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하렘-251화 (251/324)

251화

<너에게 새로운 삶을>

"천후야!!!! 천후야!!!!"

남극점. 바이칼 호 뺨치는 너비의 호수가 되어버린 그곳에는 보트 여러 척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그네스의 힘을 봉인한 이후. 호수로 떨어진 둘이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이다. 그들을 발견하기 위해 일리미네이터와 유그드라실 직원들이 나서서 호수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마법이 완전히 풀렸었다면 살아있을 수 있는 시간을 이미 넘긴 게…."

"닥치고 찾기나 해. 알겠으니까."

저편에서 들려오는 말을 들은 강호는 가슴이 옥죄는 느낌을 받았다. 이미 둘이 실종된 지 몇 시간. 저체온증은 이미 찾아오고도 남았으리라. 아무리 천후가 강건하다지만….

그때였다.

피이이이잉….. 파아앙.

호수의 한구석에서…. 작은 불빛 하나가 하늘 위로 치솟더니 마치 불꽃놀이 할 때 쓰는 폭죽처럼 터졌다.

"…신호?"

발견 신호로 쓰기로 한 수단은 다른 것이었다. 폭죽을 준비하진 않았는데? 그러다 강호는 곧 다른 것에 생각이 미쳤다.

"저쪽으로 가주세요! 어서!"

부르르릉. 그녀가 탄 모터보트가 호수를 가르며 불꽃이 솟아오른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흡!"

바로 강화마법을 건 강호는 호수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조금 지나….

"푸하! 여기! 여기다!"

그녀는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있는 두 사람을 끌어안은 채 수면으로 올라왔다.

"헉…! 찾았다! 찾았어!"

그들을 끌어올리며 내는 목소리에 보트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보트 위에 누운 둘은 이미 저체온증과 산소 결핍이 왔는지, 입술은 시퍼레져 있었고 피부 변색이 일어나고 있었다. 죽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모습. 하지만 강호는 세차게 외쳤다.

"아직 숨은 붙어있습니다! 어서 이송을!"

주변이 바빠졌다.

*

밤.

현대 선진국 도시의 하늘엔 북극성 하나 찾아보기 힘들지만, 이곳에서 올려본 밤하늘은 찬란한 보석을 박아놓은 것처럼 아름답기 그지없다.

아니, 사실 인간의 빛이 지구의 밤을 수놓고 있는 지금에 와서도 이렇게 아름다운 밤하늘을 볼 수 있는 곳이 그렇지 않은 곳보다 훨씬 많았다. 별이 아직은 여력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랄까?

"음. 찾아냈는가? 아쉬운 일이로고."

'그녀'가 올라서 있는 곳은 나뭇가지 위였다. 나뭇가지라곤 해도 그 높이는 높았다. 그냥 높은 정도가 아니라, 인간이 만든 그 어떤 건축물도 다다르지 못한 높이까지 자라있는 나무.

악시스 문디의 위에 서 있었다.

그녀는 그 위에서 세상을 굽어보며 웃고 있었다.

"뭐가 아쉬운 일이란 거야? 이 시대에 새로운 신이 태어난들 의미가 없잖아."

"후후. 여전히 매정하구나, 블뤼드. 너는 섭하지 않은 게냐? 그대의 여동생이 생길 수 있었는데."

"그딴 건 됐어. …이런 꼴로 살아가는 건 열셋이면 족하지."

그녀의 곁에 함께 서 있던 금발 소년의 말에 여자는 웃음 지으며 그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분명 옆에 있었는데, 어느새 뒤로 돌아가 품는 동작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재빨리 움직였다기보다는-

"예란. 당신도 인간사엔 관심을 꺼. 이미 우리들의 시대는 끝났잖아."

"야속하구나…. 그것이 맞지만 눈이 가는 걸 어쩌겠느냐? 게다가… 인간의 시대가 끝날 수 있는 때가 아니냐?"

"그제야 우리의 숙명도 끝나겠지."

"후후. 그래. 그렇기에 보는 것이다."

"……."

금발 소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차피 그녀를 설득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미 수백 년 전부터 그랬다. 이제 와서 그녀가 제멋대로 구는 걸 계속 막을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다 부질없는 짓이니까.

지금 저들이 잠시 즐거워하는 것조차….

소년의 시선이 다른 쪽으로 옮겨갔다. 예란은 그에 따랐다. 입가에는 미소가 걸린다.

"그대도 신경 쓰이는 것이 있나보군?"

"…시끄러웠을 뿐이야. 저쪽은 질리지도 않는군. 그녀가 화를 내는 건 저런 것 때문이기도 할 거야."

"그럴 테지…. 자아. 그럼 같이 지켜보자꾸나."

