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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드하렘-250화 (250/324)

250화

간신히 자아낸 목소리에 천후는 답했다.

“이제 좀 정신이 들어?”

“으…. 아….”

그러나 그녀는 그 말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이성은 있지만 그건 마치 머그잔에 담긴 우유 속의 조각난 비스킷 부스러기와 같아서, 혼탁한 의식 속에 간신히 떠 있었다. 그것만으로는 의식을 본래대로 되돌리는 건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지만 다행히도. 여기까지 오면 그 방책은 준비되어 있었다.

천후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반지. 이 난리통에도, 두 마인이 내뿜는 빛무리 속에서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있는 루비 반지였다.

“손을 줘. 이그네스.”

말은 하면서도 대답은 바라지 않는다. 천후는 힘겨워하는 이그네스의 손을 강제로 잡아다, 반지를 가져다 댔다.

그러자….

즈응. 반지의 문자들이 검붉은 색으로 빛나더니, 그녀의 온몸의 혈관이 빛났다.

“아------”

그 반응에 놀라 이그네스가 아리아를 내질렀지만, 이미 호응을 시작한 반지는 천천히.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지기 시작했다.

분명 고리가 그녀의 새끼손가락이나 들어갈까 싶을 정도로 좁았는데, 어느샌가 다시 그틈이 넓어져 있었고, 루비 역시 조금 더 커져 있었다.

이윽고 반지는 그녀의 오른손 약지에 끝까지 들어갔다. 그 순간, 그녀는 벼락을 맞은 것처럼 허리를 뒤로 꺾더니 온몸을 경련하기 시작했다.

천후 역시 온몸에 힘이 갑자기 빠져나가는 느낌에 신음을 흘리며, 그날 고인규가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

“피가… 필요하다고요?”

“그래요.”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천후는 당황했다. 여기에서 갑자기 자신이 엮일 이유를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유를 물어보면 안 된다고요?”

“가급적이면?”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수상하지 않은가? 게다가 마음에 걸리는 건 그것뿐이 아니었다.

“지금 제가 사용할 수 있는 최대위력의 주문은 잘못 사용하면 이성이 날아가요. 그런 상태에서 피를 줄 수 있을 어떨지….”

“그건 걱정 안 해도 돼요. 이 안에서는.”

“…….”

안심하라는 말투였지만, 거리낌은 더 늘었다. 대체 어떻게, 무슨 수로 그 방비를 해놨다는 말인가? 아니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하지?

고인규의 능력 자체는 신뢰하고 있었지만, 이건…너무 지나친 거 아닌가?

“흠. 의심하고 있군요. 저를.”

“아. 아니, 형. 전….”

“아아. 아니에요. 이 경우엔 절 의심하는 게 맞죠. 당연합니다. 뭐 그럼 제가 좀 더 양보를 하죠. 어려운 부분은 아니니까. 뭐 간단히 말해서 당신을 전담하던 세 명. 그러니까 한국 지부장님과 미연 씨, 그리고 저는 당신에 대한 대처방법을 다들 어느 정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방법론은 다 조금씩 다르지만요.”

보라색으로 타오르던 오오라를 조금 흩어낸 고인규는 안경을 고쳐 썼다.

“제 경우엔 이렇게 준비된 공간에 한정해서 당신의 폭주를 아예 원천 차단할 수 있죠. 이것도 시간 제한이 있고, 저도 소모가 필요한 일이라 당장 물어보질 않길 바란 거고요. 그리고 당신의 피를 요구한 건….”

그는 리미터의 소체가 될 루비에 시선을 주었다.

“방금 설명했지만, 지금 이 리미터 제작에 가장 결정적인 문제가 되는 건 두 가지예요. 하나는 그녀가 신역에 달했다는 점. 다른 하나는 그녀가 방출하는 힘이 늘어났다는 점. 이미 그녀는 S 랭크 방출 마법사 수준을 넘어서고 있죠. 이 루비만으로 받아낼 수 있는 출력 한계를 넘었어요. 게다가 시간도 부족하죠. 그래서 가장 빠르게 구할 수 있는 땜빵을 찾았습니다. 그게 당신이죠.”

“저…요?”

“네. 신역에 닿은 마법사를 억제할 리미터를 만들려면 마찬가지로 같은 영역에 닿아본 적이 있는 사람의 뭔가가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정신을 잃은 이그네스보고 자 이걸 10년만 가지고 있으세요 라고 할 수도 없는 이상, 다른 사람이 필요하죠. 그럼 최완 님이나 당신이고…. 리츄얼적으로도 당신이 더 인연이 깊으니까.”

“무슨 의미죠?”

