주저한다.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기색. 다가가도 괜찮은지 어떤지를 알 수 없었다. 다행히도, 천사들은 그녀를 밀어내지 않아 그녀는 그의 앞에 설 수 있었다.

그걸로 끝.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

바로 그때

"잡았…다…!"

콰악! 백열이 그녀의 팔을 잡아왔다.

파직. 파지지직. 그것만으로 사방에 스파크가 튀며 눈을 멀게 할 것만 같은 빛이 폭사 된다. 그러나 백열 두른 주인은 아무렇지 않게 그것을 이겨내며 그녀를 잡고 있었다.

"정말…. 큰일 날 뻔했네. 이봐. 이그네스. 정신은 차렸어?"

"아------?"

갸웃. 머리가 옆으로 기울여지며, 주변에 화염 나비들이 날아다녔다. 아름답게 보이는 그것들은 그러나 곧 그에게 한꺼번에 날아들었다.

퍼퍼퍼펑!

닿을 때마다 폭발이 일어났다. 그 와중에도 이그네스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만 갸웃거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제 그녀의 기준에서 이건 공격의 카테고리 안에 들어가지조차 않는 듯했다.

"으, 으윽!"

물론 당하는 천후의 입장에선 전혀 그렇지 않았다. 한두 번이면 아무렇지 않지만 이렇게까지 무더기로 날아와 터져대니 아무리 그라도 버티기 힘들었다. 아무래도 이 상황이 길게 가면…. 힘이 다하거나. 아니면 자기 쪽에서 다시 정신이 나가거나 할 것 같았다.

그럴 순 없다.

기껏 여기까지 왔다. 이 지경이 되어서야 그녀를 잡고 있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준비해온 수단을 쓸 때다.

"흡!"

천후는 자신의 혀를 세게 깨물어 입안에 피가 고이게 했다. 어처구니없게도 거의 혀가 잘릴 정도로 물어뜯었는데, 너덜너덜하던 것이 몇 초 지나지도 않아 원상 복구되어버렸다.

그리고 천후는 그런 감상을 느낄 새도 없이- 다른 한 손을 그녀의 머리 뒤로 가져갔다.

"이그네스. 미안!"

와락! 단번에 그녀를 끌어들인 천후는 그녀와 입을 마주 댔다.

"!"

파콰콰콰콱! 좋은 장면이라고 생각하기엔 너무나도 살벌한 빛이 사방에 터졌다. 그렇지만 천후는 그에 굴하지 않고 이 상황에서도 신기할 정도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피를 그녀의 입안에 밀어 넣었다.

"우…웁?"

당황한 건지 그의 몸을 밀어내며 저항하던 그녀는 그러다, 어느 순간 고개를 위로 치켜들었다.

"아, 아아아아아--------"

그녀의 몸을 뒤덮던 화염이 더욱 강해져, 주변을 뒤덮었다.

*

기억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은. 사방을 두르고 있는 회백색의 벽돌과 철로 된 문. 그리고 키보다도 높은 곳에 있는 쇠창살 달린 창이었다.

창이라고 해봐야 거기에만 벽돌이 빠져있는 정도에 불과했다. 때문에 밤이 되면 안은 늘 추웠고, 날씨가 나빠지면 그때마다 힘들었다.

바닥에는 짚이 깔려있었고, 침대 하나와 화장실이 있는 공간.

그것이 그녀의 전부였다.

때가 되면 연명은 할 수 있게 식사를 넣어주었지만, 막상 그것을 가져다주는 사람을 본 적은 없었다.

문 아래 달린 작음 틈을 통해서 들어오면 그것을 먹었다.

그것이 끝이었고, 그것이 그녀의 인생이었다.

자신이 누구인지도.

왜 이런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처음부터 이랬고, 앞으로 죽 이럴 거라는 것만 알 수 있었다. 그것이 너무나 당연해서 의문조차 품지 않았던 시절.

그나마 그녀가 알게 된 것이 몇 개 있었다.

예를 들어.

그녀가 벽에 손을 짚으면 벽에 그을음이 생긴다거나.

짚 위에 너무 오래 올라가 있으면 불이 난다거나.

문에 손을 짚으면…녹아내린다거나.

처음 그런 현상들을 보았을 땐 너무나 놀랐다. 그녀에겐 이 밖으로 나간다는 발상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밖'이라는 세계가 있을 거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자신의 공간을 변형시키는 것 자체가 두려웠다.