한숨을 내쉰 블뤼드라 불린 소년은 자신을 안고 있는 그녀를 굳이 떼어내지 않고, 주욱 한곳을 바라보았다.

하긴. 그녀에게 날카로운 말을 했지만…. 어차피 이것 말고는 할 일도,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우리.

영생을 부여받은 부외자들은.

그의 눈엔 철로 된 차량이 한곳으로 몰려가는 것이 보였다. 상대 쪽의 방비는… 그리 대단치 않다. 지금은 더더욱.

거리는 멀고, 아직 일은 시작되지도 않았음에도, 피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멍청한 것들."

청색이던 그의 눈이 황금색으로 물들었다 돌아왔다. 잠시 흉포하던 그 눈매는 마지막에 가선 슬픔을 내비치고 있었다.

안아주는 힘이 조금 더 강해지는 것을, 그는 거부하지 않았다.

우웅-----

악시스 문디가 빛을 발했다.

*

유그드라실로 올라온 둘은 회복마법으로 치료를 받았다. 상태를 확인해본 결과 그들의 몸 상태는 굉장히 약해져 있었지만, 아주 최소한의 보호마법이 걸려있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사실 이 회복 절차를 밟게 하는데도 조금 소란이 있었다. 영천후는 그렇다 치고, 이그네스가 문제였다.

"저희 유그드라실에선 그녀의 치료를 거부합니다."

그 소리에 일리미네이터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주장은 쉽게 부정하기 힘들었다. 일리미네이터들도 바보는 아니다.

갑자기 남극 한가운데서 전혀 모르는 붉은 머리의 여자가 영천후와 함께 구조되었다. 그 정체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에야 죽은 것처럼 누워있다지만, 정신을 차리면 다시 날뛸지 알게 뭔가?

그렇지만….

"…말을 하고 보는 건 좋은데 좀 뒷감당은 생각하고 말해주겠나?"

가장 앞줄에 있던 안소니는 뒤에서 느껴지는 살기에 침을 꿀꺽 삼키면서 말했다.

"……."

이미 칼을 뽑아든 검귀가 말 한마디 없이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그네스는 막지 못했다지만….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그녀 앞에서 마법을 사용하지 못한다. 총기로 무장한 사람도 없는데, 이미 난향, 난화를 손에 든 저 여자를 대체 어쩔 건가?

수틀리면 다 죽여버리겠다는 기세가 너무 노골적이라 유그드라실 측은 답변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보면 그녀뿐 아니라 영천후도 정신 차리고 이그네스가 죽어있으면 발광을 할 텐데 그것도 문제가 됐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나서야 그들은 결국 둘 다 치료하기로 결정했다.

"강호 씨. 칼을 넣으시고 진정하세요. 당신 특성 범위는 너무 넓어서, 잘못하면 회복마법도 캔슬됩니다."

"……."

그들이 치료실로 들어간 후에도 살기를 내비치던 강호는 레이나드의 말에 간신히 특성을 풀었다.

그 뒤로 한 시간 이상이 지나서야 영천후와 이그네스는 정신을 회복할 수 있었다. 잠시 몸 상태를 점검한 천후는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자 이그네스와 함께 홀로 나왔다.

"천후야. 괜찮은 거냐?"

"어. 선배. 아직 좀 어지럽지만, 움직일 정도는 돼."

당장에라도 울 것 같이 물어오는 강호를 안아주며 진정시킨 천후는 천천히 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들이 보내는 눈빛을 보며 쓰게 웃었다.

'…이럴 것 같았지.'

그들의 눈빛은 매우 익숙한 것이었다. 여기, 유그드라실에서 살아갈 때. 그를 사람 취급 안 해주던 자들의 눈빛과 닮았다.

생소함. 두려움. 놀라움…. 그것이 거부감이 되어서 그를 밀어냈다.

방 안에 감금당하다시피 했던 시절에는 그런 눈빛은 한두 개만 보면 되었지만, 지금 여기엔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예상은 하고 있었다. 천후는 그렇게 충격을 받지 않았다. 그는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대신…. 곁에서 두려워하고 있는 소녀, 이그네스의 어깨를 가만히 끌어당겨 안아주었다.

"천후야…."

물에서 막 건져왔을 때와는 달리 다시 어린아이처럼 작아진 그녀는 떨리는 눈동자로 그를 올려보고 있었다. 안심하란 듯이 그녀의 등을 쓸어준 천후는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회복할 때까지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늦은 시간인데도."

웅성웅성. 그의 입이 열리자 홀이 소란스러워졌다. 지금까지 시간이 멈췄던 것 같았던 분위기가 거짓말처럼 깨졌다. 그들이 다음 취한 행동은 의문을 풀기 위해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옆에 있는 그 아이는 이그네스입니까?"