“당신이 신역에 접속했을 때 흘린 피로 일종의 맹약을 맺게 할 겁니다. 이 루비는 지금까지 쓰이던 그냥 리미터가 아니라 일종의 중계 장치로 만들고…. 실제로 이그네스를 억제하는 건 피로 연결된 당신이 되는 거죠. 즉, 이그네스의 리미터는 당신이 되는 겁니다.”

고인규의 발언에 천후는 아연했다. 이건 그러니까 루비만으론 이그네스라는 구멍 뚫린 항아리의 물을 다 못 받으니까, 바가지를 하나 더 구해다가 받는데, 그 바구니끼리의 연결 방법이 ‘피’고, 그 추가적인 바가지가 영천후가 되었다는 소리인데….

“그럼…. 저는 어떤 상태가 되는 거죠?”

쏟아져 나오는 마력을 대신 받아 억눌러주려면, 당연히 자신도 영향을 받을 터였다. 바가지에 물이 차니까 말이다. 그 대가를 물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고인규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확답은 그때 가봐야 할 수 있겠지만…. 아마 성공만 한다면 그리 대단한 영향은 받지 않을 거예요.”

“네? 그게 말이 되나요?”

“…….”

천후의 질문에 고인규는 가느다란 눈을 감았다가 떴다. 다시 뜬 그의 눈동자엔 아주 약간, 안쓰러워하는 기색이 담겨있었다.

“천후…. 지상에 내려간 지도 한참 되었고, 다른 사람들도 많이 만나봤을 테니까. 이제 슬슬 눈치챘겠죠? 당신이 ‘특별한 존재’라는 걸….”

천후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무슨 소리를 하려는지는 알 수 있었다.

유그드라실에서 살던 시절에도 느끼곤 했다. 자신의 마력동화가 다른 이들과는 전혀 다른 현상임을. 하지만 유그드라실엔 애초에 손에서 불나가는 마법사도 많은 마당이다 보니, 이게 그렇게 특이한 현상인지는 잘 자각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다르다. 자기 의지로 통제되지 않는 이 힘은 분명히 이질적이고…마법과 비슷하지만 또 다른 영역에 걸쳐있었다. 아마 그가 당장 폭주한다면 그 역시 이그네스와 마찬가지로 디제스터 취급을 받게 되리라.

복잡한 마음에 천후는 입을 다물었지만, 고인규는 능히 그 마음을 짐작한 듯 다음 말을 꺼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당신의 힘의 근원을 알아요. 전부는 아니지만, 당신이 왜 그런 몸을 가지고 있고, 그게 어디서 기원하는지 짐작하고 있지요.”

“……!”

머릿속에 번개가 떨어지는 것 같았다. 놀라서 올려보니 고인규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물론…. 저는 그 내용을 말씀드릴 수 없어요. 저에겐 한국 지부장님처럼 강제적인 금제가 걸려있는 상태는 아니지만, 이게 금제가 걸릴만한 일이라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당신에게는 미안하지만 말이죠.”

“형….”

“돌아와서. 제가 말하고자 하는 건…. 지금 제가 하려는 조치 자체가 당신의 특성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는 거예요. 특성이 없었다면 당연히 이런 짓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죠.”

이 말로 천후는 고인규가 천후 자신보다도 천후의 특성에 대해 해박하게 꿰뚫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조치를 취하면 이그네스의 힘이 당신에게 흘러들면서 안정화될 거예요. 다만 당신 역시 인지는 못 하겠지만 영체 등에 많은 부담이 갈 거라 아마 A 랭크 이상의 주문을 사용하기 많이 힘들어질 거예요. S 랭크 신위 발동은 가능하겠지만, 당신이 이성을 가지고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의 주문은 시도도 못 할 몸이 될 겁니다. 저는 이 기간이 적어도 5년은 넘게 갈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페널티. 하지만 천후는 그것이 그리 대단한 페널티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애초에 지금 S 랭크 주문은 도저히 맨정신으로 사용할 수 없다. A 랭크에 익숙하지 않던 시절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다. 그런 건 쓸 수 있어봐야 큰 의미가 없었다. 적어도 그의 입장에선 말이다.

“강요하는 모양새가 되어버렸지만, 빠르게 결정해주세요. 이 상태는 그리 오래 유지 못 하니까요. 여러 번 쓸 수도 없는 거고.”

“하겠어요.”

망설임 없는 대답에 인규는 안경을 고쳐 썼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네. 그걸로 끝난다면.”

“…어쩌면 제가 거짓말을 하거나, 예상하지 못한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조금은 망설여야 하는 거 아닙니까?”

낮은 톤으로, 일부러 겁을 주려는 것 같은 목소리에 천후는 도리어 웃었다.

“형이 저한테 거짓말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리고…. 형의 능력도 믿고요.”