그녀는 얌전히.

자신이 살아가던 대로 계속 지내기로 했다.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그날.

그래. 그날.

"이곳이 메리 언니가 있는 곳인가요? 비켜주시겠어요?"

"엘리제 공주님. 이곳은 아무리 공주님이라고 해도 함부로 출입할 곳이 아닙니다."

"어머. 아바마마의 재가는 받았답니다. 제가 설마 아무도 모르게 이 탑의 꼭대기까지 찾아올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그, 그건 그렇습니다만."

철문 밖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신기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들어왔던 목소리는 하나같이 굵은 것이었으며, 그리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몇 번인가 신기하여 말을 걸어도, 그들은 대답해준 적이 없었다. 아니 어쩌면, 그녀가 익힌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에…. '저편'에서 전해주는 정보를 취합해서 익혔다. 그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가 손끝에서 불꽃을 만들어내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래도 그들은 답해주지 않았고, 그녀는 곧 기대를 버렸다.

그런데 지금 이 목소리의 주인은 달랐다.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말 같은 걸 할 줄 모른다고 생각한 이들을 움직이게 하고 있었다.

대단해. 놀랍다. 그녀는 목소리의 주인과 만나보고 싶어졌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녀의 꿈은 이루어졌다.

긴 백금발의 소녀였다. 자신과는 달리 분홍빛의 예쁜 옷을 입은 그녀는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읏 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세상에. 뭔가요, 이건."

"얼마 전 깔아두었던 짚을 태웠습니다."

"왜 치우지 않았나요?"

"그, 그건…."

남자들은 소녀의 말에 쩔쩔맸다. 그들은 결국 그녀의 지시에 따라 방을 정돈했다. 그동안 소녀가 접근해왔다.

"안녕하세요, 메리 언니."

"…?"

메리? 그게 누군지 알지 못해 고개를 갸웃했다.

"말을 하지 못하시나요?"

"해…. 하지만 메리 뭔지 몰라."

"그게 언니의 성함이에요."

"메리…."

머리가 아팠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기억 이전의 것들이 떠올랐다. 남자와 여자와 여러 사람의 대화가.

"으…."

메리는 신음을 흘렸다. 그걸 떠올리는 건 힘들고, 괴롭다.

"이런…. 죄송해요.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언니도 왕족인데 이런 삶이라니…."

"…?"

그녀가 하는 말은 하나같이 알아듣기 힘들었다.

"걱정 마세요. 제가 언니를 복권해드리겠어요. 일단은… 교육부터 필요하겠군요."

호언장담하는 모습에 메리는 멍하니 그녀를 올려보았다.

*

메리는 영특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교육이란 걸 받아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빠르게 지식을 흡수해갔다.

마치 응당 알았어야 하는, 혹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되새기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어느새 그녀의 행동엔 격식이 붙었고, 흐트러져있던 행색은 공주에 어울리는 그것으로 변해갔다.

그렇지만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도 있었다.

그녀가 탑에 갇힌 이유 그 자체.

불꽃의 힘.

"그것만 어떻게 되면 바로 성으로 돌아오실 수 있을 텐데."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닐 테지. 그랬다면 나를 이런 탑에 가둬두었을까."

교육을 받고 자아를 확립해나가면서 그녀는 고거의 기억 일부를 되찾았다. 자신의 몸에선 다른 사람과는 다른 정체불명의 기이한 힘이 흘러나오고, 이건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는 것도.

아버지인 부왕은 그 때문에 그녀를 공주로 인정치 않고 탑에 가둬버렸고, 엘리제 3세는 개인적인 호기심으로 자신을 찾아왔다는 것까지 알았다.

부왕의 걱정은 타당했다. 그녀의 힘은 자신의 의지로 통제할 수 없었다. 어느 정도는 가능하지만, 갑자기 휙 튀어나오는 경우도 많아 늘 위험했고, 그녀의 방에는 곧장 화재가 일어나곤 했다.

이런 몸을 가진 여식을 딸이라고 인정하긴 힘들었으리라.

"그런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책이라면 이번에도 많이 가져왔어요."

"고맙다."

메리는 책을 좋아했다. 사정상 탑을 빠져나갈 수 없는 그녀는 세상 밖의 이야기 대신 들을 수 있는 책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 정도의 힘이 있으면 그냥 확 다 뒤집어버리면 될 텐데."