"당신도 이그네스처럼 디제스터가 될 수 있는 겁니까?"

"인간이 맞긴 합니까, 당신들은?"

쏟아지는 말들에 이그네스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인간이 맞긴 하냐는 말에 그녀는 상처 입으면서도 할 말이 없었다.

방금까지 남극 하늘 위에 떠 있었던 게 본인인 이상 어찌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일단…. 하나씩 답해드리죠. 제 옆에 있는 아이는, 네. 이그네스 엠프레스가 맞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저와 비슷한 마력동화형 마법사죠. 인간이냐라…. 마법사가 인간이라면 우리도 인간 아닐까요?"

"……."

어깨를 으쓱하며 내놓은 말에 모두 입을 다물었다. 힘의 차이가 있을 뿐 그들도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건 똑같은 입장이니, 그 분별이 모호한 게 사실이었던 것이다. 그 점을 파고들어서 천후는 말을 이었다.

"저는 그 경계가 힘을 통제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이제 완전히 힘이 통제되지요. 그 대가로 많이 약해져서 이제 정말 어린 아이 수준입니다만."

그들의 시선이 이그네스에게 집중되었다. 깜짝 놀란 그녀는 그러나 도망가지 않고 그 시선들을 받았다.

언제가 되었던 한 번은 거쳐 갈 수밖에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당장에라도 울 것 같지만, 그래도 의연하게 마주 보는 그녀의 모습에서 일리미네이터들은 확실히 의식을 가지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말만으론 안심하실 수 없겠죠. 그러니…. 저와 이그네스를 어떻게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좋아요. 대신에 이번 한 번만…. 지금까지의 저를 보아서라도. 그녀가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게끔 해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녀가 다시 한 번 폭주한다면 그땐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천후야!"

그 말뜻을 깨달은 강호가 소리쳤지만, 그는 그녀의 말을 막고서 그들 앞에 고개를 숙였다.

'그래. 언젠간 거쳐야 할 일이었다.'

어쩌면. 조금 늦은 걸 수도 있다고 천후는 생각했다. 그의 특성으로 인해 발휘되는 많은 힘은, 같은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마법사들조차도 두려움에 떨게 하는 것이었다.

거기에서 나는 너희의 편이니 두려워하지 말아 달라는 확인 절차는…. 오히려 아주 예전에 거쳤어야 할 일이었다.

원래는 DS를 만든 직후에 이미 했어야 할 일. 그는 마음을 비우고 대답을 기다렸다.

홀의 분위기가 엄중하게 가라앉았다. 함부로 말을 꺼내는 사람조차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DS 멤버들이었다. 어수선한 분위기에 이곳저곳 흩어져있던 그들은 한데 모이더니, 말없이 그의 뒤에 섰다.

"레이나드 씨, 태원 씨."

"후…. 이미 우리는 네 아래 들어갈 때 각오는 하고 있었다. 생각했던 것 이상이긴 하지만."

"괴물이면 어때요. 맨정신에 세계 최고의 탱컨데. 그거면 됐습니다. …그러니까 앞으론 말 좀 듣고 행동해줘요."

다음 그쪽으로 다가온 것은 컨퀘스터 인원들이었다.

"영국에서 있었던 일을 마지막까지 당신 혼자 결자해지한 셈이니. 우리는 오히려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그다음은 머니 크래프트.

"우리 아가가 당신 이야기를 종종 해요. 당신이 '키'라고."

"……."

셀레나가 30대 후반이 되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싶은 여성이 웃으면서 다가왔다.

"그리고 당신에겐 돈 냄새가 나. 그럼 당신이 뭐든 상관없어요."

한결같은 이야기에 헛웃음이 나왔다.

마지막으로 다가온 것은 월드 리버티와 노블레스 클럽 멤버들이었다.

"다음 천급 이상 디제스터가 나오면 어떤 힘이든 빌려야 할 판인데 못 들어줄 것도 없지."

패트릭은 그렇게 웃으며 엄지를 치켜들었고.

"A 랭크 이상 마법사는…. 똑같이 괴물이나 마찬가지지."

안소니의 말에 노블레스 클럽 멤버들은 말 한마디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역시 함부로 힘을 발휘 못 하는 또 하나의 초인 집단이었기에, 천후의 처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모두…. 감사드립니다. 정말로."

간신히 웃음을 되찾은 천후는 몇 번이고 고개를 조아렸다. 이그네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한참 인사는 한 천후는 그러다…

몸을 일으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럼…. 당신들은 어쩌시겠습니까?"

그곳에는 굳은 얼굴로 서 있는 유그드라실 고위 간부들이 있었다.

0