“후. 마지막에 다 와서 기특한 소리를 해주는군요.”

가벼운 웃음을 보였던 인규는 다시 오오라를 끌어올렸다.

“일단 하나 말씀드릴 건…. 제가 무조건 당신 편은 아니라는 거예요. 전 다수결을 좋아하고, 당신을 받아들이기로 한 건 그 다수결의 결과였어요. 그러니 전 그것에 최선을 다해 따르는 것뿐입니다.”

“네, 네. 알겠어요.”

굳이 저런 소리는 하지 않아도 되는데. 정말 특이한 사람이다. 그러다 보니, 둘 다 서로를 보며 웃고 있었다.

그렇게…. 천후는 부작용 없이 S 랭크 주문을 끌어올려 그에게 피를 건네줄 수 있었다. 그는 오래 걸리지도 않아 작업을 마무리하더니, 변화한 리미터를 그에게 넘겨주며 당부했다.

“기억해두세요. 이 리미터를 사용하려면 일단 이그네스에게 당신의 피를 먹여야 합니다. 어떻게든. 이것도 의식 중 하나예요. 그 뒤에 이 반지를 끼우면 효과가 발동할 겁니다. 그럼…성공을 빌죠.”

*

아쉽게도. 고인규의 예상대로 인간 리미터가 된 여파는 S 랭크 주문을 쓰지 못하는 정도로 끝나지 않았다.

백염이 흩어지며 흑염이 되고, 그것이 다시 무색 아지랑이로 변해가는 것을 느낀 천후는 신음했다. 아직 여유가 있었던 스펠 세이브가 흩어지며, 그 자리를 이그네스의 마력이 주문의 형태로 들어찼다.

그가 발휘할 수 있는 주문의 총 역량 중 일부를 그녀와 연결되었다는 것 하나만으로 유지비로서 가지게 된 것이다. 게다가 당장은 여유공간이 있는데도 한 번씩 리셋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이그네스. 정신이 들어?”

“으…. 아….”

천후는 품 안에 안긴 여성을 불렀다. 아직 몸에 홍적의 기운이 희미하게 남아있는 적발의 여자. 이그네스였다. 그녀는 어린 모습을 하고 있던 때의 그녀가 완벽하게 정변 하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싶은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하늘하늘 날리는 적발에 잡티 하나 없는 나신. 천천히 뜬 눈동자는 보석처럼 빛을 내며 그의 얼굴을 비치고 있었다.

“정말 넌…. 오지랖이 넓구나.”

“하하.”

정신을 차렸단 걸 단번에 알게 해주는 말이었다. 너무 그녀 다워서 웃음이 나온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성장한 몸. 약지가 무겁다 싶어 바라보면 반지가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이것이 리미터가 아니란 것을 알았다.

자신의 힘이 은연중에 그에게 흘러들어 가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이 반지는 그것을 위한 일종의 매개체. 그 의미는 무겁다. 그리고…미안할 따름이다.

“고맙구나…. 하지만 이러면 이럴수록 면목이 없음이야. 왜 이리 나에게 잘해주는 거냐? 난… 난 너에게 줄 것이 없구나.”

목소리는 어느새 울먹임이 되어있었다. 천후는 성장했어도 그보단 한참 작은 그녀의 볼을 어루만졌다.

“너는…. 나와 너무 닮았어.”

그녀가 지금까지 보인 행동. 그녀가 겪었던 모든 일들이 그와 판박이다. 다른 것은 없었다. 오직 그것뿐.

그렇기에―

“너를 구원하지 못하면 나 자신도 구해내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

너조차 구원하지 못하면. 나에게 안배되어 있을 운명은 헤쳐나가지 못할 것만 같았어. 아직 찾아오지도 않은 운명이라도….

그 발언에 이그네스는 오히려 조금은 안도한 표정이 되었다.

그는…. 이그네스가 보기엔 이타심의 화신 같은 인간이었다. 그게 너무도 심해서…. 그에게는 자기 자신을 아낀다는 마음이 없는 게 아닌가 했다. 그것이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그렇다면 오히려…. 안심이 된다.

꼬옥.

안도감에 몸에서 힘을 푼 그녀는 그의 품에 얼굴을 묻고 눈을 감았다.

먼. 먼 꿈을 꾸었다. 그것은 이미 예전에 돌아간 돌이킬 수 없는 나날의 꿈.

무서운 꿈을 꾸었다. 그것은 지금 자신이 실제로 일으켰던 일.

그 어느 쪽이건….

그래. 조금은 지쳤다.

그러니 조금은 쉬자고. 그렇게 마음먹으며….

첨벙.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은 채. 녹아내린 남극점 호수에 떨어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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