아직 어렸던 엘리제 3세가 극단적인 이야기를 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이 몸으로 다른 이들과 함께 살아간다니. 무리다.

동화나 소설 속에서 자주 그리는 로맨스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한다. 지금 이렇게 방에 들어와 있는 엘리제를 태우지 않게 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심력을 소모하고 있지 않은가?

그저….

그저 살아가는 것만으로 족하다.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만. 자신이 여기에 틀어박혀 있다 언젠가 생을 마감해야 한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이전보단 나아지지 않았던가. 지금은 그래. 이렇게 책이라도 볼 수 있다. 이것에 만족해야 한다. 아무렴. 만족….

"그러지 마시고…. 언제 한 번 밖에 나와서 꽃구경이라도 가요, 언니."

"꽃…."

그림이나, 엘리제가 꺾어온 것으로밖에 본 적이 없었다. 메리의 눈이 아련해졌다. 가둬두었던 욕망이…. 새어나온다.

이 작은 골방에서 몇 년을 지냈던가. 밖의 모습 따윈 모른다. 그뿐일까. 엘리제가 돌아가면 다시 간수들은 불러도 대답조차 없는 삶이 돌아오곤 했다.

어찌 밖에 나가고 싶지 않을까? 책에서 펼쳐지는 모험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괜찮죠? 지금도 이렇게 할 수 있으니까… 탑 아래에 잠깐 내려가는 것 정도는."

"……."

여기선 아니라고 해야 한다. 그녀의 힘은 그렇게 속 편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를 자극할 거리가 지극히 적고, 완전히 익숙한 장소이기에 사람 하나가 더 늘어나도 뻗어 나오지 않고 있을 뿐이다.

작은 변수 하나에도 언제 불바다를 만들지 모르는 몸이 그녀의 정체였다. 그러나…

"…응."

욕망을 이길 순 없었다.

얼마 후. 그녀는 세상을 보았다.

힘들게 마차를 타고… 꼼꼼하게 관리되고 있는 화원까지 와서 거기서 직접 꽃을 꺾어 화관을 만들었다.

그것을 엘리제에게 주니 기뻐했다. 그녀 역시 웃었다.

희망을 품었다.

괜찮은 것 아닐까. 여기까지도 나올 수 있었으니까. 어쩌면 시간이 지나면…. 더더욱 나아지면….

그런 희망이 그녀를 미소 짓게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것이 엘리제와의 마지막 추억이 되었다.

*

그해 겨울은 매우 추웠지만, 그날만은 춥지 않았다.

교외에 떨어진 첨탑에서 화염이 피어올라, 수많은 사람이 멀리서 불구경을 하고 있었다.

거기서 의식을 반쯤 잃은 채 노래하던 이그네스란 이름이 붙여진 화염마인은 지팡이 든 다섯 사람에게 간신히 진정된 후, 그들에게 이끌려 성당으로 왔다.

묘지로 쓰이는 성당.

"너는 이제 잠들어야 한다."

눈물이 나왔다. 가지고 있는 추억이라곤, 몇 번 만나지도 못한 동생과 꽃놀이를 한 것이 전부라니.

그런데도 이럴 수밖에 없단 걸 이해하는 자신이 미웠다.

좀 더 이기적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녀는 도저히 그렇게 되지 못했다.

그들은 잔인하게도 자신을 잠재우는 데 동의를 구해왔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것이 끝.

시시한 유폐 공주의 이야기.

그 공주는 이제 창이라도 하나 뚫려있던 탑이 아니라, 이 세상 자체와 완전히 결별하는 관속에 들어가며 잠이 들었다.

*

"음…."

그렇게…. 잠이 들었을 터였다.

그런데 뭘까. 눈을 뜨니, 다른 것이 보여. 내 눈앞을 전부 가로막은 당신은 누구?

잘 모르겠다. 하지만 아아. 따뜻해.

이 사람과 마주 닿아있으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그 아이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그렇게 나를 생각해주는 사람이 또 있었을까?

아아.

떠올려보면, 또 하나 있었다.

이름이 뭐였더라?

분명. 키가 크고, 힘도 괜히 센 그런-

"영…천…후…?"

섬광 속에서 이그네스가 아리아 대신 말을 자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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